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폴레옹의 시대

말타에서 생긴 일

by nasica-old 2011. 4. 8.
반응형


지난 편에서 제가 나폴레옹의 말타 정복기는 다루지 않겠다고 했습니다만, 그 사이에 마음을 바꿨습니다.  

말타 기사단은 원래 이름이 병원 기사단(Knights Hospitaller)으로서, 그 기원은 11세기 경 십자군 원정 시작 이전에 칼리프의 허락을 얻어 예루살렘에 설립된 병원에 두고 있습니다.  성지 순례를 하는 기독교인들을 위한 치료와 봉사 단체였지요.  나중에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고, 십자군 기사들에 의해 예루살렘 왕국이 건설된 이후, 이 병원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기사단이 별도로 조직됩니다.  성전 기사단(Knights Templar)이 더 유명하고, 병원 기사단(Knights Hospitaller)도 유명했지요.  이 병원 기사단은 간혹 성 요한 (Saint John) 기사단이라고도 불렸는데, 이유는 최초의 병원 자리가 과거 세례 요한 수도원이 있었던 자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검은 겉옷에 흰 십자가가 그들의 초기 트레이드 마크였습니다.)



이런 단체들을 구성하는 기사들은, 일종의 무장한 사제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유럽 각지의 힘있는 가문 출신들이 많았고, 또 그런 가문들로부터 많은 재산을 기부받았으므로, 재산도 아주 많았습니다.  프랑스나 이탈리아는 물론, 네덜란드, 독일, 영국 등지에 이들이 소유한 장원과 토지, 숲, 광산 등의 재산이 대단했습니다.  (나중에 템플라 기사단은 이 재산을 탐낸 프랑스 왕때문에 결국 누명을 뒤집어쓰고 해체되지요...)  이렇게 물질적 기반이 충실하다보니, 그에 걸맞게 무력도 막강했고, 이 템플라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은 십자군 전쟁 내내, 가장 강력한 전투집단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러면서 성 요한 기사단은 원래 병원 기사단(Hospitaller)라는 원래 이름과는 걸맞지 않게, 기독교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보다는 이슬람 전사들을 병원(또는 무덤)으로 보내는 일에 더 치중하게 됩니다.

알라무트(Alamut) 산에 근거지를 둔 유명한 암살 집단 하시신(Hashishin, 영어 assassin의 어원이지요)조차도, 이 템플라나 성 요한 기사단의 단장(Grand Master)들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엄청난 기사들로부터 보복을 당할까봐...라기보다는, 죽여봐야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십자군을 지휘하는 왕이나 대공은 암살하면 일단 후계 문제로 대혼란이 벌어졌고, 무엇보다 암살하겠다고 협박 편지만 보내도 벌벌 떠는 것이 효과가 만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기사단장이라는 직책은, 그냥 명예 선출직이었으므로, 단장을 죽여도 금방 비슷한 역량의 새로운 단장을 뽑았습니다.  암살을 하면 그 암살자도 희생되는 것이 보통으로서, 암살은 한명을 죽임으로써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어야 이익이 남는 장사인데, 이렇게 타겟을 제거해도 별 효과가 없다면 암살의 값어치가 떨어지니까, 자연 암살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이었습니다.




(1291년, 이슬람 군대로부터 아크레 시를 방어 중인 성 요한 기사단)



