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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럼주와 노새 - 영국군의 특성

by nasica-old 2015.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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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드리드까지 점령한 나폴레옹은 여태까지 직접 총칼을 맞대어 본 적이 없는 미지의 적군인 영국군과의 한판 대결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스포일러는 아니지만, 결국 영국군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결국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격파했고, 더 나아가 1815년 워털루에서는 웰링턴 공작의 영국군이 나폴레옹이 지휘하는 프랑스군 정예를 최종적으로 패배시켰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1808년 12월 이들을 눈 앞에 둔 나폴레옹은 영국군에 대한 경멸감만이 가득했습니다.  영국은 바다 위에서는 무적일지 몰라도, 일단 땅 위에 올라서면 사막에 던져진 개구리 신세라는 인식이 강했던 것입니다.  이 즈음해서, 나폴레옹의 그런 인식이 정말 정당한 것인지, 당시 영국 육군의 특성과 현실에 대해서 한번 살펴 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영국은 섬나라라는 특성 때문에 전통적으로 육군이 약하고 해군이 강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만, 사실 꼭 그런 것도 아닙니다.  원래 영국이 프랑스나 독일처럼 넓은 영토를 가진 나라가 아니었으므로 상대적으로 인구가 작아 큰 규모의 군대를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만, 의외로 영국은 외부와 바다로 격리된 환경 덕분에 전쟁도 적었고 또 토지가 비옥하여, 생각보다는 인구가 적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또 100년 전쟁 당시 (물론 그때 영국군의 상당수는 브리튼 섬이 아니라 영국 프랜태지니트 왕가의 프랑스 내 개인 영지에서 참전한 병력이긴 했습니다만) 수적으로 우세한 프랑스군을 여러차례 격파한 강군의 나라였습니다. 






(19세기 초반 나폴레옹 전쟁 당시 유럽 주요국가들의 인구입니다.)

출처 :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foreigners_British_army.htm



영국 육군이 약해지게 된 원인은 바다보다는 사자왕 리처드의 동생인 존 왕 이후부터 영국 왕과 귀족들 간에 벌어진 권력 투쟁이었습니다.  프랑스가 일찍부터 중앙 집권을 통한 강력한 군주제를 확립한 것에 비해, 영국은 왕의 권력을 제한하려는 귀족 연합체인 의회 세력이 강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의회는 왕의 강력한 지상군을 자신들을 무력으로 탄압하려는 왕의 불순한 의도로 보고 대규모 상비군을 제한 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영국은 바다로 격리되어 외국의 침공이 사실 거의 없었으므로, 왕이 굳이 지상군을 유지할 명분도 없었습니다.  




(1215년, 존 왕이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하는 모습입니다.  독재자에게는 몽둥이를 들이대야 대화가 통하는 법이지요.)



그런 역사가 있다보니, 영국 지상군은 매우 보잘 것 없는 규모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1793년 제1차 대불 동맹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지상군은 근위대 위주로 구성된 고작 4만명 정도에 불과했고, 그나마 당장 전투에 투입될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영국은 거의 10만 단위의 병력이 하나의 전투에 투입되는 스케일을 자랑했던 대륙의 전장에 끼어들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필요에 따라 유럽 해안에 잠깐 상륙하는 정도의 작전을 펼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1793년에서 1795년 사이에 전개된 네덜란드 플랑드르 작전에 다른 연합군들과 합동으로 전투를 벌이기도 했으나, 작은 병력 규모로 인한 한계와 지휘관들의 무능력만 확인한 뒤 철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풍채 좋은 양반이 국왕의 동생인 요크 공작 Duke of York, Frederick 입니다.  비록 이 양반이 지휘한 플랑드르 작전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 양반이 주도한 영국군의 개혁은 훗날 나름 의미를 갖게 됩니다.)




영국 해군이 연전연승을 거두며 영국의 수호신으로 인기를 끌어모으는 동안, 영국 지상군의 굴욕은 계속 되었습니다.  권력의 공백이 생긴 상태였던 카리브해의 설탕이 나는 섬들을 공략했던 영국군은 프랑스 및 스페인 수비 병력 뿐만 아니라 노예 반란군과도 싸워야 했고, 그 무엇보다 무서운 황열병 때문에 거의 9만에 달하는 병력 중 거의 5만이 병사하거나 전투 불능 상태가 되어 전열에서 이탈해야 했습니다.  결국 영국군은 생 도밍그(지금의 아이티)에서 철수해야 했고, 프랑스가 다시 탈환한 과달루페 섬도 재점령하지 못했지요.  1799년 제2차 대불 동맹 전쟁 때 영국군은 러시아군과 합동으로 다시 네덜란드를 침공했으나, 결국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프랑스의 브륀 (Guillaume Marie Anne Brune) 장군에게 다시 쫓겨나야 했습니다. 

