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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지중해를 가로질러 이집트로 향하는 낭만적 항해...?

by nasica-old 2011.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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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는 나폴레옹의 함대가 어떻게 넬슨의 요격을 용케 피해 알렉산드리아에 입항했는지를 영국 해군 입장에서 보셨습니다.  넬슨이 나폴레옹의 신기루를 쫓아 지중해를 갈팡질팡하는 동안, 나폴레옹과 그의 '동방군(the Army of East)'의 지중해 항해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

먼저, 툴롱에서 출발한 이 거대한 함대는 무려 22일이 지난 후에야 중간 목적지인 말타 섬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툴롱에서 말타 섬까지의 거리는 대략 약 1,200 km 정도니까, 평균 시속 2.3km로 항해한 셈입니다.  완전 군장으로 걷는 병사의 속도가 시속 4km 정도니까, 사람이 걸어가는 것보다 더 느렸던 것이지요.  이는 당시 범선의 평균 시속인 5노트, 즉 시속 9km보다 훨씬 느린 속력이었고, 그 이유는 항해 도중에 바람이 없어 힘없이 그냥 축 늘어진 채 떠있는 날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간혹 10노트, 즉 18km/h의 속도로 달리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범선은 느릴 수 밖에 없지요.)



이 지루한 항해 동안 나폴레옹과 프랑스 병사들의 함상 생활은 어땠을까요 ?  한줄로 표현하면 이랬습니다.  "좁고, 더럽고, 구역질나고 시끄러웠다"

지난번에 언급했듯이, 당시 나폴레옹이나 넬슨의 주력함들은 대략 74문의 대포를 장착한 3급함들이었고, 이들의 배수량은 약 1700톤이었습니다.  이런 배에는 승무원이 대략 몇명이 탈까요 ?  우리에게는 가슴아픈 이름이 되어버린, 그러나 전 국민이 가장 잘 기억하는 군함인 천안함의 경우 약 1200톤급이었습니다.  (실제로는 1500톤급이라고들 하던데...)  그런데, 이 정도의 배라고 해도 현대인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상당히 작아서, 여기에 정상적인 승무원의 수가 100명이라고 하면 '아니 저렇게 좁은 공간에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지 ?' 하고 놀라게 됩니다.  (실제로 미해군이나 영국해군의 기준으로 봐도, 배수량치고는 승무원 수가 꽤 많은 편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징집제 특성상, 비싼 자동화 장비보다는 월급 10만원짜리 수병 몇십명 더 싣는 것이 훨씬 더 싸거든요.) 




(사실 포항급 초계함은 앞에서 보면 꽤 좁아서, 내부를 보면 매우 비좁은 느낌이 든다고 하지요.)



그런데 당시 대포 54문 정도를 장착한  4급함, 그러니까 천안함과 비슷한 크기였던 1000톤급의 정상 승무원은 약 400명이었습니다.  3급함의 경우에는 1700톤급에 약 600명이었고요.  그러니까 대한민국 해군 천안함과 비교했을 때 승무원 1인당 주어지는 공간은 1/5 수준이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천안함과는 달리 배 밑바닥에 엔진룸이 없다고 해도, 이 정도의 부피에 그 많은 인원이 들어가서 근 1년간 먹고자고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  문제는 이 승무원 수자는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경우의 이야기였고, 이때 나폴레옹 함대는 이집트 원정을 위해 배마다 육군 병사들까지 가득 실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게다가 육군이 사용할 군수품과 식량, 물까지 잔뜩 실었으므로, 그야말로 배(?)가 터질 지경이었지요.  사정이 이렇다보니, 당시 함상에서의 생활은 매 순간순간이 고통에 가까왔습니다.  모든 공간에 인간이 그득했거든요 ! 



(겉보기엔 멋질지 몰라도, 내부는 나름 구차했다는 거...)



