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폴레옹의 시대

코루냐(Corunna)로 가는 길 - 영국군의 후퇴

by nasica-old 2015. 12. 28.
반응형

지난 편에서는 무어 경의 영국군이 느릿느릿 갈팡질팡하는 사이, 나폴레옹이 독수리처럼 영국군을 향해 달려드는 상황을 보셨습니다.  그러던 차에, 나폴레옹에게 파리로부터 밀린 편지들이 일시에 도착하면서 영국군의 운명을 판가름짓게 됩니다.  그 우편물 속에는 나폴레옹의 충직한 정보원 노릇을 하던 라발레트 공작(Antoine Marie Chamans, comte de Lavalette)과 나폴레옹의 양아들인 외젠 보아르네(Eugene de Beauharnais)가 보낸 편지들이 있었는데, 내용은 한마디로 오스트리아가 대규모 병력에 동원령을 내렸다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에게 스페인은 어디까지나 유럽 서쪽 낙후된 귀퉁이에 불과했습니다.  유럽의 운명을 결정짓는 곳은 어디까지나 인구와 돈이 집중된 중부 유럽 무대였지요.  오스트리아가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이제 그의 프랑스 제국이 제5차 대불동맹전쟁을 치루어야 한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한겨울 스페인의 산악 지대에서 무어 경의 영국 원정군을 궤멸시키는 것은 영국에 대한 그의 증오심을 조금 달래주는 정도의 일이었으나, 관록의 제국 오스트리아와의 한판은 그의 제국의 운명이 걸린 일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물어 뜯어봐야 별로 살도 붙어있지 않을 영국군을 포기하고, 파리를 향해 발걸음을 돌리게 됩니다.

그는 파리로 떠나기 전에, 영국군을 잡기 위해 동원했던 병력 중 상당수를 다른 곳으로 재배치 했습니다.  그러나 영국군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고 그 뒤를 끝까지 추격하는 임무를 술트의 군단에게 주었습니다.  여기서 의아함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원래 이 사건의 발단은 일시적으로 고립된 술트의 군단을 무어가 치겠다고 덤볐다가 생긴 일이었습니다.  당연히 술트의 병력 1만6천보다 영국군의 병력이 훨씬 더 많아서, 영국군은 거의 3만에 달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영국군을 술트의 군단 하나만 동원해서 추격한다 ?  이건 아무리 영국군을 얕본다고 해도 너무 심한 불균형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그렇게 결정을 내렸고, 그런 결정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1월 초까지 영국군의 뒤를 추격하면서 매서운 추위 속 척박한 스페인 산악지대에서 그의 휘하 병사들이 얼마나 심한 고생을 하는지 몸소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영국군이 스페인으로 진격해 들어올 때와는 달리 후퇴 길에서는 군기가 무너져 내려 스페인 주민들을 약탈하고 학대하는데다, 거기에 덧붙여 많은 낙오병이 생기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폴레옹이 12월 31일 그의 형 조제프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영국군은 있는 힘을 다해 도망치고 있는 중이야.  모두가 그들을 혐오하더군.  그들은 주민들을 막 대하고 때리기까지 하는데다, 모든 것을 다 약탈해가거든.  반란을 일으킨 스페인을 가라앉히는데 있어서, 영국군을 투입하는 것보다 더 좋은 진정제가 없는 것 같아."

이건 사실이었습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이 있지요.  반대로 말하면 궁해지면 인의고 정의고 나발이고 없다는 뜻입니다.  뒤에도 보시겠습니다만, 영국군에게 염장 쇠고기와 럼주 보급이 딱 끊어지자, 영국군의 군기는 완전히 붕괴되어 스페인 주민들에게는 산적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영국군의 기록에도, 영국군이 마을에 접근하면 스페인 주민들은 먹을 것을 감춰놓고 모두 숨어버렸고, 그것을 본 영국 병사들은 더욱 화가 나서 스페인 주민들을 마치 적국 주민 다루듯 마구 약탈하고 마을을 파괴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영국군 낙오병들은 이런 프랑스 용기병들이 주워담았습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냥 군도로 무자비하게 베어넘겼습니다.  프랑스군도 포로를 잡을 형편이 아니었거든요.)



