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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나폴레옹, 이탈리아를 침공하다 - 아르콜레의 용자

by nasica-old 2011.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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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나폴레옹의 패배' 편에서는 바사노 및 칼디에로 전투에서 알빈치가 지휘하는 프리울리 군단의 숫적 우세에 맥을 추지 못하고 패배하는 나폴레옹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결국 패배로 끝난 칼디에로 전투 (11월 12일) 바로 다음날에 나폴레옹이 파리 총재 정부에 쓴 편지에는, '다시 싸워는 보겠으나 도저히 오스트리아의 대군을 막아낼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라는, 매우 나폴레옹스럽지 못한 패배감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의 상황은 더 이상 나빠지기가 어려울 정도로 최악이었습니다.  동쪽에서 밀려오는 알빈치의 프리울리 군단만 해도 당해내기 어려운 상태인데, 바로 북쪽에서는 다비도비치가 이끄는 티롤 군단이 보부와 장군의 (이제는 5천명 수준으로 줄어든) 빈약한 부대를 언제라도 밀어버리고 남진할 기세였던 것입니다.  여기에다, 만토바 요새에 포위된 뷔름저의 약 2만 대군도 문제였습니다.  그 중 절반이 병자라고는 해도, 그래도 그를 포위한 프랑스 군 5천명보다는 훨씬 많았습니다.  이들이 성문을 열고 북진한다면, 나폴레옹은 승리는 커녕 3면에서 포위되어 전멸당할 위기에 봉착하게 되는 형국이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아예 만토바고 뭐고 다 포기하고, 저 멀리 아다 강 서쪽으로 후퇴할 생각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 고민에 빠져 있는 나폴레옹에게 한가지 실마리가 잡힙니다.  오스트리아군이 지나치게 꾸물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패배한 칼디에로에서 베로나까지의 거리는 불과 15km가 안됩니다.)



가령 11월 12일 칼디에로 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군은 당장 그날 밤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베로나(Verona)까지 후퇴했습니다.  칼디에로에서 베로나까지의 거리는 불과 15km 정도로서, 완전무장한 부대도 4시간 행군이면 충분히 이동할 수 있는 거리에 불과했거든요.  그런데, 나폴레옹이 알빈치의 입장이었다면 당장 그 다음날에라도 베로나까지 추격해갔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알빈치는 그 다음날, 또 그 다음날이 되어도 베로나로 추격해오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칼리아노 전투에서 다비도비치에게 패배하여 리볼리(Rivoli)로 후퇴한 보부아(Vaubois) 장군에게도, 다비도비치의 추격은 관측되지 않았습니다.  대체 오스트리아군은 무엇때문에 머뭇거리고 있었을까요 ?

일단 다비도비치는 형세를 관망하고 있었습니다.  자라에게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다비도비치는 이미 나폴레옹에게 혼쭐이 났던 터라, 이번 공격의 주력인 알빈치의 프리울리 군단이 나폴레옹을 확실히 밟아버리는 것을 보기 전에는, 감히 남쪽으로 내려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저 눈치만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알빈치의 경우는 사정이 약간 달랐습니다.  알빈치는 18세기의 전장에서 뼈가 굵은 노장답게, 전통적인 전쟁 방식, 즉 후방의 보급로를 확보하고 교통로를 확고히 하는 것에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뒤에 따라오지 않는다면 아무데도 안가는 것이 신사의 전쟁 방식입니다.)



나폴레옹 전법의 핵심은 기동력이었습니다.  18세기 말 ~ 19세기 초의 유럽의 형편없는 도로 환경에서 신속한 보급을 기대할 수는 없었으므로, 나폴레옹은 보급을 과감히 생략하고 현지 조달(...이라기보다는 약탈)에 의지했었지요.  (이에 대해서는 나폴레옹과 케사르의 차이점 - 진지 구축  참조)  그러나 알빈치는 귀족 신사답게, 현지 주민들을 약탈하거나 할 생각은 하지 않고, 후방으로부터의 정식 보급에 의존했습니다.  따라서 적절한 위치에 적절한 보급창을 확보하기 전에는 섣불리 전진하지 않는, 매우 보수적인 전법을 사용하고 있었지요.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의 이 점을 이용하여, 마지막 모험을 하기로 작정합니다.  즉, 적이 그렇게 보급로를 소중히 여긴다면, 그 소중히 여기는 것을 파괴하자는 것이지요.  그는 알빈치가 칼디에로 약간 동쪽의 빌라노바(Villanova)라는 곳에 임시 보급창을 마련한 것을 알고, 바로 그곳을 탈취하기로 합니다.  삼국지에서 조조가 원소와 대결했던 관도대전에서, 병력 차이에서 상대가 되지 않자 원소군의 보급창이 있던 오소를 공략했던 것과 유사한 상황이었습니다.