그나마 1801년, 나폴레옹이 남기고 간 이집트 점령 프랑스군을 아부키르(Abukir) 전투에서 격파하면서 여태까지 구겨질 대로 구겨진 체면을 다소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그 특유의 침착함과 우수한 머스켓 사격 속도를 자랑하며 꽤 근사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만, 이 전투는 클레베르(Kleber) 장군이 암살된 이후 졸지에 프랑스 이집트 점령군의 총사령관이 된 므누(Menou) 장군의 삽질 지휘 덕에 얻은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으며, 이 승리가 영국군의 우수함을 만천하에 알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나마 이집트 현지에서 거둔 이 승리의 여운은, 1807년 당시 이집트의 실권자이던 알리(Muhammad Ali)를 상대로 벌어진 로제타(Rosetta) 전투에서 이집트군에게 900명의 사망자 및 700명의 포로를 내는 참패를 겪으며 완전히 사라져 버립니다.   1806~1087년 사이에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침공한 영국군도 스페인 식민지 주민들과의 전투 끝에 심한 피해를 입고 항복하는 대망신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때의 사태는 나폴레옹 전쟁, 아르헨티나를 독립시키다 http://blog.daum.net/nasica/6862444 참조)






(1807년 로제타에서 고전 중인 영국군입니다.)






(1806년 8월 아르헨티나 현지의 스페인군에게 항복하는 영국군 베레스포드 장군입니다.   항복을 받고 있는 산티아고 드 리니에르 (Santiago de Liniers y Bremond)는 원래 프랑스 해군 장교였으나 스페인군 소속으로 임시 복무 중인 사람이었습니다.)




영국군의 이런 연이은 망신살은 결코 운이 나빠서가 아니었습니다.  일단, 지켜야 할 영토에 비해 병력 수가 너무 적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이미 광활한 해양 제국을 반쯤 이룬 상태라서, 카리브해와 캐나다, 인도와 지중해 등 곳곳에 영토 및 식민지가 있었습니다.  인도와 실론섬 지역은 영국 정규군과는 별도로 운영되던 동인도회사 군대(이에 대해서는 최초의 기업 군대 - 영국 동인도 회사군 http://blog.daum.net/nasica/5194972 참조)가 지키고 있었습니다만, 다른 지역들에도 소규모라도 수비 병력을 파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상군 규모를 전시의 필요에 따라 꽤 늘린 상태였던 1805년에도 영국 지상군은 보/기/포병을 다 합쳐 약 16만에 불과했습니다.  이 중 6~7만 정도는 본토의 수비를 위해 영국에 머물렀고, 대영 감정이 좋지 않은 아일랜드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3만이 넘는 군대가 아일랜드에 주둔해야 했습니다.  또 아무리 동인도 회사군이 있다고 해도 인도에도 정규군 2만명 정도가 주둔해야 했고요.  이런 식으로 캐나다니 지브랄타니 자메이카니 하는 요충지마다 몇천명씩 배치를 하다보니 남는 병력이 없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군 장교 계급 가격표입니다.  이 가격 외에도, 근위대처럼 폼나는 부대에는 프리미엄이 추가로 붙었다고 합니다.

Source : http://www.colonialwargaming.co.uk/Miscellany/Army/Commissions.htm )




또 지휘관들의 자질도 심각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영국은 다른 유럽 국가들처럼 장교 임관을 매직매관(purchase system)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즉, 장교 임관이나 승진이 군사 훈련을 받고 리더쉽 자질을 갖춘 전문가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돈많은 집 아들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이런 매관매직이 영국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또 당시 엄연히 사회 계층이 나누어진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합리적인 점도 있는 제도인 것은 맞았으나, 확실히 이런 제도 하에서는 실력있는 장교들이 지휘권을 잡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프로이센 같은 전통적인 군사강국에서는 한번도 매관매직에 의해 장교를 임명한 적이 없었고, 혁명 프랑스가 개전 초기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것도 출생 신분이나 소유 재산의 대소 여부에 상관없이 그저 실력있는 사람을 장교로 임관시키고 승진시킨 것에 힘입은 바가 컸습니다.  그에 비해 영국은 구시대의 잔재인 매관매직이라는 악습을 태연스럽게 이어가고 있었고, 게다가 변변한 전투를 치룰 기회조차도 별로 없었으니, 그 지휘관들이 아무런 전문 지식이나 경험도 없이 그저 신사인 척 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재주를 갖추지 못한 것이 당연했습니다.  





