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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나폴레옹 이탈리아를 침공하다 - A Bridge Too Far

by nasica-old 2010.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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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편에서, 1796년 4월말까지 피에드몽-사르디니아 왕국을 처리하는 과정을 보셨습니다.  이 항복 과정을 5월초까지 처리한 나폴레옹은, 도주하는 오스트리아의 잔존 병력을 추격하기 시작합니다.  오스트리아군의 볼리유 장군에게는 롬바르디아의 주도인 밀라노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했습니다만, 그것은 이미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나폴레옹은 아직 4만에 달하는 총병력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것에 비해, 피에드몽이 항복하고 여기저기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볼리유에게는 고작 1만9천 정도의 병력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밀라노는 강력한 성벽으로 방비된 요새 도시가 아니었기 때문에, 밀라노에 들어가서 농성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밀라노와 만토바, 그리고 로디의 대략적인 위치입니다.)



이 상황에서 볼리유가 취할 수 있는 대책은 3가지가 있었습니다. 

1. 포(Po) 강이나 아다(Adda) 강 같은 천연 장애물에서 나폴레옹군을 어떻게든 막아내기 위해 방어선을 구축한다.
2. 북부 이탈리아에 박힌 오스트리아의 발톱이라고 할 수 있는 롬바르디아 최강의 철용성, 만토바 (Mantova 또는 Mantua) 요새를 거점으로 방어한다.
3. 롬바르디아를 깨끗하게 포기하고 아디제(Adige) 강을 넘어 티롤(Tyrol) 지방으로 철수한 뒤, 증원군을 받아 반격한다.

볼리유가 택한 것은 이 세가지 전부 다였습니다.  즉, 1안을 해보다가 안되면 2안, 그것도 제대로 안되면 3안으로 간다는 것이었지요.  이건 그다지 좋지 못한 선택이었습니다.  군사 작전이란 것은 목표와 전략이 명확해야 하거든요.  이렇게 A를 해보다가 안되면 B를 해보고, 뭐 그것도 안되면... 이런 식의 작전은 아군을 구속할 뿐만 아니라, 적에게 많은 선택권을 주게 됩니다. 

먼저 볼리유는 포(Po) 강에서 나폴레옹을 막아보기 위해 자신과 나폴레옹 사이를 흐르는 포 강의 다리를 모조리 파괴했습니다.  그러나 5월 7일, 나폴레옹의 척후대는 피아센짜(Piacenza) 근처에서 대형 나룻배를 하나 찾아냈고, 오스트리아군이 지키지 않는 강변을 통해 (포 강은 1만9천명이 지키기엔 너무 기니까요) 이 나룻배 한척으로 프랑스군이 포 강을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포 강을 넘은 프랑스군은 이때 아직 대령이었던, 나중에 나폴레옹의 절친이 되는 란(Jean Lanne)이었습니다.  인근의 오스트리아군 수천이 프랑스군의 도하 현장에 도착하여 전투가 벌어졌지만, 저항은 그다지 거세지 못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이미 '플랜 B'가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볼리유는 자신의 수하 중 가장 맹장이라고 할 수 있는 크로아티아 출신 푸카소비히(Josef Vukassovich)를 보내 프랑스군과 교전하도록 하면서, 자신의 주력 부대는 제2의 방어선인 아다(Adda) 강을 향해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럴 거면 애초에 뭐하러 포 강변을 지켰을까요 ? 

하지만 후퇴하는 볼리유의 머리 속에 가득찬 생각은 '애초에 이럴거면 왜 내가 포 강변에 죽치고 있었을까'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발업질럿' 나폴레옹군이 과연 자신이 아다 강을 온전히 건너도록 내버려 둘까 하는 공포감이었습니다.  이미 남쪽, 그러니까 볼리유 본대의 좌익을 우회하여 포 강을 건넌 나폴레옹군이 혹시라도 그 뛰어난 기동력으로 자신보다 먼저 아다 강에 도착하면 볼리유군은 2안과 3안은 시도도 못해보고 포 강과 아다 강 사이에 갇히는 신세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폼비오 전투를 그린 그림인데... 아무래도 전쟁화치고는 정말 내용물이 없네요.  이 폼비오 전투는 나름 치열하여, 야간의 혼전 중에 프랑스군의 라아르프(Laharpe) 장군이 전사하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오스트리아군은 지휘관이 우왕좌왕 했을 뿐, 병사들 개개인은 용감했다는 이야기지요.)


