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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연극과 총검 - 에르푸르트 회담과 스페인 침공 준비

by nasica-old 2015.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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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는 로마나 후작의 스페인 북방 사단이 어렵게 덴마크로부터 빠져나와 스페인 저항군에 합류하는 모습과, 이들이 합류하자마자 나폴레옹에게 박살이 난다는 불안한 예고까지를 보셨습니다.  프랑스군의 B급 군대가 비록 초반 스페인 저항군에게 볼썽사납게 쫓겨나긴 했으나, 나폴레옹 본인이 직접 나서면 이야기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었을까요 ?  나폴레옹은 단순한 군사 전문가의 수준을 넘어서는 대전략가라는 점을 준비 단계부터 보여줍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입니다.  화가 난다고 닥치는 대로 때려부수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고, 대인배가 일을 할 때는 뭔가 달라도 확실히 달랐습니다.  스페인의 반역자들을 응징하기 위해, 나폴레옹은 전혀 엉뚱하게도 당대의 대배우인 탈마 (François-Joseph Talma)와 프랑스 국립 극단 (la Comédie-Française, 개그맨이 아닙니다) 전체를 동원했습니다.  방향도 스페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들을 이끌고 독일 한 가운데 있는 프랑스 보호령인 에르푸르트 공국(Principality of Erfurt)으로 향했습니다.  




(로마 정치인 킨나로 분장한 당대의 대배우 탈마입니다.  탈마는 나폴레옹이 대단히 존중한 인물로서, 당대 유럽 최고의 명배우로 손꼽히는 인물이었습니다.  원래 치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젊을 때 영국에서 잠깐 치과의사로 개업을 하기도 했었지요.  그러나 당시에 치과의사는 그다지 존중받는 직업이 아니었고, 넘치는 문화적 소양을 주체할 길이 없었던 그는 곧 배우로서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는 나폴레옹 몰락 이후에도 대단한 지위를 누리며 예술가로서의 인생을 계속 살았습니다.)



그는 1808년 9월 말부터 10월 중순까지, 에르푸르트에 탈마와 코메디 프랑세즈 뿐만 아니라,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와 빌란트(Christoph Martin Wieland) 등 독일의 지성이라고 할 수 있는 지식인들을 모두 불러 들여 그야말로 학문과 교양이 넘쳐나는 대문화 제전을 열었습니다.  이 곳으로 나폴레옹은 여러 왕족과 귀족들을 불러 들입니다.  그가 만든 라인 연방의 독일 왕족들은 물론 올 수 밖에 없었으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들러리였습니다.  이 무대의 진정한 주인공은 바로 러시아의 짜르 알렉산드르 1세였지요.  





(당대 독일 문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는 빌란트입니다.  당시 칠순의 노인이었던 그를 꼭 만나보고 싶었던 나폴레옹은 에르푸르트 회담 중이던 어느날 밤 무도회에서 그가 와주었으면 했고, 이 말을 들은 바이마르 공작 부인이 자신의 전용 마차를 특별히 보내 집에서 실내복 차림으로 있던 그를 그 차림새 그대로 황급히 모셔왔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이 노시인과 함께 지적인 담소를 나누며 매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하네요.)



나폴레옹이 알렉산드르 1세를 직접 만난 것은 작년 여름의 틸지트 회담 이후 2번째였습니다.  그는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군사적 위용으로 러시아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준 뒤, 마치 학교의 일진 양아치들이 싸우고 난 뒤 같쟎은 우정을 맺는 것처럼 알렉산드르와 친교를 맺으며 유럽을 양분하는 동맹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즈음 해서는 나폴레옹의 약속대로 오스만 투르크의 영토를 나눠가지는 것이 제대로 되지 않고,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 때문에 러시아 귀족들의 돈줄이던 영국으로의 곡물 수출이 막힌 것 때문에 러시아의 반프랑스 감정이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원래 양아치들의 우정이라는 것이 사실은 돈에 흔들리는 같잖은 것이쟎아요.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의 우정이 딱 그랬습니다.






