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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아마추어 군대의 최후 - 투델라(Tudela)와 사라고사(Zaragoza)

by nasica-old 2015.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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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는 1808년 10월 나폴레옹이 에르푸르트 회담을 열어 후방을 단단히 한 뒤,  바일렌과 신트라 항복의 치욕을 만회하고자 프로이센에 주둔하고 있던 그랑 다르메 제1진을 스페인으로 이동시키는 것까지를 보셨습니다.  이렇게 독일에서 풀려나 스페인 에브로(Ebro) 강 동쪽에 포진한 프랑스군의 기세는 그야말로 대단했습니다.  무려 24만명의 병력이 란, 빅토르, 술트, 네 등 쟁쟁한 명장들의 지휘 하에 스페인 침공 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에브로 강과 그 지류들입니다.)



지난 번에 언급했듯이, 이와 대치 중인 스페인군은 총병력 약 8만이 크게 3개군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거기에 추가로 약 4만에 가까운 병력이 후방에 예비대로 있었지요.  스페인군의 문제는 단지 병력 부족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지휘관들은 매우 아마추어스러웠고, 상호간에 협동 작전이 거의 없었습니다.  독수리같은 나폴레옹이 그런 점을 간과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는 먼저 가장 많은 병력을 가진데다 상황 파악도 못하고 너무 혼자서 전방으로 튀어나와 있는 블레이크(Joaquín Blake y Joyes)의 스페인 좌익, 주로 갈리시아(Galicia) 지방 출신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노렸습니다.  재빨리 좌익과 중앙 사이를 파고 들어 블레이크의 퇴로를 끊고 포위, 격파한 뒤 나머지 스페인 중앙과 우익도 비슷하게 쌈을 싸먹을 작정이었지요.  





(호아퀸 블레이크 장군입니다.  아버지가 아일랜드 출신이라 성이 이렇습니다.  프랑스군에도 막도날드라는 이름의 장군이 있지요.)



그런데 10월말, 나폴레옹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벌어져서 이 모든 전략이 헝클어져 버립니다.  나폴레옹이 노리던 블레이크가 오히려 프랑스군을 공격하겠다고 쳐들어 온 것입니다.  이 공격은 그야말로 황당하기 짝이 없는 반응이었습니다.  에브로 강 동쪽에도 많은 스페인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그 중에는 강 서쪽의 스페인군에게 정보를 전달해주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니, 얼마나 많은 프랑스군이 속속 도착하고 있는지 블레이크가 모를 턱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겁도 없이 공격에 나섰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공격을 당한 프랑스군 르페브르(François Joseph Lefebvre) 원수도 너무 어이가 없었는지 혹은 너무 괘씸했는지, 때가 될 때까지 공격하지 말라는 나폴레옹의 지침을 어기고 적극적인 반격에 나섰다는 것입니다.  아무 포병 지원도 없이 공격에 나섰던 블레이크의 병력은 우세한 포병의 화력 지원을 등에 업고 반격에 나선 프랑스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 전투가 나폴레옹의 큰 그림을 말아먹은 1808년 10월 31일의 판코르보 (Pancordbo) 전투입니다.  이 전투로 인해 블레이크의 갈리시아(Galicia)군은 비명을 지르며 원래 위치보다 훨씬 더 먼 후방으로 후퇴해버렸습니다.





(블레이크의 군대는 저 갈리시아 지방 출신들이 주력이었습니다.  갈리시아는 영국과 가장 가까운데다 프랑스군의 침공을 가장 늦게 받은 덕분에 대프랑스 항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전투는 분명히 프랑스군의 승리였으나, 스페인 측은 나폴레옹의 큰 덫에서 본의아니게 벗어나게 되었고, 또 이후 대프랑스 투쟁에서 계속 반복하여 입증될 스페인군 특유의 장점을 보여주었습니다.  즉, 불리하다 싶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친 뒤, 어지간히 안전한 곳까지 도망친 뒤에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어슬렁어슬렁 다시 집결하는 것이었지요.  판코르보 전투에서 스페인군은 무려 2만명이 넘는 병력이 참전하여 볼썽사나운 참패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300명의 사상자와 300명의 포로만을 냈습니다. 