이때의 삶에 대해서는 당시 브뤼예(Francois-Paul Brueys d'Aigalliers) 제독의 공식 항해 일지 같은 것에는 당연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해군 수병들에게는 이런 함상 생활이 익숙한 것이었을테니까요.   우리가 일기 쓸 때 '놀랍게도 오늘은 밥과 김치라는 음식을 먹었다'라고 쓰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겠지요.  그리고 나폴레옹을 보좌했던 나폴레옹의 비서 부리엔 (Bourrienne)은 나폴레옹과 함께 비교적 호화로운 선상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기록에도 별로 언급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시 나폴레옹을 따라 나섰던 학자들과 예술가들에게는 이런 삶은 충격 자체였고, 덕택에 그들의 일지에는 그런 생활에 대해 기록된 바가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을 따라나섰던 학자들 중 많은 수는 사실 학자라기보다는 파리 이공대학의 젊은 학생들이었습니다.)




(1794년 국민공회에 의해 창설된 이 Ecole Polytechnique는 나중에 나폴레옹이 고위 군 장교 및 관료를 육성하기 위한 학제로 약간 개편됩니다.  그 영향으로 이 학교에는 사진에서 보시듯이, 아직도 군사적인 색채가 짙습니다.   나폴레옹, 교육을 논하다 (하편) 참조 )



젊은 파리 이공대학 (Ecole Polytechnique) 학생이었던 에두아르 드 빌리에 뒤 테라주(Edouard de Villier du Terrage)라는 사람이 남긴 기록에 당시 선상 생활의 인구밀도가 대략 적혀 있습니다. (저는 이 기록을 '나폴레옹의 학자들' (Les Savants de Bonaparte)라는 책에서 읽었습니다.  국내에는 도서출판 아테네에서 발간되었습니다.  재미있습니다 !!)  이 친구는 3급함인 프랭클린 (Franklin, 미국 독립선언의 그 프랭클린 맞습니다) 호에 타고 있었는데, 거기에서는 100 제곱미터 (약 33평)의 선실에서 무려 110명이 잤다고 기록했습니다.   1평에 3.3명이 자는 셈이지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요 ?  해먹을 아래 위로 2층으로 걸면 가능합니다.   당시 이런 배에서는 1인당 해먹을 걸 공간 폭을 28인치, 즉 71cm 정도를 주었거든요.  아래 위로 한 공간에 2명이 해먹을 걸면 그럭저럭 33평의 공간에 움직일 통로 약간을 남겨두고도 110명이 들어갈 수는 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영국 해군 생활을 묘사한 해양 소설 Lord Hornblower 중에서도 이런 이야기, 즉 윗 열에 누운 동료 수병의 등판이 자기 코에 닿을락말락 하는 공간에 수병들이 빽빽히 아래 위로 해먹을 걸고 자는 장면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그러면서 주인공 혼블로워가 혼자 생각하는 장면이 나오지요.  '생각있는 농부라면, 자기 가축들을 이런 생활 조건에 처박에 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 빌리에라는 학생이 탔던 프랑스의 3급함 프랭클린 호입니다.  이 전함은 나일강 전투에서 영국군에 나포되어, 이후로는 HMS Canopus로 개명되어 영국 해군에서 사용됩니다.)



이렇게 인간이란 짐승들이 정어리 통조림처럼 빽빽히 들어차서 생활을 하면 두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인간의 몸은 발열체입니다.  그렇게 좁은 공간에 그렇게 많은 인간을 쟁여넣으니 그 열기는 정말 대단했다고 합니다.  영국 해협이나 북해, 발트해에서 근무하던 해군들은 (불을 피울 수 없는 목조 군함 특성상) 추위에 떨어야 했지만, 남쪽 위도 지역에서, 특히 여름에 근무해야 했던 해군들은 잠을 잘 때 그 좁은 선실의 열기가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다행히 지중해는 기온이 다소 온화한 편이고, 또 때가 5월 6월이었으므로 그나마 좀 견디기가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열기에 대한 불평은 학자들의 일지에도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냄새 !  당시 배에는 샤워 시설 같은 것이 당연히 없었을 뿐더러, 당시 유럽인들은 목욕이나 세탁에 그다지 취미가 있지도 않았습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함대의 전체 인원은 아무도 목욕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루 종일 온갖 선상 노동에 시달리며 땀을 흘린 인간들을 좁고 환기도 안되는 선창에 처박아 두었으니 그 냄새가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  학자들의 일지에는 그런 냄새에 대한 고통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해먹을 건다는 것이 이런 모습이기만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Gustave Courbet의 그림입니다.)



