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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나폴레옹, 이탈리아를 침공하다 - 2편

by nasica-old 2010.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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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6년 4월,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침공 길에 나섭니다.  이때 나폴레옹의 활약상을 담은 대부분의 글을 보면, 그냥 몬테노테와 데고에서 적군을 격파, 뒤이어 로디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냥 그것만 읽으면 약간 의아해지지요.  분명히 나폴레옹이 이끌던 이탈리아 방면군은 숫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형편없는 군대라고 들었는데, 나폴레옹은 대체 어떻게 이들을 격파했을까 하고요.  나폴레옹군이 처음부터 오스트리아군과 이탈리아군(정확하게는 사르디니아-피에드몽 왕국군, 이하 그냥 피에드몽군으로 통칭)을 마구 무찌를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나폴레옹군이 이탈리에서 처음 맛본 것은 오스트리아군에 의한 쓰라린 패배였습니다.

전편에 그림 소개드리면서 말씀드렸듯이, 이때 나폴레옹군은 알프스를 넘은 것이 아니라 사보이 지방의 해안 도로를 따라서 편안하게 진군했습니다.  이때 나폴레옹의 부하 장군들은 '이렇게 해안 도로를 따라 행군하다가 영국 지중해 함대의 포격이라도 받으면 끝장'이라고 걱정들을 했습니다만, 우려했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때 프랑스 장군들이 걱정했던 사태는 C.S. Forester의 소설 Hornlower 시리즈 중 'A Ship of the Line'에서 현실화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주인공 혼블로워의 전함 Sutherland 호가 해안 도로를 따라 행군하는 나폴레옹 휘하의 이탈리아 보병 사단을 함포 사격으로 박살을 내놓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영국 함대의 방해를 받지 않고, 마세나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의 전위대는 해안가의 작은 마을 볼트리(Voltri)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이 소설에서 불쌍한 이탈리아군은 난생 처음 보는 멋진 전함을 보고 감동하여 순진하게 손을 흔들다가 일제 사격에 콰광~)



이후에 벌어진 주요 전투 일지를 보면 이렇습니다.

1796. 4. 10. 마세나의 프랑스군이 볼트리에서 볼리유(Johann Beaulieu)의 오스트리아군에게 격퇴당했습니다.

1796. 4. 11. 아르장토(Eugène-Guillaume Argenteau)의 오스트리아군이 프랑스군을 거느리고 지키던 몬테 네지노(Monte Negino)를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물러섭니다.

1796. 4. 12. 나폴레옹이 몬테노테(Montenotte)에서 아르장토의 오스트리아군을 격퇴합니다.

1796. 4. 14  마세나의 프랑스군이 데고(Dego)에서 아르장토의 오스트리아군을 격퇴하지만, 야간에 푸카소비히(Josef Philipp von Vukassovich)의 반격을 받고 패주합니다.

1796. 4. 15  마세나와 나폴레옹이 데고(Dego)에서 푸카소비히(Josef Philipp von Vukassovich)의 오스트리아군을 격퇴합니다.

1796. 4. 21  나폴레옹이 몬도비에서 콜리(Michelangelo Colli)의 피에드몽군을 격파합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일까요 ?  이렇게만 보면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가 1진1퇴를 주고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프랑스군의 압승이었고, 이때의 승리로 나폴레옹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최소한 피에드몽 지역을 석권할 발판을 마련하게 됩니다.

먼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서전은 프랑스군의 패배였습니다.  즉, 볼트리까지 진출했던 마세나의 전위 사단은 (사실 정확하게는 마세나 본인이 아닌, 마세나 휘하의 세르보니 (Jean Baptiste Cervoni) 장군이 거느린 부대였는데) 북부 이탈리아 전역에서의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인 볼리유 장군이 직접 지휘한 오스트리아군의 공세에 맞닥뜨리자 약간의 전투 끝에 뒤로 후퇴했습니다.  아무래도 숫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이었지요.  어쨌거나 이는 패배였고,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방면군으로서는 무척이나 불명예스러운 시작이었지요. 




