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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나폴레옹, 이탈리아를 침공하다 - 나폴레옹의 패배

by nasica-old 2011.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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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쥬로 ! 오쥬로 !" 편에서는 오스트리아의 제1차 만토바 구원 작전이 시작은 좋았으나 결국 나폴레옹에게 박살이 나는 과정을 보셨습니다. 

패잔병들을 이끌고 티롤 지방의 관문인 트렌토(Trento)로 돌아온 뷔름저를 기다리는 것은 당연히 합스부르크 왕가의 질책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전쟁 위원회에서는 별다른 병력 충원도 없이, 당장 만토바를 재차 구원하라는 명령을 뷔름저에게 강요할 뿐이었지요.  어쨌거나 뷔름저는 충성을 맹세한 군인이었으므로, 이 명령에 따라야 했고, 별로 준비도 갖추어지지 않은 9월 초, 뷔름저는 내키지 않는 원정길에 나서야 했습니다.





(이탈리아 트렌토입니다.  저기 보이는 것은 알프스 산맥이고, 여기가 이탈리아-오스트리아의 경계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뷔름저의 지휘권 하에 있는 병력을 박박 긁어모으면 다시 4만명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본진을 다 비워두고 나폴레옹과 싸우러 갈 수는 없었으므로, 다비도비치(Pavle Davidovic) 장군에게 2만의 병력을 맡겨 트렌토 일대를 지키도록 하고, 자신이 나머지 2만명을 이끌고 만토바 구원길에 올랐습니다.  단, 지난번처럼 나폴레옹에게 정면 도전을 하지는 않기로 하고, 나폴레옹의 본진이 있는 가르다(Guarda) 호수 동쪽 아디제(Adige) 강변을 멀리 돌아, 저 멀리 동쪽의 브렌타(Brenta) 강을 따라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지난 1차 만토바 구원 작전 때도, 이 경로를 따라 내려갔던 메자로스(Meszaros)의 병력은 프랑스군과 마주치지 않고 만토바에 도달할 수 있었거든요.

하지만 뷔름저가 간과한 것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결코 앉아서 기다릴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었지요.  지난번 1차 구원 작전 때, 오스트리아군이 서전에서 대승을 거둔 것은 나폴레옹이 지키는 입장이었기 때문이었고, 나폴레옹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파리의 총재 정부에서는 나폴레옹에게 알프스를 넘어 남부 독일에 있는 모로 장군의 라인 방면군과 합류하라는 명령이 와 있는 상태였습니다.  나폴레옹은 북진을 시작했습니다. 

우습게도, 나폴레옹도 제1차 만토바 구원 작전 때 뷔름저가 했던 것처럼, 가르다 호수 양쪽으로 병력을 나누어 올려 보냈습니다.  가르다 호수 서안 쪽에서는 보부아(Vaubois) 장군이 1만명을, 동안 쪽에서는 나폴레옹의 오른쪽 펀치 마세나(Massena)가 1만3천을 끌고 올라갔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뷔름저가 의도했던 것, 즉 이렇게 양쪽으로 내려간 오스트리아 2개 부대가 가르다 호수 남쪽에서 합류하는 것을 오스트리아군은 해내지 못했지만, 프랑스군은 너무나도 쉽게 호수 북쪽에서 두 부대가 합류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약간 삼각형 모양으로 생긴 가르다 호수의 모양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발로 뛰는' 야구, 아니 전쟁을 하는 프랑스군의 기동성이 오스트리아군보다 월등히 뛰어났다는 것이 이유가 되겠지요.




(보부아와 마세나가 가르다 호수 북쪽에서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합류하는 모습을 보십시요.  뛰어난 기동성, 오스트리아군에겐 꿈인데, 프랑스군에겐 일상이네요.)