이렇게 끝발 날리던 시절도 메뚜기 한철, 결국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아크레나 트리폴리 등 팔레스타인 해안 도시들도 이슬람 수중에 넘어가자, 병원 기사단은 근거지를 잃게 됩니다.  처음에 이들은 키프로스 섬으로 근거지를 옮겼다가, 그 섬의 정치 싸움에 말려들게 되자,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결국 자신만의 정치 군사적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소아시아 반도 턱 밑에 붙은 로데스(Rhodes) 섬을 점령합니다.  여기에서 성 요한 기사단 또는 병원 기사단은 로데스 기사단으로 불리게 됩니다.  사실 이때 즈음 되면 성 요한 기사단은 병원 기사단이라는 이름을 쓰기가 좀 애매할 정도로 주요 활동을 이슬람에 대한 파괴 행위로 집중하게 됩니다.  이들이 근거지로 정한 로데스 섬은 로마가 초창기 에게해로 진출할 때 주요 동맹으로 삼을 정도로 강력한 도시 국가가 있던 곳으로서, 고대 에게해 무역로의 요지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런 교통의 요지라는 점을 잘 활용하여 성 요한 기사단이 주로 벌였던 사업은 사실상의 해적 행위였습니다.  즉, 지나가는 이슬람 선박 (주로 민간 선박)을 습격하여 나포해서, 그 화물을 강탈하고 승무원은 노예로 매각하는 행위를 주로 했던 것입니다.  왜 숭고한 봉사 활동으로 시작한 병원 기사단이 이런 해적이 되었냐고요 ?  뭐, 당시 유럽 사회 분위기가 이슬람을 원수처럼 대하는 것도 있었겠습니다만, 무엇보다 성지를 빼앗긴 것에 대한 복수라는 개념이 더 강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이 해적질을 크게 벌여 한때 소아시아의 주요 도시인 스미르나(Smyrna)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고 약탈하기도 했습니다.




(로데스 섬의 성 요한 기사단장의 궁전입니다.  뭐니뭐니해도, 이 Knights Hospitaller들은 부자였거든요.  궁전도 아주 번듯번듯합니다.)



당연히 막강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이런 기독교 해적들이 코 앞에서 분탕질을 치게 내버려 두지는 않았습니다.  1444년에 이집트의 술탄도 한번 로데스 섬을 공격했고, 1480년에는 오스만 투르크의 메메드(Mehmed) 2세가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시련은 1522년, 오스만의 술레이만(Suleiman) 대제가 몰고 옵니다. 무려 20만 대군을 상륙시킨 술레이만 대제가 6개월간 집요한 포위 공격을 가한 것입니다.  결국 병원 기사단은 조건부 항복 하에, 시실리로 옮겨갑니다.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도스섬 공방전' 저도 읽었습니다.  당시의 공방전을 그린 그림들인데... 윗 그림이 좀더 현실적인 듯.)



여기서 한동안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되었다가, 신성로마제국, 그러니까 당시 합스부르크 왕가의 칼 5세에게 시실리 섬 남부의 말타 섬을 선물로 받아서 여기에 근거지를 정합니다.  무엇보다 이들은 그냥 없어지기에는 재산이 너무 많았거든요.  이들은 여기서도 자신들의 상징인 병원을 지었는데, 그 규모는 유럽 본토의 어느 병원에도 뒤지지 않았다고 하네요.  하지만 말입니다, 인구도 몇 되지 않는 그야말로 껌딱지 만한 말타 섬에 왜 그렇게 큰 병원이 필요하겠습니까 ?  병원 기사단은 여기서도 병원 봉사 활동보다는, 이슬람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며 또 해적질에 나섰고, 이는 결국 1565년 다시 술레이만 대제의 공격을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술레이만 대제도 늙어서 그랬는지, 말타 섬은 소아시아, 그러니까 오스만 투르크의 본토와 거리가 멀어서 그랬는지 이 공격은 그다지 힘이 없어서, 이번에는 병원 기사단은 오스만의 포위를 버텨 내고 결국 물리칩니다.  이 말타 포위전은 병원 기사단, 아니 말타 기사단의 이름을 유럽 전역에 드높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요.




(아... 로데스에서 한 짓거리를 여기서 또 해야 한단 말인가 ?)



특히 그 다음해인 1566년, 당시의 기사단장인 발레뜨 (Jean Parisot de la Valette)는 향후 또 있을 오스만 투르크의 공격에 대비하여 강력한 요새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발레타(Valletta) 성이었습니다.  하지만 발레뜨 단장의 예상과는 달리, 이슬람 교도들이 이 성을 포위하는 일은 두번 다시 없었지요.  하지만 누구에 의해서든, 포위되었을 때 이 성이 중대한 역할을 해내기는 했습니다.




(그랜드 마스터 라 발레뜨.  그는 이 성채를 통해 그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게 됩니다.)



