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폴레옹의 시대

나폴레옹, 시민 봉기를 대포로 진압하다 - 방데미에르 13일 사건

by nasica-old 2010. 10. 27.
반응형

지난 번에는 나폴레옹은 어떻게 출세할 수 있었나 ? - 툴롱(Toulon) 포위전 편을 통해, 정말 초라한 포병 대위에 불과했던 코르시카 가난뱅이 나폴레옹이 어떻게 단번에 준장으로 승진하여 출세의 기반을 잡았는지를 보았습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능력자라고 하더라도, 또 아무리 상황이 18세기말 프랑스 대혁명의 혼란기라도 하더라도, 자신의 능력만으로 이런 벼락 출세를 이루어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지난 글에서 설명드렸듯이,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살리세티와 오귀스탱 로베스피에르라는 든든한 정치적 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정치 군인이라는 카드는 양날의 칼입니다.  자신의 분수를 넘는 승진과 출세를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자신에게 아무 과오가 없어도 일신의 몰락을 겪게 하기도 합니다.  나폴레옹에게도 그런 시련이 찾아옵니다.

툴롱 포위전의 공로로 나폴레옹이 얻은 것은 준장이라는 계급 승진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이탈리아 방면군 포병 사령관이라는 상당히 매력적인 감투가 주여졌고, 덕택에 나폴레옹은 자신의 야망을 위한 초석을 다질 수 있었습니다.  즉, 당시 오스트리아령이었던 이탈리아 북부를 침략하여 라인강 방면에서 프랑스군과 대치 중이던 오스트리아군의 주력을 분산시킨다는 작전을 짠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나폴레옹이 제1통령으로 부상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했던 훗날 북부 이탈리아 공략전은 이미 1794년에 그 기초가 구상되었던 것입니다.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이라는 것은, 피에드몽(또는 피에몬테) 지도를 살펴보는 나폴레옹의 눈에 아주 잘 어울리는 표현이지요.)



군 경력에서 뿐만 아니라, 당장 가족들도 신수가 훤해질 수 있었습니다. 코르시카에서 도망친 이래로 돈 나올 구석이 없어, 당시 마르세이유 인근 허름한 방 3개짜리 다세대 주택에서 빈민처럼 살고 있던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을 곧 빼내어 니스 근처에서 징발한 저택에 살게 한 것입니다.  뭐니뭐니 해도, 일단 대위 연봉이 약 3천 리브르였던 것에 비해 (당시 이 금액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영국군과 프랑스군, 누가 더 봉급이 많았을까? 편 참조), 준장 연봉은 그 4배 정도인 1만2천 리브르 정도였으니까요.  나폴레옹은 은근히 속물 구석이 풍부하여, 자신의 초라한 옷차림이나 가벼운 지갑에 컴플렉스를 많이 느끼고 있었는데, 툴롱 포위전 한방으로 이 모든 것이 바뀌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나폴레옹의 정치적 후원을 등에 업은 출세는 그 정치적 빽이 무너져 내리면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 이름도 유명한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의 공포 정치는 툴롱 전투 불과 7개만인 1794년 7월 27일, 지롱드당의 반격으로 무너졌고,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는 동생이자 나폴레옹의 빽이었던 오귀스탱과 함께 그 다음날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습니다.  나폴레옹의 입지는 순식간에 뒤바뀌었습니다.  사실 나이 24세에 육군 준장이라고 하면,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질투가 있었겠습니까 ?  나폴레옹도 스스로 찔리는 바가 많아서, 사람들이 묻지도 않았는데 공연히 '자신은 사실 로베스피에르 형제와는 별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라며 예수를 부정한 베드로의 흉내를 내고 다녔지만, 그는 곧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렇게 나폴레옹의 투옥을 결정한 것이 바로 자신의 빽이라고 믿었던 살리세티였다는 것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습니다.  사실 살리세티도 숙청당하지 않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나폴레옹같은 건 어떻게 되던 상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태가 어느 정도로 심각했냐 하면, 쥐노와 마르몽 같은 부하들이 야간 탈옥을 권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다고 믿고, 그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이 그를 살렸습니다.  2주만에 살리세티가 그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리면서 석방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방면군에서 작전 계획을 짜고 있을 때, 오귀스탱이 직접 나폴레옹을 만나 파리 국민공회의 수비대 지휘관을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했었는데, 나폴레옹이 거절한 바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나폴레옹도 로베스피에르의 공포 정치에 질려버렸기 때문이었을텐데, 이때 그 승진 자리를 덥썩 물었다면 나폴레옹도 이때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목이 날아갔을 것입니다.




