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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탈출 - 코루냐 (Corunna) 전투

by nasica-old 2016.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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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는 1809년 1월 11일, 어리둥절하는 코루냐 시민들이 구경하는 가운데, 온갖 누더기를 걸치고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거지꼴로 코루냐 시내로 들어오는 영국군의 모습까지를 보셨습니다.  이 거지떼를 지휘하는 영국군 총사령관 무어 경의 마음은 크게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을 이 지옥에서 빼내 영국으로 실어다 줄 수송선단의 모습이 항내에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떻게든 프랑스군의 추격을 따돌리고 항구까지만 가면 살아서 영국 땅을 밟을 수 있다고 믿던 영국군은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수송선단의 도착이 늦어진 것은 사실 꼭 영국 해군의 탓만은 아니었습니다.  원래 무어의 영국군을 탈출시킬 항구로 지정된 곳은 훨씬 남서쪽인 비고(Vigo) 항으로서, 이곳은 거의 포르투갈과의 국경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무어가 영국군의 현재 상태로는 비고까지 가는 것은 도저히 무리라고 판단하고 수송선단을 코루냐로 보내달라고 요청서를 보낸 것은 1월 6일 루고에 도착한 이후의 일이니까, 아무리 말을 탄 전령이 전속력으로 달렸다고 하더라도, 항구에 닻을 내린 수송선단을 5일만에 거리가 150km가 넘는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영국 해군은 나름 최선을 다했습니다.  비록 수송선단 전체는 아니었으나, 속도가 빠르고 이동 준비가 완료되어 있던 영국 해군 소속 전함들과 일부 수송선은 이미 코루냐에 도착해서 외항에 닻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수평선 위에 영국 수송선단이 언제 나타나느냐에 따라, 프랑스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 승선을 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 될 수도 있었고, 아니면 프랑스군의 방해를 받지 않고 순조롭게 환자와 물자까지 모두 싣고 고국으로 떠날 수도 있었습니다.





(비고에서 지도 맨 위에 보이는 코루냐까지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당시의 범선들은 바람과 조수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요.  따라서 비고에서 코루냐까지 즉각 항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최악의 전투는 후퇴, 특히 선박으로 강이나 바다를 선박을 통해 후퇴하면서 추격하는 적을 막아내는 경우였습니다.  후퇴하는 도중에 사기가 좋을 리가 없고, 특히 끝까지 적과 싸워야 하는 후위 부대의 경우 마지막 보트를 놓칠 수도 있다는 초조함과 불안감 때문에 막판에 무너져 내릴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후위대가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적군이 해변까지 쫓아와 병력이 가득 탄 수송선이나 보트에 대포알을 날린다면 그야말로 끝장이었지요. 이제 코루냐에 도착한 무어는 그런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최선의 철수 작전을 짜내야 했습니다.

다행히 코루냐에는 영국 해군이 스페인군과 영국군 지원을 위해 실어다 놓은 물자가 잔뜩 쌓여 있었습니다.  그동안의 철수 작전에서 영국군을 크게 괴롭힌 것은 식량 부족과 더불어 유난히 많이 내리는 눈과 비였습니다.  눈과 비는 길을 진흙탕으로 만들어 대포와 마차 수송에 특히 방해가 되었지만, 병사들이 휴대한 머스켓 소총의 부싯돌과 스프링, 그리고 기름종이로 포장된 탄약포(cartridge)에도 손상을 주었습니다.  당시 부싯돌 점화 방식의 머스켓 소총은, 전투가 한창일 때 젖은 화약 또는 손상된 부싯돌로 인해 점화가 안 되어 (misfire) 총이 막히게 되면, 사실상 그 전투가 끝날 때까지는 총검으로나 써야 했습니다.  약실에 화약마개(wad)까지 써서 꾹꾹 눌러 담은 화약과 총알을 빼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거든요.  영국군은 방금 상자에서 꺼낸 5천정의 번쩍번쩍하는 신규 브라운 베스 (Brown Bess) 머스켓 소총으로 재무장을 했고, 비에 젖은 탄약포도 잘 마르고 잘 포장된 것으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군은 진흙탕 길을 걸어오느라 대부분 구두도 다 떨어진 상태였는데, 그런 것도 새것으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굶주렸던 병사들이 비로소 제대로 된 음식, 즉 염장 쇠고기와 건빵을 양껏 먹으며 체력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전쟁에서는 전사하는 병사들보다 질병으로 사망하는 병사들의 수가 훨씬 많았는데, 그런 질병의 상당부분은 식량 부족으로 인한 면역력 저하와 더불어, 배가 고프다 보니 아무것이나 손에 잡히는 대로 막 먹다 걸리는 이질 설사 때문이었습니다.  영국 수송선이 내려준 풍부한 염장 쇠고기와 건빵듲 비록 맛이 좋지는 않아도 병사들의 전투력을 상당 부분 회복시켜 줄 수 있었습니다.




