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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프롤로그 - 나폴레옹, 이집트를 침공하다

by nasica-old 2011.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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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멜룩 이집트의 초간단 역사


1240  아이유브 왕조의 아스-살리 아이유브 술탄 등극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다시 정복한 살라딘의 성이 아이유브였습니다.)


1249  프랑스 루이 9세 7차 십자군을 이끌고 이집트 다미에타에 상륙


(다미에타를 눈 앞에 둔 루이 9세)


1249  아스-알리 아이유브 사망.  그 아들 알-무아잠 투란샤 (al-Mu`azzam Turanshah) 술탄 등극


1250  알 만수라(Al Mansurah) 전투에서 아스-알리의 친위 마멜룩(Mamluk) 부대, 일명 바흐리(Bahri)가 십자군을 격파하고 루이 9세를 포로로 잡음



(이 만수라 전투에서 포로가 된 루이 9세와 그 휘하 기사들의 이야기는 루이 9세를 따라 이 전투에 참전했던 조앵빌의 연대기에 잘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아래의 일부 번역만 잠깐...


제7차 십자군 원정기, by Joinville  (배경 : 1250년, 이집트) -------------

우리의 처형은 거의 결정된 상태였다.  우리를 핍박하던 에미르(이슬람 관직 이름) 중의 하나는, 우리가 모두 처형될 것으로 보고, 나일 강가로 나와 갤리선의 선원들에게 소리치며 머리의 터번을 벗어 흔들어 신호를 보냈다.  선원들은 즉각 닻을 올리고 우리를 카이로 쪽을 향해 1리그(거리 단위) 가량 상류로 데려갔다.  이에 우리는 죽음을 예감하고,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자신의 자식들을 굽어보시는 신께서 보우해주신 바에 힘입어, 해가 질 무렵에, 우리의 석방이 결정되었다.  사라센인들이 우리 일행을 다시 원위치로 데려와 나일 강변에 우리가 탄 네척의 갤리선을 정박시켜놓았다. 우리는 즉각 석방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사라센인들은 우리가 식사를 마치기 전에는 보내줄 수 없다고 했다.  이유는 '포로들을 굶긴채 석방하면 에미르(관직 이름)들의 위신이 깎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음식을 가져오면 먹겠다고 했다.
사라센인들이 제공한 음식은 구더기가 생기지 않도록 햇빛 속에서 익힌 치즈 프리터(fritter)와 완숙한 삶은 달걀이었다.  그 달걀들은 3~4일 전에 삶은 것이었는데, 그 껍질은 우리에 대한 호의로 여러가지 색채로 칠해져 있었다. )


1250  바흐리 마멜룩들이 투란샤를 암살.  혼란 시작


1254  쿠투즈(Qutuz)가 3대 바흐리 마멜룩 출신 술탄으로 권력 장악. 


1258  몽골제국의 훌라구(Hulegu), 바그다드를 초토화


(카톨릭 교황에 해당하는 이슬람의 칼리프가 지금은 없는 이유가 바그다드 함락 때 몽골군에게 잡혀 죽었기 때문...)


1260  쿠투즈, 아인 잘루트(Ayn Jalut) 전투에서 몽골군 원정대를 격파. 이후 일한국(Il-Khanate)와의 전쟁 계속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승승장구하던 몽골군은 비로소 적수를 만납니다.)


(마멜룩 이집트가 일 한국으로부터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저 위, 바투의 킵챠크 한국와 연합하여 일 한국을 견제했기 때문입니다.  마멜룩 대부분이 킵챠크 지역 출신이었으므로, 킵챠크 한국과는 처음부터 동질감이 강했다고 합니다.)


1382  마지막 바흐리 마멜룩 출신 술탄인 알-딘 하지(al-Din Hajji) 폐위


(바흐리 왕조 이집트의 최대 영역)



1390  다른 마멜룩 분파 출신의 바르쿡(Barkuk)이 부르지(Burji) 왕조 창시





1501  페르시아의 사파위(Safavid) 왕조와 오토만 술탄 사이에 긴장 고조.  그 사이에 이집트 술탄 알-과리(Ghawri) 말려듬


(마멜룩 술탄 Al-Ashraf Qansuh al-Ghawri)


1514  페르시아와 오토만 사이에 칼디란(Chaldiran) 전투.  오토만 승리.


(한마디로 같은 노예 전사들의 대결에서, 오토만의 예니세리가 이집트의 마멜룩을 압도했다는 이야기...)


1515  메르즈 다빅(Merj Dabik) 전투에서 오토만 야니세리가 이집트 마멜룩을 격파. 