(길로틴, 기요탱, Guillotine, 단두대 모두 이 기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혁명 당시 의사였던 기요탱(또는 길로틴) 박사는 사실 교수형의 비인도적인 고통을 없애고자 이 단두대의 사용을 건의했을 뿐이고, 실제로 이 기계를 발명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이 흉악한 기계에 길로틴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에 당혹스러워한 길로틴 일가는 이 기계의 이름을 바꾸어줄 것을 프랑스 정부에 요구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자, 아예 가족의 성을 갈아버렸다고 합니다.  흔히 이 기계를 발명한 길로틴 박사 자신도 이 기계로 목이 잘렸다고 잘못 알려져 있고, 실제로 리옹에서 기요탱이라는 이름의 의사가 이 기계로 처형되기도 했습니다만, 이는 동명이인일 뿐입니다.)



하지만 잘나가던 나폴레옹은 여기서 완전히 찌그러지게 됩니다.  니스의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부로 복직을 합니다만, 더 이상 포병 사령관은 아니었고, 참모의 직책만을 수행할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주변 동료 및 상사와 부하들은 그를 로베스피에르의 잔당으로 여기고 왕따를 시키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이탈리아 원정이 요원해지자, 나폴레옹은 당시 영국군이 점거하고 있던 고향 코르시카에 대한 원정군에 참여하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만, 이 역시 '정치적으로 의심스러운 인물'이라는 이유로 거부되었습니다. 

절망한 나폴레옹은 마침 마르세이유의 부유한 상인의 딸과 결혼한 형 조제프를 만나러 갔다가, 거기서 조제프의 처제인 당시 16살의 데지레 클라리(Desiree Clary)를 만나게 됩니다.  나폴레옹의 상처입은 마음은 이 별로 똑똑하지는 않지만 아름답고 상냥한 아가씨에게서 큰 위안을 얻었고, 곧 이들은 약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나중에 나폴레옹이 정열의 크레올 여자 조세핀을 만나면서 파혼을 하게 되지요.)  이렇게 좀 좋은 일이 생기나보다 싶은 순간에, 나폴레옹에게는 '방데(Vendee)로 가서 보병 지휘관 노릇을 하라'는 명령서가 날아옵니다.  (방데 지방의 반란에 대해서는 나폴레옹은 왜 교황과 화해했을까 ?  편을 참조)  나폴레옹은 동족 상잔으로 피범벅이 된 방데 지방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발령받은 부대는 정말 잔혹했던 내전을 거치면서 반쯤은 피에 굶주린 산적처럼 되어버린 난장판 부대로서, 그쪽으로의 발령은 좌천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무척 온순한 여인이었던 데지레 클라리는 조세핀에게 밀려 나폴레옹에게 파혼을 당하지만, 그 후에 나폴레옹의 부하 베르나도트와 결혼했고, 또 나폴레옹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합니다.  결국 나중에는 남편 덕에 스웨덴 왕비까지 됩니다만, 정작 자신은 추운 스웨덴을 무척이나 싫어하여 생애의 거의 대부분을 파리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이 명령을 거부하고 파리의 국방성으로 출두하여 자신의 병과는 포병인데 발령받은 부대는 보병이라는 이유로 다른 직무를 받아내려 애썼습니다만,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 파리 체류 기간 중 라 리베르테 (La Liberte)라는 하루 72프랑 짜리 허름한 호텔에서 쥐노와 함께 지내며 번민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오죽 심심했으면 자신과 데지레를 모델로 '클리송과 으제니(Clisson et Eugénie)'라는 유치찬란한 연애 소설을 쓰기도 하고, 형인 조제프에게 형수님이 가져온 지참금으로 부동산 투기를 하라고 꼬드기는 편지를 쓰기도 했습니다.  파리에서 지내기에는 자신의 장군복이 너무 낡고 초라하여, 제복 1벌을 새로 지급해달라는 요청서를 국방부에 제출하기도 했지만, 거절당하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온갖 지지리 궁상을 떨었던 것이지요.  그래도 이 기간 중 나폴레옹은 당시 집권층의 주요 권력자 중 하나인 바라스(Barras)와 친분을 쌓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다시 한번, 이때의 친분이 훗날 나폴레옹을 수렁에서 건지는데 1등 공신 역할을 합니다.

