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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달팽이 영국군, 기동전에 도전하다 - 코루나 (Corunna) 전투의 서막

by nasica-old 2015.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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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는 이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과 총칼을 맞대게 된 영국군의 특성을 살펴보셨습니다.  요약하자면 영국군은 견고하고 탄탄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으나, 이는 충분한 보급이 있어야만 가능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필연적으로 영국군은 굼뜨고 느렸습니다.  대규모 병력이 움직이자면 엄청난 규모의 수송대가 필요했고, 그 모든 보급품과 수송 수단을 조달하자면 끔찍할 정도로 복잡한 행정 처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특성은 1809년 하반기, 스페인의 운명을 나락으로 빠뜨리게 됩니다.





(천막에서 럼주를 마시며 휴식하는 영국군들... 이들에게서 보급품을, 특히 럼주를 떼어놓으면 그야말로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1809년 7월 바일렌(Bailen) 전투의 굴욕적 패배 이후, 프랑스군은 에브로(Ebro) 강 동쪽으로 대대적인 전략적 후퇴를 해야 했습니다.  그 뒤를 쫓은 스페인군은 스페인 동쪽 끄트머리를 간신히 붙들고 있던 프랑스군과 대치 상태로 들어갔지요.  영국군이 포르투갈 비메이로(Vimeiro)에서 대승을 거둔 뒤, 쥐노(Junot)의 프랑스군을 프랑스로 돌려보낸 신트라(Cintra) 협정을 통해 맺은 것이 8월말이었습니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스페인 사라고사(Zaragoza)까지의 거리가 대략 940km이니, 당시 유럽 군대의 표준 행군거리인 하루 18km씩만 이동한다고 해도, 영국군은 50일 정도만 이동하면 스페인군과 합류하여 방어선을 더 굳게 하던가, 더 나아가 프랑스군을 스페인으로부터 완전히 축출할 수도 있었습니다.  신트라 협정의 뒤처리를 끝내고 충분한 준비 기간을 가진다고 해도, 영국군은 늦어도 10월 말에는 블레이크 장군의 갈리시아(Galicia) 군과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블레이크 장군의 군대가 프랑스군의 공격 앞에 그렇게 맥없이 무너지지는 않았을 수도 있고, 또 그로부터 시작된 스페인 방어군 전체의 붕괴도 막을 수 있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 부질없는 if 놀이에 불과했습니다.  11월 말 스페인군이 모두 처절하게 무너지고 난 이후에도, 영국의 이베리아 원정군은 위에서 언급된 거리의 절반에도 못 미친 살라망카(Salamanca)에서 미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남의 나라 전쟁이라고 해도, 대체 영국군은 왜 이렇게 늦었던 것일까요 ?





(리스본에서 살라망카까지의 거리가 약 470km, 거기서 다시 사라고사까지는 추가로 470km를 더 가야 합니다.)




먼저 지휘권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달림플과 버라드는 물론 웰슬리까지 주요 지휘관들이 모두 어처구니없는 신트라 협정에 대한 청문회 때문에 본국으로 소환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3만에 달하는 영국 원정군 최고 사령관직은 스웨덴 지역으로 파견되었다가 8월말에 포르투갈에 도착한 존 무어 경(Sir John Moore)이 10월 초부터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어 장군도 당장 스페인으로 진격할 처지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지들만 살겠다고 왕과 주요 귀족들이 머나먼 브라질로 도망치는 바람에 공백 상태가 된 포르투갈의 임시 정부와 협력하여 영국과의 보급선 확보를 굳건히 해야 했고, 또 스페인으로 진격할 때 사용할 보급품과 그 수송 수단도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편에서 보신 바와 같이,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이나 주민들이 가난한데다 내륙 도로망 상태까지 끔찍한 상태여서, 그 모든 것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또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이나 뚜렷한 중앙 정부의 권력이 없는 상태이다보니, 이런 점들을 극복하기 위해 현지의 협조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라면 그냥 '진격 앞으로, 식량은 현지 조달한다' 라는 명령 한마디면 신속한 진격이 가능했겠지만, 영국군은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존 무어 경의 초상화입니다.  이 전형적인 영국 신사처럼 생긴 스코틀랜드 출신의 장군은 당시 영국 지휘관치고는 병사들의 사기와 인권에 신경을 많이 쓴 인자한 장군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개인적인 성격과는 무관하게 카리브해의 노예 반란이나 아일랜드 소요 진압 등 영국의 제국주의를 위해 일생을 보냈습니다.)



