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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나폴레옹, 이집트를 침공하다 - 치기어린 계획, 그러나 완벽한 출항

by nasica-old 2011.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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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드디어 나폴레옹이 이집트에 갑니다.  그러나 가기 전에, 대체 왜 뜬금없이 이집트에 가게 된 것인지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유럽에서 유럽국가들과 싸우던 나폴레옹이 왜 갑자기 아무런 관계도 없던 이집트를 침공하게 되었던 것일까요 ?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간단합니다.  영국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집트가 영국의 식민지 내지는 보호국 비스무리하게 되어 버린 것은 19세기 후반으로서, 당시 이집트는 영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오토만 제국의 영토였습니다.  게다가 당시 프랑스는 오토만 제국과는 우호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요.  그런데도 영국을 공격하기 위해 이집트를 침공하다니, 이건 전에 인터넷에 유행하던 '일본을 공격한다'와 유사한, 황당한 결론처럼 보입니다.




(지금처럼 일본이 곤경을 겪고 있는 시기에 적절한 드립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지난 나폴레옹의 우승컵 편에서, 나폴레옹이 어떻게 오스트리아와의 종전 협정인 캄포 포르미오 조약을 끌어냈는지 보셨습니다.  이 조약은 사실상 제1차 대불 동맹 전쟁을 끝장냅니다.  제1차 대불 동맹 (the War of the First Coalition)이라는 것은, 프랑스 vs. 전체 유럽의 대결로서, 정확하게는 1792년 시작되어 이 캄포 포르미오 조약에 의해 1797년에 끝납니다.  1792년,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두무리에 장군이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즉 벨기에로 쳐들어가면서 전쟁이 시작될 무렵에는, 대불 동맹을 맺었던 국가는 정말 많았습니다.   영원한 프랑스의 밥 오스트리아를 비롯하여, 프러시아,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사르디니아 왕국, 두개의 시실리 왕국, 네덜란드 공화국, 거기에 오토만 제국까지 프랑스의 적국이었습니다.  그러나 1792년 발미 전투에서 프러시아가 떨어져 나가고, 1796년 제2차 산 일데폰소 (San Ildefonso) 조약에 의해 스페인이 프랑스의 동맹국이 되는 등 이탈국이 속출하면서, 1797년 즈음해서는 프랑스와 열심히 싸우던 나라는 오스트리아와 영국 밖에 안 남았습니다.  이제 오스트리아가 굴복하면서, 결국 5년간의 긴 전쟁이 나폴레옹에 의해 마무리된 것이지요. 




(흔히 독일 vs. 전세계 라는 대결 구도였던 제2차 세계대전을 벌인 히틀러가 미친놈이라고 하지만, 프랑스는 제1차 대불 동맹 전쟁에서 그런 전쟁을 승리로 끝냈습니다.)



이제 프랑스에는 진정한 평화가 온 것일까요 ?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직 프랑스는 전쟁 상태였습니다.  비록 모든 동맹국들이 다 떨어져 나갔지만, 오직 한 나라, 영국은 여전히 프랑스와 전쟁 상태에 있었습니다.  다만 영국은 강력한 육군을 갖추지 못했으므로, 프랑스에 상륙전을 감행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프랑스를 해상 봉쇄하며 대외 무역 활동을 억누를 뿐이었습니다.  프랑스는 이제 유럽을 호령하는 강국이 되었으나, 당장 코 앞의 영국 하나를 어쩌지 못해 분을 삭이고 있었지요.





(도버 해협 건너 피트 수상을 노려 보는 나폴레옹을 그린 당시의 풍자화입니다.)



애초에 왜 영국과 프랑스는 이렇게 철천지 원수가 되었을까요 ?  아시다시피 영국과 프랑스는 백년전쟁부터 시작하여, 달타냥과 삼총사가 활약하던 위그노 전쟁을 거쳐, 17~18세기 인도와 북미에서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며 경쟁하는 관계였습니다.  결과는 아시다시피 강력한 해군을 가진 영국의 완승이었습니다.  물론 프랑스 해군이 미국 독립전쟁 당시 영국에게 크게 한방 되갚아 주긴 했지만요.  아무리 프랑스의 군사력이 영국을 압도한다고 해도, 병력을 전쟁 지역으로 수송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면, 전쟁의 결과는 유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인도에서도 북미에서도 프랑스는 영국에게 밀릴 수 밖에 없었지요. 




(1757년 영국 동인도 회사군이 '돈의 힘으로' 프랑스군이 포함된 벵골 태수군을 격파한 플라시 전투 후 클라이브의 모습입니다.)