게다가 영국군의 뒤를 추격하다보면 영국군 낙오병을 떼거지로 주울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굶주림과 피로로 이미 죽어가고 있거나, 반대로 술에 취해 허우적거리고 있는 병사들과 그의 가족들이었습니다.  대부분은 낙오병은 한겨울에 이들을 추격하느라 온갖 고생을 하면서 짜증이 날 수 밖에 없었던 프랑스 용기병들에게 무자비하게 학살당했습니다.  길가에 널린 여자와 아이들은 대개 그냥 무시되었고, 이들도 대부분 한겨울 황야에서 얼어죽거나 굶어죽어야 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나폴레옹은 이미 반쯤 무너져 내린 영국군을 추격하는데는 술트의 군단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리라고 판단했습니다.  또, 너무 많은 병력을 보내는 것도 좋은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보급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산적떼와 거지떼 중간 정도로 전락해버린 영국군이, 후퇴하는 길의 모든 식량을 샅샅이 긁어먹으며 후퇴하고 있다보니, 역시 영국과 마찬가지로 보급을 현지 약탈에 의존해야 했던 프랑스군은 이미 영국군이 훑고 지나간 길을 뒤따라 가느라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더 많은 병력을 보냈다면 더 큰 곤란을 겪었을 것입니다.





('라이플맨 해리스의 회고록'이라는 책입니다.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에서 전자책을 무료로 다운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책 표지에 그려진 저런 사격 자세는 머스켓 소총을 든 전열 보병에게는 매우 해괴한 자세였을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사정은 이 정도까지만 보시고, 다시 영국군의 사정으로 되돌아 가시지요.  무어 장군이 퇴각을 시작한 이후로, 영국군은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병사들은 그냥 영문도 모르고 180도 선회하여 엉뚱한 방향으로 서둘러 가기 시작했다는 것만 알고 있었습니다.  이 전쟁 끝까지 살아남아 나중에 런던 소호 거리에 구두방을 차린 라이플병 해리스의 회고록에 따르면, 뭔가 심각하게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은 병참부의 짐마차가 진흙탕에 빠져 뒤짚어지자, 병참부 장교들이 그 짐을 건질 생각도 하지 않고 곧장 마차를 포기하는 것을 보면서 부터였습니다.  그러다 결국 자신들이 영국으로 탈출하기 위해 해안가를 향해 내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처음에는 그냥 평소보다 행군 속도가 빠르다고 느낄 정도였는데, 나중에는 밤에도 잠을 재우지 않고 계속 행군을 하기도 했습니다.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주린 배로 밤을 세워 행군하던 병사들 중 낙오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전혀 잠을 자지 않고 계속 후퇴할 수는 없었으므로, 추운 겨울 밤에 찬바람을 피할 수 있는 마을이나 수도원 건물 등이 나오면 그 건물에서 새우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12월 29일 새벽, 해리스가 포함된 라이플 연대 병사들이 어느 수도원 건물의 차가운 마루바닥에 누운지 1시간도 안되어, 대소란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그 건물 안쪽에 자리잡고 있던 용기병들이 "비켜 비켜 ! 적이다 ! 라이플 연대 비켜줘 !"를 외치며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라이플 병사들 위로 고삐를 잡고 말을 끌고 나온 것입니다.  어리둥절했던 라이플 병사들은 시간이 좀 지난 뒤에야 자신들이 건넌 뒤 다리를 폭파했던 그 강을 프랑스군 경기병대가 여울목을 찾아내 건너온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라이플 병사들도 졸린 눈을 비비며 우르르 그 뒤를 따라 나갔는데, 프랑스 경기병들과의 전투는 순수 기병들끼리의 강렬한 충돌이었습니다.  라이플 병사들은 후방에 열을 지은 채 기병들의 충돌을 구경만 했는데, 결국 숫자가 훨씬 많았던 영국군 용기병들과 경기병들이 프랑스 경기병들을 밀어냈고 프랑스군은 다시 강을 건너 후퇴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라이플병 해리스가 목격했던 베나벤테 (Benavente) 전투였습니다.  





(이번 편에 등장하는 주요 지명들입니다.  가볍게 한번 봐두시기 바랍니다.  맨 아래의 살라망카는 맨 처음 무어 장군이 호기있게 출발했던 곳입니다.)




당시 영국군 병사들의 기록을 보면 평소 철제 칼집과의 마찰 때문에 무디기로 악명 높았던 영국 기병대의 군도가 이때는 대단히 날카로왔는지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여 프랑스 기병들의 팔을 단칼에 절단해버리기도 하고, 프랑스 기병의 머리를 내리친 경우 적병의 정수리부터 거의 턱까지 쪼개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이런 것이 가능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당시 병사들의 생생한 회고록은 그 신뢰성을 어느 정도 의심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가령 해리스의 회고록에는 저 베나벤테 전투는 한밤중 어둠 속에 벌어진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아침 9시가 훨씬 지난 시간대에 벌어졌습니다.  하긴 전혀 현장 수기록이 없이 수십년이 지난 뒤에야 기억에만 의지해서 쓰다보니 당연한 결과겠지요.  