(조조가 제1의 세력으로 떠오르게 된 결정적인 전투, 관도대전입니다.  저 오소 공략 작전의 성공이 조조 승리의 결정적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말이 쉽지, 이 작전은 매우 위험천만한 것이었습니다.  먼저, 나폴레옹이 노리고 있던 빌라노바는, 지도에서 보이듯이, 또 상식적으로 당연히, 당시 알빈치의 주력이 주둔하고 있던 칼디에로 후방에 있는 곳이었습니다.  빌라노바를 치기 위해서는 알빈치의 주력을 피해 북쪽이나 남쪽으로 빙 돌아가야 했는데, 만약 빌라노바에 상당한 적의 수비병력이 있어 전투가 길어진다면, 특히 알빈치가 나폴레옹의 우회 공격 소식을 듣고, 보급로의 보호를 위해 동쪽으로 병력을 되돌려 공격해온다면, 적의 후방에 침입한 나폴레옹이 역으로 포위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묘하게도 북쪽의 티롤 군단을 이끌고 있는 다비도비치가 칼리아노 전투 이후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긴 했지만, 사실 그건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지요.  원래대로라면 즉각 남하하여 이 난처한 처지의 나폴레옹을 사정없이 밀어붙여 더 난처하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다비도비치를 막고 있는, 사실 막고 있다기보다는 그냥 그 앞에 웅크리고 있던 보부아 장군의 프랑스군은 이제 불과 5천명 수준의 패잔병 뿐이라서, 1만이 훨씬 넘는 다비도비치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격퇴할 수 있었거든요.  만약 다비도비치가 밀고 내려온다면, 그건 나폴레옹의 후퇴로가 끊긴다는 뜻이었습니다.  따라서, 보부아로부터 '다비도비치가 내려옵니다 !'라는 전갈이 오자마자 나폴레옹은 즉각 공격을 중단하고 서쪽으로 줄행랑을 쳐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시대의 풍운아답게, 과감한 도박을 하기로 한 것이지요.  나폴레옹은 적의 기동을 최대한 제한하고, 자신의 이동은 최대한 원할하게 하기 위해 주변 지형을 최대한 활용합니다.  즉, 아디제(Adige)강의 해당 지역 동쪽은 습지가 많아서, 제방길이나 둑길을 통해서만 부대 이동이 가능했습니다.  따라서 아디제 강 동쪽에 있는 오스트리아군의 이동이 자유롭지 못했고, 오스트리아군의 숫적 우세가 그다지 위력을 발휘할 수도 없었지요.  나폴레옹은 베로나에 불과 3천명의 수비대만 남겨두고, 약 2만명의 병력을 박박 긁어모아 아디제 강 서쪽 강변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 뒤, 롱코(Ronco)에서 도강하여 북상하기로 했습니다.





(좌측 상단의 베로나로부터 아디제 강변을 따라 이동하여, 저 오른쪽 아래의 롱코에서  도강하여 아르콜레를 거쳐 빌라노바로 가는 것이 나폴레옹의 계획이었습니다.)