(당시의 종이로 만든 탄약포입니다.  이렇게 종이로 포장된 납탄과 흑색화약은 저 포장지로 쓰인 종이와 함께 총구를 통해 약실로 꾹꾹 눌러 장전이 되었습니다.  이런 종이 탄약포는 비와 습기에 대해 취약했고, 젖은 탄약포는 불발로 이어져 머스켓 자체를 한동안 사용 불능으로 만들기 쉽상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무어는 완벽한 철수 작전을 고려하기 이전에 철수할지 말지를 고려해야 했습니다.  영국은 스페인과 협력하여 프랑스와 전쟁 중이었고, 무어의 임무는 그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영국 같은 해양 세력이 대륙 세력과 싸우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항구를 대륙 한구석에 확보해야 했습니다.  비록 영국군이 프랑스군에 쫓겨온 셈이긴 하지만, 이제 무려 2만에 가까운 병력으로 식량과 탄약 등 막대한 군수 물자가 쌓인 항구를 점령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제해권을 완벽히 장악한 영국 해군이 뒤를 지켜주고 있었고요.  따라서 영국군은 아예 코루냐 항을 근거지로 삼고 눌러 앉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실은 애초에 나폴레옹이 부지런히 무어의 영국군을 추격한 것도 혹시나 이것들이 스페인 북서부의 주요 군항인 페롤(Ferrol)을 점령하고 그를 영구 기지화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어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번 후퇴길에서 영국군의 기강이 덧없이 무너져 내린 것을 본 뒤 그저 이 오합지졸들을 하루라도 빨리 영국으로 후송시켜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이건 기술적으로 볼 때 직무 유기였습니다.  그와 그의 부대가 후퇴길에 어떤 고생을 했는지 알 길이 없는 런던의 고관대작들은 왜 병력과 물자가 충분한데 주요 항구를 적에게 내주고 허겁지겁 철수했는지 이해를 못 해 줄 것이 뻔했습니다.  특히 코루냐 항구는 그렇다치더라도 그 바로 북쪽 인근에 있는 스페인의 주요 군항 중 하나인 페롤을 그대로 포기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비록 출항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지만 스페인 해군의 주력 전함들과 더불어 영국 해군이 실어다 쌓아 놓은 막대한 군수 물자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모두 벽난로에서 장작불이 타닥거리며 불타고 있는 런던의 쾌적한 회의실에서나 통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코루냐 항구의 사정은 훨씬 급박했고, 아무도 더 북상하여 페롤 항구를 점령하거나 그 곳의 장비와 물자를 파괴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코루냐와 페롤은 바로 지척간에 붙어 있었습니다.  코루냐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되었지요.  저렇게 가까운 곳에 있는 페롤의 군수물자를 파괴하지 않고 탈출한다면 영국 내의 여론이 좋지 않을 것은 뻔했습니다.)




무어는 바빴습니다.  이제 곧 추격해올 프랑스군을 막을 작전을 짜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 외곽에 대한 지형 정찰도 필요했지만 무엇보다 코루냐의 시장을 위시한 스페인 주민들과의 협의도 필요했습니다.  다행히 스페인 북서쪽 끝인 이 지방의 주민들은 아직 프랑스군의 침공을 받지 않아 여유가 있는 편이었고 거지꼴로 기어들어온 영국군에 대해 동정심을 보여주었습니다.  또 이 곳을 지키고 있던 소수의 스페인 수비대도 공동의 적인 프랑스를 무찌르기 위해서는 결국 영국과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했는지, 영국군의 철수를 위해 자신들도 프랑스군에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영국군이 쌓아놓은 무기와 탄약은 충분했으므로, 코루냐 시민들 중 자원자들에게는 영국제 머스켓 소총과 탄약이 지급되었습니다.  이들은 프랑스군에 맞서 실제로 이 총을 쏘며 싸우지는 않았으나, 결국 이들의 협조는 영국군의 철수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런 협조 하에, 무어는 일단 외항에 정박한 몇 척의 전열함과 수송선에 먼저 환자들을 싣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항구 외곽 어디쯤에서 프랑스군을 저지할 것인지 정찰을 시작했는데, 결국 시 바로 남쪽의 몬테 메로(Monte Mero, 메로 산)를 중심으로 펼쳐진 일련의 나지막한 능선들을 따라 방어선을 펼치기로 했습니다.  이 능선들은 사실 방어에 그다지 좋은 지형이 아니었습니다.  장애물로 의지하기에는 너무 낮았고, 그 바로 남쪽에는 더 높은 능선들이 있어서 적들이 그 능선 위에서 영국군을 내려다보며 포격을 해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이 능선들은 항구 남쪽을 완전히 둘러싼 것이 아니었습니다.  엘비나 (Elvina) 마을 서쪽은 거의 그냥 평지로서, 이쪽으로 프랑스군이 우회해서 들어올 경우 몬테 메로 방어선을 지키는 영국군과 항구 사이를 파고 들어 영국군의 퇴로를 막아버리는 불상사가 벌어질 수 있었습니다.  물론 무어도 그건 잘 알고 있었으나, 더 남쪽의 능선에 방어선을 치기에는 병력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한가지 안심이 되는 점이 있다면 이 서쪽 평지는 탁 트인 벌판이 아니라 울퉁불퉁한 지형이라 빠른 진격이 쉽지 않은 지대였습니다.  무어는 파젯(Henry Paget) 장군의 사단을 예비대로 배치하고, 프레이저(Alexander Mackenzie Fraser) 장군의 사단을 코루냐 항구에 바싹 붙여서 배치했습니다.  프랑스군이 그 서쪽 평지로 쳐들어올 경우 이 두개 보병 사단을 동원하여 틀어막을 예정이었습니다. 