(크림 전쟁 때까지 그대로 이어진 영국 육군의 매관매직 제도의 폐단을 온몸으로 보여준 제7대 카디간 공작 제임스 브루드넬입니다.  이 양반에 대해서는 http://blog.daum.net/nasica/6862454 참조.)



일이 이렇다보니 영국 정부로서도 작고 나약한 영국 지상군을 늑대 같고 호랑이 같은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Grande Armee)가 활약하는 유럽 대륙의 전장에 선듯 투입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영국의 동맹국이었던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의 공통적인 불만을 축약시켜 표현하는 말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저 영국놈들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이 마지막 한방울의 피까지 다 흘려버리기 전에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즉, 말로만 프랑스와 전쟁을 하자고 해놓고 지들은 쏙 빠진 채 동맹국들만 많은 병력을 소모시키게 하는 영국의 행태가 너무나 얄미웠던 것입니다.  가령 제4차 동맹 전쟁 때, 러시아는 영국 측에게 발트해에 면한 북부 독일에 상륙하여 제2 전선을 만들라고도 부탁했고, 또 오스만 투르크에도 병력을 투입하여 러시아의 부담을 줄여달라고도 끊임없이 요구했으나 그때마다 영국 측은 난색을 표했습니다.  영국의 입장도 이해를 할 만 했습니다.  UFC 경기에 중학생들보고 들어가라고 등을 떠미는 격이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영국 측이 정말 그냥 입만 터는 얌체 족속들은 아니었습니다.  영국에게 경험있는 우수한 지휘관이나 병력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많은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돈이었습니다.  모든 전쟁에는 병사들의 피 못지 않게 돈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병사들의 급료부터 시작해서 소총, 탄약, 군복, 식량, 말, 수송선 임대료 등등 모든 것이 다 돈이었는데, 당시 영국은 광대한 식민지 확보와 함께 산업 혁명의 태동이 맞물려 그야말로 전세계의 돈을 쓸어담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피를 흘릴 형편은 못 되었지만 그래도 쌈지돈을 풀어놓을 형편은 되는 편이었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러시아 등의 동맹국에게 많은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동맹국들이 흡족할 만한 수준은 절대 아니었지만요. 




(규모도 작은 영국 육군이 써대는 저 막대한 금액의 군비를 보십시요.)



위와 같은 형편 덕분에, 나폴레옹은 영국을 '가게 주인들의 나라'(a nation of shopkeepers)라는 경멸적인 표현으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영국인들은 정말 나약하고 돈만 밝히는 그런 민족이었을까요 ?  절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앵글로색슨족의 호전성은 백년전쟁 이후로 유럽 전역에 널리 알려진 것이었고, 16세기에 스페인 무적함대를 꺾은 것도 바로 그 영국인들이었습니다.  영국의 지상군이 약하다는 것은 위와 같은 역사적 배경 때문이었을 뿐, 어떻게 보면 영국 병사들야말로 당시 전장에 딱 어울리는 자원이었습니다. 

19세기 초반 유럽 전장을 지배하던 전열 보병에 의한 라인 배틀은 무엇보다도 병사들의 엄정한 군기와 단순 반복 훈련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몸을 숨길 엄폐물이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병사들이 3열 혹은 4열로 주욱 횡대로 늘어서 같은 방식으로 도열한 적군과 70~80m 거리를 두고 머스켓 소총 사격과 무시무시한 대포알 또는 포도탄을 주고 받다가, 적당한 때에 총검 돌격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형태의 전투는 병사들에게 너무나도 덧없는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박처럼 날아드는 총탄에 바로 옆의 전우들이 픽픽 쓰러지거나 혹은 대포알에 아예 몸뚱아리가 두조각 나버리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장교들의 명령에 따라 기계적으로 총탄을 재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침착함과 더불어 명령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그림은 19세기 중반 크림 전쟁에서의 스코틀랜드 부대의 분전을 그린 것입니다.  이 발라클라바 전투에서 소위 Thin Red Line 이라는 표현이 유명해졌다고 하지요.)