문제는 그것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비록 부하 병사들의 식량을 챙겨주지는 않았지만, 작전을 시작하기 전에 최소한 자신이 작전을 펼칠 지역의 지리와 지형에 대해서는 손바닥처럼 꿰뚫고 있는 것을 기본으로 했습니다.  가령 스페인을 본격 침공하기 전에도, 기존의 스페인 지도에 만족하지 않고 포르투갈 원정을 돕는다는 핑계 하에 스페인에 진주시킨 군단들을 통해 현지의 지형을 소상히 파악해 놓고 있었습니다.  지리 정보에 밝아야 최대한 빨리 이동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먹을 것도 좀더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지요.  가령 전체 병력을 하나의 경로를 통해서 줄지어 보낸다면, 교통 체증 때문에 이동 시간도 더 많이 걸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대군이 식량을 모두 현지 조달에 의존하며 행군한다면, 선두 부대가 그 경로 주변의 식량을 마치 메뚜기떼처럼 다 소모시키기 되므로, 같은 길을 뒤따라 오는 후속 부대들은 심각한 식량난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영국군은 그런 지리 정보가 전혀 없었습니다.  스페인군이 오랜 숙적 관계였던 영국군에 대해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았던 것도 이유 중 하나였으나, 가장 큰 이유는 스페인군 자신들도 정확한 스페인 지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스페인은 원리주의 유교에 빠져 있던 폐쇄 왕국 조선과 닮은 점이 많아, 일부러 스페인 내륙 지도를 만들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차피 지방간의 교역도 별로 없다보니 다른 지방의 지도가 필요하지도 않았고, 중앙 정부에서 자기 지방의 토지 정보 등을 소상히 파악하는 것도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다보니, 무어는 자신의 군대를 어디로 어떻게 이동을 시켜야 할지 몰라 쩔쩔 매고 있었습니다.  포르투갈을 완전히 비워두고 진격할 수도 없어서 전체 병력의 절반 정도만 스페인으로 진격시키는데도 그 보급품 필요량의 계산과 조달, 그 수송 방법의 확보 등에 엄청난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이 본격적인 침공이 시작된지 한참이 지난 11월 중순에도, 영국군은 하나의 부대로 집결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10월 26일에 스페인 북서쪽 항구인 코루나(Corunna, 스페인 표기로는 Coruña)에 상륙한 베어드(Sir David Baird) 장군의 영국 증원군 약 1만2천도 똑같은 대혼란을 겪은 끝에, 거의 1달이 지난 11월 22일에야 겨우 스페인 북부 아스토르가(Astorga)에 도착한 상태였습니다.  이는 27일 동안 266km를 이동한 것으로서, 거의 하루에 10km 수준이었고, 아직도 무어의 본대 약 1만 5천과 합류하기로 한 살라망카와는 아직도 200km가 떨어진 거리였습니다.  




(살라망카와 아스토르가의 위치입니다.  두 지역 간의 거리는 약 200km, 프랑스군에게는 8일 거리였지만 영국군에게는...)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무어는 이미 스페인 야전군이 나폴레옹에게 모두 박살이 난 이후인 11월 말 이후까지도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살라망카에 도착하고 난 뒤에도 며칠이 지난 뒤인 12월 3일 경에야 블레이크 및 카스타뇨스의 패배 소식을 들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가뜩이나 영국군의 달팽이 같은 기동력에 좌절하고 있던 무어는 전진을 해야 하나 후퇴를 해야 하나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영국군 지휘관들의 전형적인 특성이 드러나게 되는데, 영국군은 야전군의 규모가 크지 않았고 무엇보다 바다 건너 외국 땅에서 작전을 치르느라 반드시 적을 막아야 한다는 부담이 없다보니, 적 격파보다는 병력 보존의 본능이 훨씬 더 강했습니다.  나폴레옹에 대해 사후에 그의 부하들이 평가를 하면서 '매우 뛰어난 지휘관이었으나 병력의 보존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라는 평가가 나온 것과는 매우 대조되는 부분이지요.  무어는 프랑스군에 대한 저항전에 동참해달라는 스페인 지역 훈타(junta, 임시 지방 정부)의 호소를 뿌리치고 포르투갈로의 후퇴를 결심했습니다.   