나폴레옹은 정 안된다면, 자신을 차라리 오스만 투르크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로 파견보내달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 군의 근대화를 도와주는 역할을 통해 프랑스의 이익을 동방에서 구현하겠다는 이야기였지요.  (이 부분에서는 대기업 신입사원이 지방(방데)에 발령내도 되겠냐는 질문에는 홀어미니를 모셔야 하므로 안된다고 하고, 그럼 해외 발령(콘스탄티노플)도 안되겠네 했더니 그건 괜찮다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이 요청도 거의 이루어지나 싶더니, 결국 1795년 9월 15일 최종적으로 내려진 공문은 '닥치고 방데로 가셈'이었습니다.  일단 나폴레옹은 병을 핑계로 파리에 계속 머물렀고, 결국 그는 현역 보직 장군 명단에서 삭제 처분됩니다.  나폴레옹은 정말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 했습니다. 

그때, 거의 기적처럼 나폴레옹에게 기회가 다가옵니다.  바로 왕당파의 반격이었습니다.


(퀴베롱 반도에 상륙한 프랑스 망명귀족군과 영국 해병대의 비참한 최후)


방데 지방의 반란은 당연히 영국의 시선을 끌었고, 영국은 이를 지원하기 위해 1795년 6월, 약 3천5백명에 달하는 프랑스 망명 귀족들의 부대와 소수의 영국 정규군을 프랑스 서부 브리타니에 있는 퀴베롱 (Quiberon) 반도에 상륙시킵니다.  이들은 인근 방데 지방의 반란군과 연합하여 프랑스 서부 지역 전체에서 반란의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순조롭게 상륙하고, 반란군들을 끌어모아 총 1만7천명까지 병력이 불어났으나, 곧 결연한 의지와 놀랄만한 신속성으로 대응에 나선 오슈(Hoche) 장군에 의해 불과 1달도 안되어 철저히 분쇄당하고 말았습니다.  총 병력 1만7천 중, 무려 1만3천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하거나, 포로로 잡혔고, 불과 2천명만이 영국 함대에 의해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오슈 장군의 프랑스군은 총 병력 1만3천 중 불과 500명의 사상자를 냈을 뿐이었습니다.   이때의 이야기는 혼블로워 시리즈 제1편 중 '개구리와 바다가재' (The Frogs and the Lobsters, 프랑스인과 영국육군을 뜻함) 편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중 한 소절은 나폴레옹 시대의 아침식사 광경 편 참조)


(개인적으로는 혼블로워 시리즈 중에서 가장 재미없는 책이었습니다.)