(현대의 코루냐 항의 모습입니다.  이제 코루냐 시내가 많이 남쪽으로 확장된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만, 당시 코르냐 시는 지금보다 훨씬 작았고, 항구는 저 지도 속의 A Coruna 라는 글자 오른쪽의 작은 만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방어 라인까지 허술하다보니, 무어를 비롯한 영국군 장병들은 제발 프랑스군이 뒤쫓아 나타나기 전에 수평선에 영국 수송선단이 먼저 나타나기를 열심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니나다를까, 집요했던 프랑스군은 영국군이 코루냐에 입성한지 불과 하룻만인 1월 12일에 그 전초부대부터 코루냐 외곽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군은 바짝 긴장했습니다만, 실은 프랑스군도 전혀 싸움을 걸어올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거쳐 가는 경로 일대의 모든 식량을 메뚜기떼처럼 바닥내버리는 영국군의 뒤를 쫓다 보니, 프랑스군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더 먼 거리까지 움직이느라 정말 기진맥진하고 굶주린 상태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낙오병도 많아서, 병력이 다 집결하려면 시간이 한참 걸리는 상황이었습니다.  술트는 영국군이 주방어선 너머에 펼쳐 놓은 초계선 저 남쪽에 웅크린 채, 병력을 정비했습니다.

이러는 사이에도 무어와 그의 영국군은 매우 바빴습니다.  코루냐에 머스켓과 탄약, 대포와 화약 등 군수 물자가 넘쳐 나는 것은 이 곳을 영구 기지로 삼을 작정이라면 좋은 일이었으나, 이 곳을 곧 탈출할 것이라면 나쁜 일이었습니다.  자신들이 떠나자마자 프랑스군이 이 곳을 점령할 것이니 이 곳에 남는 군수 물자는 모두 프랑스군의 차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영국군은 곧 있을 프랑스군과의 일전에 사용될 것 이외의 모든 군수품을 파괴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포처럼 비싸고 소중한 장비들은 곧 입항할 수송선에 싣고 갈 예정이었으나, 대포에 딸린 짐마차, 탄약 수송차 등은 당연히 버리고 가야 했습니다.  이런 차량은 항구 근처의 절벽에서 아래로 밀어 떨어뜨려 박살을 냈습니다.  여분의 탄약과 포탄 등은 싣고 갈지 폐기해야 할지는 제때에 도착하는 수송선의 선적량을 보고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이는 당시 대포와 항상 함께 다니는 탄약 수송차 limber의 모습입니다.  대포는 싣고 간다고 쳐도, 이런 탄약 수송차까지 함께 싣고 갈 필요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영국군이 싣고 갈 물건과 그렇지 않은 물자의 분류 및 방어 진지 구축에 바쁜 사이, 1월 14일 저녁, 마침내 영국 전함들의 호위를 받는 약 100여척의 크고 작은 수송선들이 코루냐에 입항했습니다.  영국군은 최근 2일간 분류해놓은 순서에 따라 체계적으로 선적을 시작했습니다.  아직 남아 있던 환자 및 부상자들 약 3천명이 가장 먼저 수송선에 올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명의 환자들은 배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상태가 너무 위중하여,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보트를 타고 외항에 닻을 내린 수송선에 기어오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환자들은 코루냐 주민들의,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들어올 프랑스군의 온정에 맡겨졌습니다. 

환자 및 부상자들과 함께 수송선에 가장 먼저 타는 불명예(?)를 누렸던 것은 기병대였습니다.  코루나 주변의 지형이 거칠어 기병대가 질주할 만한 곳이 별로 없었으므로 방어전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포병대도 9문의 야포를 제외하고는 모든 대포 및 그를 운용하던 포병들을 먼저 승선시켰습니다.  대포는 많으면 많을 수록 방어전에 좋았겠지만, 무거운 대포를 보트에 싣고 수송선에 올리는 것은 시간과 인력이 많이 들어가는 일인지라 미리 실어두는 것이 더 좋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서두를 수 밖에 없는 최종 철수 작전에서 대포를 싣는 것은 무리였으니까요.  





(나폴레옹 시대의 12파운드 포입니다.  당시의 대포는 구조가 간단하여 파괴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전투 현장에서 노획한 대포를 급히 망가뜨리는 방법은 구리못과 작은 망치로 점화구 touch hole을 막아버리는 것이었습니다만, 그것도 대장장이가 몇시간 애를 쓰면 곧 수리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기병대가 타던 말들이었습니다.  기병대가 약 3천이 넘었으니, 사료 부족과 부상으로 이미 많은 말이 죽었다고 해도 그들이 타고 다니던 말은 수송용 짐말까지 포함해서 3천 마리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을 다 싣고 가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그 중 상태가 좋은 1천 마리 미만의 말들을 제외한 모든 말들을 도살하기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말은 대포와 함께 당시 제1급 군사 장비에 해당하는 자원이었으니, 그것을 프랑스군에게 넘겨주고 갈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아마 자신의 애마를 도살해야 했던 기병대 병사들의 마음은 찢어질 듯 했을 것입니다.  이 말들은 며칠 전 마차들을 떨어뜨려 부순 그 절벽으로 끌려갔고, 절벽 가에서 총으로 쏜 뒤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도살되었습니다.  말은 무척 영리한 짐승입니다.  동료들이 차례로 절벽가로 끌려가 총성과 함께 비명을 지르며 떨어지는 것을 보며 순서를 기다리던 말들은 놀라 울부짖으며 크게 동요했다고 합니다.  상황을 더욱 안 좋게 만든 것은 병사들의 서투름이었습니다.  이렇게 꺼림직한 임무를 받은 병사들이 말의 머리를 제대로 겨누지 않고 대충 쏘는 바람에, 절벽 아래로 떨어진 말들이 죽지 않고 살아서 비명과 함께 몸부림을 쳤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참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광경에 더욱 끔찍한 상황을 더한 것이지요.  절벽 아래에 있던 병사들이 이런 말들의 머리통에 해머를 내리쳐 끝을 냈는데, 나중에는 '차라리 총을 쏘지 말고 검으로 목을 따라'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자료에 따라서는 살아서 배를 탄 말의 숫자가 1천 마리는 커녕 매우 적었고, 거의 대부분의 말을 이런 식으로 도살했다고도 합니다.