일반 병사들이야 당연히 이런 수병들이 자는 공간에 처박혀 자야 했고, 학자들도 상당수는 이런 개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이 167명의 학자들은 사실 학자라고 하기엔 좀 부족한, 학생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거든요.  이 학자들의 평균 연령은 불과 25세에 불과했을 정도니까요.  당연히 막내인 15살 짜리 자끄 앙투안 비아르(Jacques Antoine Viard)에게 육군 대위나 중령 대접을 해주지는 않았습니다.  그 기준은 모호합니다만, 아무튼 나폴레옹의 참모들은 이 학자들에게도 나름대로 5개 그룹으로 등급을 매겨 대우를 달리 했습니다.  하지만, 1급으로 분류된 학자들에게 주어지는 선실조차도, 원래는 뻥 뚫린 갑판의 넓은 공간 중 벽 쪽 부분에 판자나 캔버스 천으로 가림막을 친 수준이었습니다.  함장을 제외한 다른 해군 고위 장교들도 원래 다 그런 선실에서 살았으므로, 뭐 딱히 불평할 일도 없었지요.

아까 위에서 언급한 선상 생활에 대한 묘사가 '좁고, 더럽고, 구역질났다'라고 했습니다만, 구역질이 난 이유는 이 냄새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배멀미였지요.  인간은 누구나 배멀미를 합니다.  심지어 14살 때부터 군함 생활을 했던 넬슨 제독조차도 출항할 때면 항상 배멀미를 했다고 하는군요.  그런데 평생 육지에서만 살아오던 학생들, 학자들, 예술가들이 그런 열악한 환경의 선상 생활을 했으니, 얼마나 멀미에 시달렸을지 상상이 갑니다.  심지어 배수량 2500톤에 승무원 2500명이 들어가는 118문짜리 1급함 오리앙(Orient) 호를 탔던 나폴레옹조차도, 심한 배멀미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그나마 나폴레옹은 전용 선실 (원래 왕족이 탈 때를 위해 만들어진 호화 선실)을 혼자 차지하고 앉아 거기에 걸어놓은 흔들 침대에 드러누워 배멀미를 달랠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일반 학자들과 수많은 병사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바람이 없어 불과 시속 2.3km로 느릿느릿 흔들흔들 항진하는 선단의 속도에 울화통이 터졌겠지요.




(평상시 군함의 포갑판 모습입니다.  염소나 양같은 식육용 가축은 물론, 개나 원숭이 같은 애완동물까지... 현대 기준으로 보면 진짜 개판입니다.)



학자들이 불평했던 것은 한가지 더 있었습니다.  이렇게 울화통터지게 느린 여행에서, 별로 할 일이 없었던 병사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이었습니다.  원래 프랑스인들이 말이 좀 많은 편이라고들 하는데, 가뜩이나 할 일이 없으니 이 병사들은 카드놀이를 하며 환호성과 탄식, 싸움질, 돼먹지 못한 노래를 불러대며 온갖 소음을 만들어냈습니다.  '부드러운 바람을 타고 아름다운 지중해를 가로질러 머나먼 미지의 목적지로 향하는' 낭만적 항해를 꿈꿨던 학자들이 대실망을 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실은 할 일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해군 장교들은 영국 함대의 요격을 두려워하고 있었으므로, 수평선 위에 뭔가 다른 선박의 돛대가 보이기만 하면 무조건 'beat to quarters' (불어로는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군요) 즉 전투 태세에 들어갔습니다.  이 전투 태세라는 것은 요즘 군함에 비해서 훨씬 복잡했습니다.  당시의 전투 준비에 대해서는 나폴레옹 시대의 해전  편에서도 썼지만, 여기서 다시 인용해보지요. 




(이 정도면 cleared for action이 된 상태라고 할 수 있지요.)