그 뿐만 아니었습니다.  그 뒤를 추격하는 프랑스군을 맞아 싸운 스페인군은 5일 뒤인 11월 5일 벌어진 발마세다(Valmaseda) 전투에서 방심하고 그저 스피드만 내던 프랑스군을 덮쳐 작지만 분명한 승리를 거두기까지 했습니다.  비록 로마나 후작 본인은 현장에 없었으나, 그가 덴마크에서 데려온 북방 사단의 정예 병력이 큰 공을 세웠지요. 다만, 2배가 넘는 스페인군에게 포위된 빌라트(Eugene-Casimir Villatte) 장군의 프랑스군은 스페인군의 항복 요구를 거부하고 보병 방진을 짠 뒤 스페인군의 포위망을 힘으로 뚫고 탈출에 성공하는 저력을 과시했습니다.  이번의 프랑스군은 확실히 바일렌 전투에서 빌빌거리던 신병들과는 수준 차이가 나는 제1진급 부대라는 것이 입증된 것이지요.  그래도 포로 300명과 사상자 300명을 낸데다, 대포도 1문 잃는 바람에 프랑스군은 망신을 당한 것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발마세다 전투도 빅토르 원수의 군단의 작전이었습니다.  거기서 체면을 구기는 바람에 빅토르는 나폴레옹에게 매우 심한 비난을 받았고, 그 때문인지 에스피노사 전투 첫날에는 매우 서두르는 듯한 공격을 펼치다가 낭패를 보기도 했습니다.  1814년 프랑스 내의 방어 작전에 그의 부대가 제 시간에 도착을 못했다는 이유로 나폴레옹이 또 다시 심하게 그를 문책하자, 마침내 참지 못한 그는 결국 부르봉 왕가 편에 붙게 됩니다.  부하라고 너무 심하게 다루면 안 되는 법이지요.)



하지만 프랑스군의 방심과 스페인군의 행운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었습니다.  11월 10일~11일 2일간 벌어진 에스피노사(Espinosa de los Monteros) 전투에서 블레이크의 2만3천은 빅토르(Claude Victor) 원수의 2만2천 병력에게 따라잡힌 뒤 첫날은 잘 싸워 프랑스군의 공격을 막아냈으나, 결국 프랑스군의 조직적이고 숙련된 전투 솜씨를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블레이크의 갈리시아군은 30문의 대포와 30개의 군기를 잃고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고, 특히 북방 사단은 여기서 큰 피해를 입고 부대 단위로서의 존재를 잃습니다.   이렇게만 보면 블레이크 장군은 뭐 딱히 한 일이 없는 무능한 장군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그는 프랑스군의 추격을 피해 뿔뿔이 흩어진 부하들을 이끌고 산악 지대를 거쳐 탈출에 성공합니다.  에스피노사 전투에서 스페인군의 피해는 사실 그리 결정적이지 않았습니다.  포로까지 합해도 3천 수준이었으니까요.   블레이크의 잔존 갈리시아군이 끝내 전멸을 피해 탈출했다는 소식은 나폴레옹을 놀라게 했는데, 스페인군의 신출귀몰한 산개 후퇴 솜씨는 이후로도 반복됩니다.  하지만 늦가을에 산악지대를 거쳐 도망자 신세로 통과한 갈리시아군의 모습은 그다지 영광스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약 200km 넘게 떨어진 레온(Leon)에 12일 뒤인 11월 23일에 도착했을 때, 이들은 원래의 절반 이하인 1만명 수준으로 줄어든 뒤였습니다.  도중에 낙오한 스페인 병사들도 역사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후방에서 프랑스군을 괴롭히는 빨치산이 되었겠지요.





(전투가 벌어진 에스피노사에서 레온까지, 자동차로 가면 3시간이 채 안 걸립니다만, 산길을 통해서 가자면 12일 정도가 걸렸나 봅니다.)



아무튼 프랑스군과 대치하던 3개 스페인군 중 가장 강력하던 블레이크의 갈리시아군을 간단히 격파한 나폴레옹의 다음 목표는 물론 전선의 중앙을 맡고 있던 카스타뇨스(Francisco Castaños)의 안달루시아(Andalucia)군이었습니다.  이렇게 북쪽의 방어망이 완전히 무너진 상황에서, 카스타뇨스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  글쎄요, 저도 전문가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방어가 용이한 요새를 점거하고 장기 농성 준비를 하던가, 아니면 어차피 무너진 방어선에 연연하지 말고, 쳐들어올 프랑스군을 요격하기 위해 일단 팔라폭스(Palafox)의 아라곤(Aragon)군과 합류하기 위해 이동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합니다.  카스타뇨스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요 ? 






