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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나폴레옹의 교과서 - 리볼리 전투

by nasica-old 2011.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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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아르콜레의 용자' 편에서 보셨듯이, 비록 나폴레옹이 알빈치의 제3차 만토바 구원 작전을 물리치기는 했습니다만, 이는 정말 아슬아슬한 승리였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인적 피해가 결정적이지도 않았고, 프랑스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물론, 오스트리아군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오스트리아 전쟁 위원회는 다시 한번 만토바 구출 작전을 펼치기로 합니다.  이번에도 지휘관은 알빈치였습니다.

마침 1월 9일, 스트라스부르 인근 라인강 동쪽의 켈(Kehl) 요새에서, 드제(Desaix) 장군의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군에게 항복했습니다.  이로써 메인 무대인 라인강 동쪽에서 프랑스군을 모두 몰아낸 셈이 되었으므로, 합스부르크 왕가는 모질게 마음을 먹고 저 남쪽 이탈리아의 일을 마무리짓기로 했습니다.  라인강에서 작전을 펼치던 일부 연대를 북부 이탈리아로 이동시키고, 티롤에서 새로운 연대를 창설하는 등, 병력을 보강하여 오스트리아군은 이번에도 대략 4만7천명의 대군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이때 새롭게 편성된 연대에는, 오스트리아 황후 마리아 테레사 (Maria Teresa Carolina Giuseppina)가 손수 수놓은 연대기가 수여될 정도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기대는 컸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난번 3차 구원 작전에서 처절한 타이밍으로 탈출 기회를 놓쳤던 뷔름저와 만토바 수비병력을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로 합니다.  즉, 뷔름저에게 밀사를 보내 이번 작전에 대해 설명하고, 기회가 오면 만토바에서 출격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교황령 군대와 합류하도록 한 것입니다. 




(Kehl에서 항복했던 드제 장군.  항복했다니까 무능해보이지만, 이는 전략적 후퇴의 후위를 맡아 매우 잘 싸운 사례로서, 나폴레옹도 드제를 모로 장군 편에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애를 많이 쓸 정도로, 드제는 유능한 장군이었습니다.)



갑자기 여기서 교황령 군대라니 당황스럽겠습니다만, 이때의 전투 무대는 어디까지나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뿐이었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롬바르디아 이남에는 교황이 세속의 군주로서 직접 통치하는 국가인 교황령이 있었습니다.  당시 교황이던 피우스 6세(Pius VI)는 나폴레옹의 피에드몽 공략 당시 그 위세에 눌려 나폴레옹과 휴전을 맺었지요.  하지만 전통적인 카톨릭 국가이던 프랑스는 혁명 통에 완전히 반 카톨릭으로 돌아서서 신부들이 범법자로 쫓겨다니던 상황이었으므로, 그런 프랑스와 나폴레옹을 바라보는 교황의 시선은 고울 수가 없었습니다.  교황은 신성 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가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와 비밀리에 나폴레옹에 대항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편 나폴레옹도 병력을 보강할 수 있었습니다.  일부 본국에서의 보충 병력과 오스트리아와의 포로 교환으로 되돌려 받은 병력 등을 합해, 1797년 1월에는 약 4만3천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에도 보았듯이, 이런 넓은 지역을 그 정도의 병력으로 방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서, 방어군보다는 공격군이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마련이었습니다.  방어군은 필연적으로 여기저기 병력이 흩어질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이때 당시 나폴레옹의 병력은 아래 그림과 같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크게 보면, 북쪽은 주베르가, 동쪽은 오쥬로가 경계를 하고 있었고, 남쪽 만토바의 포위는 세루리에가 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세나와 레의 부대는 예비대로 있었고요.






