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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Line vs. Column - 비메이로 (Vimeiro) 전투

by nasica-old 2015.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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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는 1808년 7월 30일 포르투갈의 몬데고 (Mondego) 만 앞바다에 아서 웰슬리, 즉 미래의 웰링턴 공작이 지휘하는 영국군을 실은 영국 함대가 나타나는 것까지를 보셨습니다.  난리는 스페인에서 났는데 왜 이들은 포르투갈에 나타난 것일까요 ?  또 웰슬리의 임무는 무엇이었을까요 ?

먼저 당시 스페인의 상황을 다시 되짚어 보시지요.  압도적인 프랑스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리기만 하던 스페인은 발렌시아 (Valencia)와 사라고사 (Zaragoza) 공방전에서 프랑스 포위군을 막아내며 스페인 민중의 힘을 보여주었고, 스페인 정규군도 1808년 7월 16~19일에 벌어진 바일렌 (Bailen) 전투를 통해 반격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2선급 부대라고는 해도 2만명 규모의 군단 하나가 통째로 적에게 포로로 잡힌 프랑스군은 크게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프랑스군 총사령관 사바리는 전체 프랑스군을 이끌고 마드리드에서 물러나 에브로 (Ebro) 강 동쪽으로 후퇴한 뒤, 여기서 다시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에브로 강 동쪽은 프랑스와의 국경 지대 끝자락 정도로서, 프랑스군은 이제 스페인 전역에서 완전히 밀려나 한쪽발만 디디고 있는 셈이 된 것입니다.  이제 그 한쪽발마저 밀려나가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였습니다.




(사라고사 포위 공방전입니다.  사라고사는 이후에도 다시 프랑스군의 포위 공격을 받게 되고, 결국 함락되는 비운을 겪습니다.)




그러나 스페인의 반격은 그 시점을 기하여 거짓말처럼 딱 멈추고 말았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프랑스군도 약간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였는데, 그 근본적인 원인은 프로이센이나 오스트리아와는 달리 프랑스가 스페인을 쉽게 굴복시킬 수 없었던 바로 그 이유였습니다.  즉, 지방 분권적인 스페인의 뚜렷한 지방색 때문이었지요.  프로이센이나 오스트리아는 단 1~2번의 대규모 회전을 통해 주력 야전군을 분쇄하고 나면 온나라가 점령군에게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그러나 스페인은 서로 대립하는 지방 정부들 때문에 애초에 그런 대규모 중앙 야전군이 존재하지도 않았지요.  그러다보니 초기 수도 점령은 쉬웠으나, 나중에는 각 지방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저항군을 분쇄하느라 프랑스군 자체가 분산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결국 프랑스군의 고질적인 보급난과 맞물려 바일렌 전투의 참극을 낳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강점을 보이던 스페인의 지방 분권 시스템은 프랑스군이 궁지에 몰려 후퇴하자 당장 그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각 지방에서 자발적으로 생겨난 임시 자치 조직인 훈타(junta)들은 자기 동네에서 프랑스군이 물러가면 그만이라는 태도를 보였고, 각 지방의 병력들을 통합하여 대규모 중앙 병력을 만드는 것에 대해 반대를 했던 것입니다.  각 지방 정부들도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마드리드에 일종의 연합 훈타를 만들기도 했으나, 그래도 통합은 어려웠습니다.  이러는 사이 프랑스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스페인을 대대적으로 침공할 준비를 하게 됩니다.





(스페인 각 지방간의 갈등에 대해서 우리도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의 엘 클라시코를 통해 어느 정도 느끼고 있습니다.)