마침내 11월 15일 새벽,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예정대로 롱코에서 부교를 놓고 강을 건너 북상했습니다.  이번에도 나폴레옹의 원투 펀치라고 할 수 있는 오쥬로와 마세나의 부대들이 먼저 다리를 건넜고, 오쥬로는 아디제 강의 지류인 작은 하천 알포네(Alpone)의 제방길을 따라 북상, 마세나는 소식을 듣고 몰려올 알빈치의 지원군을 막기 위해 북서쪽으로 향한 둑방길을 따라 전진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작전이 순조로왔습니다만, 얼마 안되어 심각한 장애물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빌라노바로 가기 위해서는, 북진하다가 반드시 알포네(Alpone) 강을 건너야 했고, 그 도하 지점은 아르콜레(Arcole)라는 마을 옆에 놓인 작은 목제 다리였습니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도, 이 다리를 무려 2천명의 오스트리아군이 2문의 대포까지 거느리고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오스트리아 수비대는 나폴레옹의 작전 계획에 전혀 들어있지 않던 것이었습니다. 

오쥬로는 카스티글리오네의 용장답게 돌격 앞으로를 외치고 밀어붙이려 했습니다.  계획에 없던 것이긴 하지만, 그래봐야 고작 2천의 수비병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여기서 나폴레옹은 자기 꾀에 자기가 빠지고 맙니다.  나폴레옹이 이 지역에서 작전을 펼치려 했던 이유, 즉, 이 지역이 습지대라서 둑방길과 제방길로만 이동할 수 있으므로, 숫적 우세가 별로 도움이 안된다는 사실이, 여기서는 오히려 프랑스군의 발목을 잡은 것입니다.  오쥬로가 기세좋게 '돌격 앞으로 !  다 밀어버려 !'를 외친지 불과 몇십분 만에, 프랑스군의 공격은 실패로 끝나 그야말로 진흙탕 속에 빠지고 맙니다.

소식을 듣고 허둥지둥 달려온 나폴레옹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오쥬로 자신을 포함한 프랑스군 전원이, 빗발치듯 날아오는 오스트리아군의 총탄과 캐니스터탄에 압도되어, 진흙투성이인 알포네 강둑 아래에 머리를 숙이고 웅크린 모습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습니다.  지금 이 다리를 통과하지 못하면, 곧 몰려올 알빈치의 주력 부대에 의해 프랑스 이탈리아 방면군 전체가 위기에 빠질 지경이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병사들에게 당장 도랑에서 몸을 일으켜 남자답게 돌격하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또, 자신은 안전한 후방에서 웅크린 채 그런 명령을 내린다면 그 명령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던 나폴레옹은, 자기 자신이 직접 커다란 삼색기를 들고 제방 위에 서서 오스트리아 군의 총탄에 몸을 그대로 노출한 채 전투를 독려했습니다.




(아르콜레 다리 위의 나폴레옹을 그린 많은 그림 중 하나입니다.  당시 상황이 꼭 이랬다는 것은 아니지요.)



결과는 그다지 신통치 않았습니다.  아무리 머스켓 소총의 위력과 정확도가 형편없는 시절이라고 해도, 좁은 다리 위를 돌파하기에는 적의 수비 병력이 너무 많았습니다.   공격에 나섰던 주요 지휘관 거의 전원, 즉, 봉(Bon), 베르디에(Verdier), 베른느(Verne) 그리고 용장 란(Jean Lannes)까지 모두가 부상을 입고 쓰러졌고, 공격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습니다.  또, 커다란 삼색기를 들고 화려한 장교복을 입은 나폴레옹 및 그 참모진의 모습은 오스트리아군에게 좋은 사격 표적지를 제공한 셈이 되었습니다.  나폴레옹 자신은 정말 기적적으로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지만, 그 주변에 서있던 참모 장교들 중 여러명이 총탄에 부상당했고, 특히 부관이었던 뮈롱 (Jean-Baptiste Muiron)은 현장에서 즉사했습니다. 




(베르네 Vernet 가 그린 아르콜레 다리의 나폴레옹입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아르콜레 다리의 신화가 만들어집니다.  아르콜레 전투는 나폴레옹의 1796년 이탈리아 작전에서 가장 피말리게 고전한 전투이긴 합니다만, 약간 지나칠 정도로 많은 화가들이 바로 이 전투 장면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들은 모두 나폴레옹이 큰 깃발을 들고 병사들 선두에서 다리를 건너는 것을 묘사하고 있지요.  하지만 정설은, 나폴레옹은 다리 점령에서 앞장을 서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위에서 제가 묘사한 대로, 강 둑 위에서 병사들을 독려했지요.  또, 흔히 뮈롱이 위기의 순간에 몸을 던져 나폴레옹을 구하고 대신 총탄을 맞은 것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만, 그것도 정확한 사실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영화 매트릭스를 찍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사람이 날아오는 총탄을 눈으로 보고 몸을 던져 막았겠습니까 ? 