그 결과는 프랑스에게 너무나 뼈아픈 것이었습니다.  특히 인도 식민지를 영국에게 내준 덕택에, 영국이 부를 쌓는 모습을 그저 손가락을 빨며 지켜 볼 수 밖에 없었지요.  그 부를 이용하여 영국은 해군력을 더욱 강화했으므로, 해외 식민지 경쟁에서 프랑스는 점점 더 뒤쳐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 전쟁 내내, 오스트리아의 투지 못지 않게 프랑스를 괴롭혔던 것은 바로 영국의 돈이었습니다.  물론 그 돈의 원천을 따지다보면 (알고 보면 영국의 산업 혁명에 힘입은 바가 더 큽니다만) 결국 인도가 나왔지요.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전선의 승리를 안고 파리로 돌아왔습니다만, 그는 평화를 만끽하며 튈르리 궁에서 쫓겨난 궁정 요리사들이 새로 오픈한 파리 시내의 유명 식당에서 식도락이나 즐길 남자는 아니었지요.  그는 곧 자신의 영광과 성공을 위한 계획에 착수했습니다.  이제 남은 적국은 영국 뿐이었으므로, 당연히 그 대상은 영국이었습니다. 

영국 침공 계획은 사실 제1차 대불 동맹 전쟁 당시 진행되었었고, 실제로 오슈 (Lazare Hoche) 장군에 의해 실행에 옮겨졌었습니다.  바로 1796년 12월에 출항했던 아일랜드 원정군(Expédition d'Irlande)이었습니다.  약 1만5천명의 병력이 44척의 군함 및 수송선에 나눠타고 아일랜드에 상륙하여 아일랜드 전체가 영국에 반란을 일으키도록 한다는 이 계획은, 프랑스 해군의 미숙과 최악의 날씨, 영국 해군의 추격으로 인해 상륙도 못해보고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프랑스 측에 꽤 많은 교훈을 안겨줍니다.  영국을 직접 침공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이 크고, 비용도 많이 들고, 승리할 확률도 낮다는 것이었습니다. 




(1796년 겨울, 아일랜드 원정에 나섰던 프랑스 함대의 괴멸을 그린 당시 풍자화입니다.)



나폴레옹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은 크게 볼 줄 아는 남자였습니다.  가령 툴롱 포위전에서, 툴롱 탈환을 위해서는 당장 툴롱 시 진입구를 막고 있는 요새를 공격할 것이 아니라, 툴롱 항국의 영국 함대에 포탄을 퍼부을 수 있는 고지만 점령하면 나머지 요새들은 스스로 무너져 내린다는 것을 한눈에 파악했지요.  다만 이번에는 좀 너무 크게 본 것 같습니다.  나폴레옹은 영국의 무기는 해군이고, 영국 해군 로열 네이비를 지탱시켜 주는 것은 바로 동방 무역, 즉 인도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인도를 치기로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잘 나가는 나폴레옹이라고 하더라도,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인도를 공격할 수는 없었습니다.  영국 해군에 눌려 당장 도버 해협도 못 건너는 주제에, 대서양과 인도양을 지나 인도를 공략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지요.  하지만 나폴레옹의 머리 속에는 유럽인 최초로 인도를 침공했던 영웅의 일대기가 고스란히 들어있었습니다.  바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어릴 때부터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읽으며 '언젠가는 나도...' 하는 치기 어린 상상의 나래를 펴곤 했었지요.  그는 알렉산드로스처럼 소아시아와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를 공략할 꿈에 부풉니다. 






(아마도 당시 나폴레옹의 머리 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것은 이런 이미지 아니었을런는지 ?)



그렇다고 해도, 나폴레옹이 정말 과대망상증에 빠진 미치광이는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그는 현재 소아시아를 차지하고 있는 오토만 제국이 그렇게 녹녹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는 발칸 반도가 그 근거지라서 헬레스폰트 해협만 건너면 소아시아로 곧장 진입이 가능했지만, 나폴레옹이 그 루트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먼저 막강 오스트리아와 오토만 제국의 심장부를 관통해야 했습니다.  그건 절대 실현 불가능한 이야기였습니다.