(로마냐 후작은 이후에도 무어 장군을 졸졸 따라 다니며, 후퇴를 멈추고 자신과 함께 프랑스군과 싸우자고 졸라댔습니다.  아마 무어는 혼자 살겠다고 도망치는 자신을 더더욱 모양 빠지게 만드는 로마냐가 나폴레옹보다 오히려 더 미웠을 것 같습니다.  괜찮습니다.  로마냐도 무어를 맹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영국군은 후퇴조차도 느렸습니다.  후퇴 준비를 한답시고 미적거리느라 2일이 지나 12월 5일이 되자 마드리드 시민들이 나폴레옹군에 저항하여 농성하기로 했다는 소식과 함께, 거지꼴이 되어 레온(Leon)에 나타난 블레이크군의 잔존 병력을 수습한 로마냐(La Romana) 후작이 '자신이 2만3천의 병력을 규합했으므로 함께 프랑스군과 싸우자'라는 연락을 보내왔습니다.  물론 실제로는 이미 마드리드 수비대는 나폴레옹에게 항복한 뒤였고, 또 로마냐 후작의 군대도 실제 전투 가능한 병력은 2만3천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었으나, 이제 불명예스러운 후퇴를 해야 하는 무어에게는 미련이 남는 제안이었습니다.  게다가 로마냐 후작의 제안보다 훨씬 더 솔깃하고 믿을 만한 소식도 들어왔습니다.  로마냐 후작의 편지는 그저 자신의 일방적 주장을 담고 있었으므로 그 신빙성에 의심이 갔지만, 새로 전달받은 문서는 프랑스어로 된 것이었고, 술트(Soult) 원수에게 전달되는 프랑스군의 군사 우편을 스페인 게릴라들이 탈취해 온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술트가 거느린 1만6천 명 규모의 작은 군단이 카리온(Carrión)에 일시적으로 고립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지도에 A로 표시된 곳이 마요르가, B로 표시된 곳이 카리온입니다.  그리고 지도 저 아래의 살라망카 및 마드리드와의 거리를 보십시요.  살라망카-카리온의 거리는 약 200km입니다.)



카리온은 베어드 장군의 영국군 증원군이 위치한 아스토르가와 동쪽으로 약 130km, 자신이 위치한 살라망카와는 동북쪽으로 약 200km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만약 이 두 영국 야전군이 제때 합류하여 술트를 들이칠 수 있다면 2대1의 수적 우세를 가지고 간단히 대승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바로 7월 이후 프랑스군이 에브로 강 동쪽으로 대대적인 퇴각을 했던 것도 바일렌에서 프랑스군 1개 군단을 격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명성이 자자한 술트의 군단을 격파하는데 성공한다면, 나폴레옹의 이번 스페인 침공 작전 전체에 큰 차질을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과감히 북쪽으로 행군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큰 실수였습니다.  생각해보면 나폴레옹에게 프리틀란트의 대승을 안겨준 것도, 후퇴하던 베니히센이 순간적인 욕심을 참지 못하고, 고립된 것처럼 보였던 란의 군단을 치려고 했던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1807년 6월의 프리틀란트는 나폴레옹에게 여러차례 좌절을 안겨주며 선전하던 베니히센의 한순간 욕심이 빚어낸 참패였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어이없는 결말 - 프리틀란트 (Friedland) 전투 http://blog.daum.net/nasica/6862582 참조)