이 작전에서 프랑스 왕당파의 중심 인물이었던 아르투와 공작(comte d’Artois, 훗날의 샤를 10세)은 이 실패에 굴하지 않고, 9월 30일 다시 유 섬 (Il d'Yeu)에 1천명의 망명 귀족군 및 2천명의 영국군을 거느리고 상륙합니다.  특히, 직접 상륙하지는 않았던 퀴베롱 작전 때와는 달리, 10월 2일 직접 프랑스에 상륙하여 진짜 프랑스 왕족이 프랑스 땅에 귀환했음을 선포했습니다.  특히 이 아르투와 공작의 상륙은 프랑스에 잔류하고 있던 왕당파 및 그 동조자들을 흥분시켰습니다.  파리 시내에서 무스카댕이라고 불리우던 멋쟁이 젊은이들은 이제 대놓고 왕정시대의 헤어 스타일과 옷차림을 하고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공화국의 상징인 '자유의 나무'를 잘라 넘어뜨리고 삼색모를 발로 밟고 다니는 등의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특히 이때 국민공회는 자신들의 정치적 이기심을 노골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한 법안, 소위 '2/3 법령' (전체 의원 중 2/3는 국민공회 회원 중에서만 뽑아야 한다는 법)을 방금 통과시킨 상태라서, 시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바닥을 치고 있던 터라 왕당파의 소요는 더욱 심했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시위나 소요였다면 어땠을지 모르겠으나, 이는 곧 무장 반란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파리는 48개의 구역(Section)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각 구역별로 국민방위군이라는 이름 하에 자체 병력이 허가되어 있었습니다.  그 구역들 중 몇개, 특히 르 펠르티에 (Le Pelletier) 구역은 노골적인 왕당파 구역으로서, 여기서 주동이 되어 국민공회의 통치를 거부한다는 선언이 10월 4일 터져 나온 것입니다.  왕당파에 동조하는 국민방위군 병력은 무려 3만명 정도였는데, 국민공회에 충성하는 정부군은 겨우 5천명 정도만 파리 시내에 있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먼 서쪽의 방데 지방 반란 진압과 동쪽의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지대에 배치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파리 시내의 왕당파 세력을 우습게 보았던 국민공회의 부주의함이 낳은 결과였습니다.  (여기서 교훈을 얻은 국민 공회는 이 반란 진압 이후 구역 제도를 없애버립니다.)

깜짝 놀란 국민공회는 방데 지방 진압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므누(Jean-François, baron de Menou) 장군에게 르 펠르티에 구역의 진압을 명했지만, 므누 장군은 5천의 병력으로 3만명을 진압하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지, 무력을 사용하기 보다는 대화로 타협을 시도했고, 이것이 왕당파 국민방위군에게 오히려 자신감을 불어넣어준 결과를 낳아버렸습니다.  사실 므누 장군은 원래 귀족 출신으로서 왕당파에 대해 동조하는 면이 없지 않았고, 또 파리 시내에서 대유혈사태를 일으키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되어 버렸고, 국민공회는 패닉 상태에 빠져 그날 밤 므누 장군을 해임하고 체포 구금합니다. 

 


(이날, 므누 장군이 좀더 단호한 조치만 취했더라도, 황제 나폴레옹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므누 장군은 나중에 이집트 원정에 동참하여, 현지에서 이집트 여자와 정식 결혼까지 하는 개방성을 보여주었으나, 여전히 지휘에서는 무능함을 보여주어 이집트에서 영국군에게 항복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때, 즉 프랑스 혁명이 좌초될 위기에 처했던 급박했던 10월 4일 밤 위기의 순간에 나폴레옹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  그는 울적한 마음을 달래려 파리 시내의 어느 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뭔가 시내에서 함성 소리가 들리자, 뭔가 또 사건이 터졌다는 것을 짐작하고, 그는 국민공회 본부를 찾아가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인지 알아보려 했습니다.