나폴레옹은 대안을 찾아냅니다.  바로 이집트와 수에즈 지협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생각은 나폴레옹이 처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집트 원정 계획은 거의 100년 전인 태양왕 루이 14세 때부터 심심찮게 이야기되어 오던 망상이었지요.  희망봉 루트를 뚫기에는 프랑스의 대양 해군력이 딸리니, 이집트를 점령하고 수에즈 지협 양쪽에 각각 항구를 하나씩 만들면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할 수 있고, 프랑스 선박들이 영국보다 훨씬 짧은 루트로 동방 무역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16~17세기에 지중해를 주름잡던 베네치아 제국이 몰락한 원인이, 베네치아의 돈줄이었던 동방 무역이 오토만과의 갈등으로 어려워지면서, 동시에 희망봉을 돌아가는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의 대양 항로가 개척되었기 때문이었지요.  만약 프랑스가 이집트와 홍해를 장악하게 되면, 그 황금 물결을 희망봉에서 다시 수에즈 지협으로 되돌릴 수도 있다는 계산이었습니다. (나중에 나폴레옹의 제안서를 받아본 총재 정부는 아예 이 수에즈 지협에 운하를 뚫자는 시대를 앞서가는 계획까지 냅니다.)




(19세기 후반의 기술로도 어려웠던 수에즈 운하를 18세시 말에 뚫겠다는 저 야심을 보십시요.)



나폴레옹의 궁극적인 목표는 물론 장사 좀 하자는 것보다는 인도에서 영국 세력을 쓸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폴레옹은 궁극적인 목표를, 당시 영국의 침공에 저항하던 인도 중북부 마이소르(Mysor) 지방의 군주 티푸(Tippo) 술탄과 연합하는 것으로 두었습니다.  이 티푸 술탄은 당시 유럽에서 꽤 유명했던 인물로서, 영국군을 뜯어먹는 호랑이 모양의 태엽 인형을 만들기도 했지요.  (티푸 술탄과 영국의 전쟁이 제가 좋아하는 소설 Sharpe 시리즈의 1권인 Sharpe's Tiger 편입니다.  영국의 인도 침략에 대해 편을 참조하세요.)




(티푸 술탄은 결국 리처드 샤프 소위의 영국군의 손에 비참한 죽음을...)



나폴레옹의 이러한 계획에는 중대한 외교적인 난관이 있었습니다.  먼저, 이집트 침공의 정당성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지요.  아무리 막돼먹은 국가라 하더라도, 남의 나라를 침공하려면 뭔가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하다 못해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미개인들에게 유럽의 발전된 문화를 전파한다는 속이 뻔히 보이는 사명감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명의 시발지인 이집트가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미개인의 나라다 ?  이건 지나가던 개가 웃을 노릇이었지요. 





(수천년 전에 이런 거 만들어내던 나라를 미개한 나라라고 하면...)




게다가 이집트의 주권은 이집트가 아니라, 이제 허물어져 가고 있긴 했지만 당대를 주름잡은 지중해의 강국 오토만 제국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오토만 제국과는 사이가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습니다.  제1차 대불 동맹 전쟁 때, 비록 오토만이 적국이 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스처였을 뿐이고 실제로 전투가 벌어진 적은 없었지요.  그런데 다짜고짜 인도로 가는 길을 빌린다며 오토만의 영토인 이집트를 친다 ?  이건 얌전히 있는 옆동네 건달의 면상을 후려갈기는 것과 같은 형국이었습니다.




(보라, 오토만 제국의 위엄을 !)


그렇지만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가령 어떤 S전자 회장이 난데없이 '나도 자동차 회사 하나 해보고 싶어'라고 하면, 그 희망이 아무리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해도, 하바드 출신의 컨설턴트들이 S전자가 반드시 자동차 사업을 해야 하는 이유를 논리정연하게 정리해서 한 트럭분으로 갖다 바친다고요.  일단 이집트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니, 이집트에 가야만 하는 이유가 마구 새로 생겨났습니다.

- 서구 문명은 이집트로부터 왔다.  이제 서구에서 시작된 계몽사상과 혁명정신을 다시 이집트에 되돌려 주는 것은 뜻있는 일이다.  (퍽이나...)
- 이집트와 교역 중인 프랑스 상인들이 이집트의 지배층인 마멜룩 군주들로부터 핍박받고 있다.  프랑스는 자국민의 이익을 지켜야 한다.  (이건 사실이었습니다.  다만 프랑스 상인들만 당한 것은 아니고, 유럽 상인은 물론 중동 상인들도 많은 피해를 입고 있었습니다.)
- 이집트는 어차피 오토만의 지배에서 사실상 벗어나 있다.  프랑스가 이집트를 침공한다고 해도, 오토만 정부는 중립을 지킬 것이다.  (특히 오토만은 요즘 여기저기서 얻어터지느라 정신없지 않은가 ?)



(1683년 비엔나 포위 공격이 실패하면서 오토만 제국의 힘은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지요.  그림은 당시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폴란드 후자르들이 비엔나에 도착하는 모습입니다.)