사실이야 어쨌건, 나폴레옹은 일반 대중의 존경을 끌어내기 위해 신문이나 그림을 통한 연출 효과를 200%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림에서도 강둑 말고, 다리 위에 선 모습으로 묘사를 했지요.  또, 뮈롱의 죽음도 미화하여, 나중에 진수된 프랑스 군함 1척의 이름을 뮈롱으로 명명하기도 했습니다.





(아르콜레 다리에서의 진흙투이성이의 혈전)



하지만 이건 다 나중의 이야기입니다.  당장 이날 나폴레옹 자신이 멀쩡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참모 장교가, 보다 못해 나폴레옹을 강제로 끌어내려 다른 병사들처럼 강둑 아래로 몸을 숨기도록 쳐박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과정이 조금 난폭했는지 (나폴레옹은 원래 상당히 오버하는 성격이라서, 절대 순순히 강둑에서 내려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도랑 물에 쳐박혀 하마터면 익사할 뻔 했다고 합니다.  익사할 뻔 했다는 이야기가 얼마나 사실인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강둑 아래에서 다른 병사들처럼 진흙투성이가 된 것은 사실이라고 합니다.  그로(Gros)나 베르네(Vernet) 등의 거장들이 그린 낭만적인 그림과는 무척 다른 모습이었겠지요.




(그로 Gros 가 그린 불후의 명작, 아르콜레 다리의 나폴레옹입니다.  이때만 해도, 나폴레옹은 화려한 복장을 즐겨 입었습니다.)



한편, 알빈치에게도 나폴레옹이 남쪽에서 자신의 보급로를 끊기 위해 우회 기습을 했다는 급보가 날아들었습니다.  알빈치에게는 두가지 옵션이 있었습니다.  즉, 나폴레옹의 도발에 대응하여 즉각 병력을 돌려 나폴레옹을 상대하거나, 아니면 그대로 원래 목적인 베로나 점령 및 만토바 요새의 구원을 수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두번째 옵션, 즉 나폴레옹이 엉뚱한 곳에서 진흙투성이 싸움을 벌이도록 내버려두고, 오히려 나폴레옹의 본진인 베로나가 텅빈 틈을 타 베로나를 점령한 뒤, 북쪽의 다비도비치, 그리고 남쪽 만토바 요새의 뷔름저와 합류하여 나폴레옹을 역포위했다면 나폴레옹은 여기서 끝장이 났을 것입니다.  사실 빌라노바의 보급창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었거든요.  다비도비치의 티롤 군단은 보급에 아무 이상이 없었고, 만토바 요새에도 무기와 탄약이 충분한데다, 무엇보다 그 지역은 부유하기로 유명한 롬바르디아였던 것입니다.  주변 농촌 마을마다 식량은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예측대로, 알빈치는 18세기 군사 교리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첫번째 옵션을 택했고, (불과 3천의 프랑스군이 지키고 있는) 베로나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해 호엔촐레른(Hohenzollern) 장군 휘하에 강력한 수비대를 남겨두고, 4천의 병력을 급히 남동쪽으로 직행하여 프랑스군이 롱코에 부설한 부교를 끊도록 하고, 자신은 7천을 거느리고 먼저 빌라노바로 간 뒤, 거기서 남하하여 전투 현장인 아르콜레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군의 부교를 점령하러 간 부대는 습지대를 통과하느라 꾸물대다가 마세나의 부대와 딱 마주쳐 박살이 나버렸습니다.  그리고 알빈치의 주력 7천은 너무 멀리 우회하는 바람에 밤 늦게까지 아르콜레에 도착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알빈치는 아예 한술 더떠, 나폴레옹의 목표인 빌라노바의 보급품들을 모두 훨씬 더 후방인 비센짜(Vicenza)로 후송시켜 버립니다.  이러면서 병력이 뿔뿔이 분산되어 버렸습니다.





