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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나폴레옹, 이탈리아를 침공하다 - 오쥬로 !! 오쥬로 !!

by nasica-old 2010.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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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제국의 역습' 편에서는 티롤에서 증원군을 몰고 온 뷔름저가 나폴레옹의 분산된 이탈리아 방면군을 사정없이 격파하며 만토바 요새의 포위를 푸는 과정을 보셨습니다.  또, 브레시아를 석권하고 가르다 호수의 서남쪽 호반을 돌아 뷔름저와 합류하려던 카스다노비히 장군이 로나토(Lonato)에서 뭔가 차질을 겪는 것까지 보셨지요.

원래 7월 31일에 로나토에 있던 데스피누아(Hyacinthe Despinois, 이름이 히아신스... T T) 장군의 소규모 프랑스군을 몰아낸 것은 카스다노비히의 전위대인 오트(Ott) 장군의 부대였습니다.  이 부대는 약 3개 대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니 약 3천명 정도 되었던 것 같습니다.  데스피누아 장군의 프랑스군은 힘없이 밀려 벌판으로 달아났는데, 오트 장군이 거느리고 있던 경기병 중대가 도주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하기 시작했습니다.  




(페터 칼 오트, Peter Karl Ott, 여기서는 별 활약을 못했지만, 1800년에는 마세나의 항복을 받아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 이 경기병 중대는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던 프랑스군 2개 포대의 사격을 뒤집어 쓰고 물러나야 했습니다.  뒤이어, 강력한 프랑스군이 다시 로나토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지요.  이들은 마세나와 달레마뉴(Claude Dallemagne), 그리고 세르보니 (Jean Cervoni) 휘하의 부대였습니다.  도주하던 데스피누아(유인이 아니라 정말 도주였습니다...)도 이들과 합류하여 오트의 오스트리아군 전위대를 압박한 결과, 오트는 다시 아침에 출발했던 산 마르코(San Marco)까지 후퇴해야 했습니다.

브레시아에 수비대를 남겨두고 가벼운 마음으로 로나토 남쪽의 몬티치아리(Montichiari)라는 곳까지 왔던 카스다노비히는 자신의 전위대가 로나토에서 강력한 프랑스군의 반격을 받고 산 마르코까지 후퇴했다는 연락을 받고 깜짝 놀랐습니다.  "내 전위대가 나보다 후방에 있다니 !  그것도 적군의 반격에 떠밀려서 !  그럼 내 후방은 안전한가 ?"  무척 조심스러운 장군이었던 카스다노비히는 거기서 더 전진하지 않고 거의 반나절을 망설이고 있다가, 결국 클레나우(Johann von Klenau) 휘하에 소수 병력만을 남겨두고 오트 장군과 합류하기 위해 산 마르코로 후퇴해버렸습니다.  거기서 그는 또 하나의 놀라운 소식을 듣습니다.  즉, 살로(Salo)에서 귀유(Guieu) 휘하의 프랑스군 6백명을 포위하고 있던 옥스케이(Ocskay) 장군도 프랑스군의 급습때문에 가바르도(Gavardo)까지 후퇴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전편에 언급했던 소레 장군의 일시적 구출 작전에 불과했습니다.)  카스다노비히의 마음은 무척이나 혼란스럽고 불안했습니다.