(북쪽의 빌바오와 남쪽의 사라고사 사이 중간에 칼라오라 Calahorra가 있는 것이 보이실 겁니다.  그 남동쪽의 풍선 표시가 된 곳이 바로 운명의 투델라 Tudela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  에스피노사 전투에서 블레이크의 병력이 박살이 난지 10일 가까이 지난 뒤에도 카스타뇨스는 에브로 강변에 있는 소도시인 칼라오라(Calahorra) 인근에 병력을 주욱 늘어놓고 퍼져 있었습니다.   이 위치는 빌바오의 블레이크와 사라고사의 팔라폭스의 딱 중간 위치라는 점 빼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곳이었고, 또 어차피 긴 에브로 강변을 다 지킬 수도 없는데도 카스타뇨스는 그저 원래 위치를 고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카스타뇨스는 병 중이라 몸이 좋지 않았는데 아마 그 점도 이런 무기력한 지휘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그러다 11월 21일, 마침내 프랑스 몽세(Moncey) 장군의 제3군단이 약 100km 북쪽인 로그로노(Logrono)에서 에브로 강을 건넜고, 네(Ney) 원수의 제4군단은 남쪽 약 50km 지점인 투델라(Tudela)로 접근 중이라는 소식을 접하자, 포위될 것을 염려하여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디로 갔을까요 ?  북쪽은 프랑스군이 둑터진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지역이었으므로, 일단 남쪽으로 움직였습니다.

이렇게 남쪽으로 내려가던 카스타뇨스는 투델라 인근에서 방어선을 치기로 합니다.  투델라는 요새화된 도시가 아니었으나, 동쪽은 에브로강으로 막혀 있고, 서쪽에서는 퀘일레스(Queiles)라는 작은 강이 흘러와 에브로강에 합류하는 지점이었기 때문에, 북쪽에서 에브로강을 따라 내려올 프랑스군을 막기에 적절한 장소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퀘일레스강은 전혀 군사적인 장애물이 될 수 없는 작은 개천에 불과했고, 또 프랑스군을 막기에는 그 일대가 너무 넓었습니다.  프랑스군이 카스타뇨스가 원하는 곳으로만 쳐들어올 리가 없쟎습니까 ?  그는 투델라에서 서쪽으로 무려 17km에 걸친 지역에 또 병력을 주욱 늘어놓을 생각이었습니다.  이건 가뜩이나 부족한 병력을 더욱 분산시키는 짓이었습니다.




(투델라 Tudela는 에브로 강변의 작은 도시입니다.  저 교회탑이 이 소도시 거의 유일한 관광 명소 같아 보이네요.)



과연 3만이 넘는 병력도 이렇게 주욱 늘어놓으려고 보니 17km를 다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에브로 강 동쪽에 주둔하던 팔라폭스 휘하 오네일레(Juan O'Neylle) 장군에게 병력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에브로 강변의 투델라는 오네일레가 맡아줬으면 하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여태까지 서로 내왕이 거의 없다가 이제 와서 병력을 지원해달라고 하면 그게 원활하게 될 리가 없었습니다.  오네일레는 팔라폭스 명령 없이 병력을 이동시킬 수는 없어서 팔라폭스에게 허가를 요청했다는, 원칙적이지만 답답하기 그지 없는 대답을 보내왔습니다.  그래도 도와줄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그 다음날인  11월 22일 정오가 되어 팔라폭스가 '허가한다'라고 답장을 보내오자 즉각 에브로 강을 향해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스페인군치고는 빨리 행군하여 그날 저녁에 에브로 강의 동쪽 강가까지 도착했으나, 강행군에 지친 상태로 어둠 속에서 도강하는 생난리를 치고 싶지는 않아서 그냥 동쪽 강변에서 숙영을 해버렸습니다.  이때 투델라는 완전히 텅 빈 무방비 상태였는데도요.  스페인군의 다소 태평한 성격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렇다보니, 이날 밤 투델라 주변에는 카스타뇨스의 안달루시아군에 팔라폭스의 아라곤군 일부까지 증강되어 전체적으로는 무려 4만5천 정도나 되었으나, 대부분은 넓은 지역에 분산된데다 어설프게 이리저리 이동 중이라서 전혀 전투 준비가 안된 상태였습니다.