(세르보니 장군.  1809년에 오스트리아군과 전투 중 에크멀(Ekmuhl)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의 대포에 머리통을 통째로 날려먹습니다...)



이렇게 서전에서 패배를 당한 나폴레옹은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  당연히 나폴레옹은 화가 났지만, 이성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전위 부대에 불과한 마세나의 사단이 오스트리아의 롬바르디아 주둔군 주력부대와 싸워 진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으니까요.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침공시 세웠던 원래 계획을 충실히 수행합니다.

여기서 잠깐, 여기서 나폴레옹이 펼칠 작전을 이해하시기 위해서는, 먼저 이 지역의 역사적, 지리적 배경에 대해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먼저 오스트리아군과 동맹을 맺고 있던 사르디니아-피에드몽이라는 웃기는 이름의 왕국에 대해서 보시지요.  원래 이 지역은 스페인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던 곳이었는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결과로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에서 네덜란드와 나폴리 왕국, 밀라노 공국의 대부분, 그리고 사르디니아 섬이 오스트리아에게 할양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720년 런던 조약에서, 피에드몽 공국은 시실리 섬을 오스트리아에게 빼앗기는 대신 개평으로 사르디니아 섬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강대국들의 각축장에서 이리저리 당하는 입장이었던 것이지요.  어쨌거나 이때는 왕국 전체의 이름을 큰 섬 이름으로 짓는 것이 유행이었는지, 피에드몽 공국은 사르디니아 섬을 받게 된 기념으로 사르디니아 왕국이라고 이름을 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대신 여전히 왕국의 수도는 사르디니아 섬이 아닌, 피에드몽 지역의 발전된 도시 토리노(Torino, 피에드몽 현지어로는 투린 Turin)로 유지되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사르디니아 왕국의 핵심부는 사르디니아섬이 아닌, 토리노를 중심으로 한 피에드몽 지역이었고, 왕국 전체는 오스트리아에 대해서 매우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르디니아 왕국.  사르디니아는 페이크, 알맹이는 바로 피에드몽 (또는 피에몬테)입니다.)



이에 비해 밀라노(Milano, Milan)를 중심으로 한 롬바르디아 지역은 엄연히 이탈리아인들로 구성된 지역임에도, 밀라노 공작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외국인이 대대로 지배하는 곳이었습니다.  저 위에 설명되었듯이, 원래는 스페인의 지배를 받다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에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지요. 




(밀라노 공국의 영토, 즉 롬바르디아 지방입니다.  이탈리아 반도 북서부에 밀라노 공국을 해안가에서 분리시키는 저 짜투리 땅은 바로 중립국 제노아 공화국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나폴레옹이 침공한 북부 이탈리아는 한덩어리의 땅이 아니라, 이탈리아인이 주권을 가진 피에드몽 왕국과, 오스트리아가 직접 지배하는 밀라노 공국으로 나누어진 상태였던 것입니다.  이 두 미니 국가는 엄연한 대불 동맹국이었고, 피에드몽군의 총 사령관인 콜리는 일종의 임대 장군으로 피에드몽에 파견된 오스트리아 장군일 정도로 오스트리아와의 결속력이 매우 강했습니다.  특히 이 콜리는 오스트리아군의 사령관 볼리유와 개인적인 친구 사이였다고 합니다.  대외적으로 볼 때는 피에드몽과 오스트리아, 즉 토리노와 밀라노의 관계는 매우 공고했습니다.