탄약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워낙 대량의 화약과 탄약포가 코루나 항에 산적되어 있어, 결국 이들은 폭파해버리기로 했습니다.  수송선이 들어오던 1월 14일 밤, 약 4천통의 화약을 시외곽에서 한꺼번에 폭발시켰는데, 이 폭발의 굉음으로 인해 코루냐 시내의 모든 건물들의 유리창이 다 깨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폭발 소리는 저 멀리 남쪽에서 병력을 모으고 있던 술트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습니다.  술트에게 이 폭음이 뜻하는 바는 명료했습니다.  곧 영국군이 배에 올라타고 탈출할 것이고, 영국군을 잡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했습니다.  그는 뒤쳐진 병력이 다 모이기 전에라도 전투를 벌이기로 작정했습니다.  마침 그날 프랑스군의 포병대도 도착을 한 것도 그의 결정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코루냐 전투 상황도입니다.  영국군은 산 크리스토발 - 엘비나 - 피레드랄롱가 마을을 잇는 선을 따라 방어선을 치고 있었습니다.  뒤에 묘사되겠습니다만 메르메 Mermet와 메를레 Merle가 엘비나를 압박하는 사이에 라우사예 Lahoussaye가 서쪽 평원지대로 진격하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엘비나 마을과 메로 산을 중심으로 펼쳐진 방어선에 배치된 영국군의 수는 약 1만5천이었습니다.  술트의 프랑스군도 3천의 기병을 포함한 1만5천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실제 전투에 참전한 프랑스군의 숫자는 훨씬 적었습니다.  일단 3천의 기병대는 지형상 거의 쓸모가 없었고, 또 1만2천의 보병들은 아직 다 집결한 상태도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프랑스군은 영국군과는 달리 그동안 폭우 속에 강행군하느라 손상된 머스켓 소총과 탄약포를 그대로 가지고 싸워야 했습니다.  또 영국군이 지난 2~3일간 잘 먹고 잘 쉰에 비해 프랑스군은 지치고 배고픈 상태 그대로였습니다.

무어가 여분의 탄약을 폭파시킨 다음날인 15일 아침, 영국군 진영으로 웬 아일랜드 아주머니 하나가 거지꼴로 찾아 왔습니다.  이 여자는 낙오된 영국군 가족 중 하나였고, 프랑스군에 잡혀 있다가 술트의 메시지를 들고 온 것이었습니다.  술트의 메시지는 간단했습니다.  "곧 찾아뵙겠다."  무어는 주방어선 너머에 있는 더 높은 남쪽 능선에도 초계병을 깔아 놓았는데, 곧 프랑스군이 나타나 이들을 쫓아냈습니다.  프랑스군은 이 높은 남쪽 능선인 팔라베아(Palavea) 고지를 점령하더니 영국군 지휘부가 염려한 바로 그 일을 시작했습니다.  거기에 대포를 끌어다 놓고, 계곡을 사이에 두고 영국군 방어선에 포격을 시작한 것입니다.  일부 프랑스 유격병들이 계곡을 내려와 영국군이 방어선을 친 능선을 기어오르기도 했으나, 이들은 반대로 영국군의 포도탄 세례를 받고 물러나야 했습니다.  영국군 측에서도 맥켄지(M’Kenzie) 대령이 제5 보병 연대 일부 병력을 이끌고 팔라베아 고지의 프랑스군 포대에 돌격을 감행했으나, 낮은 돌벽 뒤에 매복하고 있던 프랑스군의 반격을 받고 맥켄지 대령을 포함해 많은 사상자만 낼 뿐이었습니다.  저 서쪽의 산 크리스토발 (San Cristobal) 마을 인근의 고지에서도 산발적인 전투가 하루 종일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이렇게 유격병들을 풀어서 영국군을 견제만 할 뿐, 본격적인 전투를 벌이지는 않았습니다.  술트의 의도는 다른 곳에 있었거든요.  이렇게 변죽만 울리는 사이 술트는 11문의 중포를 팔라베아 및 산 크리스토발 인근 고지에 올려 놓았던 것입니다.  이 일대의 지형이 너무 험해 이 작업은 거의 하루 종일 걸렸으며, 이 중포들이 간신히 자리를 잡은 것은 15일 밤이 다 되어서였습니다.





(프랑스군 포병대의 모습입니다.)