1. 먼저 갑판 아래에 있는 선실들을 구분하는 벽 역할을 하던 나무 판자들을 모두 떼어내서, 간판 아래를 넓은 하나의 공간으로 변형시킵니다.  이래야 대포 사격 및 통제를 제대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일반 장교들은 물론 함장의 가구나 서류, 소지품같은 것들은 모두 하갑판 창고로 처박히게 됩니다.

2. 수병들의 침구인 해먹 말아둔 것을 꺼내어 난간 등에 고정시켜 둡니다.  진지 구축시의 모래주머니 쌓아둔 것과 같은 방탄 효과를 냅니다.  또, 포격에 맞아 떨어질 삭구나 가로활대 등으로부터 갑판 위의 수병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 그물막을 펼쳐 고정합니다.

3. 주방(galley)의 불을 끕니다.  재수없게 적의 포탄이 주방 아궁이를 때릴 경우 화재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직 시간이 있다면 clear for action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염장 쇠고기를 삶아두는 것이 좋겠지요.  치열한 포격전 중에도 수병들이 원기를 찾을 수 있도록 약간의 음식과 물을 준비해두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대개는 찬 음식이었지요.

4. 탄약고에서 적절한 숫자의 포탄과 화약을 날라오고, 포격에 필요한 슬로우 맷치 (slow match, 천천히 타는 도화선) 및 포구를 식히는데 쓸 물통 등을 준비합니다.  또 포구를 막아두었던 마개도 뽑고, 핸드 스파이크 등 대포를 운용하는데 필요한 이런저런 도구들을 가져다 둡니다.  또 화재가 날 때에 대비하여 소방용 물통도 채워둡니다.  시간이 충분하면, 대개 벌겋게 녹이 슬어있을 포탄의 표면을 정으로 쪼아서 녹을 벗겨냅니다.  그래야 명중률이 좋아지거든요.




(실제 전투 상황에서는 gun deck은 그야말로 지옥이라고 할 수 있었겠지요.)



5. 이런저런 준비가 다 되면, 각자 지정된 전투 위치로 가서 사격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립니다.  군의관은 선창 바닥 근처의 응급실(cockpit)에 칼과 톱, 붕대 등을 갖다놓고 기다립니다. 

가장 난리법석을 떨어야 했던 것은 1번, 즉 선원들과 장교들의 소지품 및 선실벽을 뜯고 챙겨 배 밑바닥 창고에 옮기는 작업이었습니다.  이는 위로는 나폴레옹부터, 아래로는 말단 육군 이병까지 모든 이들의 생활 공간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군함의 이런 전투 준비 과정에 대해 놀랐는지 선원들의 소지품 뭉치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브뤼예 제독에게 물어보고는, 배 선창에 따로 보관한다는 대답을 듣자, '나라면 실제 전투가 벌어지면 (좀더 빨리 전투 태세를 갖추기 위해) 바다로 던져 버리도록 명령하겠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는 나폴레옹이 또 오버를 한 것입니다.  당시 군함은 워낙 느려서, 수평선에 나타난 적함을 탐지한 뒤 실제 교전에 들어가려면 왠만하면 2시간 이상 걸렸으니까 얼마 안되는 선원들의 초라한 소지품을 굳이 바다로 던져버릴 필요는 없었거든요.




(아무리 찾아도 나폴레옹의 기함 오리앙 호의 멋진 모습은 없고, 모조리 나일강 전투에서 폭발하는 오리앙 호의 모습 밖에 없습니다 T T)



먹을 것도 사정이 좋지는 못했습니다.  말타까지는 22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까지 합쳐도 1달 반이 채 걸리지 않았던 비교적 짧은 항해였으므로, 식량이나 식수 사정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역시 나빴습니다.  아까 언급된 드 빌리에라는 학생의 일지를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역시 '나폴레옹의 학자들'에서 발췌...)

"양고기, 대구, 강낭콩을 먹을 수 있었지만, 어렵게 구한 그 음식들은 종종 날것이거나, 상한 것들이었다."