(17세기 파리의 코메디 프랑세즈의 공연 모습입니다.  당시 파리는 서구 세계 문명의 중심지로서 파리의 연극계는 오늘날 미국의 헐리웃과 같은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돈 때문에 갈등과 긴장이 고조될 때 양아치들은 어떻게 하나요 ?  제딴에 우정을 돈독히 한다고 휘황찬란한 곳에서 으싸으쌰 회식을 하지요.  황제들이 폭탄주를 돌릴 수는 없었고, 좀더 우아하게 회식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이 고른 곳이 에르푸르트였고, 당대 최고의 공연 문화를 주도하던 탈마와 코메디 프랑세즈를 동원한 것이지요.  나폴레옹은 화려한 문화 제전과 즐비한 왕족 공작 백작 나으리들을 병풍으로 세워 프랑스 제국의 번영하는 문화로 알렉산드르의 혼을 빼놓을 속셈이었습니다.  이 문화 제전의 클라이막스는 10월 4일, 볼테르의 희곡 '오에디푸스'가 공연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극 중 "위대한 이의 우정이란 신들이 내려준 선물"이라는 대사가 나오자, 모든 왕공과 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객석에서 알렉산드르가 일어나 옆에 앉은 나폴레옹의 손을 감동스럽게 맞잡은 것입니다.  





(오에디푸스는 1718년 볼테르가 생애 최초로 쓴 비극으로서, 역시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초연되었습니다.  코메디 프랑세즈라고 해서 코메디만 하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하지만 그래도 역시 두 황제 사이의 이해 관계는 결국 돈과 영토 문제였습니다.  나폴레옹이 주도하는 유럽 대륙의 질서에 맞장구를 쳐주는 댓가로 알렉산드르가 원한 것은 스웨덴으로부터 빼앗은 핀란드 정복에 대한 인정, 러시아 입장에서 살짝 불편한 프로이센 주둔 프랑스군의 철수,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오스만 투르크의 분할 점령이었습니다.  이 중 에르푸르트에서 알렉산드르가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나폴레옹이 쉽게 들어주거나, 또는 실은 내심 바라고 있던 항목들이었지요.  즉 러시아의 핀란드 정복이야 프랑스로서는 알 바 아닌 문제였고, 프로이센에 주둔하고 있는 근 20만에 가까운 병력 중 상당수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은 사실 나폴레옹 본인이었거든요.  그 행선지는 물론 바로 스페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치기 위해서 에르푸르트 회담부터 연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첫째, 스페인을 치기 위해서는 먼저 뒤통수인 동부 유럽이 조용해야 했고, 그를 위해서는 러시아와의 동맹을 다시 굳건히 해야 했습니다.  둘째, 스페인에서의 망신이 제2진급 부대를 동원했기 때문이므로, 스페인을 박살내기 위해서는 프로이센에 주둔한 제1진급 부대를 우아하게 빼내야 했습니다.

이렇게 프로이센의 철군은 나폴레옹 자신의 필요에서 나온 것인지만, 그는 마치 알렉산드르에게 대단한 양보를 하며 선심을 쓰는 듯이 프로이센으로부터 철군 조치를 했습니다.  프로이센은 원래 1억4천만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할 때까지 프랑스군의 주둔을 용인해야 했습니다.  에르푸르트 회담이 이루어지기 직전인 9월 초, 프로이센의 빌헬름 3세의 친동생인 빌헬름 왕자가 나폴레옹을 찾아와 애걸복걸하며 그 조건을 경감해줄 것을 부탁했는데,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의 체면을 봐주는 척 하면서 오데르(Oder) 강변에 있는 요새들을 프랑스 측이 접수하는 조건으로 병력을 철수시키기로 했습니다.  또한 프로이센의 병력을 4만2천으로 제한하는 조건도 달았습니다.  그러면서도 10월 9일, 이 빌헬름 왕자를 바로 2년 전 프로이센 병사들이 흘린 피가 채 마르기도 전인 예나 벌판으로 초대하여 토끼 사냥을 벌이며 끝까지 프로이센을 능욕했습니다.




(오데르 강은 오늘날 독일과 폴란드 사이의 국경 역할을 하는 강으로서, 저 그림에 보이는 프랑크푸르트는 그 유명한 도시가 아니라 Frankfurt an der Oder 라는 다른 도시입니다.  이 강변을 따라 들어선 요새들을 내놓으라는 것은 프로이센 한복판에 여전히 프랑스군의 군사거점을 확보해 놓겠다는 이야기지요.)