한편 프랑스군은 이날 밤 불과 17km 북쪽의 알파로(Alfaro)에 도착하여 야영하고 있었습니다.  제3군단 전체에 추가로 1개 보병사단과 1개 기병여단이 증강된 병력으로, 원래 몽세 장군이 지휘하던 것을 나폴레옹이 특별히 맹장 란으로 교체한 정예 부대였습니다만, 그 수는 불과 3만3천 정도로서 카스타뇨스 휘하의 4만5천에 크게 미치지 못했습니다.

다음날인 11월 23일 에브로 강변에서 편안한 밤을 보낸 오네일레 장군의 3개 사단들이 아침부터 강을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로카(Roca) 장군의 사단이 강을 건넜고, 두번째로 생-마르크(Saint-Marcq) 장군의 사단이 강을 막 건넜습니다.  프랑스군의 공격이 시작된 것은 바로 그 때였습니다.  부지런한 프랑스군은 이미 꼭두 새벽에 기상하여 17km 거리를 순식간에 행군을 해왔던 것입니다.  오네일레 장군 직속 사단은 언덕 위에 나타난 프랑스 유격병들의 총격을 받아가며 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동시에, 투델라 서쪽 약 10km에 떨어진 카스칸테(Cascante)에 배치된 라 페냐(La Peña) 장군의 스페인군 전면에도 프랑스군이 나타났습니다.


당황한 스페인군이 대응 사격을 해댔는데, 의외로 프랑스군은 쉽게 무너져 물러났습니다.  역시 새벽 일찍부터 강행군한 것이 문제였을까요 ?  그럴 리가 없지요.  이들은 그냥 정찰을 담당한 유격병이라서 적의 대응 태세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이 짧은 교전에서 프랑스군 지휘관 란(Lannes)은 스페인군이 카스칸테와 투델라에 분산되어 있는데, 그 사이의 5km 구간이 그냥 뻥 뚫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투델라 전투의 전황입니다.  왼쪽 아래 구석에 카스칸테가 있습니다.  전투의 모습은 북쪽에서 내려오는 프랑스군을 남쪽의 스페인군이 막아보려는 모양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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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격병 Voltigeur는 전열 보병과는 달리 대오를 이루지 않고 산개 대형으로 사격하고 이동하고, 다시 사격하고 이동하여 적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Voltigeur라는 단어는 프랑스어로 뛴다는 뜻입니다.)



적이 나타나자 오네일레는 카스칸테에 배치된 라 페냐 장군의 부대에게 지원을 요청했습니다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라 페냐가 우물쭈물 하는 사이 2개의 프랑스 기병 여단이 나타나 그를 둘러싸고 움직이지 못하게 견제한 것입니다.  기병들이 2개 여단이나 몰려와 시퍼런 칼을 빼들고 빈틈을 노리는 상황에서는 보병대가 움직일 수가 없었지요. 

란은 이렇게 라 페냐의 부대의 발등에 못을 박아 둔 뒤, 투델라에 있는 스페인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좌측으로는 모를로(Antoine Morlot) 장군의 사단을 보내 로카 장군의 스페인군을 측면을 공격했고, 우측으로는 마티외(Maurice Mathieu) 장군을 보내 오네일리 장군의 부대를 공격했습니다.  이 양쪽 날개에 대한 공격을 각각 시도하면 그래도 둘 중 하나는 성공할 줄 알았는데, 그건 란의 착각이었습니다.  둘다 너무 쉽게 성공해버렸던 것입니다.  스페인군은 점거하고 있던 능선에서 허둥지둥 물러나 버렸습니다.

그런 혼란 속에서 로카와 생-마르크 부대의 간격이 지나치게 벌어지자, 데누에트(Charles Lefebvre-Desnouettes) 장군의 기병 여단이 그 틈으로 칼을 뽑아들고 돌격했고, 아군 진영 사이에 프랑스 기병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본 스페인군 전체가 그만 무너져 버렸습니다.  이날 투델라에서 싸운 것은 결국 카스타뇨스가 아니라 카스타뇨스를 지원해주러 온 오네일레를 주축으로 하는 약 2만3천이었는데, 이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개미새끼처럼 흩어져 버려 프랑스 기병들에게 사냥당하는 신세가 되어야 했습니다.   이날 스페인군의 피해는 의외로 적은 사상자 3천에 포로 1천명으로서, 역시 스페인군의 특기인 신출귀몰한 도주 솜씨가 빛을 발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카스타뇨스의 본대라고 할 수 있는 라 페냐 장군의 부대는 카스칸테에서 프랑스군 기병대와 대치하고 있다가, 어둠이 깔리자 역시 스페인군의 장기를 발휘하여 슬그머니 후퇴를 해버렸습니다.  여기서의 스페인군 사상자는 고작 200명에 불과했습니다.