반도 전쟁에서 활약했고 전후에는 반도 전쟁에 대한 역사서를 썼던 프랑스의 막시밀리앙 포이 (Maximilien Sebastien Foy) 장군의 평가는 이렇습니다.  "정착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영국인들의 습성은 행군하는 병사에게 딱 들어맞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전장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덕목을 갖추고 있다.  바로 전투 현장에서의 침착함이다.  영국 육군의 영광의 기반은 그 뛰어난 군기 및 그 민족적인 침착성과 굳건함에 있다.  실제로 그들보다 더 군기가 엄정한 군대는 찾기 어렵다..."





(막시밀리앙 포이 장군입니다.)



영국군의 군기가 우수하다는 평가에는 사실 약간 서글픈 배경이 뒤따릅니다.  원래 영국군은 군기가 좋을 수 없는 집단이었습니다.  웰링턴 공작이 1813년 스페인 비토리아(Vittoria) 전투에서 승리한 뒤 부하 병사들의 약탈 행위에 화가 나서 내뱉었다는 "술마시러 입대한 땅거지 색히들 (the scum of the earth, enlisted for drink)"이라는 표현은 여러 측면에서 봤을 때 매우 공정하고 객관적인 평가였습니다.  영국군은 근본적으로는 정상적인 사회에서 낙오한 패잔병들로 이루어진 집단이었거든요.

흔히 우리나라 군대에서 구타나 사병간의 가학적인 얼차려같은 악습이 좀처럼 근절되지 않는 이유로 '우리나라는 징집군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라는 것을 들지요.  그러나 이건 완전히 잘못된 상식입니다.  원래 왕정 하에서의 프랑스군에는 채찍질같은 체벌이 공식적으로 존재했으나, 혁명 프랑스가 국민 개병제에 입각하여 전면적인 징집제를 실시한 이후, 오히려 체벌이 페지되었습니다.  서민 출신 병사들을 '매로 다스려야 말을 듣는 하등한 존재'로 보던 관점에서, '다같은 인권을 가진 동료 시민'으로 대하게 되면서, 같은 인간이 인간을 묶어놓고 때린다는 것은 매우 야만적이고 전근대적인 행위로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강제로 끌려온 징집병은 때리지 않으면 통제가 안된다 ?  안되긴 뭐가 안됩니까 ?  매질이 없는 징집 프랑스군은 그야말로 연전연승을 거듭하며 유럽 전체를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프랑스 혁명에서 피어난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이라는 공감대가 있었습니다.  가령 일개 포병 조장이 감히 장군의 부당한 명령에 공공연히 반기를 드는 사태에 대해, 일반적인 사회 분위기가 '역시 징집병은 매질을 해야 말을 듣는다' 라고 판단하는 것이라면 그런 사회의 자식들은 군대에서 개처럼 두들겨 맞는 것이 합당하겠지요.  (나폴레옹, 프로이센에 빛을 던지다 http://blog.daum.net/nasica/6862564 참조)





징집제의 프랑스군에 매질이 없는 것에 비해, 영국군은 정반대였습니다.  영국 육군은 나폴레옹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끝끝내 모병제를 고수했는데, 정작 모병제인 영국군이 병사들에 대한 채찍질을 무자비하게 휘둘렀습니다.  당시 영국 사회가 딱 그런 것이었습니다.  영국군의 매관매직 시스템상 거의 모든 장교들은 귀족 내지는 젠틀맨 계급에서 나올 수 밖에 없었는데, 이들은 배운 것 없고 천박하기 그지없는 농민 및 노동 계급 출신의 병사들을 매질로 다스려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영국군은 서유럽의 프랑스군이나 프로이센군보다는 러시아군에 가까왔습니다.  프로이센군에서조차도 채찍질을 야만적이라고 기피했던 것에 비해, 러시아군과 영국군만 '병사들과 북어는 3일에 한번씩 패줘야 한다'고 굳게 믿고 그걸 실천에 옮겼던 것이지요.  (영국군의 체벌에 대해서는 나폴레옹 시대의 군대에도 구타가 있었을까 ? http://blog.daum.net/nasica/6862426 참조)