이때 여러가지 버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폴레옹 전기..라기보다는 소설로 가장 유명한 막스 갈로의 '나폴레옹'을 보면, 길가에서 그를 찾던 전령에 의해 국민공회로 소집되었다고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신빙성이 많이 떨어집니다.  나폴레옹의 거처도 아니고, 야밤에 파리 시내 길거리에서 나폴레옹을 찾아낸다는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  다른 문헌들에는 나폴레옹이 국민공회를 직접 찾아갔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가지 버전의 이야기가 나돌 수 밖에 없는 것이, 나폴레옹 자신도 이날 밤의 일에 대해서 비망록에 무려 3가지 버전의 이야기를 남겼을 정도로, 설들이 난무했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Pierre Lanfrey 라는 분이 쓴 'The History of Napoleon the First: 1769-1800'라는 책에 소개된 나폴레옹의 비망록에 따르면 (저는 구글 books에서 이 책의 일부만 읽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직접 국민공회를 찾아갔고, 의원들이 누구를 지휘관으로 삼을지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을 구경꾼들 틈 사이에 섞여서 듣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지휘관 이름 중에는 나폴레옹 본인의 이름도 잠깐 언급되었고, 특히 바라스가 결국 사령관으로 뽑히자, 바라스가 '부관으로 나폴레옹을 쓰게 해달라'고 의원들에게 요청하는 말도 구경꾼 틈에 숨은 상태에서 직접 들었다고 합니다.  이때 나폴레은 30여분 동안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를 열심히 고민했다고 합니다.  흔히 소개된 일화로, 이때 총사령관으로 뽑힌 바라스(Barras)로부터 나폴레옹은 '부관이 되어달라, 생각할 시간을 3분 주겠다'라는 제안을 들었다고들 합니다만, 사실 그 전에 나폴레옹은 충분히 고민을 했던 것이지요.  결국 나폴레옹은 '남자라면 모 아니면 도'라는 결론을 내리고, 바라스 앞에 천연덕스럽게 '무슨 사건이 터졌나봅니다'하며 나섰고, 바라스는 그 유명한 '3분의 여유를 주겠다'라는 제안을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대신 전권을 달라'고 요구했던 것도 유명한 일화지요. 

나폴레옹은 즉각 상황 파악에 나섭니다.  먼저 해임되어 투옥된 므누 장군을 찾아가 상황 설명을 듣고, 특히 중요한 정보, 즉 40문의 대포와 그 탄약이 파리 교외 사블롱(Sablons) 평원에 위치해있다는 정보를 입수합니다.  이 정보가 나폴레옹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나폴레옹은 즉각 사령부로 나와 눈에 띄는 사람들 중 가장 자신감 넘쳐보이는 기병 장교를 골라 '사블롱 평원으로 기병 200을 거느리고 출동하여 거기 있는 대포 40문과 탄약을 끌고 오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 사람이 바로 뮈라(Murat)였습니다.  (뮈라에 대해서는 진정한 불꽃 남자, 요아킴 뮈라 편 참조)  뮈라가 '넌 누구길래...'하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뭔가 말을 하려하자 '뮈라 자넨 내 명령에 따른다. 가라!' 라고 명령한 것도 유명한 일화입니다.  뮈라가 명령대로 대포를 끌고간 직후에 왕당파군도 대포를 찾아 사블롱 평원에 도착하여 뒷북을 쳤다고 합니다.


(1810년 열병식이 거행 중인 튈르리 궁 앞의 모습입니다.)



바로 그 다음날인 1795년 10월 5일, 프랑스 혁명력으로 포도달 13일 (13 Vendémiaire)에  벌어진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대포로 포도탄을 쏘아 왕당파군을 제압한 것은 이미 다들 아시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대포는 전장의 신 편 참조)  밤새도록 방어 준비를 했던 나폴레옹군이 새벽 5시에 처음 맞이한 적군은 2열 종대로 골목길을 따라 튈르리 궁을 향해 오던 소규모의 반란군이었고, 이들은 간단히 격퇴됩니다.  이들을 물리친지 약 5시간 뒤, 튈르리 궁을 향한 거리 곳곳에서 일제히 반란군 부대가 나타나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정규병력처럼 포도탄 세례를 견딜 만큼 굳세지는 못하여, 영국 역사학자 카알라일의 표현대로 'Whiff of grapeshot'에 거미새끼처럼 흩어졌습니다.  나폴레옹은 오히려 반격에 나서 생 로슈(Saint Roch) 교회 앞과 생 또노레(Saint Honoré) 거리에 모여있는 반란군 주력 부대를 발견하고 다시 포도탄을 퍼부어 격파했습니다.  다른 주력 부대 하나도 근처 팔레 롸얄(Palais Royal) 근처까지 왔다가 포도탄 세례를 받고 흩어졌습니다. 