(투델라에서 탈취한 스페인군의 군기를 가지고 나폴레옹에게 보고하는 폴란드 기병대의 모습입니다.)



결국 이 투델라 전투에서는 사실상 카스타뇨스와 팔라폭스 2개 야전군이 장 란의 1개 군단에게 패배한 셈이었습니다.  문제는 프랑스군 제1진이, 그것도 강력한 기병대를 갖춘 정예 군단조차도, 패주하는 오합지졸 스페인군을 일망타진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섬멸을 면하고 도주한 스페인군은 저 멀리 후방에서나마 다시 집결하여 다시 프랑스군을 괴롭히는 존재가 됩니다.  훗날 이들과 함께 싸운 영국군 장군들은 '스페인군이 잘하는 것이라고는 도망쳤다가 다시 모이는 것 밖에 없다'라며 악평을 늘어놓았습니다만, 이건 사실 대단한 재주였습니다.  특히 다시 모였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래도 계속 조국을 위해서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으니까요.  조국을 위해 죽은 병사들보다는 감동적이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살아남아 계속 적에게 저항하는 병사가 더 좋은 것이거든요.  일단 이길 수 없다면 어떻게든 생존하는 것이 병사로서 꼭 갖춰야 할 능력이지요.  물론 패전 전문 군대인 스페인군에게는 나쁜 점이 더 많았습니다.  특히 나쁜 점은 이렇게 패전을 하고 나서도 각 지방 출신들끼리 힘을 합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투델리 패전 이후 팔라폭스 휘하의 아라곤(Aragon) 부대는 '괜히 안달루시아놈들 돕다가 피해만 입었다'라고 투덜거리며 자기 고장의 중심 도시인 사라고사로 철수했고, 카스타뇨스의 안달루시아 부대는 아라곤이야 어떻게 되건 말건 일단 마드리드로 후퇴했습니다.  





(아라곤 지방의 위치입니다.  주도는 사라고사입니다.)



스페인 측에게 있어 상황은 심각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번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스페인 임시 정부 사절을 만난 자리에서 '아우스테를리츠 및 예나의 영웅들과 함께 너희들을 2개월 안에 정복해주겠다'라고 큰 소리를 친 바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1달이 안되어 프랑스군을 틀어 막고 있던 스페인 3개 야전군이 모두 녹아버린 것입니다.  이제 스페인 임시 정부가 있는 마드리드와 나폴레옹 사이에는 변변한 방호막이라고는 거친 산맥 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코스타뇨스의 안달루시아군이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고 마드리드로 후퇴해왔다는 것이 다행이었지요.  또 위에서 보셨듯이 아라곤군도 결정적인 타격은 받지 않은 상태로 아라곤의 수도인 사라고사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히려 잘 되었다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  어차피 야전에서는 도저히 숙련된 프랑스군의 상대가 안된다는 것이 분명해졌으므로, 되지도 않는 야전군을 늘어놓고 프랑스군의 밥 노릇을 하느니 차라리 방어에 용이한 요새에 쳐박혀 프랑스군의 후방을 위협하는 것이 더 나았습니다.  다만 마드리드는 요새화된 도시가 아니었으므로 마드리드로 철수한 것은 여전히 문제였습니다.  카스타뇨스는 결국 마드리드에서도 이름 값을 하지 못합니다.

나폴레옹은 전격전의 대가답게 사라고사로 도망쳐간 팔라폭스는 거의 무시해버리고 마드리드로 향했습니다.  물론 사라고사를 완전히 무시한 것은 아니고, 몽세와 네의 2개 군단을 붙여 포위전에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신속하게 마드리드로 가기 위해서는 여전히 스페인의 산악지대라는 신이 내린 방벽을 극복해야 했는데, 특히 소모시에라(Somosierra)에서 나폴레옹은 만만치 않은 장애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편에 보시기로 하고, 이번 편에서는 제2차 사라고사 포위전을 간략하게 살펴보시지요.






(사라고사의 현대의 모습입니다.  정말 멋지군요 !)