이 베나벤테 전투는 양측 사상자가 각각 50명 정도씩 되는 소규모 전투였는데,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총애를 받던 장군들 중 하나였던 르페브르-데누에트(Charles Lefebvre-Desnouettes)가 차가운 강물 속에서 영국군의 포로가 되어 버렸습니다.  프랑스 고위 장군 중 희생자는 또 있었습니다.  며칠 뒤인 1월 3일 벌어진 카카벨로스 (Cacabelos) 전투에서, 제95 라이플 연대 소속의 토마스 플렁켓(Thomas Plunket)이라는 라이플병이 베이커 라이플(Baker rifle)의 원거리 저격으로 프랑스군의 콜베르(Auguste François-Marie de Colbert-Chabanais) 장군을 초탄 명중으로 사살한 것입니다.  플렁켓은 쓰러진 장군을 도우러 온 부관까지 그 다음 사격으로 즉사시키는 위력을 보여주었는데, 당시 그 저격 거리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습니다만, 일설에는 무려 600 미터가 넘는 거리였다고도 합니다.  아무튼 당시 입증된 머스켓 사거리인 80 미터는 물론이고 베이커 라이플의 일반적인 유효 사거리 200 미터를 훨씬 넘는 거리였다고 합니다.  참고로 제가 군대에서 쓰던 M-16 A2 소총의 유효 사거리는 460m 정도입니다. 




(요즘 기준으로도 믿기 어려울 정도의 장거리 저격의 희생자가 된 콜베르 장군의 초상입니다.  이 양반은 전사할 때 고작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였습니다.  개선문에 이 양반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요.)




르페브르-데누에트와 같은 고위급 지휘관이 포로가 된 것은 영국군의 사기를 꽤 높여 주었습니다.  영국군이 프랑스군보다 싸움을 못해서 후퇴하는 것은 아니라는 반증이었기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알고보면 이건 오히려 영국군의 사기를 떨어뜨려야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의 뒤를 쫓는 프랑스군은 르페브르-데누에트 같은 거물급 인물이 비교적 소수의 병력만 이끌고 직접 최전선에서 칼을 뽑아들고 싸을 정도로 솔선수범하는 지휘관들의 지휘를 받고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르페브르-데누에트 장군의 초상입니다.  이분은 결국 비고 항에서 영국군과 함께 배를 타고 영국까지 끌려갔고, 1811년까지 거기서 자유로운 가석방 상태로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하릴없이 지겨운 포로 생활을 하던 이 양반은 그만 신사로서의 약속을 깨고 탈출, 프랑스로 돌아와 영국으로부터 맹비난을 받았습니다.  러시아 원정 및 워털루에도 참전했다가 나중에 왕정복고가 된 뒤 사형 언도를 받은 그는 수백명의 보나파르트파를 이끌고 미국 알라배마에 농업 이민을 떠났다가 결국 실패한 뒤, 특별 사면을 받고 귀국하다 그만 아일랜드 인근에서 난파되어 허무하게 묵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영국군 지휘관들은 그에 비해 경험도 부족하고 정신 상태가 글러먹은 이들이 꽤 많았습니다.  가령 긴 후퇴길 중 차가운 냇물을 건너게 되자, 어떤 장교는 지친 병사를 불러 세워 자신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너도록 명령했습니다.  그 추운 겨울에 바지가 젖는 것이 싫었던 것이지요.  이 장교는 그렇게 강을 건너던 중,  엄하기로 악명이 자자했던 크러포드(Robert Craufurd) 장군의 눈에 띄는 바람에 그대로 물 속에 내려지는 봉변을 겪어야 했습니다.  영국군 지휘부의 무능함은 이미 전군을 이런 위기로 몰아넣은 것 자체에서 잘 드러납니다만, 후퇴가 시작되면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겨울철 산악지대를 관통하는 후퇴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잘 몰랐던 것인지, 보통 부대를 따라다니던 병사들의 부인들과 아이들을 그대로 동반시켰던 것입니다.  