또, 병사들이 부족한 음식을 보충하기 위해 가진 옷가지를 팔아야 했다는 이야기도 적혀 있습니다.  대체 이 함대에서는 정규적인 배급이 없었다는 것일까요 ?  냉장고가 없던 시절, 상한 음식이야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왜 날것이 나와야 했으며, 왜 병사들이 음식을 구하려고 옷가지를 팔아야 했을까요 ?

이는 당시 유럽 육해군이 채택하고 있던 병사들의 식량 배급 시스템을 이해해시면 짐작이 가실 만한 이야기입니다.  이사무님이 내신 책 '전투함과 항해자의 해군사'에도 자세히 소개되는 이야기입니다만, 당시엔 육군이나 해군이나, 군대에서는 주요 식재료, 그러니까 빵 (또는 건빵) 또는 밀가루, 육류 등의 날재료만 지급했을 뿐, 그를 조리해먹는 것은 어디까지나 각 병사들의 재량에 달려 있었습니다.  대개는 하나의 천막을 쓰는 (육군), 또는 하나의 식탁을 쓰는 (해군) 8~10명 정도되는 식사조(mess)를 짜서 이들이 재주껏 주어진 재료로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육군의 경우는 땔감을 구해온다거나, 죽이나 수프에 넣을 채소 따위를 구하는 것도 각 식사조 병사들의 수완에 달려 있었습니다.  해군의 경우는 세상과 격리된 생활이라는 특수 환경 때문에, 솥단지나 땔감 등을 각 병사들마다 재량껏 하게 내버려 둘 수가 없었지요.  (으슥한 배 선창 어딘가의 판자를 뜯어내어 땔감으로 쓴다면...!!!)  그래서 각 식사조가 안전하고 질서있게 요리를 할 수 있도록 주방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은 준위(warrant officer)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cook 이지요.  즉, 해군의 cook은 요리사라기 보다는, 주방 관리자였습니다.  (영국 요리가 악명 높다는데, 영국 해군 주방장이 만든 요리라면 ?    참조)  당시 군함의 식사 시간은 정말 우르르 우당탕 매우 시끄러웠는데, 이유는 수많은 식사조가 줄을 서서 음식 재료를 수령하고 제한된 개수의 솥단지를 공용으로 사용하여 정해진 짧은 시간 안에 자기 식사조의 요리를 마치려면 무척 분주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포 사이의 간이 탁자에서 한솥밥을 먹는 식사조(mess)는, 글자 그대로 한솥밥을 먹는 사이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식사조의 구성원이 일이 서툴어 주방(galley)에서 재빨리 요리를 하지 못하는 경우, 일부 재료는 설익은 채로, 또는 아예 날것으로 먹어야 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었습니다.  설마 그 학자들이 병사들과 뒤섞여 1개조를 이루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학자들 중 최하등급으로 분류되어 스스로의 식사를 스스로 조리해야 했던 젊은 학생들은 익지 않은 강낭콩도 고맙게 씹어야 했을 것입니다.  또 병사들 개개인의 사정에 따라 짐짝 속에 말린 자두라든가 육포, 브랜디 등 보존 식량을 따로 준비해 온 사람들도 있었겠지요.  이런 개인 식량은 각 식사조 사정에 따라 나누어 먹는 경우도 있었겠고, 병사들이나 수병들 간에 돈으로 사고 팔기도 했습니다.  매일 먹는 건빵이나 염장 쇠고기의 단조로운 식사에 지친 병사들은 돈을 내서라도, 혹은 옷가지를 팔아서라도 (대개는 몸에 걸친 것 외에는 별다른 재산이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뭔가 보충 식재료를 구하는 경우가 있었겠지요.  음식의 맛이요 ?  어차피 재료가 무엇이건 물에 그냥 삶아먹는 수준의 요리인데, 음식의 맛을 따질 여유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장교들은 자신들만의 식당에서, 자신들이 따로 돈내서 고용한 요리사가, 자신들이 따로 돈내서 마련한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었습니다.  사진은 영화 마스터 앤드 커맨더의 한 장면.  러셀 크로의 모습이 보이시지요 ?)