이에 대해, 알빈치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양동 작전을 펼치기로 했습니다.  다만 전에는 북쪽이 보조 공격이었고, 동쪽에서 주력 부대가 쳐들어간 것에 비해, 이번에는 북쪽이 진짜 펀치, 동쪽은 페이크 펀치였습니다.   즉, 프로베라(Provera) 장군에게 1만4천의 병력으로 동쪽으로부터 도강하여 만토바를 위협하도록 했습니다.  이 작전을 먼저 펼쳐, 나폴레옹으로 하여금 그쪽에 병력을 집중시키게 하고, 알빈치 자신은 2만8천의 병력을 휘몰아 티롤로부터 텅빈 아디제 강을 따라 남하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가 뭔가 또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는 나폴레옹에게도 포착되었습니다.  1797년 1월 초, 프랑스 제7 후자르(Hussar) 연대의 셀소 갈렝가(Celso Gallenga) 중위는 정찰을 나갔다가 젊은 오스트리아군 사관 후보생(cadet) 한명을 사로잡습니다.  특히 수상했던 점은, 사로잡히던 순간, 이 젊은 사관 후보생은 뭔가를 급히 삼켜버리더라는 점이었지요.  뭔가 중대한 명령서를 가지고 있던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갈렝가 중위는 이 포로를 나폴레옹의 사령부로 직접 압송했습니다.



(나폴레옹에 따르면 기병대는 '전투 전에, 전투 중에, 그리고 전투 후에 매우 유용하다'고 했지요.  리볼리 전투가 그 좋은 예입니다.)



물론 나폴레옹의 앞에 선 이 젊은 (아마 10대 중반이었을 듯 한데) 사관 후보생은 아무 정보도 털어놓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이자를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갈렝가 중위는 깜짝 놀라, 정규 군복을 입고 자신에게 항복한 포로를 그렇게 총살할 수는 없다고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돌아온 나폴레옹의 말은 갈렝가 중위의 입을 다물게 하기 충분했습니다.

"총살대 앞에 한명이 아니라 두명을 세울 수도 있는데, 그 자리에 관심있나 ?"



(저는 담배를 안 피웁니다만, 원래 담배 맛의 절정은 firing squad 앞에서 피우는 담배라고 하더군요.)



이렇게 덧없이 불법적으로 살해된 소년 포로의 시체를 군의관이 해부하여, 밀납으로 밀봉된 명령서를 꺼냈다고 하는군요 !  그 명령서는 만토바 요새에 포위된 뷔름저 앞으로 가는 것이었고, 알빈치의 구원 병력이 제때 만토바에 당도하지 못한다면 남쪽으로 탈출하여 오스트리아-교황령 연합군과 합류하여 그 지휘를 맡으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로써 나폴레옹은 알빈치의 공격이 곧 있을 것이라는 것과, 남쪽 교황령 군대의 움직임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첫번째 공격은 바로 다음날 이루어졌습니다.  1월 8일, 아디제(Adige) 강 하류 쪽의 프랑스군 전초 기지를 오스트리아군이 공격해 온 것입니다.  이 공격을 주도한 오스트리아군은 레그나고(Legnago)에서 도강 지점을 찾던 프로베라(Provera) 장군의 부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1월 9일, 프랑스군의 근거지라고 할 수 있는 베로나(Verona) 근처에 주둔해있던 마세나의 부대에, 안개를 틈타 오스트리아군의 소규모 공격이 있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브륀(Brune) 장군은 군복에 7개의 총알 구멍이 뚫렸지만 기적적으로 몸은 전혀 다치지 않는 기적(?)을 보여주었고, 오스트리아군은 600명의 포로와 3문의 대포를 버리고 후퇴했습니다. 

당연히 나폴레옹의 눈길은 동쪽으로 쏠렸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아직 오스트리아의 주공이 북쪽인지 동쪽인지 확신이 가지 않았습니다.  동쪽 평원으로부터의 공격은 오스트리아 군의 규모치고는 너무 빈약했던 것입니다.  일단 나폴레옹은 휘하 사단들에게 북쪽과 동쪽 양쪽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촉각을 세웠습니다.  마침내 같은 날 오후, 북쪽의 주베르로부터도 오스트리아군의 탐색적 공격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아직 어느 쪽이 주공인지 판단할 수 없었던 나폴레옹은 각지에 흩어져 있던 부대들을 베로나 서쪽, 아디제 강 건너편으로 집결시킵니다.  적의 주공이 동쪽인지 북쪽인지 확실해지면 병력을 집중하기 위해서였지요.  마세나는 물론, 저 서쪽 치세(Chiese) 계곡 쪽을 지키던 레 장군의 부대도 이동했고, 심지어 만토바를 감시하던 세루리에의 부대에서도 병력이 차출되었습니다.  오쥬로의 부대는 동쪽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해 원위치에 일단 남았고, 저 남쪽에서 교황령 군대를 경계하고 있던 란의 부대는 만토바의 남쪽과 교황령을 함께 감시하게 명령받았습니다.