이런 무자비한 구타로 유지되는 군대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요 ?  당연히 많은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높은 탈영률이었지요.  반도 전쟁에서 영국군의 탈영률은 보통 10%가 넘었고 심한 경우는 20%까지 올라가기도 했습니다.  보통 큰 패전에서 20% 정도의 전사 또는 부상으로 인한 전력 손실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영국군은 시작하기도 전에 패배를 떠안고 시작하는 꼴이었습니다.  물론 프랑스나 프로이센 등 다른 나라 군대에도 탈영자는 많았습니다.  그러나 영국군의 심각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프랑스군에서 탈영하여 영국군으로 넘어간 병사들의 사례입니다.  스페인 전장에서의 지긋지긋한 게릴라 전투와 배고픔에 지쳐 영국군에 투항하여 영국군에 입대했던 프랑스군의 상당수가 끔찍한 매질에 질려 다시 프랑스군으로 탈영하는 사례가 빈번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부작용은 장교들이 병사들을 전혀 믿지 않았고, 그래서 항상 경직된 전술만을 써야 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영국군에게서 화려한 기동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웠고, 영국군에게 가장 알맞는 형태의 전투는 주로 방어전이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군이 영국군을 평가할 때, 흔히 "방어할 때는 바위처럼 단단하지만, 공격할 때의 창의성은 전혀 없다" 라고 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웰링턴이 거둔 승리는 워털루를 포함하여 대부분 방어 위주의 전투에서 나왔습니다.  





(영국군의 모병 광경입니다.  영국군 모병에는 당연히 술이 많이, 아주 많이 들어갔습니다.) 



이렇게 지독한 군대가 모병제로 구성될 수 있었다는 점이 아마 의아하실 겁니다.  대체 어떤 사람들이 왜 이런 군대에 자원 입대를 했던 것일까요 ?  애국심 때문에 ?  정반대였습니다.  영국군의 절반 정도는 잉글랜드의 왕을 미워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군대 생활이 워낙 열악하고 병사들에 대한 대우가 형편없었기 때문에, 정작 먹고 살만 했던 잉글랜드인들은 별로 자원하지 않았고, 상대적으로 소수인데다 먹고 살기가 어려웠던 아일랜드인들과 스코틀랜드인들이 많이 지원했던 것입니다.  특히 토지와 농작물을 잉글랜드인들에게 수탈당하고 정말 먹고 살 길이 막막했던 아일랜드인들이 역설적으로 잉글랜드 왕을 위해 싸우는 군대에 많이 지원했습니다.  최소한 군에 입대하면 하루에 1실링이라는 작지만 확실한 급여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금값을 기준으로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한달 약 39만원 정도에 해당하는 돈이었고, 프랑스군 사병의 25만원 정도에 비해서는 꽤 짭짤한 수준이었습니다.  (영국군과 프랑스군, 누가 더 봉급이 많았을까 ? http://blog.daum.net/nasica/6862363 참조)  이 때문에, 잉글랜드의 인구에 비해 아일랜드 인구는 고작 1/6에 불과했는데도 영국군의 약 30% 정도는 아일랜드인들로 구성되었습니다.  





(1826년 조지 4세의 얼굴이 들어간 1실링짜리 은화입니다.)



또 맛은 없더라도 먹을 것이 꾸준히 나왔습니다.  질긴 염장 쇠고기와 뻑뻑한 건빵으로 된 식사라고 해서 비웃지 마십시요.  19세기 초 당시에 서민 계급의 남자가, 비록 염장이라고 해도 쇠고기를 1파운드씩 매일 꾸준히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밀로 만든 흰빵 대신 귀리로 만든 죽을 먹어야 했고, 아일랜드에서는 감자를 먹어야 하는 것이 당시 서민들의 일상적인 삶이었습니다.  게다가 더욱 중요한 것이 매일매일 배급되었습니다.  바로 술이었습니다.  영국군 병사에게는 매일 럼 0.3 파인트 또는 와인 1 파인트가 배급되었습니다.  거지같은 성격 때문이든 게으름 때문이든, 혹은 뭔가 바보처럼 저지른 범죄 행위 때문이든 더 이상 사회에서는 밥벌이를 할 수 없었던 인간 말종들에게는 먹여주는데다 술까지 퍼주는 곳이라면 가볼만 한 곳이었습니다.  그게 군대라고 할 지라도요.  그리고 군대도 그런 인간 말종들을 환영했습니다.  아무리 인간 말종이라고 해도 채찍질 수십대면 다 고분고분하게 만들 자신이 있었던 것이지요. 