하지만 말타 기사단의 몰락은 외부로부터 보다는 내부로부터 왔습니다.  즉 오스만 투르크의 군사적 위협보다는, 유럽에서 일어난 종교 개혁이 말타 기사단에게 더 결정타를 먹였던 것입니다.  이 병원 기사단은 교황의 승인 하에 만들어진, 철저하게 카톨릭적인 종교 단체였습니다.  그런데 유럽에서 카톨릭의 부패에 반발하여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이 일어나자 그 영향으로 유럽 각국에서 들어오던 지원금이 줄어들게 되었고, 특히 독일과 영국에서는 프로테스탄트 영주 및 영국 국교회가 병원 기사단의 현지 자산을 몰수하는 사태까지 일어났습니다.  이와 함께 말타 기사단의 세력은 서서히 기울게 됩니다.  특히 레판토 해전(1571년) 이후로는 말타 섬 근처를 항해하는 이슬람 선박도 크게 줄어, 해적질도 할 일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이 후 약 200년간 말타 기사단은 찬란하거나 영광스럽지는 않지만, 조용한 시절을 보냅니다. 

그러던 때에, 1798년 6월 10일, 나폴레옹이 대함대를 이끌고 덜컥 나타납니다.  제3자가 본 이후 과정은 이렇습니다.  프랑스 함대는 식수 공급을 위한 기항을 요청했고, 말타 기사단의 단장은 그에 대해 무장 함대가 중립 항구에서 식수 보급을 하기 위해서는 한번에 2척만 입항할 수 있다고 통보했는데, 이를 거부로 받아들이고 발끈한 나폴레옹이 1개 사단을 상륙시켜 포위전을 펼친 끝에 말타 기사단은 (1522년 술레이만 대제에게 했던 것처럼) 조건부 항복에 동의하여 발레타(Valletta) 요새를 비워줍니다.  상당히 간략하지요.



(솔직히 이 남자 문 밖에 와서 '꿇어'라고 하면 꿇어야지 무슨 수가 있겠습니까 ?)



하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더 간략하고 더 허무합니다.  나폴레옹은 훗날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말타 기사단의 항복에 대해 이렇게 논평했습니다.

"말타 기사단은 분명히 완고한 저항을 펼칠 방어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럴 도덕적 기반이 없었던 것이다.  기사들이 불명예스러운 항복을 했다기 보다는, 불가능한 일이라서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말타 기사단은 팔린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툴롱을 출항하기 전부터, 말타 정복은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이것이 대체 무슨 소리인가요 ?

지난 편에도 이야기했듯이, 나폴레옹은 1797년, 캄포 포르미오 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이집트 원정 준비에 착수했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중해의 제해권...까지는 아니더라도, 지중해에서 영국 해군에 대항하기 위한 발판이 필요했지요.  (하지만 나중에 드러나듯이, 해군력이 부족한 것을 보완하기 위해 섬에 기지를 둔다는 발상은 결국 근본부터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가장 만만한 상대가 바로 말타 섬이었습니다.  크기도 작고, 어느 강력한 국가 소속도 아니어서, 그야 말로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인 땅이었거든요.  게다가 발레타 성채는 난공불락의 요새여서, 나중에 영국 해군의 공격을 받아도 충분히 버틸만 했습니다. 문제는 그 발레타 요새에서 말타 기사단이 프랑스 군에 대항하여 농성전을 펼치면 어떻게 하냐는 것이었습니다. 




(현대의 발레타 시입니다.   저 보방식 별 모양의 요새는 지금 봐도 아주 튼튼해 보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나폴레옹의 친구이자 비서였던 부리엔(Louis Antoine Fauvelet de Bourrienne)의 회고록을 보시지요.

------------------------------------------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지만 이 모든 것(말타 기사단의 포위전)은 그저 형식상의 일이었고, 이런 적대 행위가 불쾌한 결과로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우리는 기사들의 명예를 보존해주고 싶었고, 사실 그게 전부였다.  사실 말타를 직접 눈으로 본 사람이라면, 영국 해군에 추격 당하는 함대에게 그렇게 막강하고 완벽한 성채로 무장된 섬이 2일만에 항복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난공불락의 말타 요새는 너무나 튼튼하여 기습이 불가능했다.  카파렐리(Caffarelli) 장군이 그 요새를 조사한 뒤, 나폴레옹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내가 직접 들었다.  "이건 정말, 운이 좋다고 밖에 말할 수 없겠습니다.  요새 안 누군가가 문을 열어주던데요 ?"
------------------------------------------