사라고사는 바로 몇달 전에 이미 제1차 포위전을 겪은 도시였습니다.  중세시대에 세워진 사라고사의 성벽은 현대적 포격에 견딜 수준이 아니어서, 제1차 포위전이 시작된자 결국 프랑스군의 포격에 무너지고 말았으나, 사라고사 시민들이 그야말로 골목길 하나하나에서 죽기로 싸워 결국 프랑스군을 물리친 바 있었습니다.  그때의 지휘관도 28살의 귀족 청년 팔라폭스였고, 팔라폭스와 사라고사 시민들은 '한번 해냈으면 두번도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다가올 포위전을 준비했습니다.  실은 사라고사는 투델라 전투가 벌어지기 훨씬 전부터 이미 성벽 밖의 외곽 보루를 다시 튼튼히 쌓고 무너졌던 성벽도 보수를 하고 있었습니다.  팔라폭스가 약 1만7천의 패잔병을 이끌고 사라고사에 입성하자, 이 방어 진지 구축 작업은 더욱 가속이 붙었지요.  원래 사라고사의 인구는 5만5천 정도였는데, 이 방어 시설 공사에 자원한 인력이 무려 6만이었습니다.  팔라폭스가 데려온 패잔병에, 대프랑스 항쟁에 노동력이라도 보태겠다고 주변에서 몰려온 스페인 주민들이 많았던 것이지요.  이런 노동력 외에, 팔라폭스는 실제 방어전에 참전할 신병도 1만2천명을 더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팔라폭스는 제1차 포위전 때처럼 결국 성벽은 포격에 무너질 수 밖에 없다고 보고, 그때처럼 골목길 하나하나를 요새처럼 만들기 위해 시내에도 많은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는 등 제1차 포위전의 경험을 100% 활용했습니다.  시 주민들이 각자 비축한 것 외에도 중앙 창고에 사라고사 전체가 3개월 이상 버틸 식량도 비축해놓았습니다.  심지어 프랑스군이 박격포로 쏘아붙일 폭발탄(bomb)에 혹시라도 화약고가 폭발할까봐 화약을 미리 혼합하지 않고 유황과 초석, 숯을 따로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마다 필요한 만큼 조금씩 제조하기로 할 정도의 주도면밀함을 보여주었습니다.  팔라폭스와 그 휘하 스페인군은 분명히 아마추어 군대에 불과했으나, 적어도 포위전에서는 꽤 숙련된 전사들이었습니다.





(당시 사라고사 시의 지도입니다.  지금은 저 성벽 밖으로 도시가 대폭 확장되었고, 당시 포위전을 버티어 내던 성벽은 모습을 찾기 어렵다고 합니다.)



이렇게 사라고사는 곧 프랑스군이 따라 붙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방어 준비에 열을 올렸으나, 정작 포위전이 시작된 것은 마드리드가 맥없이 함락되고도 한참 뒤인 12월 20일부터였습니다.  이유는 간단히 말해 사라고사는 전략적 중요성이 떨어져 나폴레옹에게 무시당한 것이었고, 또 프랑스군도 제1차 포위전의 경험을 살려 충분한 공성포와 공병 부대를 갖춘 모르티에(Édouard Mortier)의 제5군단이 독일로부터 이동해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뒤늦게 시작되기는 했으나, 그 전투의 치열함은 제1차 때와 마찬가지였습니다.  포위전에서 왕도는 없습니다.  프랑스군은 외곽 진지부터 하나하나 격파하며 조금씩 방어망을 뚫는 것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악전고투 끝에 벌이다보니 외곽 진지들을 점령한 뒤 거기에 공성포를 설치하고 사라고사 성벽을 직접 타격하기 시작한 것은 거의 1달이 지난 1월 중순 경이 되어서였습니다.

여태까지의 공성전은 잦은 지휘관 교체 끝에 모르티에와 쥐노가 맡고 있었으나, 1월 중순부터는 좀 급이 떨어지는 지휘관이었던 쥐노가 나폴레옹이 믿고 쓰는 맹장 란으로 교체되면서 그가 전체 지휘를 맡았습니다.  항상 전투의 선두에 서던 란은 이전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회복 중이었는데, 어느 정도 회복하자마자 다시 제일 어려운 전투에 투입된 것이지요.  하지만 이때 즈음해서는 프랑스군 병영 내에 전염병이 돌아 많은 병사들이 앓아 누웠다가 병사자가 속출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은 몰랐으나 이 전염병은 사라고사 시내에도 창궐하여 많은 스페인군과 시민들이 픽픽 쓰러지고 있었지요.  급기야 스페인군 총지휘관인 팔라폭스까지 병에 걸려 드러눕고 말 정도였습니다.  프랑스군의 어려움은 이 뿐만 아니었습니다.  등 뒤에서 스페인 민병대들이 몰려 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는 팔라폭스의 형과 동생이 모아 온 약 5천에 가까운 병력이었으나, 역시 스페인 민병대는 야전에서는 별로 힘을 못 써 모르티에에게 간단히 격파당하고 말았습니다.





