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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나폴레옹 이탈리아를 침공하다 - 제국의 역습

by nasica-old 2010.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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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편은 나폴레옹이 어떻게 볼리유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을 요리하면서 롬바르디아를 정복했는지 보았습니다.  하지만 정확하게는 아직 나폴레옹은 롬바르디아를 정복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만토바 요새가 여전히 오스트리아군 수중에 있었으니까요.  당시 만토바 요새는 약 1만4천명 정도의 오스트리아군이 지키고 있었는데, 그를 포위하고 있는 프랑스군은 세루리에(Serurier) 장군이 지키는 9천명 정도 뿐이었습니다.




(장 매튜 필리베르 세루리에, Jean Mathieu Philibert Serurier.  나중에 원수 계급까지 승진하지요.)



보통 요새를 포위 공격할 때, 공격군은 수비군보다 3배의 수적 우위를 확보해야한다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연전연패했던 오스트리아군이라고 하더라도, 그를 포위하는 프랑스군의 숫자가 너무 적은 편이라고 할 수 있었지요.  과연 나머지 프랑스군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 

나폴레옹은 롬바르디아를 정복한 이후, 승리에 도취되어 (그는 아직 20대 후반의 피끓는 젊은이에 불과했습니다) 작전을 크게 확대하려고 했었습니다.  즉, 아예 이대로 합스부르크 제국의 심장부, 비엔나로 진격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아무리 나폴레옹이라고 하더라도, 비엔나 진격을 위해서는 상당한 병력 증강이 필요했고, 이를 파리 총재 정부에 요청했었습니다.  그러나 총재 정부에서는 약간의 고민 끝에 나폴레옹의 계획을 기각시켰습니다.  일단 나폴레옹의 역량을 그렇게까지 높이 쳐주지는 않았고, 병력도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비엔나 드립을 치던 7월초, 프랑스 혁명 정부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주 격전지인 라인 방면에서 큰 전투가 있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나폴레옹의 경쟁자가 되는 모로(Moreau) 장군의 라인-모젤 (Rhin-et-Moselle) 방면군은 뷔르템베르크의 에팅겐(Ettingen)에서 칼 대공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을 밀어내고 라인 전선에 구멍을 뚫어놓았습니다.  총재 정부는 여기에 병력을 집중해야 했으므로, 나폴레옹에게는 원래 계획대로 보조 공격 노릇에 충실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아울러 덧붙였습니다.  후방에 만토바 요새가 건재한 마당에, 비엔나로 쳐들어가는 것은 무모한 일이 아닌가 ?   특히 만토바 요새에 대해서는, 사실 총재 정부의 결정이 틀린 것은 아니었고, 나폴레옹도 그에 대해 뾰족한 대꾸를 하지 못했습니다. 




(철옹성 만토바의 위엄)



그러는 와중에, 나폴레옹의 정보망에, 티롤 지방으로 철수했던 오스트리아군의 반격 준비 소식이 접수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롬바르디아 침공 때 거의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후퇴만 거듭했던 볼리유가 해임되고, 그 후임으로 바로 작년인 1795년 만하임(Manheim)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던 명장 다고베르트 지크문트 폰 뷔름저 (Dagobert Sigmund von Wurmser)가 임명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원래 뷔름저가 거느리던 라인강 상류 방면군 2만5천명에 티롤 주둔군 1만명 등을 합해, 7월말 경에는 총 4만7천명 정도의 병력이 집결했습니다.  뷔름저가 오스트리아 전쟁 위원회로부터 받은 명령은 간단 명료했습니다.  먼저 만토바 요새의 포위를 풀고, 이어서 롬바르디아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내라는 것이었지요. 




(이때 뷔름저의 나이 이미 72세.  귀도 거의 들리지 않는 상태였지만 그래도 매우 유능한 장군으로 나폴레옹의 존경을 받습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재빨리 파악해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4월 초 피에드몽을 침공할 때 오스트리아-피에드몽 연합군이 처했던 상황과 너무나도 흡사했습니다.  즉, 자신의 수비군과 거의 대등하거나, 오히려 약간 우세한 병력이 곧 자신이 지키는 지역으로 쳐들어올 예정인데, 어느 쪽으로 쳐들어 오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4월초 오스트리아군이 처했던 상황에 비해 더 좋은 점도 있었고 더 나쁜 점도 있었습니다.  둘다 만토바 요새 때문에 비롯된 점이었습니다.  즉, 오스트리아군의 목표가 만토바 요새이니만큼, 그 정확한 경로야 어떻든간에,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만토바 요새인 것이 확실했습니다.  그건 좋은 점이었지만, 나쁜 점은 당연히 만토바 요새의 적군이 후방에, 그것도 1만4천명이나 호시탐탐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적군의 이동 경로를 정확히 알 수 없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티롤에서 만토바 요새로 가는 길목 75마일에 걸쳐, 자신의 병력을 주욱 늘어놓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도 4월초 오스트리아-피에드몽이 택했던 것과 동일한 작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지요.  그러는 와중에서도,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이 아마도 프랑스군의 저항을 피해 가급적 먼 경로, 즉 가르다(Guarda) 호수 동쪽을 통해 오지 않을까 생각하여 그쪽에 가장 강력한 병력인 1만6천 정도를 마세나(Massena)의 지휘 하에 배치했습니다.  반면에, 가장 프랑스군 진영 깊숙한 곳인 가르다 호수 서쪽 경로는 소레(Sauret) 장군에게 겨우 4천의 병력을 주어 지키도록 했습니다.




(가르다 호수의 위성 사진입니다.  남북으로 길쭉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이 지역에서는 중요한 군사 장애물입니다.)