(페터 카스다노비히, 정말 소심하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  그의 소심함이 이번 작전에서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카스다노비히의 불안은 옳았을까요 ?  어쩌면 옳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직 알지 못했지만 나폴레옹이 그를 매의 눈으로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은 가르다 호수 동서쪽 모두에서 들려오는 패전 보고의 홍수에 무척 당황했지만, 4월에 그에게 같은 수법으로 당했던 볼리유와는 차원이 다른 대처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시시각각 들어오는 패전 보고를 통해, 나폴레옹은 리볼리에서 마세나를 격파한 오스트리아군이 주력군이고, 브레시아를 들이친 카스다노비히는 오스트리아의 우익이라는 사실을 파악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여기서 그의 장기인 선택과 집중을 발휘합니다.  원래는 divide and conquer, 즉 적을 분산시킨 후 각개격파가 먼저였는데, 오스트리아군은 이미 가르다 호수를 사이에 두고 분산되어 있었으니 이제 나폴레옹은 어느 쪽을 먼저 부술지 선택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프랑스군도 현재 분산되어 있었던데다, 적의 중군은 물론이고, 우익조차도 그 병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프랑스군에게 위기의 순간이었던 7월 30일 밤 이때, 나폴레옹은 과감한 승부수를 던집니다.  만토바의 포위를 풀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뷔름저가 8월 1일, 텅빈 프랑스군 포위 진지를 통과해 만토바에 무혈 입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판단은 이랬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공세 목적은 1차로 만토바의 포위를 푸는 것일 것이고, 따라서 뷔름저를 내버려둬도 일단은 프랑스군 추격보다는 만토바로 달려갈 것이라는 거지요.  그 사이에 뷔름저의 중군보다는 만만했던 적수인 카스다노비히의 오스트리아 우익을 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동안 만토바 요새 공략을 위해 여러 이탈리아 도시들로부터 징발하여 만토바 앞에 모아 놓았던 무려 179문의 각종 공성포의 점화구에 구리못을 박고 (대포를 폐기하는 이 방법에 대해서는 나폴레옹 시대의 포병  참조) 과감히 내버린 뒤, 병력을 긁어모아 가르다 호수 남쪽으로 집결하도록 했습니다.  물론 리볼리에서 패퇴한 마세나의 주력 부대도, 뷔름저에게 더 이상 저항하지 말고 가르다 호수 남쪽으로 모이도록 했습니다.




(지도 아래 부분의 만토바(여기서는 Mantua라고 표시)와 로나토, 카스티글리오네의 거리를 보십시요.  무척 가깝습니다.)



하지만 이 가르다 호수라는 장애물은 그렇게까지 큰 호수가 아니었고, 만토바 요새와 브레시아가 또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었습니다.  이는 7월 30일과 31일 양일간에 걸쳐 가르다 호수 동쪽 호반에서 뷔름저와 교전했던 마세나가 같은 31일 오후에 가르다 호수 남서쪽인 로나토에 나타났다는 것을 보시면 아실 수 있습니다.  그 정도 거리라면, 8월 1일 만토바에 입성하여 수비대를 증원하여 강화시키고 보급품을 전달한 뷔름저가, 곧바로 나폴레옹의 주력군을 찾아 추격에 나설 경우, 아직 카스다노비히를 끝장내지 못한 나폴레옹이 뷔름저에게 뒷덜미를 잡힐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의 벽을 쌓기로 했습니다.  다만, 그 벽은 무척 얇았지요.  즉, 1만1천명 정도의 병력을 따로 떼어 자신의 뒤, 정확하게는 자신과 남쪽 만토바에서 올라올 뷔름저의 주력 부대 사이에 얇은 방어막을 치기로 한 것입니다.  뷔름저의 병력은 8월 1일 만토바에 집결한 뷔름저의 가용 병력은 이때 2만5천 정도였습니다.  가장 먼 동쪽 경로, 즉 브렌타(Brenta) 계곡을 통해 내려온 오스트리아의 좌익, 즉 메자로스(Meszaros)의 5천 병력이 전투를 치르지 않고 만토바에 도착했던 것입니다.   2만5천 대 1만1천의 대결은 사실상 가망이 없는 전투였지요.  나폴레옹의 남쪽 후방을 지켜줄 이 방어막의 임무는, 나폴레옹이 카스다노비히를 요리할 때까지 걸릴 1~2일의 시간을 버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전투 형태는 참호를 파고 기관총 진지와 철조망으로 방어진을 구성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병사들이 벌판에서 몸과 총검으로 적의 돌격을 막아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투란 단 1~2회의 전투로 결정지어지는 것이었으므로, 1~2일을 버틴다는 것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지요.  이런 어려운 임무에 투입할 지휘관으로, 나폴레옹은 오쥬로(Charles Pierre Francois Augereau)를 택했습니다.  