나폴레옹이야 어릴 때 읽은 그리스와 로마의 영웅들을 따라 하겠다는 치기어린 욕망에 눈이 멀었다고 하지만, 대체 파리 정부의 총재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원정 계획을 승인했을까요 ?  그 이유는 '잘되면 좋고, 안되더라도 XXX' 였습니다.  그 XXX는 무엇이었을까요 ?  그것도 나폴레옹의 욕망 못지 않게 치기어린 것이었습니다.  바로 질투심이었지요.  나폴레옹은 이제 프랑스 국내에서 최고의 인기를 끄는 까도남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이탈리아에서 보여준 빛나는 승리들도 그렇습니다만, 무엇보다 프랑스에 드디어 평화를 가져왔다는 부분이, 프랑스 국민들의 마음을 빼앗은 것이지요.  이렇게 한 남자가 인기를 얻으면, 다른 남자들은 그 남자를 질투하게 되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것입니다.  파리 정부의 총재들은 나폴레옹의 인기가 점점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나폴레옹을 어디 먼 곳으로 보내버리고 싶었습니다.  울고 싶은데 빰을 때려준다고, 그런 총재들에게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 제안서를 제출한 것입니다.  총재들은 거의 후다닥 승인을 해주었습니다.

이집트 원정의 계획 단계에서는 정말 놀라운 점이 두가지 있습니다.  첫째, 속도입니다.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 기획안을 1798년 초에 제출했습니다.  총재 정부는 이를 검토한 뒤 불과 2~3달 만인 4월 12일에 승인합니다.  이렇게 엄청난 계획을 이렇게 대충 검토하고 승인했다는 것이 꽤 놀랍긴 합니다만, 그 이유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원정군의 출항 날짜입니다.  무려 보병 3만, 기병 2천8백, 야포 60문과 공성포 40문, 그리고 공병 2개 중대에 수병까지 도합 4만이 넘는 인원과 그 군수품, 그리고 그들을 실어나를 13척의 전함, 7척의 프리깃함, 그리고 300척 이상의 수송선을 준비하여 툴롱 항구에서 출항한 날짜가 놀랍게도 5월 20일이었습니다.  불과 1달여 만에 이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이집트 원정군에는 167명의 학자들(savants), 즉 수 학자, 화학자, 생물학자, 기계기술자는 물론 화가들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군인들은 그렇다치고, 이런 학자들과 예술가들을 선정하고 프랑스 전국에서 불러모으는데 불과 1달 정도 밖에 걸리지 않은 것입니다.  고속도로와 철도가 깔린 시대였다고 해도 정말 놀라운 속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때 나폴레옹이 데려간 휘하 장교들의 명단은 그야말로 화려합니다.  베르티에, 마르몽, 다부, 쥐노, 클레베르, 뮈라...  위 초상화는 역시 함께 갔던 나폴레옹의 친구 장 란입니다.)



두번째 놀라운 점은 바로 기밀 유지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인원과 장비, 물자가 툴롱으로 집결하는데, 이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그 행선지는 끝까지 나폴레옹과 총재들, 그리고 몇몇 심복 외에는 끝까지 몰랐다고 합니다.  병사들은 물론, 대부분의 장교들도 출항하고 나서야 자신들이 이집트로 가고 있다는 발표를 들을 정도였습니다.  말 많은 프랑스인들의 작전치고는 정말 놀라운 기밀 유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여태까지 이집트 원정의 여러 난관을 살펴 보았습니다만, 그 중 가장 큰 난관을 빼놓았습니다.  바로 로열 네이비, 영국 해군이었습니다.



(Nelson at anchor...)



기밀 유지가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은 바로 영국 해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국은 이렇게 툴롱에 대규모의 원정군이 집결 중이라는 것을 수많은 프랑스내 간첩들을 통해 이미 파악하고 있었습니다만, 정말 그 목적지가 어딘지는 몰랐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몰랐습니다.  영국이 그 최종 목적지를 안 것은 프랑스 원정 함대가 툴롱에서 출항한지 거의 2달 뒤인 7월 12일, 그것도 프랑스 국내 신문에 난 기사를 통해서였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대체 나폴레옹은 대체 어떻게 넬슨이 지휘하는 영국 함대를 뚫고 이집트에 가려는 생각이었을까요 ?  불과 몇십 km 되는 도버 해협도 못 건너는 주제에 말이지요 ?

그 답은 다음 주에 나폴레옹과 넬슨이 지중해를 무대로 펼치는 숨막히는 레이싱과 함께 살펴 보도록 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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