이런 훈타들 중 몇몇은 대프랑스 항쟁이 시작되던 초기에 당시 적국이던 영국에 제멋대로 사절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각 훈타들이 바랬던 것은 무기와 군자금이었지 영국군 병력을 파견해달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영국과 스페인은 드레이크와 스페인 아르마다 시절부터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원수지간이었거든요.  영국은 몇몇 군사 사절단을 스페인에 파견하여 현지 상황을 조사했습니다만, 특히 바일렌 전투 이후 각 훈타들은 영국군의 상륙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결국 영국군은 스페인에 제멋대로 상륙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한편, 스페인이 프랑스에 대한 저항으로 들끓어 오르자 상황이 가장 난처해진 것은 바로 포르투갈을 점령하고 있던 쥐노 (Junot)였습니다.  애초에 포르투갈까지 쳐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스페인이 프랑스의 동맹국이었으므로 후방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스페인으로부터 병력 지원까지 받을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포르투갈 왕정과 주요 귀족들이 국민을 내팽개치고 지들만 살겠다고 귀중품만 챙겨 저 멀리 브라질로 도망을 가버린지라, 프랑스 점령군에 대한 저항을 이끌 지도자가 없어 포르투갈은 프랑스에 대한 저항이 거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도스 데 마요 (Dos de Mayo, 5월 2일 마드리드 봉기) 사건 이후 본격적인 대불 항쟁이 시작되자, 당장 포르투갈에서 프랑스군을 지원하던 스페인군이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포르투갈 제2의 도시인 오포르토 (Oporto)를 점령하고 있던 벨레스타 (Belesta) 장군의 스페인 사단 6천명이 고향인 스페인 갈리시아 (Galicia)를 프랑스군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떠나 버린 것입니다.  벨레스타은 바로 어제까지의 동맹군이던 소수의 프랑스군을 포로로 잡아 오포르토 시민들에게 넘겨준 뒤 '프랑스의 압제에 저항하라'는 연설과 함께 떠났는데, 오포르토 시민들은 '포르투갈 왕정이나 프랑스 점령군이나 다를게 뭐냐'라며 전혀 프랑스에 대한 저항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리스본의 쥐노에게 편지를 보내 '상황이 이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프랑스 점령군에게 충성한다'라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쥐노는 리스본에 있던 7천명의 스페인군을 불시에 습격하여 무장해제 시키고 리스본 항구의 감옥선에 가둬버렸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쥐노는 일급 야전 지휘관이라고 평가받기에는 많이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사람의 능력 평가는 잘 하는 편이었다는 반증이지요.)



하지만 포르투갈 내의 스페인군 문제를 해결했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스페인이 반란에 돌입하면서, 당장 제일 중요한 프랑스 본국과의 연락로가 끊긴 것입니다.  이제 보충병력도, 무기도, 명령서조차 받아볼 수 없게 된 것이지요.   다행히 왕과 귀족들이 버리고 간 포르투갈인들이 스페인처럼 열정적인 대불 투쟁에 나서지 않아 당장 문제가 급박하지는 않았으나, 이대로 고립된 상태로 그냥 있는 것은 대책이 없어 보였습니다.  쥐노와 그 휘하 장군들은 남은 병력을 모두 모아 프랑스 본국을 향해 스페인을 가로질러 뚫고 나갈 것까지도 심각하게 고려해보았으나, 역시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로 기각되었습니다.

프랑스군 수뇌부가 이렇게 망설이는 사이, 마침내 포르투갈 민중들도 대불 항쟁에 나서게 됩니다.  그러나 변변한 지도자도 없고 특히 무기가 없었던 포르투갈 민중의 반란은 프랑스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큰 희생만 낼 뿐이었습니다.  포르투갈은 스페인에 비해 좁고 가난한 땅이다보니, 쓸 만한 무기고는 리스본에만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7월 29일에 벌어진 에보라 (Évora) 전투에서 루아송 (Louis Henri Loison) 장군의 프랑스군은 포르투갈 민병대 뿐만 아니라 비무장 주민들도 여자와 아이를 가리지 않고 마구 학살하여 포르투갈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루아송 장군입니다.  그의 잔혹 행위는 비교적 잠잠하던 포르투갈 민중을 일깨우는 촉매가 되었습니다.)