이런 술트의 의도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던 무어는 바짝 긴장한 채로 15일 밤을 보낸 뒤, 16일 새벽을 맞았습니다.  예상과는 달리 프랑스군이 강력한 공격을 해오지 않자, 무어는 아마도 어제의 공격이 전부였나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침이 되어서도 양군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대치만 할 뿐, 뭔가 뜨거운 혈전이 벌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긴장된 상태가 거의 정오까지 이어졌습니다.  무어는 이제 프랑스군의 공격이 없을 것이라고 보고, 방어선에 배치된 부대들에게 항구로 이동하여 승선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내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오후 2시경이 되어 영국군 방어진이 조금 얇아지자,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술트는 후퇴하는 적의 뒤를 치고 싶었던 것이지요.


프랑스군은 밤 사이에 배치해둔 중포를 이용하여 엘비나(Elvina) 마을을 포격하며 메르메(Julien Augustin Joseph Mermet) 장군의 경보병 부대를 선두로 습격해왔습니다.  엘비나 마을에 배치되어 있던 영국군은 프랑스군의 거센 공격에 버티지 못했고, 신속하게 마을에서 밀려났습니다.  프랑스군은 곧 메로(Mero) 산 위에 진을 친 영국군을 공격하기 위해 비탈길을 기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메로 산을 지키던 영국군도 반격에 나섰습니다.  이들은 프랑스군이 가까이 몰려올 때까지 기다렸다 근거리에서 파괴적인 일제 사격을 퍼붓고는 총검을 꼬나들고 프랑스군의 비틀거리는 전열을 덮쳤습니다.  아무래도 아래에서 위를 공격하는 것은 힘들었던지라, 프랑스군은 시퍼런 영국군의 총검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후퇴하는 프랑스군의 뒤를 따라 영국군도 계곡 아래로 추격해갔으나, 프랑스군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원래 출발했던 계곡 아래까지 밀린 프랑스군은 역전의 용사들답게 재빨리 다시 전열을 정비했고, 기세만 믿고 아래까지 추격해온 영국군에게 다시 달려들었습니다.   영국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허겁지겁 다시 고지로 쫓겨갔습니다.  이들에 대한 프랑스군의 공격이 워낙 거세다보니, 무어는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예비대로 두었던 병력 중 2개 근위 대대를 보내야 했습니다.  프랑스군은 그제서야 엘비나 마을로 물러났습니다.  마침내 프랑스군의 공격을 격퇴한 것입니다.






(메르메 장군의 초상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술트의 기만 전술에 불과했습니다.  애초에 술트같은 백전노장이 방어가 탄탄한 영국군 방어 진지 정면을, 그것도 고지에 위치한 정면을 들이칠 리가 없었습니다.  그는 엘비나 마을에서 메로 산으로 이어지는 루트에 맹공을 가해 영국군의 관심과 병력을 그쪽으로 집중시킨 뒤, 다른 곳보다 상대적으로 허술할 수 밖에 없던 서쪽 평지 쪽을 파고들 계획이었습니다.  그에 따라, 메르메 장군의 부대가 맹공을 가하는 동안 라우사예(Armand Lebrun de la Houssaye) 장군의 용기병 4개 연대가 프랑스군이 점령한 능선 뒤에 숨은 채 뻥 뚫린 서쪽 평지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언덕 뒤에서 벗어나 지키는 이가 아무도 없는 평지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하자, 프랑스군도 왜 이 지역에 방어 병력이 배치되지 않았는지 곧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움푹 꺼진 길과 도랑, 경작지 경계로 쌓아놓은 낮은 돌벽 등이 복잡하게 얽힌 곳이라서 기병대가 질주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라우사예 장군의 용기병들은 그저 열을 지어 조심조심 이동할 수 밖에 없었고, 이 모습은 영국군의 눈에도 잘 들어왔습니다.  무어 장군이 이럴 때를 대비해서 준비해둔 파젯 장군과 프레이저 장군의 예비대로부터 5개 보병 대대가 이들을 상대하러 속보로 뛰어 왔습니다.  기병은 원래 그 스피드를 이용하여 바람처럼 내달리며 검을 휘둘러야 전투력을 낼 수 있었고, 지금처럼 거친 길 위를 느린 걸음으로 아장아장 걷는다면 적 보병들에게 쉬운 사격 표적이 될 뿐이었습니다.  라우사예 장군은 진격이 어렵게 되자 급기야 용기병들에게 말에서 내려 영국군처럼 돌벽과 도랑 뒤에 숨어 총격전을 벌일 것을 명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상황을 크게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용기병들이 사용하는 기병총(carbine)은 보병의 머스켓보다 사정거리가 더 짧았습니다.  결국 술트가 야심차게 준비했던 기습은 영양가 없는 총격전으로 변질되어 돈좌되었습니다.





(이건 1796년식 영국군 용기병 기병총 carbine입니다.  보병들이 쓰던 브라운 베스 Brown Bess 머스켓 소총이 길이 42인치의 총열을 가진 것에 비해 이 총의 총열은 26인치로서 매우 짧은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현대적 소총들도 총신이 짧은 것을 카빈이라고 부릅니다.)