이렇게 합류한 프랑스군은 트렌토를 지키고 있던 다비도비치를 사정없이 강타했습니다.  프랑스군이 이렇게 빨리 쳐들어올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다비도비치는 방어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뷔름저의 계획대로라면 다비도비치 휘하에는 2만명의 만만찮은 수비 병력이 있어야 했고, 또 실제로 있었으나, 이들은 넓은 지역에 수천명 씩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2만3천의 대군으로 도전해오는 프랑스군의 상대가 전혀 되지 못했습니다.  1796년 9월 4일, 로베레토(Rovereto) 전투에서 다비도비치가 간신히 끌어모을 수 있었던 병력은 프랑스군의 절반 정도인 1만3천 정도였고, 결과는 당연히 오스트리아군의 완패였습니다.  이 패배로 오스트리아군은 티롤로 가는 관문인 트렌토(Trento)까지 상실하고 티롤로 완전히 철수하게 됩니다.  스타크래프트로 따지자면 병력 모아서 습격간 사이에 본진을 완전히 털린 경우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아, 털렸어요 !  본진이 털렸어요 !)



다만, 나폴레옹은 여기서 뷔름저가 나머지 병력으로 이미 만토바를 향해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뷔름저의 본진을 턴 사이, 뷔름저는 나폴레옹의 본진을 털러 간 셈이지요.  하지만 뷔름저의 발길은 너무나 느렸습니다.  나폴레옹은 알프스를 넘어 북진한다는 원래 계획을 과감히 버리고, 뷔름저의 뒤를 추격하여, 마침내 9월 8일, 브렌타 강변 바사노(Bassano)에서 뷔름저의 후위 부대를 강타했습니다.  이것이 바사노 전투였고, 제1차 만토바 구원 작전에서도 패배의 원흉이었던 카스다노비히(Quasdanovich)는 이 바사노 전투에서도 맥을 못 추고 패잔병을 이끌고 동쪽으로 도주해버렸습니다. 




(제1차 바사노 전투...  나중에 11월에 벌어지는 제2차 바사노 전투의 그림은 이와는 매우 다른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이제 만토바 구원이라기보다는, 만토바로 피난을 가게 된 뷔름저는 정말 열심히 달려 간신히 나폴레옹의 추격을 뿌리치고 만토바에 입성합니다.  이때 만토바에 모인 오스트리아 병력은 무려 3만명이 넘었습니다.  추격해온 나폴레옹군보다 오히려 더 많은 수였지요.  하지만 요새 수비 병력이 다 그렇듯이, 전투에는 약간 부적절한 나이와 건강상태를 지닌 병사들이 좀 많은 편이어서, 9월 15일 추격해온 나폴레옹군과 대적하기 위해 성문을 열고 나간 오스트리아 병력은 약 1만6천 정도였습니다.  이들은 나폴레옹군과 호각지세로 싸웠으나, 결국 숫적 열세를 견디지 못하고 패배, 결국 다시 만토바 요새로 철수해야 했습니다.  결국 만토바 요새는 (전에 독자분이 댓글 달아놓으신 것처럼) 오스트리아군 스스로 파놓은 포로 수용소 비슷한 것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습지를 바로 옆에 끼고 있는 이 좁은 요새에 거의 3만명의 오스트리아군이 빽빽히 들어차 있었던데다, 그중 상당수는 노약자/부상자였으므로, 오스트리아군은 이 만토바 요새에 최종적으로 갇힌지 6주만에 약 4천명의 사망자를 내는 참담한 몰골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제2차 만토바 구원 작전은 이렇게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처지도 마냥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말이 포로 수용소지, 이 오스트리아 포로(?)들은 중무장한데다, 숫자도 거의 나폴레옹군의 70% 정도에 달하는 대군이었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은 이 포로들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는 무기, 즉 공성포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비엔나나 남부 독일로의 진격 대신, 9월 15일 이후 이 포로 수용소를 포위/감시/견제하는데 발이 묶인 형국이 되어버렸습니다.




(프랑스에 나폴레옹이 있고, 영국에 웰링턴이 있다면, 오스트리아에는 카를 대공이 있습니다.  비엔나에 있는 그의 동상입니다.)