이런 거창한 자리에 중부 유럽 전통의 패자인 오스트리아는 안 왔느냐고요 ?  왔습니다.  이때 오스트리아는 스페인 바일렌에서 당한 프랑스군의 굴욕에 자극을 받아 대대적인 재무장에 나서고 있었고, 당연히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를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가 재무장을 할 때 그 대상이 러시아겠습니까 프로이센이겠습니까 ?  나폴레옹은 자신을 겨냥한 것이 분명한 오스트리아의 재무장에 대해 매우 심기가 불편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에르푸르트 회담처럼 화기애애한 자리에 최근 오스트리아의 재무장에 대해 변명한답시고 사절을 보내왔습니다.  그의 주목적은 변명이 아니라 염탐이었습니다.  나폴레옹도 그를 모르지 않았고, 오스트리아에 대해서 매우 노골적인 질책과 경고를 보냈습니다.  




(에르푸르트에서 오스트리아 빈센트 자작을 영접하는 나폴레옹의 모습입니다.  안면에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것이 보이네요.)




이렇게 에르푸르트의 상황을 보면, 나폴레옹의 전략적 동맹 구조가 한 눈에 정리됩니다.  그는 유럽 대륙을 지배하는데 있어 러시아와는 협력적 동맹 관계를, 프로이센에 대해서는 철저한 멸시와 억압을, 오스트리아에 대해서는 무력의 우위를 기반으로 한 견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아무리 프랑스가 대국이고 또 아무리 나폴레옹이 군사적 천재라고 하더라도, 나폴레옹의 프랑스가 혼자 힘으로 유럽 대륙 전체를 지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강력한 몽골 제국을 건설했던 징기스칸도 중앙 아시아의 여러 투르크 민족들의 협력을 이끌어내지 못했다면 그런 대제국을 건설할 수는 없었습니다.  즉, 만약 저 상황에서 러시아-프랑스 동맹에 문제가 생긴다면 나폴레옹의 제국은 한순간에 무너질 가능성이 컸습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에 대해 이를 갈고 있었으니까요.

나폴레옹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에르푸르트에 이런 대제전을 열어 러시아를 총검이 아닌 연극과 문학으로 대한 것입니다.  이런 동맹 관계는 나폴레옹 이전부터 유럽 왕가 사이에서 당연하게 횡행하던 것이었고, 그런 동맹 관계를 결혼이라는 인척 관계를 통해 그 결속을 굳히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이미 당시에는 나폴레옹과 조세핀의 관계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황제에게 뒤를 이을 후사가 없다는 것은 제국의 운명에 영향을 주는 큰 일이었으니까요.  당시 나폴레옹의 궁정에서는 이혼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었고, 당연히 조세핀은 울고불며 나폴레옹에게 호소하여 나폴레옹으로부터 '절대 너를 버리지 않겠다'는 구두 약속을 받아내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결혼 생활은 이미 개인적인 애정 차원을 떠난,  수많은 사람들의 부와 권력이 달린 문제였습니다.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가 만난 이 자리에서, 프랑스 측은 탈레랑의 입을 통해 나폴레옹의 재혼 문제를 넌지시 제기했고, 러시아 측은 일단 무응답으로 반응했습니다.  당시 알렉산드르에게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여동생이 두명 있었는데, 하나는 아직 12살로서 결혼할 나이가 아니었지만, 예카테리나 (Grand Duchess Catherine Pavlovna)는 당시 딱 20세로서, 결혼 적령기였습니다.  이 예카테리나라는 공주님은 매우 활발하고 아름다운 처녀로서, 마음씨도 고와서 알렉산드르 1세와 그 어머니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로마노프 가족의 꽃이었습니다.  특히 알렉산드르는 이 여동생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하여, 자타로부터 '여동생 바보'로 일컬어지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 여동생과의 결혼을 추진한다 ?  알렉산드르가 희대의 영웅임에 분명한 나폴레옹을 과연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분명히 드러날 순간이었습니다.  





(아름답고 생기넘치는 예카테리나 공주님입니다.  실망하셨나요 ?  흠...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매우 나쁜 일입니다.  그 사람의 내면을 봐야지요.)





(혹시나 싶어 다른 초상화도 찾아봤는데, 역시 이렇게 생기신 분 맞더군요.  내면을 봐야 한다면서 왜 한번 더 찾아봤냐고요 ?  흠...)