이런 난장판 속에서 영국군의 상륙지는 자연스럽게 포르투갈로 정해졌습니다.  특히 단 한방에 포르투갈 전체를 해방시키자면 프랑스군이 집결해있던 리스본을 쳐야 했는데, 그러다보니 리스본에서 비교적 가까운 해변인 몬데고 (Mondego) 만 앞바다에 영국군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7월 30일에 나타난 영국 함대는 당장 다음날부터 롱보트 (long boat)니 바지선 (barge)이니 졸리 보트 (jolly boat)니 하는 모든 보트들을 동원하여 병력과 보급품을 상륙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약 1만4천의 병력과 그 장비, 보급품을 상륙시키는데 무려 8일이나 걸렸습니다.  1798년 7월, 나폴레옹이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여 6천명을 상륙시키는데 8시간이 걸렸던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오래 걸린 셈이지요.  그만큼 보급품과 장비가 많았다는 뜻입니다.

당시 상륙군에 소속되어있던 해리스 (Benjamin Randell Harris)라는 이름의 제95 라이플 연대 소속 유격병이 있었습니다.  이 양반은 연대 내의 구두 수선공으로도 활약했고 나중에 전역한 이후에는 런던에서 구두 수선공으로 일했습니다.  이 양반이 우연히 다시 만난 부대 장교의 권유로 자신의 전쟁 경험담을 책으로 냈는데, 이 책 내용에 따르면 당시 몬데고 만에서 내륙으로 행군했을 당시 해리스가 매고 갔던 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용물을 채운 배낭 위에 돌돌 만 방한코트 (great-coat), 담요, 야전용 남비, 망치와 받침대로 쓸 넓적한 돌판 및 구두 수선용 가죽을 잔뜩 넣은 잡낭 (haversack), 3일분의 건빵과 염장 쇠고기, 물을 채운 수통, 그리고 손도끼와 라이플 소총, 80발의 탄약을 넣은 탄약 주머니"




(당시 라이플 병사들이 가지고 다니던 80발 들이 탄약 주머니입니다.  일반 머스켓 소총수는 60발을 가지고 다니도록 되어 있었으나, 라이플 병사들은 80발이 표준 휴대량이었습니다.)



해리스 본인의 묘사에 따르면 그 짐은 당나귀도 휘청거릴 무게였다고 하는데, 젊은 시절 그런 무게를 지고 다닐 정도로 튼튼했다는 것이 스스로도 자랑스럽다고 회상했습니다.  이런 무게에 짓눌린 채로 8월 11일 하루를 꼬박 강행군했는데, 그 거리는 고작 19km로서, 역시 프랑스군의 평균인 24km에 훨씬 못 미쳤습니다.  이렇게 고생을 한 영국군에게는 다음날 생각지도 않은 선물이 주어졌습니다.  인근 포르투갈 농부들이 해방군으로 온 영국군을 환영하기 위해 오렌지며 포도, 멜론 등 온갖 과일을 풍성하게 가져온 것입니다.  특히 해리스가 포함된 제95 라이플 연대의 4개 중대에는 송아지 1마리가 특별히 따로 선물되어 이것으로 영국군 라이플 유격병들은 따로 잔치를 벌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지역민의 환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원정군 사령관인 웰슬리 장군의 마음은 그리 밝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에 그에게 도착한 본국으로부터의 소식이 문제였습니다.  즉, 새로 들어온 정보를 종합해보니, 쥐노 휘하의 프랑스군 수가 예상보다 훨씬 많은 약 2만4천에 달한다는 소식과 함께, 그러기 때문에 추가 병력을 파병한다는 것이었지요.  당장 웰슬리가 거느린 1만4천 외에 무어 (Sir John Moore) 장군의 스웨덴 방면군과, 지브랄타에서 올라올 병력까지 합해 1만5천이 추가될 예정이었지요.  그건 좋은 소식이었으나, 문제는 그렇게 큰 병력을 웰슬리와 같은 연소한 장군에게 맡길 수 없으므로 새로운 사령관으로 지브랄타 사령관인 달림플 (Sir Hew Dalrymple) 장군과 그 부관 역할을 할 장군들이 우르르 몰려 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웰슬리의 서열은 대번에 6위로 밀려날 판이었습니다.   야심만만한 그는 그렇게 자신의 지휘권을 빼앗기기 전에 결정적인 전투를 벌이고 싶었습니다.  특히, 영국군의 상륙 소식을 접한 리스본의 쥐노가 공세 지향적인 프랑스군의 전통대로 리스본에서 기다리지 않고 전군을 이끌고 해안을 향해 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으므로, 그럴 희망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홀리사 전투를 묘사한 그림입니다.  홀리사라는 마을은 말굽 모양의 계곡 한 가운데 들어가 있는 위치여서 주변이 온통 언덕입니다.)