(아르콜레 전투 당시, 나폴레옹 및 알빈치의 이동선)



다시 아르콜레 현장으로 돌아오면, 여기서는 나폴레옹의 피가 마르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래가지고는 아르콜레 다리의 돌파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귀유(Jean Guieu) 장군에게 약 3천의 병력을 주고, 멀리 빙 돌아 알포네 강의 하류에서 따로 도강하여 알포네 강의 동쪽 강둑을 따라 북상하도록 했습니다.  귀유의 병력이 도착하면, 그와 합세하여 정면과 측면에서 한꺼번에 오스트리아 수비대를 공격할 생각이었지요.  원래 계획대로라면, 신속하게 빌라노바를 강타하지 못한다면 즉각 짐을 싸들고 베로나로 철수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계속 새로운 시도를 해가며 공격에 집착하는 모습은 정말 불굴의 의지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우회 공격은 말처럼 쉽지는 않았습니다.  귀유 장군은 도강에는 성공했으나, 역시 진창길을 헤집고 북상하는데 너무 시간이 걸려,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도 전투 현장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알포네 강은 매우 작은 지류에 불과합니다.  다만 당시에는 양쪽 강변이 진흙 투성이였다고 하지요.  사진은 오늘날의 알포네 강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비록 나폴레옹이라고 해도, 불굴의 의지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녁이 다가오자, 나폴레옹이 가장 두려워하던 소식이 도착했던 것입니다. 즉, 북쪽의 다비도비치가 마침내 남쪽으로 공격을 시작하여, 보부아 장군의 빈약한 병력을 부솔렝고(Bussolengo)까지 밀어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건 나폴레옹의 의지를 이어주던 마지막 실을 끊어버리는 결정타였습니다.  나폴레옹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철수를 결정합니다.  목표였던 빌라노바 근처에도 가지 못했지만, 이젠 후퇴로를 확보하기 위해서 탈출해야 할 시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운명의 장난인지, 나폴레옹이 철수하고 난 후에야, 우회 도강했던 귀유 장군의 별동대가 현장에 도착하여 오스트리아군의 좌익을 급습했습니다.  마침내 승리했다는 생각에 긴장을 풀고 있던 오스트리아군은 일대 혼란에 빠져 패퇴했고, 귀유 장군은 마침내 아르콜레의 다리를 완전히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곧 오스트리아군과 귀유 장군 모두가 아르콜레 주변의 프랑스군은 귀유의 별동대 달랑 3천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귀유 장군도 허겁지겁 나폴레옹의 뒤를 쫓아 철수해버렸습니다.  이어서 알빈치의 주력부대가 도착하여 아르콜레 일대의 방어를 더욱 철저히 했습니다.

이렇게 나폴레옹의 모든 희망이 사라져 버린 다음날 아침, 나폴레옹을 마치 '희망 고문'이라도 하듯, 새로운 소식이 날아듭니다.  마침내 남진을 개시했던 다비도비치가 그렇게 찔끔 움직인 뒤 다시 주저 앉아 움직이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비도비치는 정말 알빈치가 나폴레옹을 완전히 격퇴시키면 비로소 남진을 개시할 생각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국가 대표 축구에서도 네덜란드나 스페인 같은 상대팀의 명성에 주눅이 들면 일단 50% 잃고 들어가곤 했는데, 다비도비치의 상황이 딱 그랬습니다.  (그나저나 어제밤 이란과의 경기는 정말 짜릿했습니다.  경기력은 좋던데, 아쉽게도 전후반 모두 골이 없었지요.  마침내 골이 들어갔을 때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 와이프와 애도 깨는 바람에 세식구가 같이 남은 후반전 15분을 새벽에 시청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정말 징하다 싶을 정도로 승리에 집착하여, 다시 아르콜레로 되돌아갑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이제 철통같은 방어를 갖추고 있던 오스트리아군이었습니다.  이 날 하루 종일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서, 통쾌한 승리를 거둔 것은 오직 마세나 뿐이었습니다.  북서쪽으로부터 올 오스트리아 증원군을 요격하기 위해 프랑스군의 좌익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세나의 부대는 프로베라(Provera) 장군이 지휘하던 약 5천명의 오스트리아군을 박살내버립니다.  하지만 그것 뿐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전날 써먹었다 거의 성공할 뻔 했던 작전, 즉 다른 쪽으로 알포네 강을 도강하여 측면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해보려 했으나, 이미 충분한 방어 준비를 갖춘 오스트리아군의 저항에 부딪혀 희생자만 더 했을 뿐, 도강에 실패합니다.  이렇게 아르콜레 현장에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양군은 서로 치열한 소모전에 돌입하여,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많은 피해만을 내며 그날 밤을 맞이합니다.





