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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나폴레옹, 이탈리아를 침공하다 - 1편

by nasica-old 2010.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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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하면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는 백마를 타고 알프스를 넘는 멋진 그림일 것입니다.  이처럼 이탈리아는 나폴레옹이라는 영웅 신화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중요 요소이고, 무엇보다도 나폴레옹을 군사적 천재로 사람들이 인식하기 시작한 첫번째 무대였습니다.  (단, 이 백마타고 알프스를 넘는 그림은 1796년 나폴레옹의 첫번째 이탈리아 침공 때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1800년 2차 침공 때를 묘사한 것입니다.)




(1차 이탈리아 침공 때는 알프스를 넘지 않고 해안길로 돌아갔다는...)



전에도 언급드렸듯이, 나폴레옹은 툴롱 전투에서 입신양명을 한 직후 이탈리아 방면군 포병 사령관으로 취임한 이래, 줄곧 '프랑스는 이탈리아를 침공해야 한다'며 온갖 작전 계획을 미리 써두었고,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방데 지방으로 좌천이 되자, 격렬하게 반발하며 이탈리아 방면군으로 다시 배속받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결국 방데미에르 사건을 통해 다시 각광을 받게 된 나폴레옹은, 국내 치안군 (Army of the Interior) 사령관 자리를 꿰어차며 권력 중심부에 서게 됩니다만, 이내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직을 맡기를 갈망했고 결국 그 자리를 따냅니다.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직을 따낸 것에 대해, 사람들의 평은 그다지 좋지 못했습니다.  당시 총재 중 실세였던 바라스의 정부였다가, 이젠 바라스의 총애를 잃고 퇴물이 된 조세핀과 결혼하는 조건으로 사령관직을 따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나폴레옹이 조세핀을 열렬히 사랑했기 때문에 결혼한 것이 사실이기는 합니다만,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직 부여가 바라스의 결혼 선물이었다는 것은 남아있는 조세핀의 편지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대체 나폴레옹은 왜 이렇게 이탈리아를 침공하고 싶어 했을까요 ?  이탈리아와 무슨 철천지 원수 관계에 있어서였을까요 아니면 이탈리아에 꿀단지를 묻어놓았기 때문이었을까요 ?

일단 확실한 것은,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이라는 자리는 뭐 그다지 잘나가는 장군이 갈 만한 자리는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방데 지방 반란 진압군보다야 훨씬 나았겠지만요.)  일단 당시 프랑스에는 총 13개 군(Army)이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군은 오스트리아와 직접 대면하고 있는 라인 방면군으로서, 당대의 명장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모로(Moreau) 장군이 맡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프랑스의 정예 병력이 그 쪽에 배치되어 있었고, 군수품 보급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와 맞서고 있는 오스트리아군도 그에 어울리는 정예군이 배치되어 있었고, 역전의 노장 뷔름저(Wurmser)가 그 지휘를 맡고 있었지요.  그에 비하면 이탈리아 방면군은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구석탱이에 위치한 군대로서, 서류상의 병력은 10만 명 정도였지만 실제로는 겨우 3만5천 정도의 병력만 동원 가능했고, 무엇보다도 보급이 전혀 안되고 있었습니다.  즉, 병사들은 급료는 커녕, 제복과 무기는 물론 당장 먹을 식량조차 거의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연히 이들의 사기는 땅 속 깊이 굴착해 들어가고 있었고, 주변의 이탈리아 마을은 물론 프랑스 마을까지 노략질함으로써 그날그날 연명을 하는, 거의 산도적 집단으로 퇴화되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같은 군사 천재가 맡을 만한 군대가 아니었다는 이야기지요.




(모로 장군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한편 쓸 생각입니다...  나폴레옹이 진정한 경쟁자로 생각할 정도로 거물이었다네요.)



하지만 나폴레옹은 나름대로의 비전과 생각이 있었기에 이탈리아 방면군을 계속 원했습니다.  아직 이 시기에, 나폴레옹은 대규모 야전군을 지휘해본 경험이 전혀 없는 상태였습니다.  툴롱 포위전 때 포병대를 지휘한 것 이외에는, 이렇다할 전과가 전혀 없었지요.   비록 라인 방면군 사령관 자리가 훨씬 좋은 자리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별 경력도 없는 자기에게, 국가의 존망이 걸려 있는 라인 방면군 사령관 자리가 돌아올 턱이 없다는 것을 나폴레옹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방면군 자리가 나름대로 꽤 괜찮은 기회를 제공한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일단 자기 자신이 코르시카 인으로서, 이탈리아어가 모국어일 정도로 이탈리아 사정에 밝은 편이었습니다.  따라서 북부 이탈리아인들이 비록 오스트리아의 실질적인 지배 하에 놓여 있기는 하지만, 결코 오스트리아와의 관계가 좋지는 않으며, 오히려 오스트리아를 두려워하고 꺼려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 비록 자기가 거느리게 될 군대가 오합지졸의 상거지떼라고는 해도, 자신이 상대해야 하는 이탈리아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더 월등하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렇게 이탈리아군을 얕잡아 본 것은 다 근거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792년, 프랑스가 내부 혼란을 정리하고 나자, 프랑스는 매우 호전적으로 돌변하여 주변 국가들을 침공하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혁명이라는 것은 상당히 호전적인 것으로서, '우리들끼리만 혁명하고 다른 나라 사람들은 지들끼리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자'가 허용되지 않는 것이거든요.  한 국가에 공산 혁명이 일어나면 주변 국가들까지 무력 침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겪어봐서 알지 않습니까 ?  심지어 미국 코 앞에서 혁명을 일으킨 쿠바만 해도, (미국 본토로 쳐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중남미에 혁명을 무력으로 전파했지요.  쿠바가 낳은 프랜차이즈 영웅 체 게바라가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죽었는지 생각해보시면 이 점을 수긍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자본주의 세계의 상업주의는 공산혁명 지도자마저 상품화합니다...  잘 생긴 외모 앞에서는 이념이고 뭐고 필요없다는 것을 증명한 체 게바라)