(리볼리 전투 전후의 각 군의 이동 경로)



이 단계에서 보여준 나폴레옹의 기동은 나폴레옹 방어전의 교과서적인 전술이었고, 바로 이 기동 덕택에 리볼리 전투의 승패는 이미 결정난 것이나 다음없게 되었습니다.  큰 그림을 보면 이렇습니다.  공격하는 오스트리아군은 1만4천의 병력으로 동쪽에서 페인트 모션을 보이면서, 실제로의 주공은 2만8천의 병력으로 북쪽에서 벌어졌습니다.  방어하는 나폴레옹군은 비록 전체 병력은 4만 3천으로서 오스트리아군에 뒤지지 않았지만, 어느쪽이 오스트리아의 주력 공격인지 알 수 없으므로 각지에 흩어질 수 밖에 없었지요.  가령 오스트리아의 주력 공격 지점인 코로나(Corona)를 지키고 있던 주베르의 부대는 고작 1만500명으로서, 공격해오는 알빈치의 2만8천에 대해 절대 열세였습니다.  나폴레옹이 피에드몽과 롬바르디아를 손쉽게 정복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공격군의 그러한 이점을 100% 활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긴 방어선에 병력을 무의미하게 분산 배치했던 오스트리아군의 방어 전술과 달리, 나폴레옹은 적으로부터 뭔가 공격이 감지되면 병력을 교통의 요지인 방어 중앙 지점에 집결시켰습니다.  일단 병력을 집중시켰다가, 적의 주력 부대의 소재가 확실해지면 벼락같이 들이치겠다는 의도였지요.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휘하 부대의 기동력이 좋아야 했습니다. 기동력이야말로 나폴레옹 전술의 핵심이라고 여러 차례 말씀드렸었지요.  이렇게 기동력 있는 전술을 위해서는 병사들의 행군 스태미너만 좋아서는 곤란했고, 지휘관이 그 일대의 도로 및 지형에도 숙달되어 있어야 했지요.  (나폴레옹과 지도에 대해서는 바클레르 달브 (Bacler d'Albe), 나폴레옹의 중추 신경   참조) 

이렇게 병력의 기동성이 좋고, 지휘관이 지형 지물에 익숙해있다면, 적이 어디로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방어전의 약점을 순식간에 장점으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바로 내부 이동의 유리함 때문이지요.  아래 그림에서 보시면 아시겠습니다만, 공격하는 적에 비해, 내부에서 방어하는 아군은 훨씬 단거리를 이동하여 병력의 이합집산을 자유자재로 이룰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되면 나폴레옹은 전매 특허인 백전백승의 기술, 즉 전체 병력에서는 열세라도, 어느 한순간의 전투 현장에서는 프랑스군이 더 다수인 상태를 쉽게 연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리볼리 전투는 그 과정을 정말 교과서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적이 100리를 걸어야 할 때, 나는 10리만 걸으면 된다)



나폴레옹에게 어느 쪽이 오스트리아군의 주요 공격 루트인지에 대한 정보는 쉽게 포착되었습니다.  1월 13일, 주베르의 앞에 좀더 많은 오스트리아군이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우세한 병력을 이용해 측면으로 우회 포위하려는 움직임까지 있었으므로, 주베르는 코로나에서 버티지 못하고 리볼리로 후퇴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즉각 마세나와 레에게 병력을 끌고 리볼리로 달려올 것을, 그리고 동쪽 평원에 남아 있어야 했던 오쥬로에게도 휘하의 포병대와 기병대를 차출하여 리볼리로 보낼 것을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내부 이동의 유리함이 있다고 해도 부대 이동에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마세나의 부대는 14일 새벽에나, 그리고 레의 부대는 14일 정오 무렵에나 당도할 예정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들의 병력을 다 합한다고 해도, 여전히 오스트리아군보다는 병력 면에 있어서 약간 열세였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이런 어려운 점은 리볼리의 지형이 어느 정도 메꾸어주었습니다.  실은 바로 이런 지형상의 유리한 점 때문에 주베르가 리볼리를 방어 거점으로 택한 것이었지요.  즉 리볼리는 해발 몇백미터 정도의 낮은 고원지대로서, 동쪽은 아디제 강이 흐르는 급한 계곡이었고, 북서남 3면은 낮은 언덕으로 둘러싸인 지역이었습니다.  이 고지대를 사수하느냐 여부가 베로나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방어 지역의 사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1월 13일 내내 리볼리 지역을 고수하며 나폴레옹의 명령을 기다리던 주베르에게,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13일 밤, 리볼리 고지에서 저 아래 계곡에 캠프를 친 오스트리아군의 야영 모닥불을 본 주베르는, 자신보다 3배는 되어보이는 병력에 기가 질려, 그 날 밤 리볼리를 버리고 부셀렝고(Bussolengo)로 철수하기로 합니다.