(라우사예 장군의 초상입니다.   이 양반은 계속 이베리아 반도 전역에서 활동하다가 1812년 러시아 침공에 불려갑니다.  결국 보로디노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햇다가 나폴레옹이 후퇴할 때 병원에 입원한 상태로 러시아군의 포로가 됩니다.  그는 1814년 전쟁이 완전히 종료될 때까지 포로로 러시아에 억류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전투의 중심은 애초에 기만이 목적이었던 엘비나 마을을 중심으로 한 전선 중앙 지점이 되어버렸습니다.   오후 4시가 넘어서자 동쪽 끝 부분의 피에드랄롱가(Piedralonga) 마을에서도 프랑스군의 강습이 있었고, 마을 전체가 프랑스군 손에 넘어가기도 했으나, 이쪽은 영국군의 경계심을 이쪽으로 돌리기 위한 보조 공격에 불과했고, 가장 치열한 전투는 엘비나 마을을 둘러싸고 벌어졌습니다.  영국군은 엘비나 마을을 탈환하기 위해 병력을 쏟아 부었고, 프랑스군도 예비 부대를 투입하며 강력하게 저항했습니다.  특히 높은 언덕에서 내리 꽂는 프랑스군의 중포 사격에 영국군은 많은 피해를 냈습니다.  엘비나에서 격전을 벌이던 제42 하이랜더(Highlanders) 연대는 탄약이 거의 떨어질 지경이었는데, 무어가 보낸 증원 병력인 근위 대대가 뒤에서 접근해오자 자기들 할 바는 다 했다고 생각했는지 슬슬 물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물러나는 이들을 막아선 것은 무어 장군 본인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출신인 총사령관 본인이 직접 나타나 독려하자 어쩔 수 없이 이 스코틀랜드 병사들은 다시 돌아서서 프랑스군과 대적했습니다.  






(무어 장군의 피격 순간입니다.  실제로는 훨씬 더 끔찍했겠지요.)




무어 장군이 쓰러진 것은 바로 이때였습니다.  뒤에서 접근해오는 근위 대대 쪽을 보기 위해 몸을 뒤로 돌리던 무어 장군은 마치 보이지 않는 주먹에 얻어맞은 것처럼 말 위에서 휙 나가떨어졌습니다.  프랑스군의 대포알에 왼쪽 어깨를 직격당했던 것입니다.  무방비로 말에서 떨어진 것만으로도 대단한 중상을 입었을 것 같은데, 영국군의 기록에 따르면 무어는 그렇게 낙마했다가 정신을 잃지 않고 곧 일어나 앉았다고 합니다.  끔찍하게도, 그의 왼쪽 어깨는 완전히 부서져서 폐와 그를 둘러싼 갈비뼈가 다 드러나 있었고, 왼팔은 너덜너덜해진 옷과 함께 힘줄 몇 점에 의해 대롱대롱 매달린 상태였습니다.   무어 본인은 차분한 정신 상태를 유지했다고 하는데, 글쎄요, 그런 부상을 입고 어떻게 정말 그럴 수 있었는지는 의문입니다. 

결국 영국군은 오후 6시 즈음해서 프랑스군을 엘비나 마을에서 완전히 축출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영국군의 피해도 컸습니다.  무어 본인 뿐만 아니라 베어드(Sir David Baird) 장군도 대포에 직격당해 왼팔을 잃었고, 영국군은 약 9백 정도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프랑스군의 피해는 이보다는 다소 작아 6~700에 포로 3백 정도에 이르렀는데, 그렇다고 프랑스측이 이날의 승리자였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일단 오후에 전투가 시작될 때에 비해 프랑스 측이 점령한 것은 저 동쪽의 피에드랄롱가(Piedralonga) 마을 일부 뿐이었고, 무엇보다 그날의 목표인 영국군이 코루냐로 퇴각할 수 없도록 퇴로를 끊는 것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베어드 장군의 초상입니다.  버나드 콘월의 나폴레옹 전쟁 소설 Sharpe 시리즈 중 초반에 샤프의 후원자로 등장하는 이 양반도 이 전투에서 왼팔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이 초상화 속에서도 왼팔이 어정쩡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영국군 수뇌부 중 서열 1위와 2위였던 무어와 베어드가 모두 중상을 입자, 지휘권은 서열 3위인 호프(John Hope) 장군에게 돌아갔는데, 호프 장군도 이 지긋지긋한 스페인에서 빨리 철수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어둠이 깔리면서 전투가 종료되자, 호프는 방어 능선을 지키던 병력들에게 차례대로 코루냐 항구로 돌아와 승선할 것을 명했습니다.  프랑스군을 속이기 위해 능선 위 곳곳에는 큰 화톳불을 많이 피워 놓고 초계병들에게 그 앞을 끊임없이 왔다갔다 하여 계속 활발한 움직임이 있는 것처럼 꾸몄습니다.  밤새도록 가장 힘들었던 것은 영국 함대의 수병들이었습니다.  영국 함대에서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보트를 다 동원하여 어둠 속에서 부두와 수송선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며  병력을 실어날랐습니다.  덕분에 동이 틀 무렵에는 전체 병력의 대부분이 승선을 마쳤습니다.  다만 어둠 속에서 닥치는 대로 병력을 마구 실어나르다보니, 각 부대별로 나누어 승선하지 못하고 뿔뿔히 흩어진 채로 마구 뒤섞여 수용되었습니다.  가령 어느 한 수송선에는 무려 6개 연대의 부대원들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있었습니다.  당시 군대가 연대를 기본 단위로 움직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렇게 본대에서 떨어져 낯선 다른 연대원들과 함께 좁고 냄새나는 수송선 선창에 들어간 병사들은 무척 불안감을 느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병사들은 일단 살았다는 안도감과 그 동안 쌓인 피로 때문에, 불안감이고 뭐고 자리를 잡는 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고 합니다.