무어가 추운 겨울 날씨를 뚫고 북상하는 와중이던 12월 11일 좋지 않은 소식이 날아들기도 했습니다.  12월 4일에 이미 마드리드가 나폴레옹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이 비로소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본인이 베니히센과 같은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다는 생각은 무어에게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판단이 옳았음을 알려주는 증거가 속속 들어왔습니다.  12월 13일에는 술트에게 전달되던 나폴레옹의 명령서가 입수되었는데, 술트 휘하의 각 부대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주변에 그를 지원해줄 다른 프랑스 군단이 없다는 것이 확인된 것입니다.  무어는 자신이 술트에게 크게 한방 먹이고도 안전하게 북서쪽으로 탈출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영국군은 여전히 끔찍하게 느렸습니다.  고작 하루에 12km 정도씩 전진하여, 12월 20일이 되어서야 카리온 서쪽 60km 지점인 마요르가(Mayorga)에서 베어드 장군의 증원군과 합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프랑스군의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속도였습니다.  그래도 이제 약 2만6천에 달하는 대군을 이루게 되었으므로, 이제 남은 것은 무방비 상태의 술트를 덮치는 것 뿐이었습니다.

무어는 전형적인 전법대로, 먼저 기병 연대를 앞세워 동쪽으로 탐색전을 펼치며 전진을 시작했습니다.  파젯(Henry Paget, 1st Marquess of Anglesey)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 기병 연대 약 400명은 12월 21일 밤 혹한 속에 전진하다 사아홍(Sahagún) 마을에 주둔하고 있던, 자신의 2배 정도가 되는 프랑스 기병대와 딱 마주칩니다.  영국군이 워낙 느릿느릿 음직이다보니 기습 효과도 거의 없어서, 프랑스 기병대는 사아홍 마을 외곽에서 진형까지 갖춘 채로 영국 기병대를 맞이했습니다.  그런데도 영국군은 수십명을 죽이고 약 300명을 사로잡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영국군의 피해는 20여명 정도로 경미한 편이었습니다.  확실히 느리기는 해도 잘 먹고 잘 지낸 영국군의 기량이 굶주리고 장비도 열악한데다 고된 행군에 시달리는 프랑스군보다 더 뛰어난 것이 입증된 것이었지요.




(헨리 파젯 경의 모습입니다.  이 양반은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 공작의 바로 옆에서 적의 포격에 다리를 잃은 것으로 매우 유명하지요.)



그러나 무어는 이 대승의 기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2일 정도 방향을 못 정하고 꾸물거리다가 오히려 후퇴를 결정합니다.  여기서 무어가 과연 뛰어난 장군인지 무능한 장군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고 봅니다.  손자병법에도 지피지기 백전불태라고,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최소한 위험에 빠질 일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달팽이 같은 기동력의 영국군에게 저 멀리 북쪽의 술트에게 기습 펀치를 한방 먹이고 튄다는 힛-앤-런 작전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작전 계획에 있어 아군의 실력과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게다가 유능한 장군은 천시와 지리, 민심을 두루 살피고 활용해야 한다고 했는데, 제대로 된 지도조차 확보하지 못한 지역에서 그것도 유난히 추웠던 한겨울에 기동전을 펼칠 생각을 했다는 것은 무어가 잘 해야 2류급 장군이라는 반증이었습니다.  게다가 결과적으로 이어진 후퇴 작전에서, 보급품을 챙기지 못한 상태로 강행군을 하다보니 휘하 영국군이 스페인 민중들에게 프랑스군 못지 않은 약탈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그렇쟎아도 살갑지 못했던 스페인 민중들과 영국군과의 거리를 더 떨어뜨려놓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영국군에게서 이 보급마차를 떼어놓으면 영국군은 스스로 녹아없어지는 기현상을 보여주게 되어 있었습니다.)




무어가 술트에 대한 공격 대신 정반대로 후퇴를 결정한 이유는 이랬습니다.  사아홍 전투에서 탈출한 프랑스 기병대가 술트 본진에 영국군이 인근 지역에 나타났다는 것을 알릴 것이고, 술트는 곧 이어 나폴레옹에게 그 사실을 알릴테니, 이제 술트에 대한 기습 작전은 포기하고 나폴레옹의 추격을 피해 철수한다는 것이었지요.  이 결정은 말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애초에 군단 규모의 병력을 가진 역전의 지휘관 술트가 주변에 초계 병력을 두지 않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런 기병들끼리의 충돌은 당연한 것이었는데, 그런 당연한 일이 있다고 해서 원래의 작전을 취소한다는 것은 둘 중 하나였습니다.  무어가 적과 마주치자 비로소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겁을 먹었거나, 아니면 애초에 그 작전 자체가 잘못 계획된 것이었다는 것이지요.  아마 두가지 요소가 다 있었을 것 같습니다.  특히 무어가 이런 판단을 내린 것에는 계속 연락을 취하던 로마냐 후작의 전갈도 큰 몫을 했을 것입니다.  그 전갈 내용은 '마드리드에서 나폴레옹이 뛰쳐나와 북쪽으로 향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단 하나, 나폴레옹이 무어의 영국군을 잡기 위해 직접 나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술트의 군단도 영국군의 내습에 대비해 병력을 집결시키는 등 반격 준비를 마친 상황에서 나폴레옹 본인까지 나타난다는 것은 영국군에게 파멸을 의미했습니다.