(오늘날의 아르콜레 다리입니다.  이렇게 짧은 다리를 건너는데 양측에서 수천명이 목숨을 잃어야 했지요.)



다시 하루가 지나, 11월 17일 아침이 되었습니다.  습지 한 가운데서 처절한 전투를 벌이던 양쪽은 모두 지칠대로 지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극단의 상황에서 정신력이 먼저 무너지기 시작한 쪽은 더 유리한 상황이었던 알빈치 쪽이었습니다.  알빈치는 아무래도 상황이 불안했는지, 베로나 앞에서 프랑스군과 대치 중이던 호엔촐레른의 부대를 아예 칼디에로(Caldiero)로 철수시켜 자신과 더 가까운 곳으로 오도록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당장 아르콜레 현장으로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정말 어정쩡한 배치였지요. 

이에 비해 나폴레옹은 지치지 않고 도강을 시도하여, 마침내 알포네 강에 부교를 띄우는데 성공, 이를 통해 오쥬로의 부대를 도강시켜 가열찬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드디어 공격이 먹힌다고 생각되었으나, 오후 들어서 알빈치가 마침내 호엔촐레른의 부대까지 전투에 투입하면서 (그러나 아쉽게도 조금씩 축차 투입하는 것에 그쳤습니다... 끝까지 소심했던 알빈치 T T) 다시 오쥬로는 알포네 강 서쪽으로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엎치락뒤치락 하는 가운데, 마세나의 부대가 오스트리아군 우측에 나타납니다.  이에 고무된 오쥬로의 부대도 다시 도강하여 맹렬한 전투에 돌입하여, 마침내 프랑스군은 아르콜레에 진입하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알빈치의 병력이 전투 현장에 더 우세한 편이었고 (다만 주변 습지 때문에 집결이 안될 뿐이었지요), 나폴레옹은 언제든 다시 밀려나 도랑 속으로 굴러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지요. 





(실제로 아르콜레 다리를 용감하게 강행 돌파했던 것은 나폴레옹이 아니라 오쥬로였지요.  샤를 테브냉 Charles Thévenin 이 그린 아르콜레 다리의 오쥬로 Augereau au pont d'Arcole 라는 그림입니다.)



이때 알빈치로 하여금 결국 전투를 포기하게 만든 것은 다름아닌 알빈치 본인의 소심함이었습니다.  오후 5시 쯤, 프랑스군 중위 하나와 약 20여명의 기병들이 오스트리아군 후방에 침투하여 요란스럽게 전투 나팔을 불며 마치 프랑스군의 대규모 습격이 있을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자, 마침내 알빈치의 신경이 무너져 내렸고, 그는 빌라노바를 거쳐 비센짜로 후퇴를 명령합니다.  3일 동안 정말 지겹도록, 정말 징하도록 싸운 끝에 신경쇠약에 걸린 것이지요.