아니나다를까, 5월 8일과 9일 사이 폼비오(Fombio)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밀어낸 프랑스군은 아다 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있는 피지게토네(Pizzighettone)로 가는 길을 막아버렸습니다.  볼리유는 어쩔 수 없이 원래 계획보다 더 북쪽인 로디(Lodi) 강의 다리를 향해 '맹렬한 속도로 후퇴(?)'를 시작했습니다.




(아다 강 레이스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이 보여준 베를린 레이스보다 더 절박했습니다.)



한편, 나폴레옹으로서도 이 아다 강을 향한 레이스가 룰루랄라하는 소풍길은 아니었습니다.  북부 이탈리아를 점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은 어차피 애초부터 3만여명 뿐이었고, 합스부르크 가문이 동원할 수 있는 웅대한 군사력 전체에 비하면 그 정도는 정말 전위대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폴레옹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즉, 오스트리아 본토라고 할 수 있는 인접 티롤 지역에는 오스트리아의 명장들과 맹병들이 득실거리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볼리유를 무찌르고 롬바르디아를 점령한다고 해도, '원래 합법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소유인' 그 땅을 되찾기 위해 티롤에 주둔한 오스트리아군이 물밀 듯 쳐내려올 것이 뻔했으므로, 나폴레옹은 가능한 빨리, 결정적으로 볼리유의 오스트리아군을 분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자면 볼리유가 만토바 요새로 기어들어가기 전에, 아다 강 서쪽에서 그를 포착하여 결정타를 먹여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로디의 다리를 향하여 볼리유와 생사를 건 레이스를 펼쳐야 했습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이 1977년 영화를 뭘로 보았나요 ?  저는 토요일 주말의 명화에서 TV로 보았지요~  그나저나 저 ㅎㄷㄷ한 캐스팅을 보십시요.)



그러나 결론은 로디의 다리는 나폴레옹에게는 a bridge too far 였습니다.  볼리유의 후위대를 맡고 있던 크로아티아의 맹장 푸카소비히 장군(대령이었다가 5월 2일 장군으로 승진)이 5월 10일 아침 9시경 마침내 프랑스군의 전위대에게 따라 잡혔을 때, 볼리유의 본대는 이미 로디의 다리를 건너 만토바를 향해 순조롭게 후퇴 중이었습니다.  푸카소비히의 크로아티아 병사들은 맹렬히 저항했지만, 곧 다리를 건너 로디 시내로 후퇴했고, 지친 그들은 게하르트 로셀미니(Gerhard Rosselmini) 장군의 부대와 바톤을 텃치했습니다.  로셀미니의 부대는 볼리유의 후위를 맡고 있는 세보텐도르프(Karl Philipp Sebottendorf) 장군의 사단 소속이었습니다.  로디를 지키던 세보텐도르프 휘하의 병력은 약 9천명 정도로서, 이날 볼리유를 잡겠다는 일념으로 쫓아온 프랑스군 1만7천에 비하면 크게 열세였습니다. 

푸카소비히와 우격다짐을 벌였던 프랑스군 전초대도 아직은 숫자가 많지 않아, 이들은 당장 로디 다리를 강행 돌파하지는 않고 증원군을 기다렸습니다.  이때 세보텐도르프는 대낮에 후퇴를 하면 곧 쫓아올 프랑스 기병대에게 추격을 당하면서 군이 궤멸될 위험이 있었으므로, 최소한 그날 해가 질 때까지는 로디의 다리 너머에서 방어진을 치고 버틸 작정이었습니다.  이 로디의 다리는 기둥이나 대들보가 모두 나무로 된 간단한 구조인데다, 길이가 무려 200야드(약 180m)에 달하는 긴 다리여서, 오스트리아군은 불을 질러 이 다리를 끊어버릴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오전 11시, 프랑스군의 대포 2문이 도착하여 마구 포격을 가하는 바람에 다리에 불을 지르려는 오스트리아군의 노력을 좌절시켰습니다. 

(로디 다리를 사이에 둔 치열한 포격전)