아무튼 프랑스는 1792년 이후, 북쪽으로는 벨기에를, 동쪽으로는 마인츠를, 남쪽으로는 사르디니아 왕국 소속이던 사보이 공국의 니스(Nice) 시를 '해방'시키기 위해 침략했습니다.  부유한 북서부의 니스 시를 빼앗긴 이탈리아, 즉 사르디니아 왕국은 육군 대국이었던 프랑스의 무력 앞에 일단 깨갱을 선언하고 찌그러져 있었지만, 프랑스 산업도시 리옹(Lyon)에서 폭동이 일어나 프랑스군이 대거 그 진압에 투입되자, 이때를 이용하여 니스를 탈환합니다.  하지만 리옹 시의 폭동이 진압되자마자 되돌아온 불과 1만2천의 프랑스군에게 다시 니스를 빼앗기고 맙니다.  이렇게 사르디니아 왕국이 삽질을 하는 동안, 프랑스 혁명 전쟁이 국제 전쟁이 되어 버린 탓에, 오스트리아와 나폴리 왕국이 이 지역의 분쟁에 개입합니다.  연합군은 사르디니아 및 나폴리 왕국의 병력에 오스트리아군까지 총 4만5천의 병력이 동원되어 다시 니스 지역을 탈환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프랑스군이 역공에 나서 이들을 쫓아내고 피에드몽(Piedmont 또는 Piemonte)으로의 통로를 확보합니다.  하지만 다시 프랑스 내부에 문제가 생깁니다.  즉, 테르미도르 정변이 일어나 프랑스군이 일대 혼란에 빠진 것입니다.  (나폴레옹도 이때 투옥되지요.)  이때를 틈타 이탈리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은 다시 사보이 지역을 침공하려 했으나, 프랑스 이탈리아 방면군은 '반격에 나서지 말라'는 국방장관 카르노(Carnot)의 명령도 무시하고 오히려 이탈리아 북부로 쳐들어가 제노아 공화국까지 도달하는 위엄을 보여줍니다.




(지금의 사보이는 프랑스 땅이지요.  모나코는 박주영이 돈버는 곳.)


나폴레옹은 어차피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을 라인 방면군 사령관직을 맡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정면부라고 할 수 있는 라인강 지역으로 쳐들어가 독일군들과 싸우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탈리아군과 싸워 합스부르크 제국의 취약점인 남쪽 측면을 공략하는 것이 더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판단이 옳았지요.




(전쟁에서 이탈리아가 개무시 당했던 것은 다 역사와 전통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진은 1940년 12월, 북아프리카에서 막 포로로 잡힌 이탈리아군들)




(우리들의, 그리고 나폴레옹의 머리 속에 박혀있는 이탈리아군의 대표적인 모습.  1943년 영국군에게 항복하는 이탈리아군의 사진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상대가 이탈리아군이라고 해도, 자신의 부대가 개판 5분전이라면 전쟁터가 개판이 될 뿐입니다.  나폴레옹이 부푼 희망을 안고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부에 도착했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반항심 가득한 눈빛을 던지는 장군들과 넝마를 걸쳐 입은 병사들 뿐이었습니다.  이탈리아 방면군에는 나폴레옹보다 훨씬 나이가 많을 뿐만 아니라 키도 훨씬 컸던 오쥬로(Pierre Augereau)나, 나중에 나폴레옹으로부터 내 제국에서 가장 위대한 이름이라는 칭찬을 들었던 마세나(André Masséna)가 이미 장군으로 복무하고 있었고, 이들은 모두 사병 출신으로서 자신의 실력만으로 장군직에 오른 풍운아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전부터 이탈리아 방면군에 대해 이런저런 말도 안되는 계획서를 써내던 나폴레옹에 대해 어쩌다 정치권에 끈이 닿아 그 덕택에 아무 전적도 없이 사령관직에 오른 '듣도 보도 못하던 잡놈' 정도의 인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첫 대면에서, 나폴레옹은 특유의 카리스마와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이들을 모두 제압했습니다. 


