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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광복절 특집 - 스페인의 광복군, 북방 사단의 귀국 이야기

by nasica-old 2015.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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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은 좀 짧습니다.  워낙 짧아서 뺄까 생각했는데, 때마침 광복절인데다 친일파니 뭐니 이야기도 있고 해서 그냥 넣었습니다.

지난 편에서는 1808년 7월 바일렌 (Baylen)의 패전으로 인해 프랑스군이 에브로(Evro) 강 동쪽까지 물러나고, 포르투갈을 점령하고 있던 쥐노(Junot)마저도 영국군에게 축출당하는 등,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나폴레옹의 입지가 궁지에 몰리는 모습까지를 보셨습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스페인은 여러가지 면에서 나폴레옹에게 큰 골치를 안겨주는데, 이번에는 스페인으로 인한 말썽이 엉뚱하게도 저 춥고 황량한 덴마크 해변에서 터져 나옵니다.



(이 냉소적인 눈빛의 스페인 귀족이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웰링턴의 존중을 받은 거의 유일한 스페인 장군인 로마나 후작입니다.)

기억하실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지난 '폭풍우, 스페인을 가로지르다' http://blog.daum.net/nasica/6862597 편에서 로마나 후작(Marquis de la Romana, Pedro Caro y Sureda)의 북방 사단(Division del Norte) 이야기를 언급한 적이 있었지요.  이 1만4천 병력의 부대는 핫바지 스페인 정규군 중에서는 그래도 가장 정예 사단이라고 뽑아서 나폴레옹에게 '미흡하나마 원하시는 곳에 쓰시지요' 하며 고도이 공작이 바친 사단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처음에 이 사단을 브륀(Brune) 원수 밑에 두고 스웨덴령 포메라니아 등 발트해 연안 공략에 활용하다가, 나중에 스페인 침공을 앞두고는 덴마크의 여러 섬에 수비 병력으로 분산 배치했습니다.  이런 강력한 부대가 하나로 뭉쳐 있다가 혹시 본국에서 사단이 난 소식을 전해 듣고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곤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적국과 싸워 이기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만, 가장 좋은 것은 적국의 동맹군을 꼬드겨 배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적과 싸워 1개 사단을 박살내는 승리를 거둔다고 하더라도, 아군도 피해를 입어 아군 전력이 약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적군 중 일개 사단이 배신하여 우리쪽으로 돌아선다면, 적 1개 사단이 줄어듬과 동시에 아군 1개 사단이 늘어나는 셈이 되니까요.  영국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스페인에서 도스 데 마요 (Dos de Mayo, 5월 2일 마드리드 봉기) 사건이 발생하자 곧 로마나 후작의 북방 사단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영국은 이 부대들이 발트해 연안에 주둔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당시 발트해는 영국 해군의 놀이터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만약 정말 스페인 사단이 원한다면 해상 수송은 상대적으로 쉬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조국에서는 독립 투쟁하는 민중들이 일본 헌병들에게 참혹하게 고문받고 처형되는데, 정작 본인일본 제국의 영광과 본인의 출세를 위해 일본군 내에서 복무하고 있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라 사정이 안 좋을 때 매국노는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애국자들의 말로가 그리 좋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적진 한 가운데서 배신을 한다는 것은, 아무리 사단 단위의 부대라고 해도 목숨을 건 모험이었습니다.  영국은 이들이 그런 위험을 무릅쓸 의향이 있는지 먼저 파악하고, 그리고 만약 있다면 그들과 어떤 식으로 연락을 해야 할지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아직 MI6가 창설되기 훨씬 전이었고, 또 007이나 이단, 본 같은 스파이는 정말 영화 속에서나 나오는 인물들입니다.  당시 첩보전이라는 것은 사실 별 것이 없었고, 적진 내의 누군가를 매수하거나 양쪽 진영을 오가는 밀수꾼들을 고용하거나 하는 정도였습니다.  돈에 따라 움직이는 그런 믿음직 스럽지 못한 인물들에게 이런 위험한 임무를 맡길 수는 없었습니다.  특히 이미 나폴레옹의 악명높은 비밀 경찰이 스페인 사단을 감시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습니다.  또, 당시 스페인 반란은 주로 중하류층의 민중이 주동이 된 것이었고 장교단을 구성하는 스페인 귀족들 중 대부분은 아직 프랑스 측에 협조하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모든 공식 권한이 프랑스와 그 꼭두각시들에게 있는 상황에서 반 프랑스 활동을 한다는 것은 자신과 가족의 계급과 재산을 깡그리 잃을 수 있는 위험한 반란 행위였으니까요.