(요한 볼리유, 1725년 생으로서, 이때 당시는 정말 노장이었고 경력은 무척 화려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사관학교 시절 가장 뛰어났던 과목이 수학과 함께 역사와 지리였다는 사실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나폴레옹은 어떤 공부를 했길래 군사적 천재가 되었을까 ?   참조)  나폴레옹은 토리노와 밀라노 사이의 거리가 겉보기와는 달리 무척 멀다는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나폴레옹의 침공이 시작되자, 오스트리아 중앙 정부는 볼리유에게 콜리의 피에드몽 군을 100% 신뢰하지는 말라고 비밀 훈령을 내렸습니다.  그 결과로, 오스트리아군의 작전 계획은 피에드몽 군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았고, 양군 사이에는 불신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1796년 이탈리아를 침공할 때, 그가 거느린 병력은 대략 4만3천명 정도였습니다.  이에 비해 롬바르디아의 오스트리아군은 약 3만2천, 피에드몽의 이탈리아군은 약 1만7천 정도로서, 오스트리아-피에드몽 연합군이 근소한 우위를 유지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오스트리아-피에드몽군은 나폴레옹이 쳐들어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뿐, 구체적으로 어느 통로를 통해 어디로 쳐들어오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피에드몽군은 토리노를, 오스트리아군은 롬바르디아를 각각 지키고 있었고,  특히 볼리유는 나폴레옹이 당시 중립이던 제노아(Genoa) 공화국을 노리고 있다고 의심했습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지중해 해안 도로를 따라 전진하고 있었으므로, 제노아 공화국을 최종 목표로 생각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노리는 것은 어떤 지역이나 도시의 함락 같은 구시대적 전술 목표가 아니라, 바로 오스트리아군의 주력을 분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위해, 먼저 나폴레옹은 피에드몽과 오스트리아군 사이를 갈라놓아야 한다고 제대로 판단을 내렸습니다.  어느 쪽을 먼저 칠까에 대해서는 먼저 오스트리아군을 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군을 치더라도, 피에드몽 군은 오스트리아군을 돕기 위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나폴레옹은 해안도로를 따라 움직이면서, 북쪽에서 피에드몽군이 치고 내려와 오스트리아군을 향해 진격하는 프랑스군의 후미를 끊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접어두고, 일단 오스트리아군과의 대결을 서둘렀던 것입니다.  물론 나폴레옹은 운명을 도박에 거는 남자가 아니었으므로, 세루리에(Serurier) 장군에게 작은 사단 하나를 주어 콜리(Michelangelo Colli) 장군의 피에드몽군을 상대하게 했는데, 다만 피에드몽군을 묶어만 둘 뿐 절대 먼저 공격하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렇게 지도로 보면 나폴레옹의 진격로는 강력한 적을 배후에 두고 바다를 끼고 도는, 무척이나 위험한 경로입니다.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나폴레옹이 노리는 것은 콜리와 볼리유의 그 이음새였지요.)



이제 다시 볼트리로 되돌아가보지요.

나폴레옹은 볼트리에서 전술 퇴각을 하면서, 즉각 척후병을 풀어 오스트리아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습니다.  볼리유와 세보텐보르프(Sebottendorf) 장군이 뭉쳐있던 오스트리아군의 주력은 일단 볼트리에서의 승전에 만족하고 거기서 대열을 정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병력은 약 2만명으로서, 애초에 5천명 정도이던 프랑스군 전위대가 상대할 수 있는 병력이 아니었습니다.  이때 원래 볼리유의 우익을 지휘하던 아르장토(Eugène-Guillaume Argenteau) 장군이 몬테 네지노(Monte Negino)에서 프랑스군에게 공격을 가했습니다.  이 오스트리아군은 약 4천명 정도였고, 공격받은 프랑스군은 약 2천명 정도였으나, 이들은 고지에 축성된 보루에 의지하고 있었고, 랑퐁 대령(Antoine Rampon)이 결사적인 저항을 펼쳤으므로 오스트리아군은 치열한 전투 끝에 일단 물러서야 했습니다.