(당시 범선에는 jolly boat와 같은 작은 보트부터 launch처럼 수십명이 탈 수 있는 큰 보트까지 다양한 크기의 보트들을 싣고 다녔습니다.  이런 보트들이 총동원되어 병력을 실어날랐습니다.)



무어는 새벽 무렵에 죽었습니다.  죽기 전 그는 프랑스군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에 대해 "난 항상 이런 식으로 죽기를 원했네.  잉글랜드 국민들이 만족하기를, 그리고 조국이 내 업적을 정당히 다뤄주기를 바라네."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어서 참모진이 안전한지, 자신의 유언장이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 등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친구인 스탠호프(Charles Banks Stanhope)와 눈이 마주치자 "자네 여동생에게 내 소식을 전해주게." 라는 말을 끝으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워낙 급박하게 철수가 이루어지고 있어서, 이렇게 죽은 장군을 성대히 예를 갖추어 묻고 갈 여유가 없었습니다.  남은 참모진은 무어의 시신을 군용 망토에 둘둘 말아 대충 염을 한 뒤 코루내 성곽 밖에 묻었습니다.  무어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찰스 울프(Charles Wolfe)라는 시인이 지은 "코루냐에서의 존 무어 경의 장례"(The Burial of Sir John Moore after Corunna)라는 시를 보면, 정말 북소리나 조총 등의 예우도 없이 어둠 속에서 그냥 묻었던 모양입니다.






(코루냐에 있는 무어 장군의 묘지입니다.  영국군이 대충 만든 무덤 위에 술트가 기념비를 세워주었고, 그 뒤 1811년에 영국군이 다시 제대로 묘지를 만든 것입니다.)



오전 8시가 되자, 사태를 파악한 프랑스군이 포성을 울리며 진격에 나섰습니다.  아직 후위를 지키고 있던 잔존 영국군은 그야말로 공포에 사로잡혀 항구로 달려온 뒤 바다 쪽을 향해 손과 모자를 흔들며 자신들을 태워달라고 아우성을 쳐야 했습니다.  특히 프랑스군이 항구에 정박한 선박들을 향해 포문을 열면서 혼란은 극에 달했습니다.  만을 사이에 두고 코루냐 부두와 마주 보고 있는 절벽에는 산 디에고 요새(Castillo San Diego)가 있었는데, 여기를 급히 점령한 프랑스군 포병대가 눈 아래 펼쳐진 수많은 수송선들에게 6문의 대포로 발포를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급히 가져온 대포는 필시 중포는 아니었을 것이므로 그렇게까지 큰 위협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심리적 효과는 만점이었습니다.  만 내에 닻을 내리고 있던 수송선들이 일제히 공포에 질려 닻을 끊고 만을 빠져 나가려고 대혼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 결과 4척이 좌초했고, 이들 중 3척은 결국 불태워 버려야 했습니다.  이 프랑스 포병대는 곧 영국 전함들의 포격을 받고 물러서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수송선들의 난장판은 어이없는 소동에 불과했습니다. 





(위에 나온 지도의 확대 부분입니다.  지도 아래편에 1월 18일 아침 프랑스 포대가 있었던 위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 지도에는 1월 17일이라고 표시되어 있네요.)

 

이런 대소동 속에서도, 영국군은 대부분의 장비와 병력을 다 싣고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성공적인 철수가 가능했던 것은 영국 해군 전함들의 엄호 덕분이기도 했으나 주로 코루냐의 스페인 수비대 덕분이었습니다.  당시 코루냐에 주둔한 한 줌 밖에 안되는 스페인 수비대의 지휘관은 알세도(Antonio de Alcedo) 장군이었습니다.  이 양반은 당시 74세의 노장이었고, 사실 변변한 군사 경험도 없는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알세도를 중심으로 코루냐 시민들은 영국 함대가 무사히 포격 사정권 밖으로 빠져 나갈 때까지 항복하지 않고 버텨주어 영국군의 철수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영국군의 병참 장교였던 샤우만(August Schaumann)은 코루냐에서 한 스페인 소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마음도 아프고 또 수치스러웠습니다.  "영국군 아저씨들은 참 좋겠어요... 이렇게 빠져나갈 수 있는 배들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스페인군에게는 빠져나갈 곳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영국군이 최후로 철수한 것이 1월 18일이었는데, 코루냐가 항복한 것은 1월 20일이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스페인 수비대가 프랑스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영국군의 뒤를 치는 것에 이미 실패한 마당에, 술트로서도 굳이 무리해서 코루냐를 공략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지요.  1월 20일이 되자, 서류상으로는 2개 연대였던 스페인 수비대는 순순히 항복하고 무기와 항구를 프랑스군에게 넘겼습니다. 

