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8일이 워털루 전투 200주년 기념일이었습니다. 유럽에서는 리앤액트다 뭐다 해서 굉장히 떠들석 했던 모양입니다만, 우리나라 뉴스에서는 특히 벨기에가 발행한 2.5 유로짜리 동전을 집중적으로 다루었습니다. 그를 둘러싼 뉴스는 이미 국내 뉴스에서도 많이 소개되었으므로 생략하고, 오늘은 저 동전의 앞면에 새겨진 사자상에 대해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 동전은 기념 은화로도 나왔다는데, 저도 하나 구매하고 싶네요.)
저 사자상은
워털루 전투를 기념하여 세워진 것입니다. 정확하게는 워털루의 승리보다는, 그 전투에 참전했다가 적의 머스켓 탄환에 부상을 당한
네덜란드 왕국의 왕세자, 즉 훗날의 빌렘 2세 (Willem Frederik George Lodewijk)가 부상당한 위치를
기념하기 위한 구조물입니다. 원래 워털루 전장은 (벨기에 지역이 다 그렇듯이) 비교적 평탄한 지역이었으나, 이 사자상은 오로지
사자상을 올리기 위해 인공적으로 쌓은 43m 높이의 원뿔형 언덕 꼭대기에 올려져 있습니다. 이 언덕과 그 위의 사자상은 당시
네덜란드 국왕이자 왕세자의 아버지인 빌렘 1세의 명에 따라 1820년부터 건설되어 6년만인 1826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저 사자상은 프랑스군이 워털루 전장에 버리고 간 청동 대포들을 녹여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만, 실제로는 저 사자상은 청동이 아니라 무쇠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사자상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그리 탐탁치 않게 생각합니다. 일단, 워털루 전투의 패배자인 프랑스 측이야 당연히 싫어합니다. 그래서 벨기에가 발행하려던 2유로 짜리 동전에도 반대했던 것이고요. 의외로 영국인들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워털루 전투의 진정한 승리자인 웰링턴 공작과 그의 용감한 영국군을 기리는 것이 아닌, 조연에 불과한 네덜란드 왕세자를 기리는 기념비를 (영국과의 상의도 없이) 세워 놓았기 때문이랍니다.
이 43m자리 인공 언덕을 세우려면 당연히 엄청난 양의 흙, 약 39만 입방미터의 흙이 필요했습니다. 내연기관도 없던 시절 먼 곳에서 그런 흙더미를 트럭으로 실어올 수 없었으므로, 당시 벨기에 사람들은 워털루 현장의 표토를 긁어모아 이 언덕을 쌓았습니다. 덕분에 워털루 전투 현장의 지형이 약간 변하게 되었지요. 특히 라 아예 생트(La Haye Sainte) 농가 뒤로 이어진, 네 원수의 기병 돌격에 큰 장애가 되었다는 '움푹 꺼진 통로' (sunken lane)도 많이 변형되어 버렸습니다. 완공 2년 뒤 이 사자상을 기념 방문한 웰링턴은 이 사자상 언덕 위에 올라 둘러 본 뒤 사자상에 대한 치하는 커녕 '이런 젠장, 내 전쟁터를 완전 뒤짚어 놨쟎아 ?' 라고 투덜거렸다고 합니다.