(영국인들은 나폴레옹을 그 별명인 Boney라든가 코르시카 출신임을 비웃는 본래 이탈리아식의 이름 부오나빠르떼라고 부르며 조롱했지만, 그건 바다 건너편에 있을 때 이야기였고, 그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자신들에게 오고 있다고 하면 그 공포감은 대단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시점을 나폴레옹 쪽으로 돌려보시지요.  나폴레옹은 마드리드 함락 이후 이런저런 행정 업무로 바쁜 와중에도, 이베리아 반도에 남은 유일한 정규군인 영국군의 격멸을 위해 서쪽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확보한 첩보에 따르면 포르투갈에서 출발한 영국 원정군은 타구스(Tagus) 계곡을 따라 스페인으로 들어와 마드리드를 향해 오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자신보다 먼저 마드리드에 도착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 밖에도 자신이 마드리드를 점령한지 한참 후까지도 영국군의 행방이 묘연하여 크게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는 스페인의 중앙 지점인 마드리드에 앉은 채 스페인 각지에 정찰병을 보내 영국군의 위치를 파악하는데 주력하고 있었는데, 대략 막연하게나마 영국군이 살라망카에서 북쪽으로 이동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12월 20일 즈음이었습니다.  이때 무어는 이미 마요르가에서 베어드 장군과 합류한 상태였지요.   이 소식은 다름아닌 영국군에서 탈영한 병사 3명이 전해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영국군 탈영병은 영국인이 아니라 프랑스인들이었습니다.  바로 4년전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 해군에게 포로가 된 프랑스 수병들이었는데, 항상 모병에 골머리를 앓던 영국군이 이들을 살살 꼬셔서 영국 육군 입대 서류에 서명하게 했던 것이지요.  이들은 영국 항구에 정박한 끔찍한 시설의 포로 수용선에 갖혀 담배도 술도 없이 기약없는 포로 생활을 하느니, 차라리 영국군 병정 노릇을 하며 하루 1실링씩이라도 벌고 럼주라도 마시겠다는 선택을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영국군의 지나치게 엄격한 규율과 끊임없는 체벌은 프랑스인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 왔고, 이들은 기회가 생기자마자 탈영하여 프랑스 측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1805년 트라팔가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포로가 된 프랑스인이 무려 4천명이었습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항구에서 썩어가는 폐선을 재활용해서 만든 열악한 환경의 포로 수용선에서 기약없는 포로 생활을 계속 해야 했습니다.)



아무튼 영국군이 살라망카에서 동쪽도 아니고 서쪽도 아닌, 북쪽을 향해 떠났다는 것은 나폴레옹의 예상 밖에 있는 행동이었고, 나폴레옹은 깜짝 놀랐습니다.  동쪽으로 와서 마드리드의 자신에게 도전하는 것도 아니고, 서쪽의 포르투갈로 후퇴하는 것도 아니라면 대체 그 진로의 목적은 무엇일까 궁리하던 나폴레옹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영국놈들이 아예 포르투갈을 포기하고 좀더 내륙 교통이 편하고 영국과 좀더 가까운 북부 스페인의 항구인 페롤(Ferrol)을 작전 기지로 삼을 모양이다!'  영국놈들이 스페인 한쪽 구석에 뿌리를 내리는 것은 절대 반갑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를 막기 위해 아직 정확한 소재가 파악되지 않은 무어의 영국 야전군을 찾아, 그 소식을 들은 바로 즉시 대군을 이끌고 마드리드를 떠나 칼날같은 겨울 바람이 거센 과다라마(Guadarrama) 산맥을 넘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사아홍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의 일이었지요.  영국군과 비교하면 정말 놀라운 반응 속도였습니다.  곧이어 들어온 사아홍 전투의 소식은 나폴레옹의 전의를 더욱 불태웠습니다.