(몬테 네지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하는 랑퐁 대령.  삼국지에 나오는 전위도 저렇게 큰 깃발을 한손으로 들고 있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려)




(랑퐁 대령은 이날 전투로 나폴레옹이 직접 껴안아주며 준장으로 승진시켜 줍니다.  그런데 랑퐁 대령은 나폴레옹보다 무려 10살 연상이었다는 거...  하지만 가는 것에는 순서없다고, 나폴레옹보다 훨씬 오래 살아 1842년에 천수를 누리고 죽습니다.)



나폴레옹에게 이 정보가 들어왔을 때, 나폴레옹은 노리던 기회가 왔음을 알아차렸습니다.  겨우 4천 정도의 오스트리아군이, 주력 부대에서 멀리 떨어진 채 프랑스군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즉각 인근의 1만명 정도의 병력을 몰아 몬테네토(Montenetto)에서 아르장토를 공격했습니다.  결과는 당연히 오스트리아군의 참패였습니다.  프랑스군이 약 800명의 사상자를 낸 것에 비해, 오스트리아군은 약 2천5백명의 사상자를 내며 궤멸되었습니다.  전투 직후에, 군기를 따라 제대로 후퇴한 오스트리아군은 겨우 7백명 정도였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렇게 생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볼리유가 볼트리에서 작은 승리를 거두고 볼트리를 탈환한 것에 만족한 것과는 무척 다르지요.  서로의 전술적 목표가 달랐던 것입니다.  볼리유는 고전적으로, 프랑스군으로부터 롬바르디아의 영토를 지키는 것이 목표였고, 나폴레옹은 그가 피에드몽을 본격적으로 공략할 때 오스트리아가 끼어들지 못하도록 오스트리아의 주력을 강하게 후려 치는 것이 목표였으니까요.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과 피에드몽군의 사이를 더 벌려 놓기 위해 몬테노테의 북동쪽 6km 정도에 위치한 데고(Dego)에 마세나를 보내 공략하도록 했고, 마세나는 약 1만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약 5천명의 오스트리아 패잔병 및 수비군을 손쉽게 물리치고 마을을 점령했습니다.  아르장토는 여기서 완전히 패배하여 북서쪽의 아퀴이(Acqui)로 도주합니다.



 

(4월14일 데고 전투 당시의 전선 상황)



마세나의 프랑스군은 (전편에서도 언급했지만 사실상 거지떼나 다름없었는데) 마을을 점령하자 약탈에 빠져 흥청망청 먹고 마신 뒤 골아 떨어져 버렸습니다.  무척 춥고 비까지 내리는 밤이었는데, 이때 어둠 속에서 일단의 오스트리아군이 불쑥 나타납니다.  원래 아르장토를 지원하게 되어 있던 오스트리아군의 크로아티아 출신 대령 푸카소비히(Josef Philipp von Vukassovich)가 이끈 부대 약 3천5백명 정도였습니다.  이들은 다민족 제국인 오스트리아가 자랑하는 크로아티아 출신의 호전적 병사들로 구성된 그렌츠(Grenz) 보병들이었습니다.  무질서하게 곯아 떨어진 프랑스군은 이들의 야습에 그야말로 혼비백산해서 도망쳤습니다.  심지어 총사령관인 마세나조차도 여자를 끼고 자다가 (아마 강간범인 듯...) 이들의 습격에 놀라 속옷 차림으로 헐레벌떡 도망칠 정도였다고 합니다.