오스트리아군도 14문의 대포가 있었으므로, 이에 맞서 포격전이 벌여 프랑스군의 대포를 파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오후 들어 프랑스군의 증원군이 도착하면서 대포가 30문으로 늘어나, 프랑스측의 포격이 더욱 격렬해지며 오스트리아군의 포병대는 물론 보병들에 대한 포격이 가해졌습니다.  이때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나폴레옹이 직접 대포를 조준하면서 이 포격전을 지휘했다고 합니다.  프랑스군 병사들은 이를 보고 나폴레옹에게 '꼬마 하사관'(le petit caporal, 하사관이라기보다는 직역하면 우리의 상병 계급이지요)이라는 애칭을 붙여주었습니다.  대개, 대포를 조준하는 것은 caporal, 즉 상병이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대포를 조준하는 것이 뭐 어려운 일일까 싶습니다만, 그건 어렵다기 보다도,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병사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입니다.  당시 로디 전투를 그린 그림을 보면, 나폴레옹의 옆에 쓰러져 죽은 병사의 모습이 보입니다.  'Call of Duty 5' 라는 게임 중간중간에 나오는 전쟁 명언 중 이런 것이 있었지요.  'If the enemy is in range, so are you.'  즉, 적이 아군의 사거리 안에 들어왔다면, 우리도 적의 사거리 안에 들어간 거라고요.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군 대포들을 잠재우기 위해 열심히 포격을 할 때, 오스트리아군 포병들도 나폴레옹의 대포를 향해 맹렬히 포격을 해댔습니다.  실제로 많은 장군들이 적의 포격에 두 동강이 났지요.  (장군님들의 전사  참조)  병사들은 이렇게 자신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동고동락하는 나폴레옹의 리더쉽에 감복한 것입니다.




(로디 전투에서 직접 대포를 조준하는 나폴레옹.  미르바흐(Myrbach) 작.  옆에 쓰러진 말과 병사는 아마 나폴레옹이 일부러 그려달라고 부탁했을 듯.)



이 포격전은 저녁 6시 무렵까지 이어졌습니다.  이때 약 1천명 정도의 프랑스 제2 기병총 (carabiniers) 대대는 마을을 둘러싼 벽 뒤에 숨어서 6열 종대의 긴 대열을 짜고 있었습니다.  아침 나절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프랑스군의 습격에 대비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이 이제 막 해가 지려는 순간, 즉 막판이 되어 느슨해지는 모습을 보이자, 제2 기병총 대대는 마을 문을 박차고 뛰어나가 6열 종대로 로디 다리를 가득 매운 채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군이 다리를 중간 정도 건넌 순간, 기다리고 있던 오스트리아군의 대포가 캐니스터탄을 발사함과 동시에, 여태껏 이 순간을 위해 7시간 정도를 기다려온 오스트리아군 보병들의 머스켓도 일제히 불을 뿜었습니다.  경보병 중 정예병사들만을 모아 만든 제2 기병총 대대의 용감한 병사들은 순식간에 피투성이 시체 덩어리가 되어 다리 위에 쓰려졌고, 그 긴 돌격 대열도 비틀거리며 멈춰섰습니다. 




(로디 전투, 르죈(Louis-François, Baron Lejeune) 작)



사실 이때가 이 전투의 절대절명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죽어야만 하는 전투에서, 승리와 패배를 결정짓는 것은 병사들의 사기인 경우가 많았고, 이렇게 기세좋게 돌격해가다가 적의 일제사격에 전우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버린 순간이, 다리 위 병사들의 사기는 거의 0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도 더 진격하다간 저렇게 시체가 되겠다'라는 공포심이 병사들 사이에서 퍼지는 것이지요.  이렇게 한번 멈춘 돌격을 다시 움직이게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프랑스군의 지휘관들은 이를 해냈습니다.  마세나, 베르티에, 란, 세르보니(Jean-Baptiste Cervoni), 달레마뉴(Claude Dallemagne) 등의 장군들이 일제히 돌격 대열의 선두로 달려나가 멈춰선 병사들을 이끌고 마침내 다리를 건넜습니다.  사실 아직 건너지 못하고 남은 다리의 길이인 90m 정도의 거리라면, 뛰어서 돌파한다면 오스트리아군의 대포나 머스켓 소총이 재장전되기 전에 건널 수 있는 거리겠지요.  어떻게 생각하면 저 지휘관들 좀 약았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훃이 분명히 말했다... 군대는 줄이라 했다.  대체로 맨 앞줄은 매우 조치안타 !)



아무튼 긴 총검을 꽂은 기병총 대대 병사들이 (기병총 대대가 정말 짧은 기병총을 들고다닌 것은 아닙니다) 다리를 건너 오스트리아군의 대오에 부딪히는 순간, 오스트리아군은 삽시간에 와르르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오스트리아 병사들은 용감하게 싸워 프랑스군을 오히려 거의 강변까지 몰아붙였습니다.  하지만 여울목에서 말을 타고 강을 건넌 프랑스 기병대들이 나타나고, 더 많은 프랑스군이 다리를 건너 전투에 합류하자, 마침내 오스트리아군은 물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어찌되었건, 해질 때까지만 버틴다는 목표는 완수했으니까요.  일부 오스트리아군은 끝까지 용감하게 싸워, 프랑스군이 집요하게 추격하는 것을 저지시켰습니다.  이로써 5월 10일 로디 전투는 종료되었습니다.  이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의 피해는 약 2천, 프랑스군은 5백이라는 설도 있고 2천이라는 설도 있는 등 다양합니다.