즉, 말타 기사단의 기사들 중 상당수는 사실 프랑스인이었고, 그들 중 역시 상당수가 이미 나폴레옹과 내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기사단 내부에서 '승산도 없고 의미도 없는 싸움을 해서는 안된다, 우리 기사단 강령에도 기독교인과의 싸움은 금지한다고 했다' 라며 항복 분위기를 이끌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항복한 말타 기사단 중 프랑스 국적인들은 나폴레옹을 따라 괜찮은 군대 계급을 받고 이집트 원정에 동참합니다.  그 나머지는 나폴레옹이 '잘 타일러 귀가시키'지요.  하지만 집이 어딘가요 ?  병원 기사단은 정말 집도 절도 없이 유랑하는 신세가 되었다가, 뜻밖에 머나먼 북동쪽 러시아에서 안식처를 찾습니다.  러시아의 짜르 파벨 (Pavel) 1세가 페테르부르크에 정착을 권한 것입니다.  사실 18세기말 정도되면, 이미 병원 기사단이라는 존재는 돈키호테식의 웃음거리로 전락한 상태라서, 대개의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않았고 그다지 명예롭게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파벨 1세는 아직도 기사단장이라는 자리에 간지가 좀 남아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기사단 자체 규약에도 어긋나는 얼치기 과정을 거쳐, 아예 파벨 1세가 새로운 단장, 즉 그랜드 마스터로 선출이 되었고, 나중에 정식 총회를 거쳐 이 선출이 승인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문제가 있습니다.  병원 기사단은 분명히 로마 카톨릭 휘하의 단체인데, 그리스 정교를 믿는 러시아 짜르가 그 단장이 되다니요 ?  이 문제는 아주 쉽게 해결이 됩니다. 로마 교황 자신도 나폴레옹에게 포로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마당에, 이런 허울뿐인 기사단 따위 누가 신경이나 쓰겠습니까 ?  교황은 '그래 너 가져라' 하며 병원 기사단이 이제 카톨릭이 아니라 그리스 정교 소속이 됨을 아무렇지도 않게 승인해줍니다.  하지만 말타 기사단의 안식은 쉽지 않아서, 얼마 되지 않은 1801년 파벨 1세가 암살되면서 이젠 정말 집도 절도 가장도 없는 상태가 되어버려 정말 흐지부지 어정쩡한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이 단체는 지금도 영국에서 그 이름을 유지는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고금을 막론하고, 역시 기사라는 단어에는 간지가 남아있나 봅니다.




(Kinghts Hospitaller의 그랜드 마스터가 된 러시아의 짜르 파벨 1세)



(현대의 Knights Hospitallers입니다.  이분들의 진짜 직업은 치과의사이신데, 가만 생각해보면 한 9백년 만에 병원 기사단이 제대로 자리를 잡은 것 같기도 합니다.)



자, 추운 나라 러시아로 사라져간 기사들이야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말타 주민들이지요.  병원 기사단인지 성 요한 기사단인지가 말타 섬에 오기 훨씬 이전부터, 말타 섬은 원주민들이 사는 평화로운 섬이었습니다.  말타어라는 고유 언어도 있고요.  (저는 이 말타어가 이탈리아 계통 방언이라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아랍어 계통의 방언이더군요 !  알라 후 아크바르 !)  이들은 섬의 새로운 주인인 프랑스군의 통치를 받게 됩니다.  원래 이 말타 주민들은 병원 기사단에게 그리 애정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일부 기사들이 결사 항전을 주장했지만, 기사들 밑에서 싸워주어야 할 말타 주민들은 그런 항전 의지에 되려 반항했거든요.  '우리가 왜 프랑스군과 기사 나부랭이들의 의미없는 싸움에 목숨을 바쳐야 하느냐' 하는 것이었고, 사실 그건 말이 되는 반항이었습니다.  과연 이런 말타 주민들에게 프랑스 혁명 정부, 정확하게는 나폴레옹의 통치는 어땠을까요 ?  주민들에게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을 안겨주었을까요 ?




(너희들이 이 삼색기의 의미를 아느냐 ?)