(오쥬로의 초상.  이 아저씨의 프랑스 혁명 이전의 이력서를 보면 딱 한 줄로 요약됩니다.  "탈영의 제왕".  파리의 과일가게집 아들이던 이 아저씨의 인생은 그에 대해 따로 쓸 만큼 매력적이지는 않더군요.)


사병들의 경우는 좀더 어려웠는데, 사병들은 '행군을 시키려면 먼저 군화부터 달라'는 아우성을 쳐댔고, 사실 그건 정당한 요구였습니다.  이들을 제대로 된 군대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돈이 필요했고, 나폴레옹은 파리 총재 정부에 60만 리브르의 군자금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파리의 총재 정부는 아시냐 지폐로 인한 재정 파탄으로 이미 땡전 한푼 없는 상황이었고, 나폴레옹이 가진 것이라고는 부임할 때 들고 온 달랑 2천 루이(Louis d'Or)의 금화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의 루이 금화에는 금이 약 7.01g 정도 들어 있었으므로, 2천 루이라면 금 1g = 4만8천원으로 잡으면 대략 7억원 정도입니다.)  나폴레옹은 출세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답게, 병사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강압적으로 규율을 잡아나갔습니다.  실제로 병사들 중 일부는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나폴레옹은 직접 현장에 출동하여 병사들을 협박하여 폭동을 진정시켰습니다.  그렇다고 나폴레옹이 병사들에게 채찍만을 썼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장 돈이나 군복, 군화를 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이탈리아에서 얻을 영광과 부, 특히 부에 대한 연설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그런 넝마차림의 병사들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쳐들어갔습니다.


(1786년에 주조된 진짜 루이 16세의 Louis d'Or 금화입니다.  나폴레옹은 바로 이 금화 2천개가 든 가방을 들고 이탈리아 방면군에 부임했지요.)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를 침공한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어서였습니다. 

첫째, 자신이 전임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인 셰레르(Barthélemy Louis Joseph Schérer)를 밀어내고 사령관직을 따낸 것은 10차례도 넘게 보고서를 올려 '내가 이탈리아 방면군을 맡으면 북부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 군을 싹 몰아내겠다'고 떠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원균이 이순신 장군을 몰아내고 그 수군 통제사 자리를 차지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지요.  원균이 좋든 싫든 부산에 쳐들어가야 했듯이, 나폴레옹도 준비가 되었든 안되었든 이탈리아로 가야 했습니다.


(셰레르 장군의 초상입니다.  그렇다고 이 양반이 이순신급이라는 이야기는 물론 아닙니다... 이 후의 전력을 보면 나폴레옹이 따놓은 이탈리아 땅을 지키고 있다가 다 까먹는 등, 오히려 원균에 가깝습니다.  하긴 이 아저씨가 없었다면 1800년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이라는 미술계의 걸작이 탄생할 수 없었겠지요.)


둘째, 총재 정부도 북부 이탈리아 정복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기 떄문이었습니다.  총재 정부가 나폴레옹을 사령관에 임명하면서 내린 교서는 노골적으로, 이탈리아로부터 경제적 수탈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진짜 돈이라고 할 수 있는 황금이 없어 종이 돈인 아시냐 지폐를 마구 찍어내다 경제가 파탄난 프랑스로서는, 어디에서든 진짜 돈을 빨리, 그리고 많이 가져와야 했었고, 그럴 가능성이 보이는 곳은 오스트리아나 영국, 스페인보다는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이탈리아가 만만해 보였던 것입니다.

세째, 이탈리아 방면군의 자체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즉,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탈리아 방면군은 한마디로 집단 거지떼로 전락하는 와중이었는데, 어차피 그대로 원위치에 주둔하고 있다면 보급 부족으로 스스로 와해될 것이 뻔했습니다.  그럴 바에야 이탈리아를 정복해서 거기서 얻은 돈으로 월급을 주겠다는 것이 정말 현실적인 선택이 될 수 있었습니다.

네째, 나폴레옹 전략 전술의 핵심은 병력을 분산시켜 신속한 행군으로 이동시킨 뒤, 자신이 전투를 하고자 하는 곳에 집중하여 수적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공격이냐 수비냐  -  나폴레옹과 웰링턴 ,  나폴레옹과 케사르의 차이점 - 진지 구축,  바클레르 달브 (Bacler d'Albe), 나폴레옹의 중추 신경  참조) 이러한 전법은 공격에 적절한 것이었지 결코 수비에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비록 자신의 공격군이 오스트리아-피에드몽 방어군보다 숫자가 더 적더라도, 자신의 작전대로라면 전투 현장에는 자신이 수적으로 우세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전략은 놀랍게도 잘 맞아 떨어졌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2주 후에 뵙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요즘 좀 바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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