(워털루 전투에서 네 원수의 유명한 기병 돌격을 방해했다는 소위 sunken lane입니다. 이 장면은 1970년의 대작 영화 Waterloo에서도 묘사된 바 있습니다만, 그 존재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벨기에 국민들 본인은 이 사자 언덕에 대해 뭐라고 생각할지 궁금합니다만, 뾰족하게 관련 기사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 사자상을 새긴 2.5 유로 동전을 만든 것을 보면 나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만, 실은 벨기에 사람들도 이 기념비에 대해 꼭 좋게만 생각하지는 않을 수 있겠다 싶은 것이, 이는 자신들을 핍박하던 네덜란드 오라녜 (Orange, 영어로는 그냥 오렌지) 왕가의 명으로 세워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네덜란드 왕가의 이름과 과일 오렌지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정복민에게서 환영 받은 보나파르트 http://blog.daum.net/nasica/6862602 편을 참조)
워털루 전투의 두 주인공은 당연히 웰링턴과 나폴레옹입니다. 그러나 사실 진정한 3대 주인공은 거기에 블뤼허가 들어가야 합니다. 블뤼허가 저녁때 끼어들지 않았다면 워털루의 승자는 나폴레옹이 되었을테니까요. 참고로, 워털루 전투를 독일에서는 워털루 전투 (Schlacht bei Waterloo) 라고도 하고 '아름다운 동맹'의 전투 (Schlacht bei Belle-Alliance) 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독일에서 굳이 프랑스어로 '아름다운 동맹'이라는 용어를 쓴 것은 다름 아니라, 블뤼허와 웰링턴이 승리 이후 처음으로 재회한 여관 이름이 'La Belle Alliance' 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여관은 전투 중 나폴레옹의 사령부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기분 좋게 승리를 거둔 뒤 이 여관에서 웰링턴을 만난 블뤼허는 웰링턴에게 '이 여관 이름을 따서 이 전투 이름을 짓도록 하자'고 제안했으나, 웰링턴은 그 상식적인 제안을 생까고 전날 그리고 그날 밤에 자신의 숙소가 있던, 정작 전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던 워털루 마을의 이름을 따서 이 전투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워털루 전투는 영, 프, 독의 3대 강국의 역사처럼 보입니다.
(La Belle-Alliance 여관에서 승전의 기쁨을 나누는 블뤼허와 웰링턴입니다. 워털루 전투 막판, 영국군이 무너질 지경에 이르자 웰링턴이 'Give me night or give me Blucher' (밤이 오든가 블뤼허가 오든가)라고 중얼거린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러나 워털루 전투가 벌어진 전장 그 자체는 현재 벨기에, 당시는 통합 네덜란드 왕국 영토였고, 엄연히 네덜란드 및 벨기에 군도 당시 전투에서 큰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웰링턴이 지휘하던 '영국군' 6만8천 중 실제 영국군은 불과 2만5천에 불과했습니다. 나머지는 네덜란드-벨기에군이 1만7천, 영국군 소속이던 하노버 용병들 (King's German Legion에 대해서는 고향을 잃은 병사들 http://blog.daum.net/nasica/6862517 참조) 6천, 그리고 그외 진짜 하노버(Hanover), 브라운슈바이크(Brunswick) 및 나사우(Nassau) 등 영국과 동맹 관계에 있던 독일군 2만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렇쟎아도 유럽의 3대 강국인 영-프-독 사이에 정확히 낀 소국이라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이후에도 수없이 유럽의 전쟁터가 되어야 했던 네덜란드와 벨기에로서는 워털루 전투를 이야기할 때 네덜란드-벨기에군의 존재를 무시한다면 매우 기분이 나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웰링턴을 비롯한 당대의 영국 장교들, 그리고 주로 그들의 기록에 의존하는 많은 영국 역사가들과 작가들은 네덜란드-벨기에군을 그냥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겁장이, 애송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덤탱이' 정도로 폄하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제가 이 블로그를 시작하게 된 계기인 Bernard Cornwell의 대표작 'Sharpe' 시리즈입니다. Sharpe's Waterloo 편에서, 샤프는 영국군 소속이 아니라 네덜란드-벨기에군의 총지휘관인 오렌지 공 (Prince of Orange), 즉 저 사자 언덕의 주인공인 훗날의 빌렘 2세의 보좌관으로 워털루 전투에 참전합니다. 그런데 오렌지 왕자가 너무 병신스러운 지휘를 하는 바람에 아군이 거듭하여 몰살당하자, 이를 보다 못한 샤프가 남들 몰래 왕자를 저격해 버리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즉, 우리의 영웅 샤프 중령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워털루 현장에는 저 사자상이 없을 뻔 했다는 이야기지요.
(1824년 네덜란드의 Jan Willem Pieneman이 그린 워털루 전투입니다. 그림 중앙에 밝은 빛을 받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웰링턴입니다만, 그 왼쪽 아래에 부상을 입은 오렌지 왕자 역시 약간 빛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빌렘 1세가 워털루 전투에서 네덜란드 왕국의 이름을 빛낸 아들에게 선물로 준 것입니다. 오렌지 왕자는 워털루 전투에서의 활약을 스스로 크게 자랑스러워 하고 그 생색을 내느라, 전투 이후 수년 동안 전장에서 쓰던 철제 침대 위에서 계속 잤다고 합니다.)