글쎄요... 나폴레옹이 말타에서 펼친 통치는 곧이어 이집트, 훗날 유럽의 다른 정복 국가에 대해 펼친 것과 유사한 스타일이었습니다.  한줄로 요약하면 '근대로의 개혁, 그 댓가로는 약탈'입니다.

나폴레옹은 이 섬에 기사들이 건설한 것 중 바람직한 것들, 즉 대학과 병원을 현대화했고, 나쁜 것들, 즉 카톨릭 교단에 의한 신정 일치의 통치 구조나 노예제도를 폐지했습니다.  카톨릭 폐지가 좋다기 보다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는 근대화된 나라에서라면 당연히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므로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특히, 기사라는 탈을 쓴 해적들이 납치해서 말타 섬의 노예로 만든 이슬람인들을 모두 해방시킨 것은 누가 봐도 좋은 일이었습니다.  이들은 기사들의 갤리선 등에서 비참하게 복역하고 있었거든요.  나폴레옹은 이들을 모두 (출신지가 이집트이건 모로코이건 상관하지 않고) 함대에 싣고 이집트로 갑니다.  불쌍한 납치 피해자들에게 귀가 교통편을 제공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이집트에 상륙해서, 프랑스군이 이슬람인들을 구해주었다라는 입소문을 내게 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또 세금 제도도 근대적으로 개혁했습니다.




(지중해의 갤리선은 이슬람 쪽이나 기독교 쪽이나 대개 노예들이 노를 저었지요.)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나폴레옹이 한 그 외의 일은 그야말로 약탈, 그 자체였습니다.  기사단이 성소에 쌓아놓은 금 또는 은으로 만들어진 성물들을, 문화재로 탈취해간 것도 아니고 아예 그 자리에 도가니를 걸어놓고 녹여서 금괴와 음괴로 만들어 가져갔습니다.  이 금은괴들은 이집트 현지에서 침공 자금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또 도서관의 희귀 책자들도 싹쓸이해갔고요.  특히 카톨릭 교회와 성물에 대한 파괴 행위는 말타 주민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타를 1주일간 정리한 뒤, 4천명의 수비대를 남기고 5월 19일 이집트로 떠납니다.  이 수비대의 지휘관은 보부아 (Claude-Henri Belgrand de Vaubois) 장군이었습니다.  지난 '아르콜레의 용자' 편을 읽으신 분들께는 보부아 장군의 이름이 낯설지는 않으실 겁니다.  나폴레옹이 아르콜레에서 알빈치 공작과 사투를 벌일 때 리볼리에서 다비도비치에게 저항하여 대치와 후퇴를 거듭하며 그런대로 잘 버텨주었던 그 장군입니다.  이 보부아에 대해서는, 아르콜레 전투가 끝난 직후에 나폴레옹이 평을 남긴 것이 있습니다.   "용감한 군인으로서, 포위된 군대의 지휘관에 매우 적합하다.  그러나 기동전을 펼쳐야 하는 공격 부대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래서인지, 나폴레옹은 곧 영국 함대에게 포위될 것이 뻔한 외딴 섬의 수비 대장으로 보부아를 남겨놓고 갔습니다.




(구글을 아무리 뒤져도 이것보다 더 큰 그림은 못 구했습니다... 그렇잖아도 서러운 장군인데 더욱 서럽게시리...)



나폴레옹이 처음 발레타 요새를 공략할 때, 기사들과 함께 프랑스군에 저항했던 말타섬의 민병대 수자가 2천명이었는데, 프랑스 수비대의 수자는 그 2배인 4천명이니, 사실 수비 병력이 적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이 정도면 말타 주민들을 제압하는 것도 어렵지 않고, 설령 영국 해군이 침공한다고 하더라도 육군을 동반하지 않은 영국 해군만의 단독 작전으로는 섬을 빼앗기는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8월 1일 나일 전투에서 프랑스 함대가 괴멸되자, 프랑스군의 반 카톨릭 행위에 분노하던 말타 주민들이 마침내 떨쳐 일어납니다.  9월 2일, 프랑스군이 몰수한 교회 자산을 경매에 부치는 자리에서, 마침내 봉기가 일어나 프랑스 수비대를 공격했고, 당황한 프랑스군은 발레타 요새로 들어가 농성했습니다.  이 싸움은 외국인 귀족들인 말타 기사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말타 주민들 자신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지난번 나폴레옹에 대항했던 민병대 수자인 2천명을 훌쩍 넘어 무려 1만명의 남자들이 무기를 들고 발레타를 포위했습니다.  발레타 시 전체 인구가 4만5천인 섬에서 이 정도 수자라면, 정말 전체 섬이 들고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이들에게는 또 23문의 대포와, 몇척 되지 않지만 대포를 장착한 대형 보트까지 있었으므로 프랑스군을 완전 포위할 수 있었습니다.