당시 프랑스 측도 명시적으로 예카테리나와의 결혼을 제안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양아치들끼리라도 체면이라는 것이 있고 또 혹시 저쪽이 거절할 경우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될 것이 뻔했으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넌지시라도 언급이 되었다는 것은 굉장한 사건이었습니다.  알렉산드르는 이에 대해서 우아하게 입을 다물고 아무 의사 표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러시아로 돌아가자마자, 역사가 슬로안(Sloan)의 표현에 따르면 '다소 점잖지 못할 정도로 서둘러' 이 여동생을 사촌 관계인 올덴부르크 공작 게오르그(Duke George of Oldenburg)에게 시집보냈습니다.  이것이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의 아름다운 우정의 실체였습니다. 


이렇게 서둘러 중매 결혼을 하긴 했으나 예카테리나 공주는 남편 게오르그 대공을 무척 사랑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혼한지 불과 2년만인 1811년, 나폴레옹은 마치 보복이라도 하듯 올덴부르그 공국을 프랑스 제국에 합병해버렸고, 올덴부르크 대공은 졸지에 실업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카테리나가 알렉산드르에게 어떤 존재인지 뻔히 알면서도 벌인 이 조치는 당연히 알렉산드르를 격분시켰고, 이는 결국 1812년 프랑스와 러시아의 전쟁이 벌어지는 한 원인이 됩니다.  여담이지만, 이 올덴부르크 대공은 든든한 매형 덕분에 볼가(Volga) 지방의 총독 자리를 얻었으나, 그만 곧장 티푸스에 걸려 1812년 사망하고 맙니다.  예카테리나는 슬픔에 잠겼으나 결국 1814~1815년 영국에 갔다가 거기서 뷔르템베르크 (Württemberg) 왕세자를 만나 운명적인 첫눈에 빠지는 사랑을 하게 됩니다.  당시 이 뷔르템베르크 왕세자는 이미 유부남이었는데, 사랑에 눈이 먼 이 불륜남은 바이에른 공주 출신인 부인과 이혼하고 예카테리나와 결혼하는 강수를 둘 정도로 대단한 열애를 했다고 합니다.  결국 예카테리나 공주는 1816년 왕세자가 즉위하면서 뷔르템베르크의 왕비가 되는데, 다른 여자 눈에 눈물 흘리게 한 죄값인지 불과 3년만에 폐렴 합병증으로 슈투트가르트에서 사망하고 맙니다.  이 공주님 이야기는 이 정도로 마무리하고 나폴레옹 쪽으로 돌아가 보지요.  





(예카테리나 공주님의 첫남편 올덴부르크 공작님입니다.  이분에 대해서는 '미남은 아니지만 예카테리나 공주가 무척 헌신적으로 사랑한 남자'라고 되어 있더군요.  흠...)



나폴레옹이 에르푸르트에서 괴테부터 시작하여 오스트리아 빈센트 장군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다양한 태도로 만나는 동안, 바로 인근 지역은 줄지어 프랑스로 귀환하는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 병사들의 군화 소리가 요란했습니다.  이렇게 지성과 예술이 넘쳐나는 에르푸르트 궁정에서도, 나폴레옹은 짬을 내 스페인의 지도를 펼쳐 놓고 참모들과 현재의 전선 상황과 스페인군의 전개 현황을 면밀히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뒤퐁 장군으로 대표되는 제1차 프랑스 점령군이 스페인에서 쫓겨난 이유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1) 훈련도 제대로 못받은 2진급 부대의 기용
2) 열악한 보급과 통신
3) 부르봉 왕가와 카톨릭 교회에 대한 광신적 충성으로 가득찬 스페인 민중의 저항

3번은 스페인의 특성이 그런 것이므로 어쩔 수 없다고 쳐도, 1번과 2번은 충분히 보완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사실 이 에르푸르트 회담 목적이 1번 문제의 해결을 위한 것이었고, 그 결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아우스테를리츠와 예나의 영웅들이 군화 소리도 우렁차게 프랑스를 관통하여 피레네 산맥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지시에 의해 프랑스 국내에서는 이 영웅들을 열렬히 환영하는 행사들이 열렸고, 나폴레옹이 특별히 주문한 다양한 애국적 노래가 작곡되어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또 지난 해에 어떨결에 스페인에 진주했다가 호된 꼴을 당하고 후퇴했던 신병들도 이제는 꽤 단련이 된 상태였습니다.  바일렌의 참패 이후 프랑스군 전체가 에브로 강 동쪽으로 물러나 집결한 것은 결과적으로 잘 내린 결정이었던 것이, 이렇게 좁은 지역에 프랑스군이 대규모로 집결하자, 점령지의 스페인 민중들도 감히 저항을 하지 못했고 덕분에 프랑스 신병들도 더 이상의 희생없이 훈련을 하며 병영 생활에 익숙해질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또 프랑스와의 접경 지대라서 보급과 통신도 원활했으므로, 지난 해의 어리버리 허약했던 신병들도 잘 먹어 잘 쉬어 스태미너를 키운, 제대로 된 병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호아퀸 블레이크 장군입니다.  다음 편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래도 제 몫은 하려고 노력한 장군입니다.)