(나폴레옹이 반란군들을 무찌른 주요 전투가 벌어졌던 3곳을 노란 핀으로 표시했습니다.  왼쪽 하단은 과거 튈르리 궁이 있던 자리입니다.  참고로, 저 위에서 생 로슈와 생 또노레 사이의 거리는 불과 200m 정도에 불과합니다.)



반란군을 이끄는 지휘관은 2명으로서, 한명은 다니캉(Danican)이라는 이름의 불명예 제대 장교였는데 별 능력이 없는 지휘관이었고, 다른 한명은 라퐁(Lafond)이라는 이름의 귀환한 망명 귀족(emigre)였는데, 매우 용감한 사내로서, 포도탄 세례에 놀라 달아나는 병사들을 재집결시켜 3번이나 돌격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포도탄 앞에 어중이떠중이들의 용기가 그리 오래 버틸 수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2시간 가량의 전투가 끝났을 때, 거리에는 반란군 병사들의 시체 300여구가 널려 있었습니다.  남은 것은 보병과 기병들이 도망치는 적병들을 추격하는 것 뿐이었지요.  나폴레옹도 반란군을 추격하며 전진할 때 탄 말이 적탄에 쓰러지는 등 위기의 순간을 겪기도 했다고 합니다.  (다만, 이렇게 '타고 있던 말이 적탄에 맞아 쓰러질 정도로 위험을 무릅썼다'는 표현은 식상하다 싶을 정도로 당대에 너무 유행하던 표현이라서, 정말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인지, 나폴레옹과 그 부하들이 나중에 지어낸 말인지는 미지수입니다.)



(생 로슈 교회 앞 계단에 모인 반란군을 항해 포격을 가하는 나폴레옹의 모습입니다.)



이전 글에서도 제가 의문을 표했지만, 그 좁은 파리 골목길에서 포도탄을 발사하며 2시간이나 격전을 벌였는데, 사망자가 겨우 300명 뿐인가 하는 것은 약간 이상합니다.  그걸 보면, 나폴레옹이 상대했던 것은 국민방위군이라는 이름이 붙은 3만명의 반란군에 대해서 의심을 해보아야 합니다.  또, 위에서 언급한 퀴베롱 상륙 작전에서 1만7천명의 프랑스 망명귀족군이 고작 1만3천명의 프랑스군에게 처절하게 박살이 나버렸는지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먼저, 퀴베롱에 상륙했던 오리지널 프랑스 망명귀족군 3천명에 대해서 보도록 하지요.  이들은 브리타니 지방에 반혁명의 불꽃을 태울 핵심 부대여야 했습니다만 이들 중 상당수가 상륙 이후 얼마 안되어 프랑스군에 투항해버립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  생각해보면 프랑스에 귀족이 많기는 많았습니다만 ( 웰링턴 공작의 이름이 웰링턴이 아니라고 ??  참조) 그래도 이렇게 수천명씩 여러번에 걸쳐 쳐들어올 만큼 젊은 귀족들이 많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이들 중 상당수는 당시 영국의 헐크선에 갇혀 있던 프랑스군 포로들로서 ( 나폴레옹 시대의 포로 생활 편 참조), 이들은 비참한 헐크선 상에서의 포로 생활이냐 총들고 프랑스에 상륙하느냐의 선택을 강요받고 프랑스행을 택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들이 기회가 나자마자 투항(이라기보다는 원대 복귀)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지요.  대개 농부의 아들들이었던 이들이 망명 귀족 나부랭이들의 총알받이가 되어 동포들과 싸우다 죽을 이유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