(영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Sharpe's Waterloo 편에서 오렌지 왕자 역은 최근 어벤저스 2에서 비전 역으로 나온 폴 베타니가 맡았습니다. 당시 신인이었던 폴 베타니는 말을 전혀 타지 못했음에도 어떻게든 역을 따내려고 자기가 말을 잘 탄다고 했다가, 나중에 촬영을 하면서 정말 죽을 뻔 했다고 합니다.)
(오렌지 왕자의 충격 변신)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오렌지 왕자가 네덜란드-벨기에군을 방진(square)이 아닌 그냥 횡대(line)으로 펼치는 바람에 이들이 프랑스 기병들에게 큰 피해를 입었다는 이야기는 실제로도 일어났던 사건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건 프랑스 기병들이 잘 은폐되어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며, 다른 전투, 다른 지휘관들에게도 종종 발생했던 일입니다. 당시 23살이었던 오렌지 왕자가 뭐 그다지 뛰어난 지휘관일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그가 영국 소설 속에 묘사되는 것처럼 천하에 상병신이었다는 증거는 사실 없습니다. 이 소설 속에서도 그렇고 실제 당시 영국 장교들의 기록에도 네덜란드-벨기에군은 그 미숙함과 겁장이같은 행동 때문에 젊은 오렌지 왕자와 함께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프랑스어를 쓰는 벨기에 사람들은 사실상 프랑스인들로서, 내심 나폴레옹의 복귀를 환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믿지 못할 족속들이라고 폄하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비난은 워털루 전투의 공로를 블뤼허 및 기타 연합군들과 나누고 싶지 않았던 웰링턴과 그의 영국인 부하들이 부당한 보고를 올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특히 웰링턴은 오렌지 왕자의 아버지인 빌렘 1세와는 다소 소원한 관계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습니다. 실제로는 네덜란드-벨기에군은 워터루 전투의 승리에 나름 큰 기여를 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은 나중에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이렇게 말함으로써 오렌지 왕자의 체면을 살려주었습니다.
"캬트르 브라(Quatre Bras)에서 한줌의 병력만으로 굳센 방어전을 펼친 오렌지 왕자의 영웅적인 결심이 없었다면, 난 영국군을 무방비 상태로 덮친 뒤 프리틀란트(Friedland)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요리했던 것처럼 정복할 수 있었다."
(캬트르 브라 전투 장면입니다. 이 전투에서 소수의 네덜란드군을 이끈 오렌지 왕자가 더 우세한 병력의 네 원수를 꽤 집요하게 막아냈습니다. 물론 뒤늦게 달려온 영국군의 도움이 꽤 컸지요.)
캬트르 브라 전투에 대해서 나폴레옹이 오렌지 왕자를 극찬했고 또 웰링턴이 오렌지 왕자를 더더욱 미워하게 된 이유는 아래와 같습니다. 워털루 전투는 사실 나폴레옹의 전광석화와 같은 작전 때문에 벌어진 전투로서, 웰링턴은 나폴레옹이 그렇게 빨리 진격해 올 줄을 전혀 예상 못 했습니다. 워털루 전투가 벌어진 것은 6월 18일이고, 그 2일전에 벌어진 전투가 캬트르 브라 전투인데, 캬트르 브라 전투 바로 하루 전인 6월 15일 밤에 웰링턴은 브뤼셀에서 리치몬드 공작 부인의 무도회에 참석 중이었습니다. 그 무도회에서 저녁 식사는 새벽 1시에 제공되었는데, 웰링턴은 그 식사 중에 비로소 나폴레옹이 벨기에 국경을 넘어 플레뤼스(Fleurus)에서 프로이센군을 몰아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웰링턴은 일단은 침착하게 그 자리를 뜨지 않고 식사를 계속 했는데, 나중에 슬그머니 자리를 뜬 뒤 다른 방에서 지도를 펼쳐 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이 내게 한방 먹였네 ! (Napoleon has humbugged me, by God !) 나보다 24시간을 앞질러 버렸어 !"
(브뤼셀의 무도회장에서 프랑스군의 진격 소식을 전해 듣는 웰링턴 공작의 모습입니다.)