그러던 중, 10월 들어 메이저리그라고 할 수 있는 라인 방면 전선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일어납니다. 뷔름저나 카스다노비히처럼 관록있는 노장이 아닌, 합스부르크 가문의 장군치고는 새파랗게 젊은 카를 대공(Archduke Charles, Duke of Teschen, 당시 나이 25세, 그 젊다는 나폴레옹보다 2살 어림)이 프랑스 최고의 명장 모로(Moreau) 장군을 10월 19일 에머딩겐 (Emmendingen) 전투에서 패배시킨 것입니다.  라인 강을 건너 승승장구하던 모로는 이 패배로 인해 다시 라인 강을 건너 후퇴하는 굴욕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파리 총재 정부로서는 이탈리아에서 일이 어떻게 돌아가건 전혀 중요치 않게 되어 버렸습니다.  즉, 나폴레옹은 완전히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지요.  반면에, 한숨 돌린 오스트리아에서는 잃어버린 북부 이탈리아를 되찾을 여유가 생겼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제3차 만토바 구원 작전에 나섭니다.




(알빈치.  무척 유능한 장군인데도, 아르콜레 전투 이후 그다지 활약을 못하고 2선으로 물러납니다.)



제3차 구원 작전은 알빈치 (József Alvinczi von Borberek)의 손에 맡겨집니다.  원래 오리지널 마쟈르 출신인 그는 (그래서 원래 이름도 József Alvinczi가 아니라 동양식으로 Alvinczi József 였답니다) 이때 당시 61세의 노장으로서, 그동안 나폴레옹에 맞서 왔던 다른 오스트리아 장군들과 그다지 다를 것 없는 배경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전투에서 부상도 여러번 당하고, 그를 태운 말 여러 필이 총탄에 쓰러질 정도로, 실전 경험이 누구보다도 풍부했고, 또 잠깐이나마 황태자 시절의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시스 2세의 교육을 담당하기도 하는 등, 남들보다 약간 더 괜찮아 보이는 이력서를 가지고 있었지요.  특히, 만토바 구원 작전에 나서기 직전에는, 오스트리아의 전쟁 위원회 (Hofkriegsrat, 나중에 오스트리아의 국방부가 되는 조직입니다)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전쟁 위원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티롤 지방입니다.  제가 아는 분이 '다녀본 곳 중에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티롤을 뽑더군요.  저도 꼭 가보고 싶습니다 !)



이때 당시 이탈리아와 접하고 있는 오스트리아 직할지인 티롤도 병력 자원이 사실상 고갈된 상태였습니다.  이미 볼리유 및 뷔름저가 기존 병력을 박박 긁어모아 나폴레옹 앞에 다 갖다 바치거나, 만토바 포로수용소에 데리고 갔기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일단 티롤 및 아직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던 동북부 이탈리아 지역인 프리울리(Friuli, 우디네와 고리찌아를 포함한 지역)에서 신병을 징집하고 간단히 군사 훈련을 실시했습니다.  이렇게 모은 병력이 총 4만7천 (프리울리 군단 2만8천, 티롤 군단 1만9천)이었습니다.  여태까지 나폴레옹과 대적했던 오스트리아 병력 중 가장 대규모 병력이었지요.  다만 이들은 장기간 단련된 고참병들이 아니라, 대부분이 신병들이라서 그 질적인 우수성 면에서는 많은 의구심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경험있는 장교들에 의해 지휘된 이 신병들은 역전의 나폴레옹군에 맞서 놀랍도록 잘 싸워, 신규 징집군도 결코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보입니다.




(이탈리아 지도에서 저 북동쪽 구석의 초콜렛 색 지역이 프리울리 지역입니다.  '무기여 잘있거라'에 나오는 고리찌아, 우디네 등의 지역이 이곳의 주요 도시지요.)



알빈치는 이 병력을 출신 지역에 따라 둘로 나누어, 프리울리 군단 2만8천은 카스다노비히의 지휘 하에 자신과 함께, 프리울리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저 멀리 동쪽의 피아베(Piave) 강으로부터 서쪽으로 진격했고, 티롤 군단 1만9천은 다비도비치의 지휘 하에 아디제(Adige) 강 계곡을 따라 남하했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의 병력은 크게 넷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대략 다음과 같았습니다.