나폴레옹이 리볼리에 나타난 것은 14일 새벽 2시였습니다.  나폴레옹도 리볼리 고지에서 계곡의 오스트리아군 캠프 파이어를 보고는, 적어도 4만명은 넘어보인다고 판단을 했습니다.  마세나와 레의 병력이 제때 도착한다고 해도 2대1의 열세인 상황이었지요.  (실제로는 오스트리아군은 2만8천이었습니다.)  또한 나폴레옹은 캠프 파이어의 배치를 보고, 적이 총 5개 부대로 이루어져 있고, 그 중에서도 가장 멀리 떨어진 서쪽 부대의 위치로 보아, 그 부대(루시냥 Lusignan 의 부대였습니다)는 정면 공격보다는 서쪽으로 우회하여 프랑스군의 배후로 우회 기동을 할 것 같다고 정확하게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정확하게 포병대와 기병대에 있어서는 프랑스군이 절대 유리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런 산악 지대를 강행 돌파하려면 포병대를 함께 끌고 오지는 못했을 거라는 판단이었지요.  나폴레옹이 그날 밤 관측하기로는 (실은 정말 이날 밤 관측하고 그렇게 판단한 것인지, 또는 나중에 전투 결과를 보고 '내가 그날 밤 판단해보니까 말이야' 하고 비망록에 허세를 부린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지리적 위치로 볼 때, 그 5개 부대 중 가장 동쪽에 위치한 부대 (카스다노비치 Quosdanovich 의 부대였습니다)에 포병대와 기병대가 집중되어 있을 것이고, 그들은 아디제 강변에 위치한 오스테리아 (Osteria) 협곡을 통해 리볼리로 쳐들어 올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 부대가 오스트리아 공격의 핵심이라고 생각했고, 그들이 오스테리아 협곡으로 밀고 들어오려면 그 협곡을 제압할 수 있는 고지에 위치한 산 마르코(San Marco) 성당을 먼저 점령해야 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즉, 만약 프랑스군이 이 산 마르코 성당 앞에 강력한 포병을 배치하여 오스테리아 협곡에 불벼락을 퍼붓는다면 카스다노비치의 부대는 발이 묶일 거라는 것이었지요.  결국 트롬발로레(Trombalore) 고지 동쪽에 위치한 산 마르코 성당의 사수 여부가 이번 리볼리 전투의 핵심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리볼리 전투는 나폴레옹이 자랑할 만한, 정말 교과서적인 전투였고, 나폴레옹의 정확한 판단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판단이 끝나자, 즉각 주베르에게 다시 리볼리로 돌아올 것을 명령했고 (하루밤 사이에 잠도 못자고 괜히 왔다리갔다리 해야 했던 불쌍한 프랑스 병사들... 어쩌면 나폴레옹의 유명한 명언 '이 산이 아닌가벼'도 여기서 나온 것이 아닐지...) 산 마르코 성당에 특히 집중하여 병력을 배치했습니다.  아울러 마세나의 부대 중 일부는 루시냥이 우회 공격할 것으로 예상되는 타소(Tasso) 계곡 쪽에 배치하여 적이 프랑스군 배후로 도는 것에 대비했습니다. 