지난 편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당시 프랑스군과 대치하고 있던 스페인군은 크게 좌-중-우의 3군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좌익, 즉 북쪽은 블레이크 (Joaquín Blake y Joyes) 장군 지휘 하에 3만2천 명 정도가 있었고, 중앙에는 바일렌 전투의 영웅인 카스타뇨스 (Francisco Javier Castaños) 장군 하에 2만5천이 있었습니다.  우익, 즉 남쪽은 팔라폭스(José de Palafox y Melci) 장군이 1만7천명의 병력으로 지키고 있었지요.  나폴레옹이 주목했던 것은 북쪽의 블레이크의 위치였습니다.  3군 중 가장 규모가 컸고, 거기에 로마나 후작의 북방 사단까지 합류하여 더욱 강력해질 스페인군 좌익이 너무 전방으로 돌출되어 고립 포위되기 딱 좋은 위치였던 것입니다.  나폴레옹 같은 대가의 눈에, 스페인군의 배치나 운용은 너무나 아마추어스러웠습니다.  아무런 경험도 전문지식도 없는 사람들이 스페인군을 지휘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고, 또 그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아마 그래서 이런 병신들에게 바일렌에서 패전한 뒤퐁 장군을 더더욱 용서할 수 없었나 봅니다.




(바일렌 전투의 영웅 카스타뇨스 장군입니다.  웰링턴 공작이 스페인 장군들 중에서 존중했던 것은 로마나 후작과 함께 이 양반, 딱 2명 뿐이었다고 하는데, 글쎄요, 바일렌 전투 이후로 뭐 딱히 눈에 띄는 활약을 하신 이야기는 눈에 띄지 않습니다.  아마 우리가 영국 측에 편향된 역사만 읽어서 그럴 거에요.)




가령 중군을 맡고 있던 카스타뇨스 장군은 바일렌에서 뒤퐁 장군의 항복을 받으면서 스스로 밝혔듯이, 한번도 실전 경험이 없던 노신사에 불과했습니다.  바일렌 전투의 승리는 프랑스군의 자충수 덕분이었지 사실 카스타뇨스가 뭔가 뛰어난 전략이나 지휘력을 발휘한 덕분은 아니었지요.  좌익을 맡은 블레이크 장군은 그나마 미국 독립 전쟁 및 프랑스 혁명 전쟁 등에 참전하여 부상을 당하기도 하는 등 나름 경험이 있는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러나 경험이 있다고 실력이 있는 것은 아니라서, 그의 경력은 그저 그런 수준이었을 뿐, 특별히 뛰어난 전공을 세운 바는 없었습니다.  우익을 맡고 있던 팔라폭스(José de Palafox y Melci)는 약간 지면을 할애할 가치가 있는 인물이긴 했습니다만, 역시 경험있고 유능한 장군은 아니었습니다.