(크로아티아-트란실바이나 지역 출신으로서 원래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맞서 싸웠던 용맹한 그랜츠 병사들.  나폴레옹도 이때부터 이들을 눈여겨 보았다가, 나중에 오스트리아를 굴복시킨 뒤 이들을 프랑스군에 배속시켜 복무하게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전쟁에 있어서는 숫자 앞에서 그렌츠고 뭐고 다 필요없는 겁니다.  그 다음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마세나와 그 일당들은 나폴레옹이 보내준 지원병력까지 합쳐 무려 1만5천의 병력으로 겨우 3천5백에 불과한 푸카소비히 대령의 그렌츠 부대를 강습했습니다.  물론 푸카소비히도 데고를 점령하자마자 아르장토 장군에게 전갈을 보내 '모든 것을 용서하니 빨리 돌아오라'고 했으나, 이미 기가 꺾인 아르장토는 그를 거부하고 오스트리아 본대를 찾아 동쪽으로 후퇴해버렸습니다.  푸카소비히의 그렌츠 보병들은 절대적인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마세나의 프랑스군의 공격을 3번이나 격퇴했으나, 측면까지 포위당하자 끝내 무너져 후퇴해야 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약 1천명, 그렌츠 보병들은 약 1천 7백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나폴레옹은 다시 정찰에 집중했습니다.  틀림없이 볼리유가 지원군을 보내 반격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러나 뜻 밖에도, 볼리유의 오스트리아 본대마자도 볼트리를 포기하고 북서쪽을 향해 후퇴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볼리유는 정말 땅따먹기 식의 고전적 전쟁관에 사로잡혀, 흩어진 (사상자의 대부분은 낙오병과 탈영병들...) 병사들을 수습하고 소중한 롬바르디아의 수비에 치중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제서야 나폴레옹은 그동안 후방에 내버려두었던 피에드몽군을 손봐주기 위해 서북쪽으로 되돌아섭니다. 




(몬도비 전투.  대체 어디가 프랑스군이고 어디가 피에드몽군인 것인지, 무슨 전쟁화가 이렇습니까 ?)



고립된 피에드몽군에게는 (어차피 그 고립은 스스로 자초한 것인데) 희망이 없었습니다.  특히 믿었던 오스트리아군이 힘없이 격파당하고 물러서는 것을 본 뒤, 피에드몽군의 사기를 확 떨어져 버렸습니다.  원래 1만3천 정도이던 콜리 장군의 피에드몽군은 아무 전투 없이도 며칠 사이에 1만명으로 줄어들어 버렸습니다.  이탈리아군의 전설적인 탈영이 시작된 것이지요.  콜리는 좀더 방어에 유리한 지점을 찾아 전투를 벌이면서도 전술적 후퇴를 거듭했지만, 행군이라면 이골이 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행군 속도에서 당해낼 수는 없었습니다.  선두를 달리던 '탈영의 제왕' 오쥬로 장군의 부대가 몬도비에서 피에드몽군을 따라잡자, 오쥬로는 징집병들을 유명한 종대 (column) 몇개로 편성하고, 고참병들은 그들 앞에서 유격병(skirmisher, voltigeur)로 편성하여 피에드몽군을 공격하였습니다.  도주하다가 거센 프랑스군의 공격을 받게 된 피에드몽군은 일부는 잘 싸웠으나 일부는 도주했고, 결국 전체가 무너져 내리며 무질서한 패주에 빠져들었습니다.  의외로 양측의 사상자 수는 비슷했고, 또 숫자가 많지도 않았습니다.  피에드몽군이 초반부터 전의를 상실하고 무질서하게 도주했고, 또 일부 피에드몽군 기병대가 용감히 싸워 추격하는 프랑스 기병대를 막아냈기 때문이었습니다. 

군대가 완전히 와해된 콜리 장군은 이틀 뒤인 4월 23일 화평을 요청했으나 나폴레옹은 진격을 계속했고, 쿠네오(Cuneo), 체바(Ceva), 그리고 알레산드리아(Alessandria) 또는 토르토나(Tortona) 등의 중요 요새지를 내놓고 배고픈 프랑스군에게 보급품을 내놓을 것을 화평의 조건으로 내걸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오스트리아도 피에드몽의 충성심을 의심하여 알레산드리아 요새를 오스트리아군에게 넘길 것을 피에드몽 국왕 아마데우스 3세(Vittorio Amadeus III)에게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나폴레옹의 짐작은 맞아 떨어져, 아마데우스 3세는 프랑스도 좀 그렇지만 오스트리아는 더욱 못 믿을 놈이라며 결국 나폴레옹과 화평을 맺기로 합니다.  (나중 이야기지만 사실은 프랑스 놈들이 더 못 믿을 놈들이라서, 2년 뒤 아예 피에드몽을 사르디니아 왕국에서 빼앗아 버립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마데우스 3세는 그 꼴을 보기 전에 1796년 10월 뇌졸증으로 사망하고요.)