그렇게 입맛만 다시고 있는 영국 당국에게 마치 하늘에서 내린 듯한 인물을 소개해준 것은 다름아닌 아서 웰슬리, 즉 훗날의 웰링턴 공작이었습니다.  웰슬리 장군이 비메이로(Vimeiro) 전투로 연결되는 포르투갈 원정을 떠나기 직전에 '이런 사람이 있으니 연락해보라'며 알려준 것이지요.  그 사람이란 로버트슨(James Robertson)이라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카톨릭 사제였습니다.  이 양반은 주로 북부 독일 지역에서 활동하다 당시에는 영국으로 돌아와 어느 귀족 집안의 가정교사로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코틀랜드 사람이자 카톨릭 사제였으니, 카톨릭을 박해하는 잉글랜드에 대한 반감도 강했으나, 당시 유럽 전체를 뒤흔들던 나폴레옹의 독재 정권이 잉글랜드보다 더 악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영국 입장에서는 이런 '건전한' 사상을 가진 카톨릭 사제가 최고의 적임자였습니다.   스페인 군은 모조리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으니, 그들의 신임을 얻으려면 카톨릭 사제만한 인물이 없었거든요.

 

 

 

 

(패트릭 오브라이언의 7번째 오브리-머투어린 시리즈인 Surgeon's Mate에서 이 로마나 사단의 탈출기가 주요 내용으로 다루어집니다.  이 소설의 두 주인공 중 하나인 스티븐 머투어린이 바로 아일랜드 출신의 박학한 의사인 영국 해군성 첩보원이쟎습니까 ?  게다가 어머니가 카탈로니아 사람이라 스페인말도 자유자재로 했으니, 이보다 더 적절한 '로버트슨' 배역이 없었을 것입니다.   로마나 후작은 이 소설 속에서 둘라스트레트 d'Ullastret 대령으로 나옵니다.  실제 로마나처럼 둘라스트레트 대령도 나중에 요절하게 되는데, 이때 스티븐에게 엄청난 양의 금괴를 유산으로 물려주게 됩니다.)

 

로버트슨은 당시 발트해에서 알게 모르게 맹활약하던 밀수선 중 한척을 고용하여 덴마크 본토(유틀란트 Jutland 반도)와 젤란트 섬(Zealand, 코펜하겐이 있는 덴마크의 가장 큰 섬) 사이의 푸넨 섬(Funen)의 니보르그(Nyborg) 항구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나 후작을 찾아갑니다.  이때 로버트슨은 발트해에서 장사를 하는 밀수꾼으로 위장을 하고 입항을 했는데, 실제로 그의 배에는 금수품인 담배와 코코아가 잔뜩 실려있었습니다.   이 열대 작물들은 당시 영국 해군 때문에 영국의 카리브해 식민지에서만 올 수 있었으므로 영국의 상품이었고, 따라서 금수품이었습니다.  (당시 어떤 물품이 언떤 이유로 금수품이 되었는지는 지난 '돈은 총보다 무섭다 - 대륙 봉쇄령' http://blog.daum.net/nasica/6862565 편을 참조)  그러나 오래전부터 남미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어 이런 기호품에 익숙해져 있던 스페인 사람들은 유럽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이것들을 절실하게 원하고 있었으므로, 담배와 코코아를 싣고 왔다는 말에 무조건 입항을 허락한 것이지요.  