8월 16일, 영국군의 척후가 홀리사 (Roliça) 인근에서 프랑스군을 발견할 때만 해도 웰슬리의 소원대로 일이 진행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상대 프랑스군은 들라보르드 (Henri François Delaborde) 장군의 4천명 규모의 소부대로서, 웰슬리가 이끄는 1만5천이 넘는 대부대와 싸울 마음이 없었습니다.  8월 17일 벌어진 홀리사 전투에서 영국군은 프랑스군을 가볍게 밀어냈으나, 이는 승리라기 보다는 프랑스군의 당연한 후퇴였고, 기병대가 부족했던 영국군은 질서있게 후퇴하는 프랑스군을 제대로 추격하지도 못 했습니다.   특히 이때 웰슬리는 곧 영국으로부터 지원군 5천명을 이끌고 버라드 (Sir Harry Burrard) 장군이 도착할 예정이라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가 우두머리인 시기가 맥없이 끝나버리게 된 것이었지요.

상륙할 영국군을 엄호하기 위해 마세이라 (Maceira Bay) 해안가로 되돌아온 웰슬리는 아직 전함에서 내리지 않은 버라드 장군을 만났습니다.  버라드 장군은 전투 경험이 거의 없는 보신 제일주의자로서, 총사령관인 달림플 장군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내륙으로 진격하지 않고 해안가에서 기다린다는 원칙을 세워놓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즉각 상륙하지도 않고 하루 더 전함에서 보낼 계획이었습니다.  버라드 장군과의 면담을 마치고 다시 상륙한 웰슬리는 자신이 육상에서 2만명이라는 대군을 하루 더 책임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 하루 동안 사건이 벌어집니다.  별명대로 리스본에서 폭풍처럼 달려온 쥐노의 부대가 그날 밤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원래 포르투갈을 점령한 쥐노의 프랑스군 수는 총 2만4천에 달했지만, 그렇다고 리스본을 텅텅 비워두고 올 수는 없었으므로 쥐노가 8월 20일 마세이라 해안가로 끌고 온 병력은 총 1만4천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여기에는 바로 며칠 전 영국군과 충돌했던 들라보르드 장군의 부대도 포함되어 있었고, 마렝고 전투의 주역이었던 켈레르만 (François Étienne de Kellermann) 장군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쥐노는 영국군을 상당히 얕잡아 보고 있었고, 이번 한번의 전투로 영국군을 모조리 바다 속에 쳐박을 기세였습니다.