잠깐, 병사들의 부인들과 아이들이라고요 ?  제 블로그에 오래전부터 출입하신 분들은 잘 아시겠습니다만, 예, 영국군 뿐만 아니라 모든 유럽 군대는 원정시에도 병사들의 부인들 뿐만 아니라 아이들까지 데려갔습니다.  현대적인 시각에서는 위험할 뿐만 아니라 식량, 급수, 위생 등이 모두 엉망인 전쟁터로 아내와 아이를 데려간다는 것이 매우 이상하게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병사들은 못 데려가서 안달이었습니다.  너무 많은 여자들과 아이들이 따라 붙으면 신속한 이동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 당연했으므로, 군 당국에서는 나름 기준을 정해서 그렇게 동반하는 가족 수를 제한했습니다.  일단 아이가 둘 이상이면 무조건 제외되었고, 부사관까지 포함해서 병사 100명당 6명의 부인만이 원정에 따라 붙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원정에 따라가겠다는 자원자가 많을 경우는 추첨이 이루어졌는데, 자원자는 항상 넘쳐 났으므로 추첨에 떨어진 부인들과 아이들의 울음소리로 추첨장은 항상 통곡과 비탄이 넘쳐 흘렀습니다.  이런 공식 동반 가족 외에, 비공식적으로 재주껏 따라붙는 여자들도 많았습니다.




(당시 유럽 군부대의 이동에는 이렇게 여자와 아이들, 그리고 이런저런 상인들이 따라 붙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이들을 보통 camp followers라고 불렀습니다.)




왜 그렇게 위험하고 불편한 전쟁터에 못 가서 안달이었을까요 ?  이는 당시 사회 상황에 대해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당시 영국 서민들의 삶은 기본적으로 비참했는데, 일반 사병의 사회적 계급은 거의 밑바닥이었으므로, 그 가족의 삶 또한 거의 밑바닥이었습니다.  또 당시의 사회 분위기나 도덕적 상황으로 볼때, 남편의 원정으로 잠시 헤어진다는 것은 사실상 영영 이별하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였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송금같은 것도 그다지 자유롭지 못했으므로, 병사의 얼마 안되는 급료를 본국의 부인과 아이들에게 보낼 방법도 거의 없었습니다.  따라서 대개의 경우, 부대와 동행하지 못하는 부인들은 곧 다른 남자와 결혼하든가, 더 심한 경우 창녀로 전락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은 그야말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고요.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하는 병사들의 마음도 찢어졌...을까요 ?  의외로, 역시 당시 사회 상황과 또 그 병사들의 출신 성분을 고려해야 합니다.  귀찮은 마누라와 징징대는 애들로부터 해방되어 새 여자를 얻을 희망에 부풀었던 병사들도 적은 편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런 부인들도 분명히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연대의 당당한 구성원이었습니다.  병사들에게 연대가 바로 집이고 가족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부인들도 연대에 강한 애착과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쟁터에서는, 부인들은 부상병과 병자들을 돌보기도 했고, 또 전투가 승리로 끝난 경우, 시체와 부상병이 즐비한 전쟁터로 용감히 뛰어들어가 약탈품을 찾았습니다.  시체나 부상병이 가진 몇 안되는 동전이나 근사해보이는 군복, 돈이 될만한 검이나 피스톨 등이 대상이었는데, 자신의 장화를 벗겨가려는 이런 부인들에게 저항하는 적 부상병은 가차없이 부인들의 칼에 목이 따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억세고 거친 삶을 살았던 여자들과 아이들이었으므로, 이들을 차라리 베나벤테 같은 주요 마을에 놔두고 오는 편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프랑스군이 막장이라고 해도 (사실 그렇게까지 막장도 아니었습니다) 적군의 가족을 건드릴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장교들로서는 가족들과 떨어지기를 거부하는 병사들을 강요할 수가 없어서 그랬는지, 혹은 정말 아무 생각이 없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결국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은 지휘부가 지는 것입니다.  지휘부의 그런 어리숙한 판단 결과, 많은 여자들과 아이들이 결국 굶주림과 추위에 낙오되어 황야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때 여자들과 아이들이 모두 낙오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해리스 일병의 회고록에는 여자와 아이들 뿐 아니라, 장교든 사병이든 건장한 남성들도 많은 수가 피로와 굶주림으로 쓰러져 결국 목숨을 잃는 장면이 나옵니다만, 몇몇 믿을 수 없는 강인한 여자들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런 고된 후퇴 길 중, 어느 병사의 부인이 힘겹게 길을 걷다 결국 길 옆에 드러눕더랍니다.  그리고 그 남편인 병사도 그 옆에 주저앉고요.  그런 경우를 워낙 많이 봐왔던지라, 해리스 주변의 병사들은 '지친 부부가 이제 죽을 자리를 정한 모양이군' 하고 쑥덕거리며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해리스는 그 부인이 갓난아이를 안고 남편과 함께 다시 라이플 부대를 따라 잡아 대열에 합류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그 부인이 드러누운 것은 아이를 출산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해리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 아이와 산모는 결국 영국행 수송선까지 무사히 집어탔고, 아이는 나중에 건강한 소년으로 자랐다고 합니다.