이때 나폴레옹의 전격전에 대한 영국군의 당황함은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3일 뒤 워털루 전투에서 전사한 영국군의 맹장 픽튼 경(Sir Thomas Picton)은 중절모에 신사복차림으로 싸우다 죽었고, 다른 많은 영국군 장교들도 리치몬드 공작 부인의 무도회에 참석했던 차림새 그대로인 비단 양말과 무도회용 구두를 신고 싸웠는데, 이것만 봐도 당시 상황이 너무 긴박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웰링턴은 나폴레옹이 어느 경로를 통해 북진할런지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망설이던 그는 일단 오렌지 왕자에게 네덜란드-벨기에군을 브뤼셀 남쪽의 비교적 큰 도시인 니벨르 (Nivelles)에 집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전방에서 남쪽 국경을 지키던 네덜란드-벨기에군을 통해 더 정확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받아보고 있던 오렌지 왕자는 감히 웰링턴 공작의 명령을 어기고 훨씬 더 중요한 전략적 교통의 요지인 캬트르 브라(Quatre Bras, 글자 그대로 4개의 팔이라는 뜻)의 십자로를 지키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6월 16일 벌어진 캬트르 브라 전투에서 네덜란드-벨기에군이 프랑스군을 집요하게 막아내지 못했다면 나폴레옹은 영국군과 프로이센군 사이를 훨씬 더 멀리 떨어뜨려 놓을 수 있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나폴레옹은 여유있게 이들을 각개격파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그래서 오렌지 왕자를 칭찬한 것이고, 웰링턴은 자신의 실수를 덮고자 더욱 오렌지 왕자를 폄하했다고 합니다. 캬트르 브라 및 워털루 전투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더 상세히 다룰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위 지도의 아래 부분, 붉은 핀 표시가 되어 있는 십자로 부분이 캬트르 브라 Quatre Bras입니다. 리뉴 전투에서 밀려난 프로이센군은 지도의 중간 오른쪽에 있는 와브르 Wavre에 재집결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영국군이 그 서쪽의 니벨르 (지도에는 니벨레스라고 표기되어있네요)에 집결하느라 저 십자로를 비워놓았다면, 프랑스군이 워털루로 곧장 북진하면서 영국군과 프로이센군의 사이를 더욱 벌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벨기에가 이번에 저 사자상을 문제의 2.5 유로짜리 동전에 새긴 것이 제게는 조금 의외였습니다. 저 사자상은 벨기에의 작센-코브루크 (Sachsen-Coburg und Gotha) 왕가가 아닌, 네덜란드 오렌지 왕가를 기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나름 복잡한 갈등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16세기 말에 네덜란드가 독립 전쟁을 통해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독립을 쟁취할 때 합스부르크의 지배 하에 남은 곳이 바로 벨기에입니다. 이때문에 신교인 네덜란드와는 달리 벨기에는 대다수가 카톨릭을 믿고, 또 인구의 상당수가 프랑스어를 쓰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도 벨기에는 아예 프랑스의 일부로 병합해렸고, 네덜란드는 자기 동생인 루이를 왕으로 앉히면서도 네덜란드 왕국의 독립성을 (표면적으로나마)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패배하면서, 비엔나 회의에서 유럽의 강대국들은 프랑스를 견제할 완충지대가 필요하다고 보고 그 역할을 위해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합쳐 기존의 네덜란드 공화국의 수장 (stadtholder, 네덜란드어로는 stadhouder) 가문이던 오렌지 가문에게 그 왕위를 맡겼습니다. 당시 오렌지 가문은 혁명을 일으킨 네덜란드인들과, 그들을 지원하는 혁명 프랑스군에게 쫓겨난 독일계 귀족 가문이었거든요. 결과적으로 오렌지 가문은 비엔나 회의가 바라던 역할을 워털루 전투에서 훌륭하게 수행한 셈이었습니다.