사정이 이렇다보니, 몽쥬(Gaspard Monge)와 베르톨레(Claude Louis Berthollet)처럼 나폴레옹의 신임을 받는 최측근으로 분류되어 기함 오리앙(Orient) 호에서 나폴레옹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었던 학자들과, 위에서 언급한 빌리에 및 비아르 같은 학생들은 매우 다른 선상 생활을 했습니다.  이런 학자들에 대한 병사들이나 장교들의 인상은 제각각이었습니다.  가령 조프루아 생틸레르(Etienne Geoffroy Saint-Hilaire) 같은 이는 자기가 탄 군함의 함장의 개인적인 손님 대접을 받으며 선상에서도 자신의 연구 활동을 계속하여, 선원들이 항해 중에 낚은 상어에다가 전기요법으로 실험을 하며 병사들과 수병들의 눈을 희둥그래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젊은 학생들은 도르래 뭉치 뒤편에 쭈그리고 앉아 대학에서 공부하던 미적분학 교과서를 읽어야 했지요.  대체적으로 장교들은 '저것들은 대체 뭘 얻어먹겠다고 따라 왔단 말인가' 하며 귀찮아 하는 분위기였고, 병사들은 '뭔지는 뭘라도 아는 것이 많은 대단한 분들'이라고 존경하는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학자라고는 할 수 없는 예술가들 (화가는 물론 심지어 오페라 가수까지 있었습니다)은 병사들로부터도 '반쪽짜리 학자'(demi-savant)이라고 괄시받는 처지였다고 합니다. 






(위에서부터 몽쥬, 베르톨레, 그리고 생틸레르입니다. 몽쥬와 베르톨레는 정말 절친한 사이로서, 항상 붙어다녔으므로 사람들은 그 둘을 그냥 몽쥬톨레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람들, 즉 나폴레옹의 휘하 장군들은 이들 학자 및 예술가들을 매우 소중히 여겼습니다.  이유는 다름아니라, 이들이 장군들에게 더없이 소중한 말벗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장군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장군의 부하다보니, 편하게 개인적인 고민 등을 이야기할 친구라는 것이 전혀 없었거든요.  그런데 교양있는 중산층 이상의 민간인 신사들이 주변에 있다는 것은, 장군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말동무 상대였습니다.  처음에 나폴레옹은 이집트에 상륙한 뒤, 장군들을 로제타니 알렉산드리아니 여러 곳으로 나누어 파견하면서, 학자들도 각자 관심사에 따라 그 장군들을 따라가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상황이 안정된 뒤, 모든 학자들을 카이로로 집결시키도록 했는데, 각 분견대의 장군들이 그 조치에 대해 가장 섭섭해했고 학자들을 데려가지 말아달라고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학자들을 좋아한 것은 나폴레옹도 마찬가지여서, 기함 오리앙 호에서 가장 즐겨했던 놀이가, 이런 학자들과 장군들을 자신의 선실에 초대해놓고 토론회를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전혀 뜬금없는 화제, 가령 지구의 나이가 몇년 정도인가, 꿈의 해몽은 과학적인 것인가, 다른 행성에도 생명체가 존재하는가 등의 주제를 던져 놓고 거기에 대해 찬반 토론을 벌이게 하는, 즉 나폴레옹의 100분 토론 시간이었지요.  여기서 나폴레옹은, 그냥 고지식하게 맞는 말에 대해 지루한 해설을 늘어놓는 사람보다는, 약간 억지같은 주장이더라도 재치있게 풀어나가며 설득하는 사람을 더 좋아했다고 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나폴레옹의 사람됨을 엿볼 수 있지요.

다음편에는 드디어 나폴레옹이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는 모습을 보게 되십니다.




(엇, 우리들 이야기, 말타 기사단 이야기는 언제 나오나요 ?)



PS. 말타섬의 요한 기사단을 정복하는 이야기는 따로 다루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가 여기저기 자료를 찾아보니, 아무래도 재미가 별로 없더라고요.  제가 뭐 역사책을 쓰는 것도 아니고, 재미없는 부분은 과감히 패스...  그런데 이번 항해 생활 편도 그리 재미는 없었다고 하시면 대략 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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