전투는 정말 나폴레옹의 예상대로 산 마르코 성당 부근에서 벌어졌습니다.  주베르의 부대가 산 마르코 성당에 진입하자마자 간발의 차이로 옥스케이(Ocksay)의 부대가 현장에 도달했고, 그날 새벽 결국 프랑스군은 산 마르코 성당 확보에 성공했습니다.  이어서 해가 밝은 뒤 벌어진 정면 전투에서, 크노볼로스(Knobolos)와 맆테이(Liptay)의 부대가 1만2천이라는 우세한 병력을 바탕으로 주베르를 밀어붙였으나, 주베르는 고지라는 이점과 마세나의 지원 병력에 힘입어 간신히 정면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한편 동서 양 측면에서 오스트리아군의 위협은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비록 산 마르코 성당은 확보했지만, 아디제 강 건너 배열한 부카소비치(Vukassovich)의 포병대의 지원을 받은 카스다노비치의 7천 병력은 동쪽 오스테리아 협곡을 희생을 무릅쓰고 어거지로 밀고 들어올 기세였습니다.  또한 서쪽에서 우회 공격을 하던 루시냥의 4천 병력도, 그를 막으라고 배치했던 마세나의 파견대를 가볍게 밀어 젖힌 뒤 아피(Affi)에 접근하여 프랑스군의 후방 교통로를 끊을 태세였습니다.  이때 나폴레옹이 가진 예비 병력은 여기저기 병력을 나눠주고 3~4천 밖에 남지 않은 마세나의 예비대 뿐었습니다.  아직 레의 병력은 도착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결국 프랑스군의 수적 열세가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지도의 핵심은 동쪽의 Quosdanovich와 서쪽의 Lusignan의 움직임입니다.)



이 심각한 순간에, 나폴레옹은 병력 운용의 고전적 원칙을 지킵니다.  먼저 마세나의 예비병력이던 제18 반편여단(demi-briagde, 약 2~3천 ?)을 보내, 루시냥의 위협을 분쇄하여 후방 교통로를 먼저 확보한 것입니다.  손자병법에도 '퇴로를 확보하기 전에는 전진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지요.  보통 갱 영화나 기업 영화를 보더라도 'We don't take chances (우리는 운을 믿고 일을 벌이지 않습니다)' 라는 대사가 자주 나오는데, 여기에 딱 들어맞는 이야기입니다.  흔히 나폴레옹을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는 용맹무쌍한 풍운아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엘리트 교육을 받은 정규 장교답게 교과서 원칙에 충실했습니다. 

한편, 나폴레옹은 여전히 동쪽 오스테리아 협곡을 향한 카스다노비치의 공격을 분쇄하는 것이 이날 승리의 결정적 요소라고 판단했습니다.  정면의 트롬발로레 능선을 공격하던 옥스케이, 크노볼로스, 맆테이의 부대는 비록 수자는 1만2천의 대군이었고, 또 아직 대오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만, 고지를 공격한다는 불리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기진맥진한 상태인 것이 눈에 뻔히 보였거든요.  나폴레옹은 과감하게 트롬발로레 능선 방어 병력 중 일부를 빼내어 오스테리아 협곡 방어에 투입했습니다.  그리고 이 조치가 결국 이날의 최종 승리를 결정짓습니다.

카스다노비치의 병력은 쏟아지는 프랑스군 포병대의 포도탄에도 불구하고 오스테리아 협곡을 꾸준히 통과했습니다.  치열한 포격 속에, 오스트리아군의 탄약 수송차 2대가 연쇄 폭발하여 끔찍한 피해를 입혔습니다만, 그래도 오스트리아군은 전진을 계속하여 마침내 리볼리 고지에 올라섰습니다.  이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프랑스군의 보병과 기병의 연합 공격이었습니다.  실은 이 프랑스 보병 및 기병의 숫자는 불과 500에 불과했습니다만, 그 중 한명의 기병은 이력서가 무척이나 특이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특이한 이력서를 가진 기병의 이름은 앙트완 샤를 루이 드 라살(Antoine Charles Louis de Lasalle)로서, 당시 제22 경기병 연대의 소령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소귀족 출신으로서, 1775년 생이니까 나폴레옹보다 6살 어린 젊은이였습니다.  라살은 가문을 배경으로, 불과 14살의 나이에 소위 계급을 달았는데, 프랑스 혁명 발발 이후 라살이 혁명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는데도 불구하고 귀족이라는 이름으로 받은 계급은 인정할 수 없다는 규정에 따라 장교 계급을 박탈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라살은 여전히 프랑스와 프랑스군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사병으로서 계속 기병대에 복무했습니다.  북부 이탈리아의 제23 엽기병 연대 (23rd Horse Chasseur Regiment)에서 하사관으로 복무하던 그는 기병 돌격으로 적의 포병진지를 탈취한 공로로 장교 승진을 제안받지만, 그럴 경우 자신의 동료들과 헤어지게 된다며 거절할 정도로, 뭔가 특이한 인간이었습니다.