자 어떻습니까 ?  이 로디 전투는 프랑스군의 승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제가 볼 때는 프랑스군의 전략적 패배입니다.  나폴레옹이 벌인 '아다 강으로의 레이스'의 목적, 즉 볼리유의 주력 본대가 아다 강을 건너기 전에 따라잡아 격파한다는 목표는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따라잡은 세보텐도르프의 후위대 조차도 완전 섬멸시키지 못하고, 무리한 작전 끝에 의미없는 사상자를 냈을 뿐입니다.  특히 프랑스군의 사상자가 5백이 아니라, 일부에서 주장하는 대로 2천이나 된다면, 더더욱 이 전투는 프랑스군의 패배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보다 더 뒤의 일이긴 하지만, 나폴레옹은 전투 이후 프랑스군의 사상자 숫자를 의도적으로 크게 줄여서 발표하는 못된 버릇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통치자는 언론과 여론을 통제해야 한다는 못된 생각을 가진 나폴레옹이라면, 파리 총재 정부에 보낸 보고서에 프랑스군의 사상자 숫자를 일부러 크게 줄여서 보냈을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적어도 책을 통해 알게 된 나폴레옹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거든요.  저는 개인적으로 로디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5백보다는 2천에 가까왔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렇게 초라한 전과를 남겼던 로디 전투는, 희안하게도 1차 이탈리아 침공 당시 나폴레옹의 전설적인 승리로 기록됩니다.  나폴레옹 자신도 이 전투를 통해서, 자신이 위대한 인물이 될 운명임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젊은 시절, 정확히는 아르콜레 다리에서의 나폴레옹의 날씬했던 모습.  그로(Gros) 작.  그러나 이때부터 온갖 못된 버릇은 이미 다 가지고 있었던 듯.)



제가 볼 때는 이렇습니다.  이탈리아를 침공한 이래, 여태까지의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한번도 본국의 프랑스인들의 입을 딱 벌어지게 할 만한 빛나는 승리를 거둔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몬테노테 전투나 데고 전투 등에서 거둔 승리는, 소수의 적을 다수의 아군으로 찍어누른 전투였지요.  적을 섬멸한 것도 아니었고요.  전편에서도 다루었듯이, 나폴레옹의 진짜 능력은 '이길 가망이 없는 전투에서 혈투를 통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이길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대의 대중들은 후자보다는 전자를 더 높게 쳐주었지요.  그래서 나폴레옹은 적절한 시점에, 자신의 전공을 빛내줄 기념비적인 전투 하나가 필요했고, 로디 전투를 그런 전투라고 포장하기로 마음 먹었던 것입니다. 




(세계에서 두번째로 크다는 밀라노 두오모 대성당.  14세기부터 짓기 시작한 것인데 1809년 나폴레옹에 의해 완공되었습니다.)



사실 로디 전투가 전혀 의미가 없는 전투가 아닌 것이, 이 전투를 끝으로, 아다 강 서쪽은 나폴레옹이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고, 덕택에 나폴레옹군은 꿈의 도시 밀라노에 보무도 당당히 무혈 입성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나폴레옹은 자신이 마치,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를 격파하고 메소포타미아의 진주라고 할 수 있는 바빌론에 무혈입성하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부유하기로 소문난 밀라노는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방면군에게는 정말 '꿈의 도시'라고 할 만 했습니다.  굶주린 배를 움켜주고 누더기 군복을 걸친 채 이탈리아로 쳐들어왔던 나폴레옹군은, 밀라노에 입성한 이후에야 비로소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었고, 뿐만 아니라 여태까지 받지 못하던 밀린 급료를 금화로 지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굶주린 군대를 먹이고 입히고 밀린 급료를 주기 위해서, 밀라노와 인근 지역의 이탈리아 주민들은 금고와 식량 창고를 탈탈 털어야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렇게 긁어모은 재화 중에서, 1차에서만 2백만 프랑(약 250억원)에 달하는 보석과 귀금속 외에도, 이탈리아 거장들의 그림 80여점을 파리의 총재 정부로 보내 자신의 약속을 완료합니다.  이렇게 나폴레옹이 재정난에 시달리던 파리로 보낸 금은보화는 극적인 효과를 보여줍니다.  즉, 나폴레옹이 파리 총재정부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파리 총재정부가 '좀더 보내주세요'라며 오히려 나폴레옹의 눈치를 보게 된 것입니다.  왕가이든 혁명이든 전쟁이든, 돈의 위력은 영원한 것이거든요.