(붉은 코트를 입었다고 다 영국군은 아닙니다.  퀴베롱 상륙 작전에 참가한 영국 해병대와 프랑스 망명귀족군, 그리고 방데의 슈앙 반란군)



르 펠르티에 구역에서 집결했던 3만명의 국민방위군이라는 군대도 사실 그 성분이 의심스럽습니다.  당시 프랑스에는 귀족 칭호를 가진 사람들이 무려 25만명이나 되었으니, 국민공회의 무능력과 부패에 신물이 났던 불평불만자들과 합하면 3만명의 군대를 조직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들은 한번도 제대로 된 군사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 군사 훈련이라고 하면 가장 중요한 것이 머스켓 소총의 기계적인 재장전 기술이고,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대오를 짜고 유지하고 변경하는 단체 훈련이었는데, 그건 시간과 공간이 많이 필요한 일이었거든요.  결국 이들은 진짜 군대라기보다는, 그저 당시 사회 상황에 몹시 분노하고 열정이 좀 넘치는 무장 시민 집단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 일단 패배하여 도망친 뒤에도 재집결은 커녕 다들 집으로 귀가하는 바람에, 바로 그 다음날 본부까지 모두 점령당해 불과 하루만에 모든 저항이 종결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국민공회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도주하는 이들 반란군을 끝까지 추격하여 몰살시키거나 체포하지 않았고, 그저 무장해제 정도에 그쳤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내란의 죄를 물어 처형당한 사람은 망명귀족 신분이었던 라퐁 뿐이었습니다. 

결국 나폴레옹이 무찔렀던 것은 일종의 민병대 정도로서, 어떻게 생각하면 무장한 시위대 정도로 볼 수도 있었습니다.  이들을 상대로 대포까지 발포한 것은 좀 과한 것이 아닐까도 생각될 수 있습니다.  패배한 왕당파들은 이를 비꼬아 나폴레옹을 '포도달(방데미에르) 장군'이라고 부르며 조롱했는데, 나폴레옹은 이를 맞받아쳐 '자신이 얻은 최초의 영예로운 타이틀'이라고 자부했습니다.  사실 나폴레옹이 므누와는 달리 중화기까지 동원하여 강력하고 단호한 무력 진압을 신속하게 수행했던 것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배운 교훈 때문이었습니다.  즉, 3년전인 1792년, 파리 시내에서 폭도들이 당시 루이 16세가 있던 튈르리 궁을 습격하여, 왕궁을 지키던 스위스 용병대 1천여명을 학살한 사건을 나폴레옹은 현장에서 목격했었습니다.  그때 나폴레옹은 폭도들 중 여자들이, 이미 살해된 스위스 병사들의 성기를 잘라내어 흔드는 장면을 목격하고, 민중 폭동에 대해 무척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게 되었고, 또 그때 '루이 16세가 말을 타고 현장에 나타나기만 했어도 스위스 근위대가 승리했을 것이다'라고 평가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3만명의 반란군과 대치한 파리 시내에서, 나폴레옹이 단호한 조치를 망설였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한 일이었겠지요.


(나의 출세를 위해서는 민간인들에게도 대포를 쏠 용의가 있다 - 생 로슈 교회 앞에서의 나폴레옹 )



나폴레옹은 이렇게 위기일발 상황의 국민공회를 구해낸 공로로, 권력은 물론 부와 명예, 심지어 사랑(조세핀을 만나게 되지요...)까지도 쟁취하게 됩니다.  나폴레옹은 당장 육군 중장으로 승진했고, 곧이어 내부군 (the army of interior)의 제2인자로 지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곧 이어 원래 소원했던대로 이탈리아 방면군의 지휘권을 받아 예전부터 기획해온 북부 이탈리아 침공에 나서게 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나폴레옹의 신화가 시작될 기반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