(19세기 스타일로 구운 하드택 hardtack, 즉 건빵입니다.)



이런 특성 외에, 영국군을 정의하는 매우 중요한 특성이 또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특성이 나폴레옹을 끝내 패배시키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바로 보급이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영국군을 군대로 결속시키는 것은 충성심이나 애국심이 아닌, 염장 쇠고기와 럼주였습니다.  즉, 염장 쇠고기와 럼주, 그 중에서도 특히 럼주의 보급이 끊어진다면 영국군은 와해되기 쉽상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영국군은 철저하게 보급을 중심으로 움직였습니다.  가령 이미 보신 1808년 비메이로 전투 편에서, 고작 1만4천의 병력을 상륙시키는데 영국군은 무려 8일을 소모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쾌속 강행군에서도 영국군은 고작 하루에 19km를 움직였습니다.  이는 프랑스군의 평범한 하루 행군 거리인 24km에도 크게 못 미치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엄청난 양의 보급품과 함께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유럽 전장에서는 그런 보급품들을 현지 상인들과의 계약에 의해 구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유럽은 토지가 비교적 비옥하고 산업이 발달한 곳이라서 농산물과 각종 자재가 부족하지 않았으니까요.  나폴레옹이 보급 치중대를 끌고 다니지 않고서 현지에서의 약탈에 의존하여 그런 대규모의 병력을 유지했던 것도 다 그런 풍요로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영국군이 주로 활동할 무대였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상당히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현지 상인들과의 계약에 의해 군대를 먹이는 것은 불가능했고, 결국 영국군의 보급품은 모두 해외에서 수입해와야 했습니다.  영국은 이 모든 것을 처음에는 미국, 나중에는 멕시코와 브라질, 심지어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들로부터도 수입하여 충족시켰습니다.  이런 해상을 통한 보급품 수송은 영국 해군이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이베리아 반도는 영국군이 활동하기에 좋은 지형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오포르토(Oporto)나 리스본(Lisbon), 카디즈(Cadiz) 같은 항구까지는 영국 해군이 이런 보급품을 별 어려움없이 날라다 주었습니다만,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거든요.  지난 편에서 스페인의 특색을 설명하면서 지방색이 뚜렷하고 지방 세력들간의 협업이 전혀 안되었다고 했습니다만, 그런 특색을 가지게 된 이유 중 하나가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이나 거친 산악 지형이 많았고 거기에다 내륙 도로망이 형편없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도로망이라고는 고대 로마제국이 닦아놓은 것이 전부였고, 마드리드 주변의 도로들만 간신히 포장이 되어 있을 뿐이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이베리아 반도에서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 지방은 마드리드와 바야돌리드(Valladolid)를 제외하고는 큰 도시가 거의 없었습니다.  미국의 스페인 문학과 역사를 전공한 조지 티너(George Ticknor)라는 사람이 당시 스페인을 여행할 때, 어찌나 내륙 지방의 교통량이 적은지 바르셀로나에서 마드리드까지 13일간 여행을 하면서 노새꾼 몇몇과 마차 두어개, 그리고 딱 한대의 승객마차를 봤을 뿐이라고 적었는데, 그런 내륙 통상의 부재가 결국 도로망의 미비로 이어진 것입니다.





(특히 도로라고는 없었던 포르투갈에서는 이런 건기에 말라붙은 시냇물 바닥이 주된 도로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웰링턴 공작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스탠호프 공작이 '그럼 포르투갈 사람들은 비가 올 때는 어떻게 합니까 ?'라고 묻자, 웰링턴은 '아마 그냥 집에 있나 봅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1808년 웰슬리의 지휘 하에 포르투갈에 상륙한 영국군은 처음에는 황소가 끄는 짐마차를 현지에서 고용하여 수송을 시작했지만, 그런 마차로는 그다지 먼 곳까지 갈 수가 없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 포르투갈을 정복했던 프랑스군의 쥐노(Junot)는 아무런 보급품도 없이 그냥 맨몸의 보병들만을 이끌고 산악 지대를 강행 돌파하는, 지극히 나폴레옹스러운 기동전을 펼쳤고, 그 덕분에 극심한 비전투 병력 손실을 입어야 했었지요.  하지만 애국심이나 사명감 대신 염장 쇠고기와 럼주로 유지되는 영국군에게 보급품이 없다는 것은 프랑스군과는 차원이 다른 결과, 즉 부대 전체의 붕괴를 낳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곧 영국군은 무거운 짐을 싣고도 거친 산악지대를 꾸준히 걸을 수 있는 노새를 곧 대량으로 채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불행히도 포르투갈에는 말은 물론 노새조차도 쉽게 구할 수 없어서 그 역시 수송선으로 날라와야 할 정도였으나, 스페인에서는 사정이 나아서, 매우 우수한 현지의 노새들을 대량으로 임대하여 수송 업무에 투입할 수 있었습니다.