(당시 숀클리프 병영의 대략적인 지도입니다.  지금도 이곳에는 영국 육군 병영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영국군이 그 부인처럼 강인한 체력과 행운을 가졌던 것은 아닙니다.  많은 병사들이 낙오되었고, 일부는 굶주림과 영국군의 혹독한 군기에 질려 일부러 대오에서 이탈하여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그나마 해리스가 소속된 제95 라이플 연대는 이런 낙오병이나 탈영병이 적은 편에 속했습니다.  일단 이들은 무어 장군이 영국 켄트(Kent)에 위치한 숀클리프(Shorncliffe) 병영에서 1803년부터 열심히 키워낸 경보병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어 장군은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했던 경험에서, 경직된 전열 보병보다는 좀더 병사 개개인에게 자율성을 부여하는 경보병 전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훈련에 많은 공을 들인 바 있었습니다.  라이플 연대도 머스켓 소총보다 더 긴 사거리와 더 정확한 명중률을 가지는 베이커 라이플의 특성을 살려 2인1조로 산개하여 전투하는 훈련을 받은 부대였습니다.  따라서 그저 장교들의 호통소리에 따라 걷고 장전하고 대충 아무데나 쏘는 훈련을 받은 전열 보병에 비해 정예병이라고 할 수 있었지요.  그랬기 때문에 크로포드 장군도 제95 라이플 연대를 가장 위험한 후미에 배치하여 끊임없이 도전해오는 프랑스 기병대를 견제하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채찍질은 결코 빠따나 회초리질 같은 가벼운 형벌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채찍질 도중 실제로 병사가 출혈 및 쇼크로 사망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그 경우에 대비한 규정까지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 규정이란 이미 죽은 시체에 대해 나머지 매질을 그대로 시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제95 라이플 연대를 포함한 경보병 여단들은 영국군의 후퇴가 시작될 때 영국군의 선두 쪽이 아닌 후미 쪽에 위치해있었고, 무어 장군은 이 경보병 여단들을 그 위치에서 그대로 방향을 바꿔 포르투갈과의 국경 바로 위쪽인 비고(Vigo) 항으로 향하도록 했습니다.  무어 장군의 본대도 그 뒤를 따라 비고를 향할 작정이었으나, 나중에 보시듯 결과적으로 좀더 북쪽에 위치한 코루냐(Corunna, Coruña)로 향했지요.  이때 비고 항으로 향했던 경보병 여단들은 그래도 피해가 적은 편에 속했습니다.  이는 해리스의 기록에 따르면 크로포드 장군이 끊임없이 병사들의 대오를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격려함과 동시에, 명령에 따르지 않는 병사들에게는 가혹한 처벌을 가하며 군기를 혹독하게 다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연설할 떄 비아냥거렸다는 이유로 호완스 (Dan Howans)라는 병사에게 채찍질 100대를, 그것도 프랑스군이 뒤에 바짝 쫓아오는 도중에 전부대를 집결시켜서 차렷자세를 만들어놓고 그 앞에서 집행할 정도의 강심장을 가진 장군이었습니다.  크로포드 장군은 매서운 인상을 가진 훌륭한 군인으로서, 걸핏하면 쌍욕을 퍼부었기 때문에 병사들로부터 검은 밥(Black Bob)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맹장이었습니다.  맹장 아래 약졸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이렇게 채찍질 100대를 당한 호완스라는 병사도 신음소리도 내지 않고 100대를 다 맞은 뒤, 억세게 생긴 아내가 건네주는 외투를 피투성이 맨살 위에 걸치고 걸어나왔다고 합니다.  원래 채찍질은 10대만 당해도 등가죽이 홀라당 벗겨질 정도였고, 50대가 넘어가면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악랄한 형벌이라서, 100대의 채찍질이라는 것은 사실상 사형 언도, 그것도 난자질에 의한 사형 언도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렇게 등가죽이 갈기갈기 찢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호완스는 차마 자켓을 입지 못하고 외투만을 대충 걸친 것이었고요.  이렇게 강인한 병사와 그 아내가 결국 살아남았는지에 대해서는 해리스의 회고록에 더 이상 언급이 없습니다.  