                                   



(샤를 피에르 프랑소와 오쥬로, 일명 탈영의 제왕)



나폴레옹의 부하 장군들 중 가장 거구였고 또 가장 성깔있는 사나이였던 오쥬로는 나폴레옹보다 12살 연상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방면군에 처음 부임했을 때, 나폴레옹은 마세나, 세루리에 등의 쟁쟁한 부하들을 모두 눈빛 만으로 제압하여 자기 앞에서 눈을 내리 깔도록 만들었는데, 오직 한명, 오쥬로만이 끝까지 나폴레옹을 (발칙하게) 정면으로 마주 보며 눈싸움을 벌였다고 합니다.  오쥬로는 (다른 많은 프랑스 장군들이 그랬듯이) 귀족 출신에 제대로 된 장교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파리 청과물 가게 아들이었던 그는, 젊은 시절 프랑스군에서 졸병으로 복무했으나 장교와 사사로이 다투다 살해한 뒤, 유럽을 방랑하며 러시아와 프러시아, 나폴리 왕국에서 (역시 졸병으로) 복무했다고 합니다.  오쥬로의 군 생활의 특징은 항상 탈영으로 끝난다는 점이었습니다.  러시아군에서도 그랬고, 특히 프러시아에서는 집단 탈출을 주도하며 화려하게 탈영했습니다.  가장 절정은 나폴리 왕국에서의 탈영이었는데, 그는 거기서 왠 점잖은 집안 아가씨와 눈이 맞아 야반도주로 군생활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다시 프랑스군에서, 이번에는 장교로 근무하게 된 오쥬로는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뒤고미에 장군(툴롱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상관으로 있었던 그 뒤고미에 맞습니다) 밑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연이어 이탈리아 방면군에 배속되었다가 나폴레옹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쥬로는 앞서 말했듯이 거구였고, 또 유랑생활 중 펜싱 교사로 일할 정도로 검술에 능한데다, 양가집 규수와 야반도주를 할 정도로 개인적인 매력도 있어서, 자신만만하고 두려운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런 자신감, 그리고 자신과의 눈 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았던 그의 객기(?)를 높이 샀던 모양입니다.  한마디로, 나폴레옹의 명령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1만명으로 2만5천명을 하루 이틀 정도 막아내봐라' 라는, 상당히 무책임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오쥬로가 뷔름저의 대군 앞에서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다면, 나폴레옹은 카스다노비히와 뷔름저 사이에서 완전히 박살이 날 상황이었습니다.  나폴레옹으로서는 오쥬로라는 카드로 상당히 위험스러운 도박을 한 셈이었습니다.  


마침내 8월 3일 아침, 만토바에서 북쪽으로 '나폴레옹 사냥'을 나선 뷔름저의 전위대가 카스티글리오네(Castiglione)에 도달합니다.  오쥬로의 부대는 바로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립테이(Anton Lipthay) 장군이 이끄는 4천명으로 구성된 이 오스트리아군의 전위대에 대해, 오쥬로는 예비대조차 남겨두지 않고 휘하의 1만 병력을 총동원하여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립테이의 오스트리아군도 용감하게 반격했으나, 아무래도 숫적으로 너무 열세인지라 결국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끌벅적한 총성과 포성에 이끌려, 북진하던 뷔름저 휘하의 다른 부대들이 속속 전투 현장에 도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증원된 오스트리아군이 오쥬로 부대의 측면을 강타하기 시작하고, 특히 다비도비치(Pavle Davidović, 세르비아 출신이라서 다비도비히보다는 다비도비치라고 읽는 것이 맞지 않을런지...) 장군의 병력이 도착하여 마침내 오쥬로의 좌익을 깨뜨렸습니다.  저녁 무렵에는, 뷔름저의 주력 부대 전체가 전투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오쥬로의 운명은 끝났다고 봐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쥬로는 후퇴하지 않고 싸웠습니다.  뷔름저는 이 상황에 대해 무척 당황했습니다.  70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뷔름저의 상식으로 볼 때, 1만명 정도 밖에 안되는 적군이 이렇게 격렬한 전투를 벌이며 진격해 왔다는 것은 한가지를 뜻할 뿐이었습니다.  즉, 저들은 전위대일 뿐이고 바로 뒤에 강력한 주력 부대, 즉 나폴레옹이 이끄는 본대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뷔름저는 일단 전투를 멈추고 그 다음날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나폴레옹의 공격에 대비한 방어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뭐가 어찌 되었건 간에, 오쥬로는 1만으로 뷔름저의 본대 2만 5천을 멈춰 세우는데 성공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이날 오쥬로의 활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날 오쥬로가 우리를 위해 카스티글리오네에서 어떤 일을 해주었는지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