(비토리오 아마데우스 3세. 사보이 공작이자 사르디니아 왕국의 국왕)



나폴레옹은 이렇게 제1차 목표였던 피에드몽 정ㅋ벅ㅋ를 전투 개시 불과 2주만에 마무리짓습니다.  이렇게 보면 어,어, 하는 틈에 어느새 금새 끝나버린 정복전이었습니다만, 정리해보면 주요 승리는 딱 3번, 즉 몬테노테 전투, 데고 전투, 그리고 몬도비 전투의 3번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전투에서 나폴레옹군은 약 2대1 이상의 숫적 우세를 확보한 상태였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저런 전투라면 나도 이기겠다'라고 말할 수 있을 지 몰라도, 그건 반 니스텔루이가 골 넣는 것을 보면서 '저렇게 노마크 찬스에서는 나도 넣는다'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반니가 골을 넣는 순간에는 골대와 반니 사이에는 골키퍼 하나 뿐일지 몰라도, 분명히 필드에는 상대 선수 10명이 더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피에드몽-롬바르디아 지역에서 나폴레옹군은 4만3천인데 비해, 오스트리아-피에드몽 연합군은 거의 5만으로서 더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승리의 순간, 그 전장에는 나폴레옹군의 숫자가 항상 더 많았지요.  그것이 바로 반 니스텔루이가 위대한 공격수인 이유이고, 나폴레옹이 군사적 천재라는 증거이지요. 




(Ruuuuuud !!!    요즘은 함부르크에서 손흥민을 아들 삼아 지낸다던데... 한국인들에게는 무척 좋은 인상으로 남아있는 선수지요.)



반니와 나폴레옹의 공통점 중 대표적인 것은 빠른 발이라는 점입니다.  반니는 한때 국내에서의 별명이 ('말대가리'를 빼면) '발업질럿'이었지요.  그 빠른 스피드를 이용하여 상대 수비수의 오프사이드 트랩을 뚫고 바람처럼 나아가 무인지경에서 골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병사들도, 나폴레옹의 채찍질에 못이겨 그에 못지 않은 기동력을 발휘했습니다.  하긴 어차피 당시 이탈리아 방면군은 보급품 부족으로 천막도 없고 보급 마차도 따라다니지 않았으므로 더욱 행군이 빨랐겠지요.  (나폴레옹과 케사르의 차이점 - 진지 구축  참조)  나폴레옹도 일시적으로 불리한 전황을 맞은 적이 있습니다만, 모두 재빠른 기동력으로 병력을 보충하여 해결이 가능했습니다.  그와 반대로, 오스트리아군은 그런 능력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가령 몬테노테 전투나 데고 전투에서, 모두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강력한 오스트리아군 본대가 있었음에도 그들은 반 니스텔루이의 뒤쪽에 위치한 상대 수비수처럼, 골 순간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그저 병사들에게 가혹한 행군을 강요했기 때문에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닙니다.  나폴레옹은 상대의 역사적 배경과 지리적 환경을 꿰뚫고 있었기 때문에, 적을 분산시키고 아군을 결집시키는 묘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했습니다.  나폴레옹이 브리엔 사관학교나 왕립 사관학교에서 읽어댔던 수많은 역사책과 지리책이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었지요.

하지만 나폴레옹이 북부 이탈리아 전역에서 거둔 초기의 승리 중 가장 유명한 승리인 로디(Lodi) 전투는 아직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이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의 북서부 이탈리아 경영의 근거지 밀라노를 향합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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