(켈레르만 장군입니다.   그는 나중에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와 여러 전투에서 전공을 세우지만, 결국 스페인 전황은 그에게 유리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스페인에서의 전황 때문에 나폴레옹 앞에 선 그가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으려 하자 나폴레옹이 그를 제지하며 딱 한마디 했다고 합니다.  "장군, 장군의 이름이 내게 보고될 때마다 난 오직 마렝고 전투만을 생각한다오."   그만큼 마렝고 전투에서의 그의 활약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런 쥐노를 맞이한 웰슬리의 전술은 향후 여러 전투에서 반복될 전형적인 전술로서, 병법의 대가 손자가 보았다면 무척 칭찬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손자병법을 읽어보신 분들은 다 공감하시겠습니다만, 손자는 일단 전투는 싸우기 전에 이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이길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었지요.  또 손자는 땅과 하늘, 즉 지형과 기후를 적극 활용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웰슬리는 쥐노에 비해 분명한 숫적 우위를 가지고 있었고, 또 기후까지는 몰라도 지형을 확실히 활용할 줄 알았습니다.  그는 기세등등한 프랑스군을 비메이로 (Vimeiro) 마을에서 맞이할 예정이었습니다.  정확하게는 비메이로의 남서쪽과 북동쪽으로 펼쳐진 2줄의 긴 능선에서 맞이할 계획이었지요. 이 긴 능선은 그리 높지는 않았으나 포도나무로 뒤덮여있었고 그 후면에 병력을 감춰두기에 딱 좋은 지형이었습니다.  그는 그냥 영국군의 전통적인 전술대로, 능선 위에 길게 2줄로 늘어서서 접근하는 적군에게 머스켓 사격 세례를 퍼붓는 수비적인 태세를 취할 계획이었습니다.  이렇게 2줄 혹은 3줄의 병사들로 구성된 얇은 방어진의 약점은 어느 한쪽이 뚫리면 전체 전선이 한꺼번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이런 횡대 전술은 적이 측면에서 강력한 기병대로 강습을 해올 경우 속절 없이 무너질 수 밖에 없었지요.  그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웰슬리는 능선이라는 지형을 효과적으로 활용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전투란 능선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예측하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는데, 그의 말마따나 항공 정찰이 없는 시대에는 낮은 능선이라고 할지라도 그 뒤에서 어느 정도의 예비 병력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알 방법이 없었으므로 능선이라는 지형은 방어전에 매우 유용했습니다. 




(비메이로 주변의 능선을 눈여겨 보십시요.)