코루냐 항구에서 프랑스군은 비로소 풍족한 식량과 군수 물자를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영국군은 자기들만 쏙 몸을 빼서 달아나는 처지에, 자신들의 뒤를 지켜줄 코루냐 시민들로부터 식량과 최소한의 무기들까지 빼앗을 뻔뻔함은 없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장비와 물자를 파괴했다고 해도 식량은 거의 그대로 남아있었고 5백마리의 말과 스페인군이 원래 가지고 있던 대포와 소총, 수십만발의 탄약포와 화약이 프랑스군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대박은 바로 북쪽에 있던 스페인 군항 페롤(Ferrol)에서 터졌습니다.  1주일 뒤, 술트는 페롤에 진격하여 항복을 받아냈는데, 여기서 프랑스군은 8척의 전열함과 3척의 프릿깃함, 그리고 많은 수의 작은 코르벳(corvette)함을 멀쩡한 상태 그대로 손에 넣었습니다.  또한 페롤은 스페인의 주요 군항답게 거대한 무기고를 갖추고 있었는데, 여기서 무려 1천문의 대포와 2만정의 신품 머스켓 소총, 그리고 막대한 양의 탄약 등 온갖 군수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들은 원래 영국이 스페인 침공 작전에 쓰기 위해 실어다 놓았던 것인데, 이제 이 물자들은 그대로 술트의 포르투갈 침공에 쓰이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술트의 군단은 11월 9일, 나폴레옹이 스페인 침공을 시작한 이후 거의 쉬지 못하고 재보급도 못 받은 채 2달 넘게 강행군에 시달렸는데, 비로소 휴식과 재보급, 재정비를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술트는 여기서 낙오병들까지 다 수습하여 1만9천의 보병과 4천의 기병대, 그리고 58문의 대포를 끌고 2월부터 포르투갈 침공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페롤 항의 입구를 지키는 산 펠리페 San Felipe 요새의 모습입니다.  저런 철옹성 여러개가 지키고 있는 페롤 항을 저렇게 쉽게 넘겨준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횡재수를 만난 프랑스군과는 달리, 영국군은 곧이어 불어닥친 폭풍 속에 2척의 수송선이 난파되어 수백명의 병사들을 물고기밥으로 바치는 고난을 겪은 뒤 4~5일 만에 영국 플리머스에 도착했습니다.  이렇게 천신만고 끝에 영국 땅을 밟은 영국군 병사들을 바라보는 플리머스 시민들의 반응은 경악 그 자체였습니다.  땟국물이 흐르는 수염투성이 얼굴에 갈기갈기 찢어진 군복을 걸친 이들은 영국을 떠날 때의 기세등등한 정예병들이 아니라, 거의 거지떼에 가까왔기 때문입니다.  2만명에 가까운 귀환병 중 무려 6천명이 환자라서 상당수가 들 것에 실려 병원으로 직행해야 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이들은 비참한 패잔병이었습니다. 

무어 장군은 죽어가는 와중에도 '조국이 내 업적을 정당히 다뤄주기를 바란다 (do me justice)'고 했지요.  무어 장군은 자신의 철수 결정 및 그 지휘 내용에 대해 나름 꺼림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병력과 장비에서 열세였던 프랑스군의 공세를 간신히 막아낸 코루냐 전투를 과연 승리라고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왈가왈부 말이 많습니다만, 확실히 꼴사나운 후퇴 작전은 결국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칭찬받을 업적은 아니었거든요.  언제 어디서나 그렇듯이, 기본적으로 영국 정부는 스페인 원정군의 참담한 귀환을 '영웅들의 성공적인 귀환'이라며 미화하려고 했습니다만, 거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당시 전투에서는 패배한 측의 병력 손실이 20% 정도인 것이 보통이었는데, 원래 출정했던 병력의 20~30%를 상실한 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온 것은 명백한 패배였습니다.  영국 주요 일간지인 더 타임즈(The Times)에서도 "진실을 위장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수치스러운 재난을 겪은 것이다"라고 독설을 날렸고, 영국 정부 내에서도 이미 전사한 무어 경에 대한 비난이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커졌습니다.  특히 바로 코 앞에 있던 페롤 항에 진입하여 그곳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군수 물자를 파괴하지도 않고 몸만 빠져나온 것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덕분에 대륙에 남은 유일한 영국의 동맹국인 포르투갈은 영국군의 탄약을 사용하는 프랑스군의 침공에 큰 피해를 입어야 했으니까요.  오히려 코루냐 전투에서 용감히 싸운 무어 경을 알아준 것은 적장 술트였습니다.  그는 그 멀고 험한 길을 거쳐 영국군을 철수시키고 최후의 순간까지 용감하게 싸운 무어 경의 시신을 수습하여 조촐한 기념비를 세워주었습니다.





(고향인 스코틀랜드 글라스고우에 세워진 무어 경의 동상입니다.)



무어 경의 철수 작전은 더 중요한 곳에도 큰 피해를 남겼습니다.  바로 스페인과의 우호였지요.  스페인은 전통적으로 영국과 적대적인 경쟁국이었는데, 나폴레옹의 침공 앞에 자존심을 버리고 도움을 청했건만, 영국이 신의를 버리고 저만 살겠다고 우방 스페인을 완전히 내버린 꼴이 된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존경을 받던 스페인의 애국자 로마냐 후작 자신이 영국군의 배신 행위와 스페인 주민들에 대한 약탈 행위에 대해 맹비난을 하며 다녔으므로, 그 보이지 않는 앙금은 오래, 또 깊게 남았습니다.  이는 훗날 웰링턴 공작의 작전에도 꽤 큰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이제 전장은 영국제 화약으로 탄약통을 가득 채운 술트의 군단이 향하는 포르투갈로 옮겨갑니다.  그러나 그런 유럽 한구석의 조그마한 전장보다는, 무어의 영국군을 내버리고 나폴레옹이 향한 유럽의 중앙 무대, 오스트리아 쪽의 상황을 먼저 보시는 것이 나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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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요즘 게을러져서 2주에 한번씩 하던 연재가 조금씩 늦어지고 있습니다.  약 3주 후에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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