 

 

 

(스페인에서의 인기있는 아침 식사가 기름에 튀긴 추러스를 진한 코코아에 찍어 먹는 것이라는 생각하시면 당시 스페인 장교들과 병사들이 황량한 발트해 해변에서 얼마나 저 뜨거운 코코아를 그리워 했을지 이해하실 것입니다.  소설 Surgeon's Mate 편에서는 담배와 코코아가 아니라 담배와 브랜디, 와인으로 품목이 바뀝니다.   소설 속에서는 임시 변통으로 영국 발트 함대 내에 있는 담배와 브랜디, 와인을 박박 긁어모아 밀수품 화물을 마련하는 것으로 나오거든요.)

 


마침내 로마나 후작을 만난 로버트슨은 어렵게 자신의 진짜 목적을 털어 놓습니다.  처음부터 로마나 후작이 덥썩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찾아온 로버트슨이 실제로는 로마나 후작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나폴레옹의 비밀 경찰일 수도 있었고, 또 스페인 사단 내부만 하더라도 친프랑스파 귀족 장교들이 꽤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상황이 복잡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이 제안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영국은 전통적인 스페인의 적국이었으므로 더욱 미묘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중국군이 한국에 쳐들어왔는데 일본군이 도와주겠다고 손을 내민 격이니까요.  하지만 로마나 후작을 비롯한 대부분의 병사들은 나폴레옹을 혐오하는 애국파였기 때문에, 스페인으로 돌아가 저주받을 프랑스놈들에게 한방 먹여줄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습니다.  곧 로마나 후작은 로버트슨을 통해 전달된 영국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덴마크의 지도입니다.  유틀란트 반도와 코펜하겐이 있는 젤란트 섬 사이에 오덴스가 있는 섬이 로마나 후작이 주둔하고 있던 푸넨 섬입니다.)

 


하지만 정말 탈출이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로버트슨이 다시 덴마크-프랑스 측의 순시선을 피해 바깥 바다의 영국 함대에 합류하는 것도 어려웠고, 또 이런 일을 염려한 프랑스 측이 이미 스페인 사단을 연대별로 조각 내어 덴마크 여기저기 섬에 분산 배치했기 때문에 이들을 한 곳에 모으는 것 자체가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그 중 일부는 노골적으로 친프랑스파 장교들이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나온 묘안은 때마침 그 지역 총사령관인 베르나도트(Bernadotte) 원수가 스페인 사단 전체의 병사 하나하나에게 '새로운 스페인 국왕 조제프에게 충성을 서약하라'고 요구한 것을 역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의식을 위해 전체 스페인 병력을 한 곳에 모으겠다고 제안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 묘안은 젤란트 섬에 주둔하고 있던 일부 스페인 부대가 '나폴레옹의 형이 스페인 국왕이라니 이게 무슨 개뼉다구같은 소리냐' 라며 분개하여 성급한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실패했습니다.  이렇게 7월 31일 반란을 일으킨 스페인 병사들은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가진 주변 덴마크군에게 곧 제압 당해 버렸지요.

주춤하고 있던 로마나 후작에게 곧 이어 스페인 본토에서도 사람이 와서 스페인의 참혹한 상황을 전해주며, 바깥 바다에 영국 해군 함대가 와서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도 함께 전해주었습니다.  로마나 후작은 곧 여기저기에 은밀하게 사람을 보내 각지의 부대들에게 자신이 주둔하고 있던 푸넨 섬(Funen)으로 재주껏 이동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유틀란트 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일부 부대는 작은 조각배 같은 것들을 구해 푸넨 섬으로 건너오는 등 전체 1만4천의 병력 중 약 9천 정도가 니보르그 항에 모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안 킨델란(Juan Kindelán) 등 친프랑스파가 지휘권을 쥐고 있던 일부 부대들은 여기에 합류하지 못했습니다.  한 열혈 애국자 대위의 지휘 하에 부대가 이동을 시작하자 이 친일파 아니 친불파 킨델란이 말을 달려 인근 프랑스군에게 밀고를 하는 바람에 결국 덴마크-프랑스군에게 저지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장군의 명을 어기고 부대를 이끌고 탈출하려던 대위는 자살로 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애국은 남는 장사가 아닌 것 같습니다.  뒤에 이야기할 기회가 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목숨을 바쳐 프랑스와 투쟁했던 대부분의 스페인 애국자들은 나중에 프랑스의 속박에서 돌아온 페르디난드 국왕에 의해 처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습니다.