쥐노 역시 전형적인 프랑스군의 전법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그는 정면에 주력 부대를 배치하여 강공으로 밀어붙였는데, 이때 공격해들어가는 부대들은 여단 단위로 전면에 40명씩 줄을 지어 천천히 행군해 들어갔습니다.   1개 여단이 1920명이라고 하면 세로로는 48줄이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전면에 40명만 선다면 이 40명만 총을 쏠 수 있으므로 이는 화력 운용면에서 큰 제한이 있는 진형이었습니다만, 공세 위주의 작전을 썼던 프랑스군에게 딱 어울리는 전술이었습니다.  적의 방어선 중 어느 한곳에 병력을 집중하는 것이 공격의 기본인데다, 어차피 걸어들어가면서 사격하고 재장전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더 빨리 적진에 접근하여 근접 사격 후 총검으로 끝장을 내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적이 미친 듯이 총을 쏘아대는 전장 속을 화력 지원 없이 무턱대고 걸어들어갈 수는 없었으므로, 이런 공격 대형 전면에 산개된 유격병 (voltigeur, 폴짝폴짝 뛰는 사람이라는 뜻)들과 함께 포병이 그 화력 지원을 맡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재빨리 적진에 접근한 뒤에는 역시 효과적인 화력 운용을 위해 40명 종대로 되어 있던 진형이 좌우로 벌어져 긴 횡대를 이루도록 되어 있었으나, 이는 화약 연기가 자욱하고 머스켓 볼이 빗발처럼 날아다니는 전투 현장에서 실시하기는 매우 어려운 제식 동작이었기 때문에, 많은 경우 프랑스군은 그냥 그 종대 공격 진형을 끝까지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쥐노는 영국군의 횡대 진열을 격파하기 위해 매우 적절한 작전도 펼쳤습니다.  즉 전면에 이렇게 강력한 공격 부대를 전개시켜 시선을 집중시킨 뒤, 브레니에 (Antoine François Brenier de Montmorand) 장군의 여단을 북쪽 측면, 즉 영국군의 좌익 측면으로 빙 돌아 들어가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나 능선을 장악한 웰슬리도 그렇게 프랑스군이 측면으로 우회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즉각 북동쪽 능선 뒤로 병력을 보내 그 우회 공격에 대비했고, 그를 눈치챈 쥐노도 솔리냑 (Jean Solignac) 장군의 부대를 추가로 파견하는 등 치열하게 수싸움을 벌였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동안 이베리아 반도에서 크게 활약한 영국군 제95 라이플 연대 병사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아침 9시부터 전투가 벌어지자, 영국군의 우세한 병력과 유리한 지형, 그리고 방어전에 최적화된 횡대 전술이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일단 프랑스 유격병들은 더 긴 사거리의 라이플 소총 (Baker rfile)으로 무장한데다 숫적으로도 훨씬 더 많았던 영국 제95 라이플 연대의 유격병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전면을 커버해주던 유격병들이 후퇴하자 공격 최첨단에 섰던 토미에르 (Thomieres) 장군의 여단이 영국군 횡대의 사격에 그대로 노출이 되었는데, 실탄 사격으로 훈련된 영국군은 프랑스군보다 더 빠른 속도로 재장전하며 약 90m 거리에서부터 머스켓 사격을 퍼부어 프랑스군을 크게 당황시켰습니다.  좀더 잘 훈련된 부대였다면 90m 쯤의 거리 정도야 이를 악물고 돌격하여 돌파했을지 모르겠으나, 제2선급 부대였던 이 프랑스군 여단은 생각보다 많은 희생자가 나오자 당황하여 진격을 멈춰버렸고, 그 결과 더욱 거센 머스켓 사격에 노출되어 결국 무질서하게 후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측면에서 함께 진격하던 샤를로 (Charlot) 장군의 여단 또한 똑같은 방식으로 격퇴되어 버렸습니다.  쥐노는 초기의 이런 실패에도 불구하고 전혀 기가 죽지 않고 두번 더 공격했습니다.  마지막 공격은 켈레르만 장군이 직접 척탄병 대대를 이끌고 지휘했고, 결국 비메이로 마을 안쪽까지 뚫고 들어가는데까지 성공했으나, 능선 뒤에서 풍부하게 쏟아져 나오는 영국군의 수적 우세에는 당해낼 방법이 없었습니다.    





(비메이로 전투의 다른 지도입니다.)