(시에라 드 과다라마, 즉 과다라마 산맥의 모습입니다.   마드리드의 나폴레옹이 스페인 북부로 나가기 위해서는 저 산맥을 넘어야 했습니다.  위성 사진에서도 눈에 덮힌 모습이 보입니다.)



12월 말 크리스마스 시즌에 눈덮힌 과다라마 산맥을 넘는 것은 대단한 체력과 강인한 의지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거센 바람에 밀려 계곡 아래로 떨어지지 않도록 나폴레옹과 휘하 원수들도 예외없이 말에서 내려 팔짱을 끼고 걸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눈보라 속에서 어찌나 고생이 심했는지 곁을 지나던 병사들이 나폴레옹이 옆에 있는 것을 보고 'Vive l'empereur' 대신 '저놈의 머리통에 총을 쏴버려라!'는 등의 험악한 욕지꺼리를 내뱉으며 지나갔다고 하고, 나폴레옹도 그냥 고개를 숙이고 못 들은 척 했다고 합니다.  산맥을 넘고 나서도 스페인 특유의 진흙투성이의 열악한 도로 위에서 병사들은 끔찍한 고생을 해야 했고, 마치 이집트 원정시 사막 횡단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살을 해버리는 병사까지도 생길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영국군과는 비교도 안되는 쾌속으로 북진했습니다.  아무리 뭐라고 해도, 황제 본인이 따뜻한 궁전의 안락함을 내팽개치고 말단 병사들과 똑같이 진흙투성이가 되어 고생을 하고 있으니, 병사들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황제를 위해 적의 포탄과 탄환 속으로 돌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사도, 추운 겨울날 벌벌 떨며 진흙구덩이 속을 며칠씩 허우적거리다 보면 입에서 쌍욕이 나올 수 밖에 없지요.)



하지만 아무리 프랑스군의 행군이 빠르고 영국군의 행군이 느리다고 해도, 마드리드에서 마요르가까지의 290km 거리를 따라잡는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이 '반드시 무어의 영국군을 전멸시키리라' 라며 강행군을 했던 것은 술트가 끊임없이 무어의 뒤를 건드려 영국군의 후퇴 속도를 늦추기를 기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원래 용맹무쌍한 군인이었던 술트는 과거 이탈리아에서 큰 부상을 입고 간신히 살아난 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전투에서의 위험을 극도로 회피하는 말년 병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런 그의 변화를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지요.  술트는 무어의 뒤를 쫓으며 낙오하는 영국군을 쳐죽이고 있을 뿐, 결코 영국군 후미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술트에게도 할 말이 있는 것이, 그의 병력이 1만6천에 불과하고 보급품과 장비도 열악한 것에 비해, 영국군은 2만6천이 넘는 대군이었던 것입니다.  술트는 부르고스(Burgos)에서 출발한 증원군이 당도할 때까지는 모험을 할 의사가 없었고, 그 증원군은 거세게 내리는 겨울비와 진흙구덩이로 변해버린 도로 때문에 지연되고 있었습니다.





(술트 원수입니다.  그는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나 비교적 교육을 잘 받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인성은 교육 수준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서, 탐욕과 배신으로 널리 알려졌고, 나중에 왕정 복고 이후에도 상황에 따라 신념을 휙휙 바꾸는 묘기를 보여주었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무어의 영국 원정군을 전멸의 위기에서 구해줄 구원의 손길이 찾아옵니다.  그 손길이란 뜻밖에도 파리에서 날아온 몇 통의 편지였습니다.  발신인은 라발레트 공작(Antoine Marie Chamans, comte de Lavalette)과 나폴레옹의 양아들인 외젠 보아르네(Eugène de Beauharnais), 수신인은 진흙에 뒤덮힌 채 어느 길가 농가에 숙소를 정한 나폴레옹 본인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편에서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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