(통합 네덜란드 왕국의 초대 국왕 빌렘 1세도, 루이 18세처럼 영국 프리깃함을 얻어타고 귀국했습니다. 자신들이 쫓아냈던 오렌지 가문의 군주를 다시 받아들여야 했던 네덜란드 국민들의 심정은 다소 착잡했지만, 네덜란드를 강제로 병합했던 나폴레옹의 통치도 그닥 매력적인 것은 아니었으므로 빌렘 1세의 등극을 그냥 체념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통합 네덜란드 왕국의 초대 국왕이던 빌렘 1세는 쫓겨날 때도 그랬듯이, 돌아와서도 그렇게 인기있는 왕은 아니었습니다. 일찍부터 상업 자본이 발달된 네덜란드와 풍부한 석탄을 바탕으로 공업이 발전했던 벨기에는 높은 수준의 시민 사회가 형성된 소위 '선진국'이었는데, 빌렘 1세는 외세를 배경으로 벼락 출세하여 왕이 된 주제에 사실상의 전제 군주 노릇을 하려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네덜란드 출신답게, 벨기에의 부를 착취만 했을 뿐 카톨릭을 신봉하는 벨기에를 차별 대우했으므로, 벨기에의 불만이 매우 컸습니다. 이런 갈등은 결국 1830년의 벨기에 혁명으로 이어져 벨기에는 독립을 쟁취하게 됩니다. 워털루 전투의 영웅이자 저 사자상의 주인공 빌렘 2세도 왕세자 자격으로 벨기에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싸웠으나, 결국 그 사자상 언덕을 포함한 벨기에를 상실하고 말지요.
(1830년 벨기에 혁명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진정한 자유와 독립은 총칼을 들고 일어설 용기가 있는 시민들만 얻을 수 있는 것이지요.)
(오렌지 왕자는 워털루 전투에 나서는 각오로 벨기에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군대의 선두에 섰으나, 벨기에 시민들의 완강한 저항과 결정적으로 프랑스군의 개입에 의해 힘없이 쫓겨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인 1840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네덜란드 왕위에 오른 빌렘 2세의 평판은 그다지 나쁜 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미남 신하들을 주변에 많이 두는 등 양성애자라는 소문이 파다했고, 실제로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흔히 동성애자 또는 양성애자라고 하면 진보파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왕가 출신인 그가 진보적인 생각을 가질리는 만무했습니다. 비록 진보파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는 중용과 상식으로 통치하는 이성적인 군주였습니다. 유럽 전체가 혁명으로 끓어오르던 1848년 (이 1848년 유럽 혁명의 해에 대해서도 나중에, 그게 몇년 뒤라도 다룰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대로 수구꼴통 노릇을 계속하다가는 유럽 전체를 휩쓸고 있는 혁명이 암스테르담까지 번져 올 것이라고 판단한 그는 매우 현명하게도, 전제적이었던 헌법을 대폭 수정한, 진정한 입헌 군주로의 대변신을 해냅니다. 그는 나중에 농담반 진담반으로 '나는 하룻밤 사이에 보수주의자에서 진보주의자로 변신했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의 이 개혁으로 인해, 네덜란드 왕국의 권력은 국왕으로부터 의회로 넘어갔고, 이후 네덜란드는 큰 정치적 변혁 없이 오렌지 왕가가 계속 국가 원수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네덜란드 국왕인 빌렘-알렉산더(Willem-Alexander)도 바로 이 워털루의 오렌지 왕자의 후손입니다만, 아마 1848년에 빌렘 2세가 그런 현명한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면 현재 그는 왕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진보가 아님에도 개혁에 응한 현명한 보수, 네덜란드의 빌렘 2세, 워털루 전투의 오렌지 왕자입니다.)
사자상 이야기로 되돌아 가보지요. 건설 당시에는 벨기에인들이 궁시렁거리면서 빌렘 1세의 명에 따라 오렌지 왕자의 부상을 기리는 사자상 언덕을 쌓았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벨기에는 오늘날 그 언덕의 덕을 나름 짭짤하게 보고 있습니다. 긴 계단을 통해 올라가게 되어 있는 이 언덕은 공짜가 아닙니다. 이 언덕에 오르기 위해서는 1인당 16유로 (대략 2만원)의 입장료를 내야 합니다. 이 언덕에 오르면 당시 워털루 전장을 한눈에 볼 수 있어서 좋긴 하다고 하는데요, 글쎄요. 이번에 영국도 네덜란드도 아닌, 벨기에가 굳이 프랑스와의 마찰을 무릅쓰고 2.5 유로짜리 동전을 만든 이유도 혹시 저 두당 16유로의 입장료 수입을 늘리려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덕중의 덕은 양덕 ! 워털루 전투 200주년 기념 리앤액트입니다. 참가자들의 평균 연령이 매우 높지요 ? 그 모습을 웹으로나마 구경 좀 해볼까 했는데, 현장에서의 관람은 물론이고, 심지어 인터넷 녹화 장면까지도 모두 유료더군요 !! 우리나라도 행주산성 전투나 뭐 그런 것들을 리앤액트하면서 관광 자원으로 키우면 좋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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