(크로포드 장군입니다.  정말 매섭게 생기셨네요.  이 양반은 나중에 시우다드 로드리고 공성전에서 용감하게 앞장 서다가 결국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비고 항으로 향한 영국군은 비록 많은 낙오자를 내기는 했으나, 프랑스군의 끈질긴 추격을 뿌리치고 큰 전투없이 영국 수송선에 기어오르는데 성공했습니다.  라이플병 해리스도 한때 낙오되었다가, 해안을 떠나는 거의 마지막 보트를 간신히 집어타고 영국 포츠머스에 상륙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수송선에 올라탄 그날 밤부터 거센 폭풍에 휘말려 배가 거의 옆으로 기운 상태로 5시간을 표류했다고 합니다.  당시 허술한 목조 수송선의 수밀성을 생각하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 같습니다만, 아무튼 이젠 물고기밥이라고 다들 체념할 때 즈음 기적적으로 폭풍이 멎고 배가 평형을 되찾아 간신히 포츠머스 앞바다인 스핏헤드(Spithead)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씌여 있습니다.  해리스를 포함한 이들은 포츠머스에 도착한 뒤에도 약 5일간 선상에 머물다가 간신히 상륙 허가가 떨어져 맨발과 누더기 군복 차림에 떡이 진 수염을 한 거지 꼴로 절뚝거리며 상륙하여, 포츠머스 시민들을 경악시켰습니다.

무어 장군이 이끄는 본대는 좀더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도착하는 마을에서 돈, 하다 못해 셔츠라도 벗어주고 빵과 와인을 샀으나, 점차 행군이 가혹해지고 돈과 옷가지가 떨어지면서 병사들은 노골적인 약탈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당연히 받아야 하는 와인 또는 럼주 배급이 중단된 것에 대한 불만이 엄청났고, 이는 도착하는 마을마다 술을 찾아나선 병사들의 행패로 난장판이 일어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장교들은 병사들의 약탈과 낙오를 막아보려 나름대로 애를 썼으나 역부족이었습니다.  자신들도 지치고 배고픈 것은 마찬가지였고 또 이런 후퇴 상황을 처음 겪어보는데다, 바로 뒤를 프랑스군의 기병대가 쫓아오고 있었기 때문에 뒷수습을 할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후위를 맡은 기병대 사령관인 파젯(Henry Paget, 1st Marquess of Anglesey) 장군이 약탈 행위를 하던 병사 3명을 체포하여 교수형을 집행하려다가 프랑스군에게 쫓겨 집행을 못하고 퇴각을 해야 하는 일이 벌어질 정도였으니까요.  

보급이 중단되고나니, 확실히 역전의 용사 프랑스군과의 질적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군은 장교들이 어쩔 줄을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병사들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찾아 짐승처럼 허우적거리는데, 똑같이 주린 배를 움켜쥐고 싸우던 프랑스군은 노련한 장교들의 지휘 하에 영국군을 끈질기게 추격했던 것입니다.  사실 사정은 프랑스군에게 더욱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영국군은 애초에 수송용 가축과 짐마차를 충분히 가지고 있었으므로 여전히 무기와 탄약 등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또 부족하기는 하지만 식량도 좀 있었고 지나는 길가의 스페인 마을들로부터 식량을 추가로 더 얻을 수 있었지요.  그에 비해 프랑스군은 단기 섬멸전을 생각하고 길바닥에 나선 상황이라 아예 보급이 없었습니다.  진흙투성이의 빗길 속을 헤치며 추격전을 펼치다보면 군복과 군화, 말굽과 안장 뿐만 아니라 탄약과 무기 등에도 손상이 많이 가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전투라도 벌어지면 칼이 부러지고 총의 부싯돌이 깨지는 일도 많았고요.  프랑스군은 그런 것을 보충할 방법이 거의 없었습니다.  게다가 영국군이 먼저 샅샅이 훑고 지나간 마을들에서는 정말로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매일같이 영국군이 퇴각하는 경로에서 한참 벗어난 마을까지 추가로 움직여 거기서 먹을 것을 약탈해와야 했습니다.  즉, 영국군보다 훨씬 더 많은 거리를 움직여야 했으므로 훨씬 피로도가 심했습니다.  그런데도 프랑스군은 줄기차게 영국군의 뒤를 밟으며 낙오병 사냥을 계속 했습니다.