(노새의 모습입니다.)



노새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영국군의 발 노릇을 해주었습니다.  노새는 암말과 숫나귀 사이에서 태어난 동물로서, 매우 우수한 수송용 가축 (pack animal)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노새는 말보다 더 끈기있고 병에도 더 강했으며, 말보다 더 적게 먹었습니다.  평균적으로 말 한마리가 하루에 귀리나 보리 등의 곡물 10파운드와 건초 10파운드를 먹어야 하는 것에 비해, 노새는 곡물 5파운드와 건초 10파운드만 먹으면 되었습니다.  게다가 말이 먹으면 결국 탈이 나고 마는 거친 풀도 노새는 잘 먹었습니다.  노새는 평균 200파운드 (약 90kg)의 짐을 싣고 하루 평균 16마일(약 25.6km)를 주행할 수 있었는데, 이는 일반적인 보병대의 강행군 속도와 맞먹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군대의 수송을 위해 태어났다고 할 만 했지요. 


하지만 이런 노새들은 1마리를 하루 빌려 쓰는데 영국군 병사 1인의 급료만큼인 1실링의 비용이 들었습니다.  또 말보다는 적게 먹는다고 해도, 노새도 먹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보통 노새 3마리당 1명의 노새꾼(muleteer)를 고용해야 했는데, 이들에게도 영국군 병사와 동일한 보급품을 지급해야 했습니다.  아무리 영국이 돈이 많다고 해도, 영국 재무성의 금고에 밑창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이런 노새들을 무한정으로 고용할 수도 없었고, 또 스페인에 노새가 무한정으로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19세기말~20세기 초의 남아프리카 보어 전쟁에서 노새를 이용하는 영국군의 모습입니다.)



일반적으로 보병 여단 또는 기병 연대 하나당 딸린 노새는 100~150마리 정도였습니다.  6문의 대포를 갖춘 포병 여단까지 딸린 보병 사단이라면 약 400~600마리를 가지고 있었지요.  하지만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보병 사단의 병력이 1만이라고 하면, 이들이 하루에 먹을 건빵과 염장 고기의 양은 2만 파운드 정도였고, 이를 나르기 위해서는 무려 1백마리의 노새가 필요했고, 영국군에게 어쩌면 고기보다도 더 소중한 럼주를 나르는데 추가로 50마리가 더 필요했습니다.  그러니 보병 사단에 딸린 노새가 500마리라고 하면, 이들이 나를 수 있는 보급품은 고작 3~4일치에 불과했습니다. 

병사 240명으로 이루어진 기병 연대 하나를 생각해보시지요.  이들이 하루 먹고 마실 건빵과 고기, 그리고 럼주를 나르기 위해서 30마리의 노새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니 만약 20일간 작전을 한다면 무려 600마리의 노새가 필요했지요.  하지만 노새들도 먹어야 했습니다.  600마리의 노새가 하루에 소비하는 곡물과 건초가 각각 6천 파운드였으므로, 이를 수송하는데 무려 또 60마리가 필요했고, 20일분을 실어나르려면 또 600마리가 필요한 셈이었지요.  이건 당연히 말도 안되는 숫자였습니다.  그러나 기병 연대에는 사람보다 말이 더 많았는데, 노새 1마리는 말 1마리가 먹을 곡물 20일치를 싣고 하루 평균 25km를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병 연대가 보급창에서 약 75km 떨어진 곳에서 작전을 한다면 이들에게 곡물을 수송하기 위해서는 기병 연대에 소속된 말의 대략 1/3에 해당하는 수의 노새가 필요했습니다.  기병 연대가 주둔한 곳까지 가는데 3일, 돌아 오는데 3일 걸리니까요.  만약 이 거리가 길다면 그만큼 더 많은 수의 노새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 노새들도 끊임없이 병들고, 다치고,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충분한 보급품을 수송할 수 없게 되는 것이었고, 이는 전투력 저하로 곧장 이어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프랑스군과의 차이가 가장 크게 벌어지는 부분이라고 생각되는데, 영국군은 그런 가능성을 충분히 고려하여, 노새 6마리당 1마리씩의 예비 노새들도 끌고 다녔습니다. 