 

 

 

 

(아직 전근대적인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해던 스페인 민중이 당시 충성을 다해 싸웠던 것은 이 페르디난드 7세를 위해서였습니다.  나폴레옹 몰락 뒤 뜨거운 환영 속에 돌아온 이 못난이 왕은 조국을 위해 싸웠던 애국자들이 헌법이라는 것을 도입해 놓은 것을 보고 불같이 화를 내며 국내의 종북친노 세력을 잔혹하게 탄압했습니다.  나중에는 프랑스군까지 끌여들여 이들을 소탕했으니, 우리로 따지자면 이승만이 민주 시위 진압하느라 일본군을 끌어들여 과거 독립 투사들을 때려잡은 셈이지요.  그의 찌질함과 잔혹함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페르디난드 7세를 지원하여 스페인 반란을 진압한 프랑스군 지휘관 앙굴렘 공작이 페르디난드가 하사한 훈장을 거부할 정도였습니다.  프랑스와의 투쟁 속에서 페르디난드 7세 만세를 외치며 죽어간 용사들이 가련합니다.  그를 만나보고 이런 멍청한 왕족은 처음이라며 고개를 저었던 나폴레옹도 나중에 그 사태를 보았다면 아마 쓴 웃음을 지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9천 정도의 병력이 푸넨 섬에 집결하자, 이젠 무서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 섬에 주둔하고 있는 덴마크군보다 수적 우세를 가질 수 있었거든요. 이들은 즉각 항구를 무력으로 접수했고, 덴마크군은 눈치껏 이를 애써 못 본 척 했습니다.  항구에 떠 있던 덴마크 해군의 소형 브릭(brig)함 2척은 스페인 육군 병사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이들을 해상에서 저지하겠다고 버티고 있다가 영국 해군 프리깃함의 공격을 받고 제압되었습니다.  결국 로마나의 스페인 병력은 8월 21일 3척의 전열함을 앞세운 영국 해군 함대에 분승하여 일단 스웨덴 남쪽의 항구도시 고텐부르그(Gothenburg)로 갔다가, 거기서 37척의 수송선으로 옮겨타고 꿈에도 그리던 스페인으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실제로 스페인에 도착한 것을 덴마크를 탈출한지 약 1.5개월 후인 10월 11일,  땅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전열함들이 크기는 해도, 8~9천명을 싣고 장기간 항해하기는 어려웠겠지요.  고텐부르그는 지도 위쪽에 보입니다.)

 

 

 

 

 

(로마나 후작의 사단을 성공적으로 빼내온 발트해 함대의 지휘관 키츠 Richard Goodwin Keats 제독입니다.  소설 Surgeon's Mate에서는 키츠 제독이 아닌, 역시 다른 실존 인물인 소머레즈 제독이 그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이때 매국노 귀족 장교들의 밀고로 탈출에 실패한 스페인 병사들은 훗날 조제프 국왕의 부대라는 이름으로 재편되어 고향 땅을 못 밟고 계속 외국을 전전해야 했습니다.  그것도 바로 자신들의 탈출을 고자질했던 바로 그 매국노 킨델란 장군의 지휘 하에서요.  혹시 이들도 그 지휘관처럼 친프랑스 매국노파였는가 하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로마나의 반란 사건이 있기 전, 킨델란이 베르나도트 원수의 명에 따라 조제프 국왕에 대한 충성 선서를 하게 할 때, 병사들은 모두 조제프 대신 쫓겨난 페르디난드의 이름을 부르며 충성 맹세를 했거든요.  킨델란과 그 휘하 장교들은 이를 애써 못 들은 척 해야 했지요.  병력이 부족했던 허수아비 왕 조제프는 이 병력이라도 스페인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으나, 나폴레옹이 볼 때 이들은 스페인 땅을 밟는 즉시 모반을 하여 저쪽 편에 붙을 것이 뻔했으므로 스페인으로 보내는 것은 거부했습니다.  이들은 결국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길에도 끌려갔다가 큰 피해를 입는 등 갖은 고생을 다 해야 했습니다.  이들은 전세가 악화되자, 기회가 닿는 대로 러시아군에게 즉각 항복하여, 남은 3천~4천은 결국 영국 해군의 수송편에 몸을 의탁하여 근 5년 만에 거지꼴로나마 고향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에 갈 곳이 없어진 킨델란은 차마 스페인으로 돌아가지는 못했고, 결국 파리에 남아서 여생을 보내야 했습니다.  