럼주가 끊기면서 점점 느슨해지던 영국군의 군기가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베어드 장군이 영국군 증원군을 이끌고 스페인으로 진격할 때 11월 22일에 도착하여 1차 기지로 삼았던 아스토르가(Astorga)에서였습니다.  일단 여기서 숨을 돌리고 지붕 밑에서 잠을 잘 수 있었던 영국군은 이 곳에서 로마냐 (Romana) 후작의 스페인군 잔존부대와 합류했습니다.  그러나 이 만남은 결코 기쁜 일이 아니었습니다.  양측 모두에게요.  예상대로 로마냐 후작은 무어 장군에게 '더 이상 꼬리를 빼지말고 여기서 자신의 부대와 함께 힘을 합해 프랑스군과 싸우자'고 간청했습니다.  실제로 영국군과 스페인군을 합하면 비고로 먼저 보낸 경보병 여단들을 빼고도 3만에 가까왔으니, 1만6천에 불과한 술트의 군단 하나를 물리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어는 그럴 생각이 전혀, 정말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여기까지 오는 내내 빠르게 무너져 내리는 영국군의 모습을 보고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하루라도 더 빨리, 그리고 한명이라도 더 많이 영국군을 영국 수송선에 싣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아스토르가의 성당 사진입니다.  아스토르가 같은 작은 도시에도 저런 거창한 건물이 있다니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네요.)




후퇴하는 마당에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가는 것이 아무래도 힘들었던 영국군 지휘부는 아스토르가에 도착하자, 여기에 비축해 놓았던 것까지 합해 탄약과 각종 장비들을 대거 파괴하기로 했습니다.  이 결정은 로마냐 후작을 격분시켰습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스페인이 이렇게 나폴레옹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일방적인 패배를 당하고 있는 것은 영국 원정대가 지나치게 느릿느릿 전진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젠 아예 스페인이야 어떻게 되든 나몰라라 자기들만 살겠다고 도망치겠다는 것이 영국군 총사령관이라는 작자의 공언이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아스토르가에 비축해놓았던 머스켓 소총과 탄약, 각종 군사 장비들은 원래 스페인군에게 지원해주기로 했던 군수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비들이 프랑스군 손에 떨어지는 것을 막는답시고 폭파하겠다는 것은 '영국은 로마냐가 이끄는 스페인 패잔병 따위는 믿지 않는다' 라고 공공연하게 밝히는 행위였습니다.  

로마냐 후작을 격분시킨 것은 그 뿐만 아니었습니다.  영국군이 폭파 작업에 들어가 여분의 화약이 폭음과 함께 대형 불꽃놀이를 일으키고, 또 각종 장비들을 불태우느라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자, 그렇잖아도 사기가 떨어졌던 영국 병사들은 이제 모든 것이 끝장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나마 남아있던 군기를 내팽개쳐버리고 거의 떼강도 수준의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영국 병사들은 더 나은 숙소를 갖겠다고 스페인 병사들과 주먹다짐을 벌였을 뿐만 아니라 술을 찾아서 아스토르가 주민들의 집을 무단 침입하고 주민들을 구타했습니다.  로마냐 후작은 공식 기록에 남기겠다며 이 와중에 형식을 갖춘 항의 서한을 무어에게 보내기도 했습니다만, 어차피 영국군의 행패는 이미 무어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영국군 장교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아스토르가부터 영국군은 군대로서의 모습을 잃기 시작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목격한 로마냐 후작은 무어의 영국군에게서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보고 이들과 결별하여 포르투갈 쪽을 향해 남쪽으로 향했습니다.  어차피 영국행 수송선에 로마냐 후작이 이끄는 부대가 탈 자리는 없었으니까요.

영국군의 군기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 럼주 배급 때문이었다면, 군기가 무너진 것도 결국 술 때문이었습니다.  가령 1월 2일에는 벰비브레(Bembibre)라는 마을에서는 병사들이 술집 술창고를 때려부수고 와인을 퍼마시는 바람에 난리가 났는데, 장교들이 수습하려 노력을 해봐도 이미 술에 취한 병사들에게는 전혀 명령이 먹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영국군은 그 마을에 수백명의 술에 취한 병사들을 내버려두고 떠나야 했고, 이들은 모조리 뒤따라온 프랑스 기병들의 무자비한 칼탕을 받아야 했습니다.  영국군은 충분한 양의 술이 있는 마을마다 이렇게 수십 수백명 씩 희생자 아닌 희생자들을 내버려두고 떠났습니다.  이런 식으로 영국군은 꼴 사나운 후퇴길에 그야말로 수천명을 흘리며 속절없이 녹아내리고 있었습니다.