따라서 이런 식량 수송에 필요한 노새의 숫자가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부대가 진격하기 전에, 보급창을 먼저 적절한 곳에 지어놓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영국군은 그렇게 했습니다.  웰링턴은 진격하기 전에 반드시 적절한 위치 요소요소에 보급창을 짓도록 했고, 이러한 보급창에는 평균 1만명이 먹고 마실 식량과 럼주를 축적하도록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그는 예하 부대들의 위치가 그런 보급창에서 75km 이상 떨어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이 이베리아 반도 내에서 작전할 때 수송 비용으로만 한달에 7만 파운드의 비용을 써야 했습니다.   이는 현재 가치로 약 178억원에 해당하는 거액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웰링턴의 영국군은 끊임없이 돈을 잡아먹었습니다.  웰링턴이 포르투갈 주재 영국 대사인 존 빌리어스(John Villiers)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매달 20만 파운드, 현재 가치로 약 500억원에 달하는 돈이 필요하다고 했으며, 다른 편지에서는 '후퇴하는 프랑스군의 뒤를 쫓아 진격을 하려고 해도, 주둔지의 주민들과 상인들에게 진 빚을 갚기 전에는 움직일 수가 없어서 작전에 차질이 생기니 빨리 돈을 보내라'고 볼썽 사납게 독촉하는 내용이 들어있기도 했습니다.

비록 돈이 많이 들긴 했으나, 확실히 보급을 중시하는 영국군의 작전은 프랑스군의 작전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훗날 웰링턴과 맞서게 되는 프랑스 마르몽 (Marmont) 원수가 1812년 나폴레옹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뚜렷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는 이 편지에서, 영국군이 7천~8천 마리의 노새로 식량을 끊임없이 실어올 수 있는 것에 비해, 자신의 부대는 수송용 가축이 없어 현지 조달에 의존해야 하며, 그나마 현지 주민들도 워낙 가난하여 식량 조달에 크게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먹을 것을 찾아 온 부대를 여러 지역에 분산 배치해야 하고, 그나마 주둔 지역의 식량이 곧 고갈되었으므로 끊임없이 부대들이 이동해야 하므로 도통 병력을 집결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같은 편지에서 자신의 군대가 아무 저항을 받지 않고 코아(Coa) 강을 건넌다고 해도, 어차피 식량이 부족하여 4일만에 되돌아와야 한다고도 불평하고 있습니다.





(훗날 배신의 아이콘이 되는 라구사 공작 마르몽입니다.)



이는 사실이었습니다.  반도 전쟁 기간 중 이베리아 반도 전역에 주둔한 프랑스군은 무려 20만명 정도에 달했으나, 이중 영국군에 대해 공세를 취할 수 있는 것은 고작 4~5만에 불과했습니다.  나머지는 곳곳에서 들고 일어나는 스페인 게릴라들을 상대하거나, 식량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영국군은 식량이든 노새든 모두 현금을 주고 구매를 했기 때문에, 현지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에서나 포르투갈에서나 주민들은 자국 정부의 명령은 무시해도 영국군의 지시에는 잘 따르는 편이었는데, 이유는 딱 하나, 영국군에게서 돈이 나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영국군의 이런 특징에는 좋은 점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습니다.  프랑스군과는 달리,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영국군은 너무나 느렸습니다.  가령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격파한 직후, 웰링턴 공작과 블뤼허 원수는 패퇴하는 프랑스군에 대한 추격은 프로이센군 단독으로 수행하는 것에 동의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는 하루종일 프랑스군과 혈투를 벌인 영국군이 지쳐 빠진 것을 배려한 점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실은 영국군의 보급 부대가 출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것 때문이었습니다.  알고 보면 먼거리를 달려오느라 지친 것은 프로이센군도 마찬가지였으나, 웰링턴 공작에 따르면 영국군은 "텐트와 보급품에서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는 부대 단위로 유지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도저히 빠른 속도로 프랑스군을 추격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서로 정반대의 특성을 갖춘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1809년 12월, 이제 충돌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과연 그 첫 충돌은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요 ?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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