오쥬로가 카스티글리오네에서 혈투를 벌이던 8월 3일, 나폴레옹은 2만의 주력 부대를 동원하여 1만5천을 거느린 카스다노비히를 공격했습니다.  이때의 전투, 즉 로나토 전투는 이렇게 양측의 병력 3만5천이 한 곳에 모여 죽어라 싸우는 형태는 아니었고, 여러 작은 부대들이 여러 곳에서 우왕좌왕하며 격전을 벌이는 형태였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병력 수도 나폴레옹군보다 확연히 더 적지도 않았기 때문에, 모든 곳에서 프랑스군이 유리하지는 않았습니다.  가령 프랑스 측 데스피누아 장군의 오트 장군에 대한 공격은 병력을 축차 투입하는 우를 범하며 격퇴되었고, 그 뒤를 이어 오트를 공격한 달레마뉴(Dallemagne) 장군의 공격도 2번이나 격퇴되어 결국 후퇴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로나토를 공격한 옥스케이(Joseph Ocskay) 장군의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측 수비대를 격파하고 그 지휘관인 피종(Jean Pijon) 장군을 포로로 잡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직접 지휘한 마세나의 주력부대가 로나토에서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습니다.  지휘관인 피종을 잃은 로나토 수비대도 당시 대령이던 쥐노 (Jean-Andoche Junot)의 지휘 하에 반격을 시작했습니다.  강력한 반격에 부딪혀 사방이 프랑스군에 포위된 옥스케이는 심한 피해를 본 뒤 결국 항복하고 맙니다.  이것이 이날 전투를 결정지었습니다.




(폭풍우 쥐노입니다.  그는 이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경기병의 군도에 머리를 여러번 심하게 베이는 중상을 입습니다.)



옥스케이의 부대와 합류하러 오던 오스트리아군은 이미 옥스케이의 부대가 항복해버린 것을 보고 급히 후퇴하다가 프랑스군의 요격을 받고 졸지에 패잔병이 되어 흩어져 버렸습니다.  게다가, 살로(Salo)에서 프랑스군과 일진일퇴를 벌이던 카스다노비히는, 이 소식을 8월 3일 저녁 즈음에 접하고는, 엉뚱한 결정을 내려 버립니다.  아무래도 뷔름저와 합류하지 않고서는 나폴레옹을 상대로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카스다노비히는, 뷔름저와 합류할 수 있는 남쪽 길을 나폴레옹이 막고 있으므로, 차라리 가르다 호수 북쪽 호반을 빙 돌아 동쪽 호반을 따라 남하하여 뷔름저와 합류하겠고 선언을 한 것입니다.  이런 핑계 하에, 카스다노비히는 나폴레옹이 있는 남쪽을 내버려 둔 채, 북쪽을 향해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나폴레옹은 8월 4일 새벽에, 북쪽을 향해 후퇴하는 카스다노비히의 후위대에게 공격을 가해 확실히 배웅을 한 뒤, 망설이지 않고 뷔름저를 상대하기 위해 남쪽으로 기수를 돌렸습니다.  

결국 오쥬로의 위엄에 눌려 8월 4일 하루를 허송세월한 뷔름저의 2만 대군 앞에, 나폴레옹의 주력과 오쥬로의 병력이 합류하여 3만의 프랑스군이 집결했습니다.  분명히 7월 31일 제국의 역습이 시작될 때는 모든 곳에서 프랑스군을 숫적으로 압도했었던 뷔름저였건만, 어쩌다 이리 되었는지 불과 5일만에 상황이 역전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뷔름저는 하루를 꼬박 방어 준비에 투자한 상태였고, 무엇보다 뷔름저는 산전수전 다 겪은 역전의 노장이었습니다.  그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8월 5일 카스티글리오네 전투.  빅터 아담 작)



나폴레옹은 이미 충분한 숫적 우위를 확보했지만, 평범한 작전으로 뷔름저를 상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마세나와 오쥬로를 정면에서 보내 적의 주의를 끈 뒤, 적절한 시점에 오스트리아의 좌익으로는 세루리에의 부대를, 우익으로는 데스피누아의 부대를 보내 측면 공격을 노렸습니다.  하지만 뷔름저의 우주 방어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는 좌익이든 우익이든 나폴레옹이 측면 공격을 꾀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강력한 예비대를 준비해두었고, 특히 좌익인 몬테 메돌라노(Monte Medolano)에는 강력한 보루를 구축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뷔름저는 이들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도 마세나와 오쥬로 두 맹장이 이끄는 프랑스의 원투 펀치 공격을 가볍게 튕겨 냈습니다.  이어서 나름대로는 기습 공격이라며 호기있게 쳐들어온 세루리에 장군 (정확하게는 피오렐라(Fiollela)가 이끌었습니다)의 우회 공격을 예비대를 동원하여 좌절시켰지요.  나폴레옹에게는 설상가상으로, 이번 작전 내내 나폴레옹의 마음에 흡족하지 않게 행동하던 데스피누아 장군의 부대는 합류가 너무 늦어져 우익 측면 공격은 이루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8월 5일 카스티글리오네의 작전도입니다.)