(앗다, 튼튼하기로는 발레타 성님이 갑이셨제 !)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역시 발레타 요새는 누가 공격을 하고 누가 수비를 하건, 너무 튼튼한 요새였던 것이지요.  나일 전투를 마치고 손상된 영국 군함 및 나포한 프랑스 군함들을 이끌고 말타를 지나가던 영국 해군이 말타 민병대에게 머스켓 소총 1,200 자루를 공급해주기도 했고, 또 더 나중에 포르투갈 해군과 영국 해군 일부가 봉쇄에 합류하기도 했습니다만, 여전히 포위 작전의 전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사실 프랑스군도 발레타 항구에 전 말타 기사단 소속 전함 2척과 프리깃함 3척을 가지고 있었으나, 숙련된 선원의 부족으로 인해 이들을 적극적으로 운용할 생각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문제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원래 말타는 척박한 땅이어서, 곡물을 이탈리아에서 수입하는 형편이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많은 주민들이 포위 작전에 참여하느라 생업을 버려두다보니, 섬 전체에 식량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떨어지는 식량과 함께 포위 작전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주민들의 수자도 빠르게 줄어들어, 1만명이던 민병대는 연말이 될 무렵에는 불과 1,500명 수준이 되어 버립니다.  성에 처박혀서 나오지도 않는 프랑스 놈들을 지키고 있는 것보다는, 먹고 사는 일이 당장 더 급했으니까요.  여기에 약 500명의 영국 및 포르투갈 해병대가 참여하고 있었고요.




(영국 해군 함장이었다가, 어쩌다보니 말타와 인연을 맺게 되어 결국 나중에 초대 말타 총독까지 된 Alexander Ball 입니다.)



이렇게 1798년 9월 2일에 시작된 포위전은 해를 넘기고도 지겹도록 계속됩니다.  가끔씩 프랑스 해군 함정이 포위망을 뚫고 보급품을 날라주기도 하여, 프랑스군은 사정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던 것에 반해, 오히려 포위를 하고 있던 말타 민병대의 식량 사정이 더 궁핍했던 기현상도 벌어졌습니다.  아무래도 말타 전선은 연합국들의 관심사 저 멀리 벗어나있는 '버려진 전장'이었기 때문에, 가난한 말타 주민들에 대한 보급은 거의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던 것이지요.  영국군에서는 해군 함장 알렉산더 볼(Alexander Ball)이 섬에 상주하면서 연합국과 섬 주민 간의 연락 장교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프랑스군 포위 공격보다는 굶주리는 말타 주민들에 대한 기아 구제에 더 많은 시간을 쓰는 형편이었습니다.  실제로도 그것이 더 급했고요.  영국 해군에서는 넬슨 제독이 이 봉쇄 작전을 맡아가지고 있었으나, 이 무렵 넬슨은 나폴리에서 파티와 도박을 즐기며 현지 영국 대사의 부인인 엠마 해밀턴(Emma Hamilton)과 불륜의 재미에 쏙 빠져 있었으므로,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허...걱.... 입흐네요 !!!  나중에 엠마 해밀턴 부인이 되는 Emma Hart 입니다.  Patrick O'Brian의 주인공 Jack Aubrey도 제1편에서 상관의 부인과 바람이 나는데,그 부인의 이름이 Molly Hart 였습니다. 잭 오브리는 아시다시피 Nelson과 Cochrane을 뒤섞어 놓은 캐릭터입니다.  심지어 잭 오브리의 정장(coxwaine)인 바렛 본덴도 실제 넬슨의 정장의 캐릭터를 그대로 본땄다고 합니다.  알고 보면 잭 오브리가 바람 피운 대상조차도, 최소한 이름에서 그 모티브를 따왔습니다.)