보부아(Vaubois)의 1만1천 - 트렌토(Trento)
마세나(Massena)의 9천 - 바사노(Bassano)
오쥬로(Augereau)의 8천 - 베로나(Verona)
킬멘(Charles Kilmaine)의 9천 - 만토바(Matova)

그외에 맥콰르(Francois Macquard)의 기병 및 보병 약 4천5백이 만토바 근처에서 예비대로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이쯤에서 다시 한번 지도를 보고 각 장군들의 주요 주둔지를 확인하는 센스를...)



먼저 나폴레옹군과 충돌한 것은 티롤 군단이었습니다.  제2차 만토바 구원 작전 때 뷔름저가 빼앗긴, 오스트리아의 이탈리아 방면군의 근거지라고 할 수 있는 트렌토(Trento)에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보부아(Vaubois) 장군이 약 1만1천의 병력으로 지키고 있었는데, 거의 2배에 가까운 병력을 몰고 쳐들어온 다비도비치의 티롤 군단에 밀려 트렌토를 내주고 칼리아노(Calliano)로 후퇴해야 했습니다.  이때가 11월 2일이었습니다.  바사노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마세나는 자신의 3배가 넘는 프리울리 군단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아예 교전을 회피하고 바사노에서 철수해 후퇴했습니다.  이때가 11월 4일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 프리울리 군단이 브렌타 강을 건너기 전에 격파하기로 결정하고, 오쥬로와 맥콰르에게 모든 병력을 끌고 마세나와 합류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야말로 가용한 병력을 박박 긁어모아 결전을 벌이려던 것이지요.  문제는 보부아가 다비도비치에게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다는 점 외에도, 가용한 병력을 예비대까지 다 끌어모아도 프리울리 군단보다 열세였다는 점이었습니다.  어찌 되었건 다른 방도가 없었으므로 (결국 뷔름저의 오스트리아군 뿐만이 아니라, 그를 감시하던 킬멘의 프랑스군도 만토바의 포로였던 셈이지요) 나폴레옹은 바사노에서 알빈치의 프리울리 군단을 막아내기로 합니다.

전투는 11월 6일 아침 7시부터 벌어졌습니다.  나폴레옹이 직접 지휘하는 약 2만 병력과, 오스트리아군 2만8천의 격돌이었지요.  그런데, 나폴레옹은 역시 숫적 우위가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신통한 재미를 보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나폴레옹은 이제 역전의 용사가 된 프랑스 이탈리아 방면군이라면, 이제 막 징집된 북부 이탈리아 출신의 신병들 쯤은 간단히 무찌를 것이라고 생각했나 봅니다만, 실제로 부딪혀 보니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전투의 양상은 주로 나폴레옹이 브렌타 강을 건너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하고, 오스트리아군은 그를 막아내는 식으로 벌어졌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전위대를 지휘하는 립테이(Lipthay) 장군은 타고 있던 말이 쓰러지고 자신도 부상을 입는 와중에도 전투 현장을 굳게 지켜, 마침내 마세나의 공격을 좌절시켰습니다. 





(브렌타 강변의 아름다운 도시 바사노의 모습.  정말 이런 곳에서 전쟁을 하면 전쟁도 꽤나 멋있을 것같은 착각이 드는군요.)



전투는 밤 10시까지 계속 된 후, 마침내 나폴레옹이 후퇴를 명하면서 끝이 났습니다.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약 3천, 그외에 포로 800여명과 곡사포 1문을 빼았겼고, 오스트리아군의 사상자는 약 2천8백, 그리고 대포 2문을 빼았겼습니다.  이 전투를 제2차 바사노 전투라고 합니다만, 나폴레옹은 근거가 무엇이건간에, 파리 총재 정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승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명백히, 여기서 오스트리아군의 도강을 막는다는 나폴레옹의 목표는 실패로 끝났고, 무엇보다도 서쪽으로 후퇴하는 것은 바로 나폴레옹 자신이었습니다.  역사가들은 흔히, 나폴레옹 자신이 직접 지휘한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이 전투가 처음이라고 평가합니다.  파리에 보낸 보고서에 뭐라고 썼건 간에, 나폴레옹 자신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요.  게다가 북쪽은 티롤 군단이 밀고 내려오고 있고, 동쪽에서는 프리울리 군단이 달려드는데, 나폴레옹에게는 이를 막을 병력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패배가 분명해지면 만토바에서 튀어나올 약 2만5천의 오스트리아군이 배후에 있었지요.  나폴레옹은 무척이나 심란했습니다.