아르콜레 전투의 계산서(보통 푸주간 목록, butcher's list라고 하지요)는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 오로지 의지의 결과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무려 3,500명이었지만, 오스트리아군은 불과 2,200명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포로는 프랑스군이 1,300명이 사로잡힌 것에 비해, 오스트리아군은 무려 4,000명, 그리고 11문의 대포를 프랑스군에게 포로와 노획물로 잡힌 것입니다.  아마도 오스트리아군 포로 대부분은 알빈치의 철수 결정 이후에 낙오된 병력들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승리는 아직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알빈치의 병력은 프랑스군보다 막강했고, 언제든 비센짜에서 서쪽으로 다시 진격해올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북쪽에는 다비도비치의 티롤 군단이 그대로 건재했습니다.  실은 건재할 뿐만 아니라, 알빈치와 나폴레옹이 3일 째 최후의 결전을 벌이고 있던 11월 17일, 마침내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다시 보부아의 부대를 리볼리(Rivoli)에서 공격하여 패배시켰습니다.  아마 당시에 무전기가 있어서 이 상황이 알빈치와 나폴레옹 둘 중 어느 한 쪽에라도 알려졌더라면, 아르콜레 전투의 승자는 오스트리아군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그 소식은 나폴레옹이 마침내 쓰디쓴 승리를 거둔 뒤에야 나폴레옹에게 도달했고, 나폴레옹은 쉴 틈도 없이 군을 돌려 보부아 장군을 돕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아직 1만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던 다비도비치는 어이없게도, 알빈치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내 이럴 줄 알았다'라는 듯이, 나폴레옹이 근처에 오기도 전에 잽싸게 다시 리볼리로 철수해버립니다.  마침내 11월 20일, 나폴레옹이 1만5천의 병력을 끌고 다비도비치에게 접근하여 마치 티롤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위협하는 듯한 기동을 보여주자, 다비도비치는 완전히 티롤로 도망쳐버립니다.




(다비도비치가 보부아를 격파했던 리볼리의 전경입니다.  이곳은 훗날 마세나가 이름을 날리게 되는 리볼리 전투의 무대이기도 합니다.)



여태까지 서로 하나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던 알빈치와 다비도비치는 이날에도 서로 어긋나 버립니다.   다비도비치가 나폴레옹에게 겁을 먹고 티롤로 완전 철수하던 11월 20일, 알빈치는 '이대로 물러설 수 없음 !' 이라며 다시 1만6천의 병력을 끌고 칼디에로를 거쳐 베로나까지 접근해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11월 23일, 마침내 다비도비치가 티롤로 튀었다는 소식을 듣자, 알빈치도 기가 꺾여, 아무 것도 해보지 못하고 브렌타 강을 건너 완전히 철수해버립니다.  정말 끝까지 서로 어긋나는 남녀 커플을 그린 짜증나는 TV 드라마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이 짜증나는 TV 드라마에는 못지 않게 짜증나는 보조 출연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만토바 요새에 갇혀 있던 뷔름저였습니다.  아르콜레 전투의 치열한 포격 소리는 만토바 요새에서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가까운 거리였던 것이지요.  게다가 나폴레옹이 계속 증원 병력을 빼가면서, 그렇쟎아도 절대 부족했던 만토바 포위군의 병력은 속속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만토바 요새 성벽에서 프랑스군을 매일 관찰하던 보초병들이, 프랑스군 진지에 빈 막사가 눈에 띄게 늘어난다는 보고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뷔름저는 비참한 포위 생활에 쩔어 있었는지, 다비도비치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납작 업드려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알빈치가 철수를 결정한 11월 23일 (정말 얄궂은 날짜입니다), 마침내 뷔름저는 아직 기운이 남은 병사들을 긁어모아  8천명을 지휘하여 성문을 열고 출격합니다.  당연히 만토바를 포위하고 있던 프랑스군은 맥을 못추고 패배했고, 몇몇 프랑스군 병사들과 장교들은 오스트리아군에게 사로잡힙니다.  하지만 이렇게 포로로 잡힌 프랑스군 장교들로부터, 알빈치가 아르콜레에서 패배하고 후퇴한지 오래라는 소식을 전해들은 뷔름저는, 자신의 무능을 탓하며 다시 만토바 요새로 기어들어가야 했습니다.  며칠만 더 일찍 용기를 냈어도, 역시 아르콜레 전투의 승패는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오스트리아의 제3차 만토바 구원 작전은 참담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시련은 계속됩니다.  오스트리아는 대대로 자국의 영토라고 여겨왔던 롬바르디아를 쉽게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곧 제4차 만토바 구원 작전이 이어집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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