측면 공격에 나섰던 부대들은 좀더 사정이 복잡했습니다.   먼저 출발했던 브레니에 장군의 여단은 길을 잃고 헤메다 늦어버렸고, 솔리냑 장군의 부대가 먼저 영국군과 충돌했는데, 이들도 영국군의 횡대 사격 대열에 가로 막혀 결국 패퇴했습니다.  솔리냑 여단을 무찌르고 한숨 돌리고 있던 영국군을 뒤늦게 나타난 브레니에 여단이 나타나 습격하는 바람에 한때 영국군의 방어선이 무너지기는 했으나, 능선 뒤쪽에 남아있던 영국군 예비대 제29 대대에게 막혀 결국 브레니에도 후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정오 무렵에는 이미 승패가 난 상태였습니다.  프랑스군이 약 2천의 사상자를 내고 13문의 대포를 탈취당한 것에 비해, 영국군은 7백의 사상자를 냈을 뿐이었고, 전열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쥐노는 패배를 인정하고 잔존 부대를 수습하여 토레스 베드라스 (Torres Vedras) 시로 철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웰슬리는 그 뒤를 추격하여 완승을 거두려 했으나, 포성을 듣고 뒤늦게 상륙한 버라드 장군이 그를 제지했습니다.  이미 승리를 거두어 교두보를 완전히 확보했으므로 소기의 목표를 달성한데다, 준비없이 추격하다가 역습에 걸릴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후퇴하던 켈레르만의 뒤를 쫓던 영국 제20 용기병대는 자제력을 잃고 지나치게 달려들어가다 프랑스군 기병대의 역습에 걸려 약 1/4의 병력을 잃는 참패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이제 지휘권은 버라드 장군으로 넘어갔고, 웰슬리는 버라드의 명령에 따르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가장 처지가 난처했던 것은 쥐노였습니다.  여기서 대승을 거두고 영국군을 바다 속에 쳐넣었다고 해도 본국과의 연락로가 모두 끊긴 쥐노의 상황은 매우 암울했을텐데, 하물며 만신창이로 패배한 상태에서는 더욱 할 말이 없었습니다.  결국 쥐노는 협상가로서의 자질이 가장 풍부했던 켈레르만에게 백기를 들려 사절을 보낸 뒤, 조건부 항복을 영국과 협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켈레르만이 유능한 협상가였다면, 그와 마주한 영국군 최고 사령관 달림플 장군은 매우 인심좋은 협상가였습니다.  신트라 (Sintra)에서 맺어진 이 항복 협상에서, 켈레르만은 엄청난 성과를 이뤄 냅니다.  프랑스군은 대포를 포함한 모든 무기와 군기를 소지한 채, 심지어 포르투갈에서 그동안 약탈했던 모든 전리품까지 다 챙겨서, 영국이 제공하는 수송선 편으로 모두 프랑스로 편안한 귀향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애초에 쥐노와 그 참모들이 포르투갈을 포기하고 스페인을 관통하여 피레네 산맥 근처의 프랑스군 진영까지 후퇴할 것까지 고려했던 것을 생각하면, 영국군이 쥐노가 원하는 바를 무료로 제공하는 꼴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달림플 장군으로서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임무는 포르투갈의 신속한 점령 및 해방이었는데, 아무리 쥐노가 궁지에 몰렸다고 해도 아직 포르투갈 전역에 프랑스군 2만명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영국군의 병력 손실없이 그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면 그다지 나빠 보이는 조건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버라드 장군도 적극 찬성하는 편이었습니다.  다만 젊고 야심찬 웰슬리는 이런 조건의 항복 수락에는 동의할 수 없다며 강한 불만을 표시했고, 결국 신트라 협상 문서에는 서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이런 어이없이 너그러운 협상 조건이 영국에 전해지자, 이 장군들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결국 달림플과 버라드, 그리고 현장에 있었던 웰슬리까지 모조리 본국으로 송환되어 청문회에 출석해야 했습니다.  이들은 결국 모두 무혐의로 풀려날 수 있었으나, 달림플과 버라드는 두번 다시 현역에 복귀할 수 없었습니다.  

쥐노와 그의 부대는 영국의 약속대로 무사히 프랑스로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그 상황이 어쨌건 점령지를 모두 빼앗기고 적의 아량에 의존하여 귀환했으니 그런 쥐노를 대하는 나폴레옹의 심기는 매우 불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일렌에서 항복한 뒤퐁 장군과는 달리 쥐노 및 그 이하 장군들은 아슬아슬하게 군사 재판에 회부되는 것을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처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나폴레옹의 설명에 따르면 '반란군 놈들이 아니라 영국군에게 항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국군에게 항복했건 스페인 반란군놈들에게 굴복했건, 나폴레옹은 화가 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판단하고 자신이 직접 정예 부대를 이끌고 피레네 산맥을 넘기로 결심합니다.  과연 스페인이라는 수렁은 나폴레옹이라는 영웅 본인까지도 집어 삼킬 수 있을 정도로 깊었을까요 ?  그 이야기는 다음에 보기로 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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