(제2차 사라고사 포위전, 아니 시가전의 모습입니다.  당시 침략자에서 맞서 목숨을 바친 스페인 애국자들에게 경의를...)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프랑스군이 사라고사 시내에 진입한 것은 1월 27일이 되어서였습니다.  그러나 진짜 사라고사 포위전은 지금부터였지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라고사 시민들은 처음부터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골목길마다 싸움터를 마련해놓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프랑스군도 만만치는 않았습니다.  특히 란은 정작 본인은 부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맹장이면서도 부하 장병들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진짜 명장이어서, 무리하여 병력을 투입하지 않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골목길 하나하나씩을 확보해나가며 장기전을 펼쳤습니다.  이러다보니 별로 크지도 않은 사라고사 시내에서 무려 3주넘게 치열한 시가전이 계속 되었습니다.  산 아우구스틴 (San Augustin) 수도원에서는 예배당 한쪽은 스페인군이, 다른 한쪽은 프랑스군이 점거한 상태에서 몇시간 동안 총격전을 벌일 정도로 양쪽 모두 대단한 끈기와 집요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라고사 시내 성당에서 벌어진 전투입니다.  십자가로 프랑스군의 대갈통을 내리치는 스페인 신부님의 모습이... 인상적이네요.)



그러나 정예 프랑스군에게 스페인 방어군은 결국 밀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원래 3만2천명이던 스페인 방어군은 이미 8천명 수준으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전투와 전염병으로 인한 사상자들이 그렇게 많았던 것이지요.  민간인 사상자와 병자의 수도 엄청나서 이 포위전에서 사라고사의 인구는 5만5천에서 1만5천으로 떨어졌습니다.  민간과 군을 합한 스페인측 사망자는 5만명이 넘는 수준이었지요.  프랑스 측의 피해도 물론 커서, 1만명이 사망하고 약 4~5천이 부상 및 전염병으로 드러누워야 했습니다.  결국 2월 19일부터 항복 협상이 진행되어, 다음날인 2월 20일, 사라고사는 프랑스군에 조건부 항복을 하게 됩니다.  항복 조건은 저항전에 참전한 시민들에 대한 사면과 시민들의 재산에 대한 약탈 금지였습니다.  스페인 병사들은 포로로서 프랑스로 후송되든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프랑스측 스페인군으로 복무하든가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이는 무려 2달 동안이나 프랑스군에게 끈질기게 저항한 도시치고는 매우 관대한 항복 조건이었습니다.  이렇게 완강히 저항한 도시에 대해서는 1~3일간 병사들이 마음껏 약탈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관례였으니까요.  실제로 란은 이 조건을 비교적 잘 엄수하여, 스페인군이 무장을 모두 해제당한 이후에도 프랑스군에 의한 시내 약탈은 일부 사례를 빼고는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란은 여러 면에서 정말 명장 같습니다.




(사라고사 성벽 밖으로 걸어나오며 무기를 내려놓는 사라고사 수비군의 모습입니다.)






(장 란은 알면 알 수록 감탄을 자아내는 인물이군요.  그러나 장 란 특집은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직전까지 기다리셔야 합니다.)



그러나 팔라폭스 본인은 항복한 적장으로서의 예우를 전혀 받지 못하고 범죄자 취급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는 페르난도 7세를 보좌하여 바욘에서의 퇴위 때도 함께 있던 장교로서, 정당한 스페인 국왕인 조제프를 배신하고 반란을 일으킨 배신자로 취급된 것입니다.  그는 험한 대접을 받으며 프랑스로 후송되어 뱅센(Vincennes)의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지난 페르난도 7세 이야기 때에 적은 바 있으니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이렇게 사라고사는 비록 결국 함락되기는 했으나 그 과정에서 스페인 민중의 저력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는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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