 

 

 

(El juramento de las tropas del Marqués de la Romana, 즉 로마나 후작 부대원들의 맹세라는 작품입니다.)



한편, 조국을 위해 위험과 고생을 무릅쓰고 영웅적인 귀향을 택한 애국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금의환향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대대적인 환영이었을까요 ?  그런 것을 베풀어 주기에는 스페인 현지 사정이 너무 엉망이었습니다.  당시는 아직 나폴레옹의 재침공이 시작되기 전이라서 아직 여유가 있는 편이긴 했습니다만, 아직 스페인 동쪽 국경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프랑스군과 대치하기 위해 스페인군은 크게 3개군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좌익, 즉 북쪽은 블레이크 (Joaquín Blake y Joyes, 조상이 아일랜드 출신이라 이름이 이렇습니다) 장군 지휘 하에 3만2천 명 정도가 있었고, 중앙에는 바일렌 전투의 영웅인 카스타뇨스 (Francisco Javier Castaños) 장군 하에 2만5천이 있었습니다.  우익, 즉 남쪽은 팔라폭스(José de Palafox y Melci) 장군이 1만7천명의 병력으로 지키고 있었지요.  

 

 

 

(로마나 사단이 상륙한 산탄데르 항의 위치입니다.  바로 그 오른쪽에 빌바오가 보입니다만, 저 인근에 르페브르 Lefevre가 지휘하는 강력한 프랑스군이 주둔하여 블레이크 장군의 스페인군과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3개군 사이에 전혀 협력이나 조율된 작전 같은 것이 없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지방색이 강하고 지방분권적인 스페인의 특성 때문이었습니다.  대부분 자기 땅만 지키면 된다는 생각이었고, 특히 다른 지방 고위층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로마나와 그의 8천~9천에 이르는 병력이 상륙한 것은 블레이크 장군이 지키는 지역인 북쪽 해안 산탄데르(Santander) 항구였습니다.  나폴레옹은 바일렌 전투와 비메이로 전투의 치욕을 갚고 다시 스페인을 짓밟기 위해 대대적으로 병력을 스페인 동쪽 지역에 모으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때 상륙한 로마나의 병력은 가뭄 속의 단비 같은 존재였지요.  이들은 즉각 프랑스군과 대치하는 블레이크 장군의 전선으로 출발해야 했습니다.  기병대는 말을 모두 두고 떠나와야 했기 때문에 엑스트레마두라(Extremadura)까지 도보로 이동하여 거기서 말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한편 로마나는 이들 병력과 함께 움직이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스페인 귀족층의 정서상, 고위급 장군이자 무려 후작 나으리셨던 로마나가 냄새나고 초라한 수송선을 타고 일반 병사들과 함께 항해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거든요.  그는 영국 측과 이런저런 회담도 거친 뒤, 별도 영국 해군 선박 편으로 10월 19일 코루나 (La Coruña)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11월 10일에야 산탄데르 항구에 육로로 도착할 수 있었는데, 이곳에서 그는 도착 즉시 블레이크를 대신하는 스페인 좌익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의 명성과 신분에 걸맞는 직위였지요.  

하지만 세상사가 그리 만만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총사령관직에 오르던 바로 그날, 그의 군대는 그야말로 개박살이 나고 있었습니다.  바로 나폴레옹이 분노의 스페인 침공 시즌 2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편에서 보시도록 하시지요.

 

 

(감히 나에게 반항을 ?  허참 기가 막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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