(사라고사 공작 팔라폭스의 초상입니다.  고야의 작품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짧게 다루자면, 팔라폭스는 사라고사(Zaragoza) 출신의 아라곤 귀족 가문의 아들이었고, 1808년 당시 불과 28세의 청년에 불과했습니다.  이렇게 새파란 청년에게 경험이 있을리 만무했고, 그다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것을 보면 짐작하시듯이, 별다른 천재성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귀족 청년이 어떻게 스페인 3개 야전군 중 하나의 총사령관을 맡은 것은 그가 보여준 열정과 애국심이 남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지난해 페르난도 7세가 나폴레옹의 초대에 응해 바욘으로 천진난만하게 떠날 때 그를 보좌했던 위관급 초급 장교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페르난도 7세가 발렝세 성에 억류되자 그의 탈출을 도모하다가 결국 자신만 탈출하여 스페인으로 돌아왔습니다.  한동안 실의에 빠져 지내던 그는 반프랑스 봉기가 일어나자 앞장서서 그에 참여했고, 사라고사 시민들은 그 고장 출신의 정통 귀족이자 페르난도 7세에 대한 충성심이 입증된 그를 지도자로 추대했습니다.  다른 귀족들은 비겁하게 꼬리를 뺐던 것이지요.  그가 주도한 사라고사 방어전은 그야말로 치열하고 처참한 것이었습니다.  압도적인 프랑스 포위군에 맞선 그 전투에서, 사라고사 시민들은 팔라폭스의 호소에 부응하여 성벽이 무너진 뒤에도 무려 9일 동안이나 골목길 하나하나에서 맹렬하게 저항했고, 결국 프랑스군은 이 살벌한 도시를 포위한지 61일 만에 철수해야 했습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그에게 사라고사를 포함한 남부 지역 방위군의 최고 사령관직이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1808년 8월의 제1차 사라고사 포위전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열혈 귀족 청년 팔라폭스가 보여줄 수 있는 한계였습니다.  곧 이어 나폴레옹의 재침이 시작되자, 그저 열정 외에는 가진 것이 없던 팔라폭스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고, 그는 다시 사라고사로 철수하여 제2차 사라고사 포위전을 지휘했습니다.  제2차 포위전은 결국 함락으로 끝났고, 병상에 누워있던 그도 포로가 되어 프랑스로 끌려갔습니다.  그것이 그의 저항전의 끝이었습니다.  프랑스가 패퇴하면서 1813년 12월에 페르난도 7세가 귀환할 때 즈음에야 석방된 그는 아라곤 총독직에 임명되었으나, 사실 자신은 그런 그릇이 못된다며 물러나는 겸손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행동은 그 뒤에 나왔습니다.  1820년 헌법 수호를 위한 쿠데타가 일어나 페르난도 7세가 억류되자, 그를 호위하는 왕실 근위대장 역을 맡은 것입니다.  즉, 사실상 국왕을 포로로 감시하는 간수 역할을 하며 헌법 수호의 편을 든 것이지요.  물론 페르난도 7세가 복권되면서 그는 모든 지위와 작위를 빼앗기고 다시 낙향해야 했습니다.  나중에 진보주의자들이 집권한 크리스티나 여왕 때 그는 사라고사 공작의 작위를 받고 다시 정무에 복귀하긴 했습니다.  보시다시피 훌륭한 애국자이자 신념있는 진보주의자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능력있는 지휘관은 절대 아니었지요.




(1809년 2월 제2차 사라고사 포위전입니다.  자애로운 성모 마리아 상 아래서 인간들이 죽고 죽이는 모습이 인류의 모습을 말해주네요.)




이런 아마추어급 지휘관들이 지휘하는 스페인군의 방어진이 제대로 된 것일 리가 없었습니다.  가장 나빴던 점은, 이 3개군은 각각 서로 다른 지방 출신으로 뭉쳐진 집단이라서, 서로 간에 협동 작전이나 작전 조율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작전 계획은 이런 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전방으로 크게 노출된 블레이크의 본대를 순식간에 포위시켜 격파한 뒤, 뻥 뚫린 적의 좌익을 통해 밀물처럼 남쪽으로 우회하여 적의 중군과 우군을 차례차례 격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적의 3개 야전군 전체를 궤멸시키고 난 뒤에는, 무방비 상태가 된 마드리드와 기타 주요 도시들을 무혈 점령하여 스페인 민중의 저항 의지를 꺾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신속한 작전이 중요했습니다.  이 스페인 전쟁은 이겨도 본전인 게임이고, 길게 끌 수록 프랑스에게 유리할 것이 전혀 없었거든요.  게다가 오스트리아의 재무장은 매우 신경쓰이는 문제였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재무장은 결국 바일렌과 신트라의 패전이 계기가 된 일이므로, 스페인을 순식간에 격파하고 재점령하여 그랑 다르메의 위용이 건재하다는 것을 입증한다면 오스트리아도 제풀에 겁을 먹고 꼬리를 말아 쥘 가능성이 컸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계획은 전혀 뜻밖의 사건이 일어나면서 대위기에 봉착합니다.  과연 어떤 일이었고 나폴레옹은 그를 어떻게 극복했을까요 ?  그 이야기는 다음편에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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