(왜 영국군만 음주로 인한 문제가 심각했는가 라고 물으신다면 대답은 '아니오, 영국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영국이라는 나라 전체에 음주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가 답입니다.  당시 영국은 프랑스나 프로이센 등에 비해 나라 전체에 음주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병사 1인당 매일 와인 1파인트 또는 럼 1/4 파인트를 배급하면서도 만약 술에 취한 것이 발각되면 채찍질 형벌에 처해졌는데, 실은 장교들도 음주 문제가 매우 심각했습니다.  이에 대해 무어 장군도 이렇게 한마디 남길 정도였습니다.  "병사들에 대해서만 그렇게 처벌하는 것은 불공평하지 않은가 ?  장교들도 같은 죄목으로 채찍질을 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당 시 영국군의 사정이 얼마나 다급했는가 하면, 영국군이 이런 난장판을 벌이고 후퇴한 아스토르가에 나폴레옹 본인이 약 8만의 병력을 이끌고 들이닥친 것이 1월 1일이었습니다.  1월 2일 영국군이 술을 퍼마시며 퍼져 있던 벰비브레는 아스토르가에서 불과 44km 정도 떨어진 곳으로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라면 2일만에 주파할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그러니 나폴레옹은 바로 그 전날까지 약 300km를 10일만에 주파했으니 하루에 30km씩 달린 셈이었습니다.  영국군도 후퇴할 때는 전진할 때보다 빨랐습니다.  이런 몰골로나마 영국군이 루고에 도착한 것이 1월 6일이었습니다.  벰비레에서 130km 정도 떨어진 곳이고, 이를 4일만에 주파했으니 하루에 30km 이상, 즉 프랑스군과 거의 같은 속도를 낸 것이지요.  보급도 포기하고 낙오병과 환자는 다 내팽개치고 달리니 확실히 더 빨랐습니다.  그래도 나폴레옹이 끝까지 따라 붙었다면 결국 따라 잡혔을 가능성도 꽤 컸습니다.  그러니 나폴레옹에게 '오스트리아가 재무장에 나섰다'라는 편지가 날아온 것은 영국군에게 있어 대단한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구글 지도에서 각 지역간의 거리를 재가면서 당시 전투 기록을 보면,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행군 속도를 실감하실 수 있습니다.)



루고(Lugo)에서 무어는 전열을 가다듬고 다가오는 술트의 선봉대와 맞붙을 용기를 냈습니다.  루고 인근의 지형이, 방어에 너무나 용이한 고갯길 2곳만 막으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술트가 꼬리를 내리고 도전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확실히 술트의 병력은 무어의 영국군보다 약했고, 더군다나 술트의 프랑스군도 힘든 추격 행군에 무척 지쳐 있었고 또 부족한 식량 조달을 위해 넓은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습니다.  무어와 본격적인 전투를 벌일 상황은 아니었지요.  술트가 꼬리를 빼자, 2일간을 이렇게 기다리던 무어는 프랑스군이 측면을 우회하여 자신의 뒤를 차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여기서 발을 다치거나 상태가 안 좋은 말 500마리를 도살하고 남는 탄약 수송차를 파괴하고는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낙오병과 탈영병의 숫자가 덜컥 겁이 날 정도로 많았으므로, 더 먼 비고(Vigo)까지는 도저히 갈 수 없다고 보고 전령을 보내 더 가까운 코루냐(Corunna)로 수송선단을 보내도록 했습니다.  거기서 승선할 생각이었지요.  이렇게 루고에서 코루나로 가는 길에서 영국군은 다시 1천명 정도를 낙오병으로 상실했습니다.  다시 그 뒤를 밟던 술트는 그렇게 영국군이 흘리고 간 낙오병들을 사냥하며 착실히 전과를 올렸고요.




(루고에서 비고까지는 약 160km지만, 루고-코루냐까지는 약 90km로서 코루냐가 훨씬 가까왔습니다.)




(기원전 401년, 메소포타미아에서 출발하여 흑해 연안에 당도한 뒤 마침내 바다가 보이자 감격해 마지 않는 그리스 용병단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비틀거리며 영국군이 코루냐에 입성한 것이 1월 11일이었습니다.  이들의 심정은 2천년 전 페르시아 내전에 참전했다가 메소포타미아의 쿠낙사(Cunaxa) 전투에서 패전한 뒤 소아시아 반도 흑해 연안까지 강행 돌파한 그리스 용병대와 비슷했습니다.  당시 그리스 용병대가 흑해 인근까지 도착하여 고개 정상을 넘자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바다가 눈에 들어왔고, 이들은 "바다다, 바다야 !"를 외치며 이제 살 길을 찾은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1810년 1월 11일, 거지꼴로 코루냐에 들어온 영국군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텅빈 항구였습니다.  영국 수송선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이제 영국 원정군의 운명은 어떻게 펼쳐질까요 ?  그 이야기는 다음편에서 보시지요.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