(당대의 경기병의 전형적인 모습답게, 라살은 음주와 여자 문제로 많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만, 전투에서는 용감무쌍하기 이를데 없었습니다.)



그의 인간됨을 보여주는 일화는 이 뿐만이 아닙니다.  결국 나중에 다시 장교로 승진한 그는, 계속 북부 이탈리아 방면군에서 복무했는데, 전쟁 초기에 적의 포로가 되었다가 포로 교환으로 풀려나면서, 당시 오스트리아 영토였던 비센차(Vicenza)에서 왠 이탈리아 귀부인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 귀부인을 잊지 못한 그는, 1796년 12월 17일, 그러니까 아르콜레 전투가 끝난 지 한달 정도 되던 때, 일단의 기병들을 이끌고 야음을 틈타 비센차로 침투했습니다.  목적은 이 귀부인과의 러브 메이킹이었던 것은 물론이었지요.  원래가 귀족 가문 출신이던 라살은 이탈리아어와 독일어에도 능통하여, 야간에 여러번 오스트리아 초계병들과 마주쳤으나, 어둠과 그의 유창한 독일어를 이용하여 적을 속여 넘기고 무사히 비센차에 도착, 그 목적(?)을 무사히 이루어냅니다.  문제는 귀환 길이었는데, 이미 날이 밝은지라 그의 프랑스 군복이 훤히 보이는 상황에서는 더 이상 뻥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100여명 정도의 오스트리아 경기병들에게 포위되었는데, 그들은 치열한 격투를 벌이며 흩어져 서쪽 프랑스군 진영으로 탈출했습니다.   홀로 남은 라살은 4명의 오스트리아 경기병에게 추격을 당했는데, 그는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용감히 싸워 적 4명에게 모두 부상을 입혔으나, 그도 말을 잃고 결국 바치글리오네(Bacchiglione) 강을 맨몸으로 헤엄쳐 건넜다고 합니다.  여기서 동료들과 합류한 그는, 동료 중 1명이 노획해 온 오스트리아군의 군마를 타고 부대에 복귀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날 나폴레옹이 참석하는 열병식이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 앞에 뻔뻔스럽게 오스트리아군의 군마를 타고 나타난 라살은 당연히 나폴레옹의 눈에 들어왔고, 자초지종을 캐묻는 나폴레옹에게 솔직한 대답을 한 라살은 군법회의에 처해질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그러나 라살은 자기가 간밤에 오스트리아군 후방에서 알아낸 이런저런 오스트리아군 정보를 변명이랍시고 떠벌였고, 그런 라살에게서 뭔가 비범한 (사실 이런 인간이 비범하지 않다면 어떤 인간이 비범하겠습니까) 기질을 본 나폴레옹은 그를 일단 용서했다고 합니다.

다시 리볼리 현장으로 돌아오도록 하지요.  이제 카스다노비히의 병력이 마침내 프랑스군의 방어를 뚫고 리볼리 고원에 올라선 위기의 순간이었지요. 