(오토만 술탄 셀림의 모습이라는데...)


1516  오토만, 이집트로부터 시리아 지역을 강탈


1517  리다니야 (Ridaniya) 전투에서 오토만의 셀림(Selim) 1세, 이집트의 마멜룩 술탄 투만 (Al-Ashraf Tuman) 2세를 패배시키고 그 목을 베어 카이로 성문에 내검.  오토만의 이집트 지배 시작


1517  셀림 1세 오토만 본토로 귀환.  이집트는 오토만의 자치구로서, 오토만 정부(Sublime Porte)가 파견하는 파샤(Pasha, 총독 정도)가 현지 마멜룩 베이(bey, 장군 정도)들의 도움을 받아 통치하는 형태를 띰


(오토만의 외무성 정도에 해당하는 Sublime Porte의 모습)


1604  이브라힘 (Ibrahim) 파샤, 병사들의 반란으로 피살


1609  오토만 파샤와 마멜룩간에 내전 발발


1610  마호메드 (Mahommed) 파샤, 마멜룩 반란군을 진압하고 카이로에 입성  (제2차 오토만 정복)



1623  오토만 제국의 쇠퇴와 함께 오토만 정부에서 파견된 파샤에 대한 이집트인들의 경외심도 감퇴.  새로 부임한 알리 파샤에게 마멜룩들이 떡값을 요구했다 거절당하자 마멜룩 지휘관들이 무력 충돌 끝에 기존 파샤를 복위시키는 사태 발생.  오토만 정부도 이 조치를 추인.


1630  새로 부임한 모우사 (Moussa) 파샤가 다시 마멜룩의 부당한 요구를 거절했다가 축출됨


1631  오토만 정부는 마멜룩들이 요구한대로 칼릴 (Khalil) 파샤를 이집트 총독으로 추인


1707  카이로의 마멜룩 권력자(bey)들끼리 내분 시작.  이후 마멜룩 베이들 사이에서 암살 및 권력 싸움 계속됨


1724  이스마일 베이 암살됨


(이때 즈음 오토만은 쇠락하느라 정신없어서 이집트에 적극적인 개입이 어려웠습니다...  그림은 1717년 베오그라드 전투에서의 사보이 공 유젠.  이 전투로 오토만은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를 오스트리아에게 빼앗깁니다.)


1730  두르피카르(Dhu-'l-Fiqar) 베이 암살됨


1743  오트만(Othman) 베이 축출됨


1750  알리(Ali) 베이가 칼릴(Khalil) 베이를 축출


1766  오토만의 총독 라기브(Raghib) 파샤, 다시 이집트에서 축출됨


1769  오토만 정부가 알리 베이에게 오토만-러시아 전쟁에 투입될 병력 1만2천을 파견해줄 것을 요청. 그러나 이 병력으로 이집트 독립을 선언할까 두려워한 오토만 정부가 비밀리에 알리 베이의 암살을 지시.  알리 베이가 알아차리고 파샤를 축출하고 독립 선언


(러시아-오토만 전쟁 중 1772년 전투에서 승리한 러시아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


1771  알리 베이, 자신의 이름으로 주화를 발행하고 오토만으로부터 시리아를 빼앗기 위한 원정군 3만 파견


(알리 베이의 금화는 아니고... 17세기의 오토만 금화입니다.  이슬람 교리상 사람의 얼굴을 금화에 넣는 것은 금지)


1773  시리아 원정 중 자신의 사위에게 배신당한 알리 베이, 사위와의 교전 중 부상을 입고 사망.  다시 이집트는 오토만의 속국이 됨


1775  알리 베이의 사위도 팔레스타인 원정 중 사망.  그 부하인 무라드(Murad) 베이가 마멜룩 병력을 이끌고 카이로로 귀환.  무라드 베이와 이브라힘 베이가 이스마일 베이를 축출하고 이집트를 둘이서 공동 통치하다 서로 불화 시작


(훗날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 참여했던 학자들이 집필한 Description de l'Égypte État 에 실린 무라드 베이의 모습)


1786  오토만에서 파견한 원정군에 의해 무라드 베이와 이브라힘 베이 모두 축출되어 나일강 상류로 도주.  이스마일 베이가 다시 오토만 총독 밑에서 이집트 통치 시작


1791  카이로에 전염병 창궐.  이스마일 베이 병사.  오토만 총독은 이집트 지배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무라드 베이와 이브라힘 베이를 사면하고 카이로로 불러들임.






...






1798  7월 1일, 나폴레옹 알렉산드리아 상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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