하지만 넬슨이 바람이 나건 말건 영국 해군은 강력하여, 1799년과 1800년 가끔씩 시도된 프랑스 해군의 보급품 및 증원 병력 상륙 시도를 성공적으로 막아냈습니다.  이런 영국 해군의 요격 작전 때문에, 다시 해를 넘겨 1800년이 되자, 포위된 프랑스군의 사정은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운 지경에 놓였습니다.  쥐 한마리가 40수 (현재 가치로 약 2만4천원)에 팔릴 지경이었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결국 2년간의 고달프고 외로운 포위 생활 끝에, 보부아 장군은 9월 4일 마침내 조건부 항복에 동의합니다.  프랑스군은 말타 주민들에게 항복하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으므로, 항복 협상에서 말타 주민들은 완전히 배제되었고, 오로지 영국군에게 항복하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보부아 장군이 협상해낸 항복 조건은 나쁜 편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군은 개인 소지품과 무기까지 다 챙겨서, 즉각 마르세이유로 송환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상대적으로 가장 큰 피해자는 보부아 장군이었겠지요.  무려 2년 동안이나 굶주림 속에서 갇혀 지내야 했으니까요.  나폴레옹도 그에게 미안했는지, 그에게 레종 도뇌르 훈장도 주고 나중에 자신이 황제가 되자 그를 백작으로 봉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야전군을 맡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보부아도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때 나폴레옹이 아닌, 부르봉 왕가를 택했고, 보부아는 나폴레옹보다 훨씬 연장자임에도 훨씬 더 오래 살아, 91세까지 장수했습니다.



(뭐 ?  말타가 어째 ?  지금 과인은 나폴레옹 성님과 툭닥거리느라 좀 바쁘시다 !)



이렇게 프랑스군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말타는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  원래 말타 섬은 형식적으로는 나폴리 왕국(또는 두 시실리 왕국)의 페르디난드 1세가 영유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넬슨 제독도 부하들에게, 섬을 점령하더라도 영국 국기만 게양하지 말고 반드시 나폴리 국기도 함께 게양하거나, 혹시 사정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아예 나폴리 국기만 게양하라고 지시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나폴리 왕국의 페르디난드 1세는 나폴레옹에게 쥐어 터지느라 말타섬 따위는 어떻게 되건 전혀 상관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저 위에서 언급했듯이, 러시아의 파벨 1세가 성 요한 기사단의 단장이었다는 것을 꼬투리삼아, 그 뒤를 이은 러시아의 짜르 알렉상드르 1세가 이 섬의 소유권을 주장했으나, 영국 수상 피트(William Pitt)는 단칼에 거절하고 이 섬을 움켜 쥐었습니다.  결국 같은 해인 1801년 아미엥(Amiens) 평화 조약으로 오랜 전쟁이 끝났고, 그 조약의 조건 중 하나가 영국이 말타 섬에서 철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어렵게 손에 넣은 이 전략적 요충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는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철수를 거부했습니다.  (사실 프랑스도 마찬가지로 조약 조건들을 지키지 않았지요.)  이것이 빌미가 되어, 결국 1년 정도의 휴전 기간 끝에 전쟁이 다시 재개되었지요. 



(나폴레옹과 함께 지구를 갈라먹는 영국의 윌리엄 피트)



이후 말타섬은 1964년까지 영국의 소유로 남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말타는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를 잇는 주요 군사거점으로 주목받아, 특히 독일 공군의 집요한 폭격을 받고 많은 피해를 받았습니다.  1964년 마침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긴 했는데요, 글쎄요, 나중에라도 혹시 다시 지중해에서 전쟁이 벌어진다면, 말타가 평화롭게 남아있을 수 있을런지 걱정이 되긴 합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루프트바페의 폭격으로 쑥대밭이 된 발레타 시...  생각해보면 중국과 미국, 일본 간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우리나라도 어떻게든 무사하지는 못할 지정학적인 위치에 있군요.  지금 말타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은 평화로운 관광지가 된 말타...  역시 한번 가보고 싶네요.)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