하지만 피오렐라의 좌익 공격이 전혀 무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좌익 공격으로 오스트리아군의 전면이 흔들렸을때, 나폴레옹 못지 않게 포술의 대가로 이름난 마르몽(Auguste Marmont)이 포병대를 극단적으로 전진시켜, 몬테 메돌라노 바로 코 앞에 대포를 펼쳐 놓고 영점거리에서 포격을 퍼부었습니다.  이어서 다시 마세나와 오쥬로의 공격이 시작되어 마침내 몬테 메돌라노가 함락되었고, 뒤늦게나마 데스피누아 장군이 보낸 르클레르(Leclerc)의 부대가 도착하여 오스트리아군의 우익을 공격, 솔페리노(Solferino)를 함락시켰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뷔름저도 더 이상은 어렵다고 보고, 티롤로의 퇴로가 끊기기 전에 퇴각을 시작했습니다.  원래 나폴레옹의 독트린대로라면 이렇게 패주하는 부대를 뛰어난 기동력을 십분 활용하여 끝까지 추격, 완파해야 했습니다만, 뷔름저의 우주 방어를 뚫느라 기진맥진했던 프랑스군에게는 그럴 힘과 의지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덕택에 이날 저녁, 뷔름저는 민치오 강을 순조롭게 건너 보르게토까지 철수할 수 있었고, 결국 티롤로 무사히 후퇴합니다.


이렇게 제국의 역습 제1장은 오스트리아군의 패배로 막이 내립니다.  이번 작전에서 오스트리아군은 약 1만6천, 프랑스군은 약 1만명의 희생자를 냈지요.  왜 처음에 잘 나갔던 오스트리아군의 공세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렸을까요 ?  이번 작전의 주요 전환점은 크게 두가지인데, 모두 8월 3일 하루에 일어났습니다.  즉, 여러분들도 느끼셨겠지만, 이날 카스다노비히가 겁을 먹고 후퇴한 것과, 반대로 오쥬로가 무모할 정도의 과감한 공세를 펼쳐 뷔름저를 막아낸 것이 바로 그 두가지입니다.  이 두가지 중 한가지 만이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나폴레옹의 1796년 이탈리아 작전은 여기서 끝났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두가지가 모두 나폴레옹이 바라는 대로 일어난 것이 그냥 우연이었을까요 ?  그저 나폴레옹의 운이 그렇게 강했던 것일까요 ? 


오스트리아가 진 것은 카스다노비히 개인 때문이었고, 프랑스가 이긴 것도 오쥬로 개인의 무용 때문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글쎄요, 카스다노비히는 크로아티아 귀족 출신의 58세 노장이었고, 오쥬로는 39세의 젊은 나이에 개인의 실력과 용기로 장군이 된 파리 과일가게 출신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관록과 출신을 중시했고, 프랑스 공화국은 젊음과 실력을 중시한 결과였지요.  아마 카스다노비히 같은 인물은 프랑스 공화국의 사단장이 될수 없었을 것이고, 오쥬로 같은 이력서로는 오스트리아군에서 사단장은 커녕 하사관 정도의 노릇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즉, 8월 3일의 두가지 사건은 단순히 개인의 용기, 상황의 운세가 결정지은 것이 아닌 것이지요.  이건 귀족들의 제국과 혁명 공화국이라는 두 사회 제도가 선택한 인사 제도의 결과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군의 노력이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뷔름저는 1차 목표인 만토바 구원을 일단 성공리에 수행했습니다.  덕택에 만토바 수비대는 충분한 보급을 받아 강력해졌고, 반대로 프랑스군은 북부 이탈리아를 뒤집다시피해서 박박 긁어모았던 179문의 대포를 상실하여, 만토바를 강습할 방법을 완전히 상실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합스부르크 제국의 힘은 웅대하여, 만토바 구원 원정군을 2차, 3차로 보낼 여력이 충분했습니다.  

To be contunued...  그리고 새해에도 모두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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