나중에 나폴레옹의 매제가 되는 르클레르(Victor Emmanuel Leclerc) 대령이 500명 정도의 보병을 이끌고 오스트리아군을 막아섰고, 용감한 기병 소령 라살이 불과 26기의 경기병을 이끌고 미친듯이 오스트리아 보병대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아마 오스트리아군이 대오를 유지한 상태였다면 라살 소령의 기병대는 산산조각이 났겠습니다만, 치열한 포도탄 공격을 뒤집어 써가며 계곡을 기어올라 막 고원 지대에 올라선 오스트리아군은 필연적으로 대오가 헝클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렇게 헝클어진 보병의 대오 속으로 뛰어든 26기의 경기병, 그것도 미친 호색한 라살이 이끈 경기병들의 공격은 치명적인 효과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전체 연대가 공포에 사로잡혀 무질서하게 후퇴하기 시작했고, 카스다노비치도 결국 산 마르코에서 쏟아지는 프랑스 포병대의 사정권 밖으로 병력을 후퇴시켜야 했습니다.  전투가 끝난 뒤 세어보니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의 군기를 11개나 탈취했는데, 그 중 6개가 라살이 탈취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카스다노비치의 공격이 분쇄되자, 나폴레옹은 전 병력을 집중하여 오스트리아군이 정면을 밀어붙였습니다.  그렇지않아도 지지부진하던 옥스케이, 크노볼로스, 맆테이의 공격은 곧 퇴각으로 바뀌어야 했습니다.





(리볼리 전투는 절반 정도는 산악 전투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루시냥의 서쪽 측면 우회 공격은 더욱 비참한 결말을 맞았습니다.  마세나의 제18 반편여단과 맞닥뜨려 주춤해하던 루시냥의 4천 병력 뒤에, 뒤늦게 도착한 레(Rey)의 4천이 나타난 것입니다.  나폴레옹군을 포위하려던 전략은 완전히 빗나가 오히려 포위되어버린 루시냥의 부대는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나, 결국 살아서 철수할 수 있었던 것은 2천명 뿐이었습니다.  루시냥은 바위 동굴 틈에 숨었다가 전투가 끝난 뒤 간신히 탈출하는 추태를 보였습니다.

결국 오후 4시가 되자 알빈치는 총퇴각에 나섰고, 나폴레옹은 주베르와 레에게 그 추격을 맡긴 뒤, 자신은 마세나와 함께 동쪽으로 침입한 프로베라를 상대하러 나섭니다.  아무래도 그쪽도 오쥬로의 병력만으로는 열세였기 때문이었지요.  그 다음날 주베르가 추격을 중지했을 때는, 알빈치 휘하의 2만8천 중 남아있는 것은 고작 1만4천에 불과했습니다. 

저 위에 루시냥 부대의 비참한 결말에 대해 간단히 썼습니다만, 사실 가장 비참한 결말은 만토바 요새 구원에 가장 근접했던 프로베라였습니다.  프로베라는 오쥬로의 넓게 분산된 얇은 방어선을 쉽게 뚫고 아디제 강 도하게 성공했습니다.  그것까지는 좋았으나, 레그나고에서 만토바로 가는 도중에 있던 생-조르쥬(Saint-Georges) 요새에서 길이 막혀 15일 하루를 허송세월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월 15일 밤, 프로베라의 전령 한명이 마침내 만토바에 입성하여, 뷔름저에게 그 다음날 아침에 곧장 북쪽으로 뚫고 나와 프로베라와 병력을 합치자는 협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요새의 총병력은 약 3만이었지만, 실제로 싸울 능력이 있는 건강한 병사들은 불과 1만명 정도였던 것입니다.  그 다음날 만토바 요새에서 출격한 뷔름저는 아니나다를까 세루리에의 수비병력에게 덜컥 가로 막혀 결국 다시 요새로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또, 작은 요새 공략에 끙끙대던 프로베라는, 어느덧 자신이 뒤에서 추격해온 오쥬로의 부대와, 북쪽에서 내려온 마세나의 부대에 완전히 포위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프로베라는 휘하 7천 병력과 함께 전원 항복했습니다.

결국 리볼리 전투는 프랑스군이 약 2천2백 전사에 1천명의 포로, 도합 3천2백의 손실을 봤고, 오스트리아군은 4천의 전사에 8천의 포로, 도합 1만2천의 손실을 보면서 끝났습니다.  어떤 자료에서는 프랑스군이 약 5천에, 오스트리아군은 1만5천의 손실을 본 것으로 나옵니다.





(이 두 사진을 보시면 왜 뷔름저가 절망했는지 아실 수 있습니다.)