이렇게 심란한 마음으로 후퇴하는 나폴레옹에게 들려온 것은 11월 6일과 7일 양일간 칼리아노(Calliano)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보부와 장군의 병력이 다비도비치의 티롤군단에게 또 패배하여 계속 후퇴 중이라는 소식이었습니다.  다비도비치와의 대결에서, 보부와 장군의 병력은 원래의 1만1천명에서 약 6천 수준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때 보부와 휘하의 제39 및 제85 반편여단(demi-brigade)가 보여준 형편없는 용기에 대노했다고 합니다. 




(보부아 Charles Henri Vaubois 장군입니다.  1748년 생이니까 나폴레옹보다 무려 21살이나 더 많습니다.  그러나 1839년까지 나폴레옹보다 더 오래 살아, '가는데는 순서없다'는 것을 보여준 좋은 사례로 남습니다.)



베로나로 철수한 나폴레옹은 이대로 계속 밀릴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추격해오는 알빈치의 전위대 약 1만2천을 칼디에로(Caldiero)에서 요격합니다.  이때 내보낸 부대는 나폴레옹의 원투 펀치인 마세나와 오쥬로가 지휘하는 총 1만3천이었으니,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카드를 내보낸 것이었지요.  그러나 결과는 의외로 다시 나폴레옹의 패배였습니다.  오스트리아의 프리울리 군단은 정말 신병들로 구성된 부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잘 싸워, 프랑스군에게 약 1천명의 사상자 외에도 800명의 포로라는 피해를 입혔습니다.  물론 프리울리 군단도 약 900명의 사상자와 400명의 포로를 냈습니다만, 전장에서 후퇴한 것은 프랑스군이었습니다.  이건 나폴레옹이 기대한 결과가 아니었지요. 

바사노부터 줄줄이 패배한 나폴레옹의 입지는 점점 심각해졌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때 만토바의 포위도 포기하고, 그냥 민치오 강도 아니고 화끈하게 아다 강 서쪽으로 후퇴할까도 생각했다고 합니다.  프랑스 최고의 명장이라는 모로 장군도 라인 강 서쪽으로 다시 후퇴한 마당에, 아무 지원도 받지 못한 자기가 아다 강 서쪽으로 후퇴한다고 해도 그렇게 볼썽 사나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된데다, 그래도 롬바르디아의 심장 밀라노를 손아귀에 쥐고 있다면 그렇게 나쁜 장사는 아니라는 판단이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현재로서는 그 외에는 다른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황을 파악하는 나폴레옹에게 무언가 작은 실마리 하나가 잡힙니다.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

To be continued...


여기까지 읽으신 독자분들께 또 작은 부탁 하나 드립니다. 

지난번과 비슷한 건데, 제 블로그의 방향성에 대해서입니다.  원래 제 블로그는 Sharpe 시리즈 소개부터 시작하여, 나폴레옹 시대의 금융, 식생활, 관습 등등 사소한 것들에 대한 소개로 이어지다가, 요즘엔 보시다시피 본격적으로 나폴레옹 전쟁사 자체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본격적인 전쟁사 쪽이 더 좋으신지, 아니면 예전처럼 소소한 역사의 뒷 이야기 쪽이 더 좋으신지 간단히 댓글로 의견이라도 남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가만 보니 요즘 제 블로그 방문객 수가 (원래부터도 그다지 많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좀 줄어든 것 같아서, 의견을 구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폐가 되지 않는다면, 출석 체크라고 생각하시고 제 블로그를 주기적으로 방문하시는 분들은 아래 손가락 추천 표시 한번 눌러봐 주세요.  몇분이나 계신지 한번 통계를 좀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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