(이거 앞에 당할 장사 없습니다.)



정복자에게는 이런 '징세'가, 피흘려 얻어낸 당연한 권리였을지 모르지만, 약탈당하는 현지 주민들에게는 아닌 밤중의 홍두깨였습니다.  그리고 정복자가 굶주리고 헐벗은 정도에 비례하여, 그 약탈의 정도는 더욱 가혹했습니다.  프랑스군의 이런 탐욕스런 약탈 행위는 마침내 현지 주민들의 봉기를 야기시켰습니다.  5월 24일 밀라노와 파비아 인근에서 프랑스군에 저항하는 농민 봉기가 발생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했습니다.  그 대가로, 봉기가 일어났던 곳은 수백명이 처형당하고, 더욱 철저히 약탈당했습니다.  이렇게 무자비한 모습을 보여준 무적의 나폴레옹군에게 놀란 인근 이탈리아 공국들은 서둘러 나폴레옹에게 무릎을 꿇고 수백만 프랑의 조공을 바치고 휴전협정을 체결했습니다.  교황령도 영토 할양과 함께, 무려 3천4백만 프랑(4천2백억원)에 달하는 예술품과 귀금속을 바쳤습니다.  나폴레옹이 처음 밀라노에 입성할 때, 나폴레옹을 '오스트리아로부터 이탈리아를 해방시킨 혁명 영웅'으로 열렬히 환영하던 이탈리아인들의 표정이 바뀐 것은 말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나폴레옹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야심가 나폴레옹에게는 이탈리아 주민들이 자신에 대해 뭐라고 생각하던 전혀 중요치 않았으니까요.  그는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손아귀를 빠져나간 볼리유를 추격하여 박살내는 일이 남아 있었습니다. 




(도대체 볼리유 이 자식은 몇주 전 일도 기억 못하나 ???)



이때 볼리유는 포 강에서 벌어졌던 폼비오(Fombio) 전투에서 배운 것이 전혀 없었는지, 다시 전과 동일하게, 철용성 만토바 요새를 끼고 도는 민치오(Minchio) 강을 따라 넓게 병력을 산개시키고 나폴레옹을 막아내려고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5월 30일, 보르게토(Borghetto) 전투에서 어렵지 않게 이 연약한 방어선을 돌파했고, 전과 동일하게, 볼리유는 나폴레옹이 퇴로를 봉쇄할까봐 허겁지겁 병력을 수습하여 아디제(Adige) 강을 건너 티롤로 철수해 버립니다.  하지만 볼리유는 나폴레옹의 목에 가시를 하나 남겨두고 떠납니다.  즉 원래 만토바 요새를 원래 수비하던 디를(Josef Franz Canto d'Irles) 장군의 수비대를 1만5천명 수준으로 늘려 놓았고, 특히 거기에 자신의 휘하 중 최고 용장이라고 할 수 있는 푸카소비히 및 그의 그렌츠 병사들을 남겨놓았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이 만토바 요새 때문에 두고두고 고생을 하게 됩니다.  로디 전투에서 볼리유를 놓쳤던 과오에 대해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이지요.




(저 지도 북동쪽에 티롤 공국이 보이시지요 ?  나폴레옹은 황제가 된 이후에도 티롤 때문에 계속 골치가 아팠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진짜 문제는 만토바가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피에드몽과 롬바르디아를 (남들이 보기에는) 이토록 쉽게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비교적 소수의 수비대가 지키고 있는 넓은 지역을 공격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나폴레옹은 공격자 입장에서, 자기가 원하는 곳,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상대를 골라가며 싸울 수 있다는 절대적인 잇점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역전되었습니다.  이제 나폴레옹은 공격자가 아닌 수비자 입장에서, 티롤로부터 쳐들어올 오스트리아 증원군에 맞서 롬바르디아를 지켜야 했습니다.  마치 4월초 볼리유의 입장이 된 셈이었습니다.  적들이 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정확히 어느 곳을 칠 지는 모르고, 지켜야 할 곳은 넓은데 병력은 부족하므로 어쩔 수 없이 병력을 분산시켜야 했던 것이지요.  설상가상으로, 이렇게 초조하게 오스트리아의 반격을 기다리는 나폴레옹을 향해 오던 적은 메인 무대라고 할 수 있는 라인 방면에서 명장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뷔름저(Dagobert von Wurmser)였습니다.   K리그를 평정한 신흥 구단에게, 잉글리쉬 프리미어 리그에서 뼈가 굵은 명문 구단이 도전해 왔던 것이지요.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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