뷔름저의 상황은 여기에서 그대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알프스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서, 봄이 되기 전에는 더 이상 오스트리아의 구원군이 올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배식량을 절반으로 줄이면서 버티던 만토바 요새에서는, 이제 며칠 분의 식량 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동안 늪지를 옆에 낀 좋지 않은 환경과 식량 부족, 그리고 그 동안의 전투로 만토바 요새는 포위가 시작된 이후로 무려 16,333명의 사상자를 낸 상황이었습니다.  이러다가다는 전원이 앉아서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이때, 나폴레옹은 매우 관대한 항복 조건을 뷔름저에게 제시했고, 뷔름저는 그를 감사히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리볼리 전투가 끝난 뒤 약 2주일 뒤, 2월 2일에 뷔름저는 조건부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만토바 요새를 비워줍니다.  뷔름저는 7백명의 호위대와 6문의 대포를 거느리고 참모진과 함께 자유의 몸으로 오스트리아로 귀환했고, 나머지 병사들도 일단 항복했다가, 가석방 조건으로 오스트리아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제발로 만토바 요새를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불과 1만6천명 정도였고, 나머지 1만명은 걸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만토바 요새를 함락시킴으로써, 이제 나폴레옹은 확실히 북부 이탈리아를 완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동안 그를 괴롭혔던 포병 장비의 부족을 이번 기회에 완전히 해소하게 됩니다.  만토바 요새에 있던 무려 325문의 대포와 함께, 제1차 만토바 구원 작전 때 상실했던 179문의 대포도 모두 회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나폴레옹은 원래 목표이던 비엔나로의 진격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PS. 

전에 어떤 분께서 당시 포로로 잡은 병사들의 처리는 어떻게 되냐고 여쭈어보셨는데, 대략 위와 같이 가석방 처리되었습니다.  이렇게 전투가 끝날 때마다 쌍방에 수천명씩 포로가 생기는데, 그걸 어떻게 다 일일이 본국에 후송하여 먹이고 입히고 하겠습니까 ?  대부분의 경우 그 지휘 장교의 명예를 믿고, 정식 포로 교환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적대 행위에 투입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상대편에게 되돌려 주었습니다.  즉, 석방된 포로들은 일단 전투에 참여할 수 없었고, 그에 상응하는 숫자의 상대방 포로를 적에게 되돌려 준 다음에야 전투에 투입이 가능했습니다.  이는 당시 유럽 사회 지도층의 명예와 신용이 상당히 중요하게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저 위의 갈렝가 중위가 붙잡은 포로의 경우처럼, 비신사적으로 살해되거나 학대당하는 경우도 많았을 것입니다.  당시 스페인 전장에서 프랑스군에게 포로가 된 어떤 영국군 장교의 수기를 읽어보니, 전투 현장에서 자기가 항복을 하려는데, 프랑스 출신의 병사는 자신을 친절히 대하며 항복을 받아주려고 했지만, 그 프랑스 병사가 잠깐 딴 곳으로 간 사이 우라부락한 이탈리아 출신의 병사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바람에 정말 공포에 질렸다는 이야기가 씌여 있습니다.  그때 자신은 저 멀리 있는 프랑스 병사를 향해 '용감하고 신사적인 프랑스군은 포로를 죽이지 않는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서 그 병사가 뒤돌아보는 바람에 목숨을 건졌다고 하더군요. 




(전투 투입전 거쳐야 하는 필수 불어 시간입니다.  해석은 Don't shoot.  I surrender ! 입니다.)



그 영국군 장교의 수기에서 재미있었던 일화가 한가지 더 있습니다.  당시 영국군 장교들 중 일부는 프랑스어를 잘 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어서, 항복할 때 곤란한 점이 많았나 봅니다.  그래서 항복할 때 외치는 프랑스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는 무조건 'Jemmy Round'를 외치라고 장교들끼리 반농담 반진담으로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건 약간 잘못된 것 같은데, Jemmy Round (둥근 제미, 제미 라운드)와 Je me rends (I return myself, 항복한다, 즈 므 랑)와는 발음이 상당히 차이가 나는 것 같거든요.  하긴 우리야 맨 끝의 d 발음을 열심히 하려고 하지만 서양애들은 별로 안하나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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