이에 비해, 뷔름저는 별 다른 고민을 하지 않고 아주 정석대로 작전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가 롬바르디아 방면군 사령관에 임명될 때, 그에게는 오스트리아 전쟁 위원회가 짜 놓은 작전 문서를 잔뜩 가지고 비엔나로부터 파견된 군사 고문단이 달라붙어 미주알고주알 참견을 해대고 있었습니다.  그 작전 계획은 아주 평범하면서도, '알면서도 당할 수 밖에 없는' 정공법이었습니다. 

즉, 뷔름저는 전군을 크게 셋으로 나누어, 가장 강력한 2만4천명의 중군은 만토바 요새로 가는 가장 편하고 가장 빠른 길인 아디제(Adige) 강의 양쪽 강변을 따라, 둘로 나누어 자연스럽게 전진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1만8천명의 강력한 우익을 가르다 호수 서쪽을 통해, 프랑스군의 보급기지인 브레시아(Bresica) 쪽을 향하게 했고, 가장 동쪽이라서 상대적으로 프랑스군의 존재 가능성이 가장 적었던 동쪽 루트, 즉 브렌타(Brenta) 계곡을 통해서는 5천명의 다소 검소한 좌익을 내려보냈습니다. 

이렇게 병력을 나눈 것은 나폴레옹을 얕잡아 봐서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도로는 포장된 고속도로가 아니었기 때문에, 좁고 험하여 대군이 한꺼번에 통과하려면 많은 시간이 지체되기 일쑤였습니다.  또 보급 문제도 있고요.  아무래도 일부 좁은 지역으로 대군을 투입하면, 식량 등을 현지에서 조달하는데 아무래도 어려움이 있었겠지요.  뷔름저는 적절한 루트로 병력을 분산 이동 시킨 뒤, 가르다 호수 남쪽에서 병력을 재집결할 생각이었습니다.

뷔름저의 병력은 7월 29일, 드디어 프랑스군과 충돌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예상대로 뷔름저가 직접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의 주력이 가르다 호수 동쪽, 리볼리(Rivoli)에서 마세나가 거느린 프랑스군 주력과 격돌한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예상이 적중한 것이었지만, 1만6천의 프랑스군이 2만4천의 오스트리아군을 대적하기에는 좀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은 하루 종일 강력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수적 우위를 가진 오스트리아군에게 밀려나기 시작했고, 결국 밤이 되자 마세나는 2천8백의 사상자와 9문의 대포를 포기하고 후퇴해야 했습니다.  바로 그 다음날에도 추격해온 뷔름저에게 마세나는 다시 후퇴해야 했습니다.  뷔름저는 순조롭게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8월 1일, 마침내 만토바에 도착하여 이미 철수한 프랑스 포위군의 텅빈 진지를 통과하여 만토바에 입성합니다.  작전 개시 불과 며칠만에, 1차 목표를 달성했던 것입니다.




(가르다 호수를 둘러싼 브레시아, 만토바, 리볼리의 위치를 살펴 보십시요.  나중에 로나토의 위치는 저 가르다 호수 바로 남쪽 호반 약간 서쪽입니다.)



나폴레옹의 예상이 적중하여 주력을 배치했던 중앙에서조차 이렇게 밀릴 정도였으니, 나폴레옹의 예상과는 달리 강력한 오스트리아군 우익이 덮친 가르다 호수 서쪽, 브레시아(Brescia)에서는 상황이 더욱 안좋았습니다.  역시 7월 29일, 카스다노비히(Quasdanovich) 장군이 이끈 1만8천의 오스트리아군은 소레(Sauret) 휘하의 프랑스군 4천을 살로(Salo)에서 가볍게 밀어내고 600명의 포로를 잡았습니다.  또, 간신히 포로가 되는 것을 면하고 인근 성곽 안으로 대피한 귀유(Guieu) 휘하 600명의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의 포위망 속에 갇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바로 다음날, 카스다노비히는 가볍게 프랑스군의 병참 기지인 브레시아를 점령하고 여기서 7백명의 프랑스 수비병력과 2천명의 프랑스군 환자들을 포로로 잡습니다.  또한 나폴레옹이 비엔나로 쳐들어갈 때 쓰겠다고 모아놓은 많은 보급물자를 노획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때 아직 대령 계급이었던 장래의 용장 장 란(Jean Lannes)과 함께, 훗날 나폴리 왕이 되는 뮈라(Joachim Murat), 그리고 발미 전투의 영웅인 켈레르만 장군의 아들 (François Kellermann)까지 모조리 오스트리아군의 포로가 되는 수모를 겪습니다.




(뮈라 : 나도 총 들이대면 항복한다고.  참 인간적이지 ?)



살로에서 쫓겨났던 소레의 프랑스군은 7월 31일 깜짝 기습을 가해 살로(Salo)를 탈환하고 성곽에 갇혔던 프랑스군 6백명을 구출하지만, 자신들의 병력이 너무 소수였던지라 카스다노비히가 살로 쪽으로 관심을 돌리기 전에 서둘러 후퇴합니다.  이때, 카스다노비히는 가르다 호수 바로 남쪽에 있는 로나토(Lonato)에서 다른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있었습니다.  총사령관인 뷔름저의 작전대로, 카스다노비히는 뷔름저의 본대와 합류하기 위해 가르다 호수 남쪽을 지나 동쪽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여태까지의 전황을 보면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4월초 오스트리아군이 저지른 실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고, 오스트리아군은 4월초 프랑스군이 보여준 눈부신 전과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날, 즉 7월 31일 로나토를 점령한 카스다노비히의 작전에 작은 차질이 벌어집니다.  과연 무슨 일이었을까요 ?


너무 짧아서 죄송하지만 여기서 끊고 박지성 축구 봐야겠습니다.... 
요즘 많이 바빠서 글을 못 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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