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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바클레르 달브 (Bacler d'Albe), 나폴레옹의 중추 신경

by nasica-old 2009.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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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시내의 튈르리 궁.  여기서 루이 16세, 나폴레옹, 루이 18세가 살았습니다.) 

 

 

나폴레옹이라고 항상 전쟁터를 누비고 다녔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평화시, 파리 튈르리 궁에서 나폴레옹은 어떤 생활을 하고 있었을까요 ?  그의 궁정 생활은 요즘 기준으로 보았을 때도 상당히 바빴습니다.  그래도 그도 인간인지라, 밥은 먹고 살아야 했지요.  사람의 일상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식사입니다.   당연히 튈르리 궁에도 부엌이 있고, 식당이 있었습니다.  요즘도 그렇습니다만, 특히 당시 유럽에서, 식사를 어떤 사람과 같이 하느냐가 사회적 지위를 판별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나폴레옹 정도되면, 그의 식탁에 한번이라도 초대된다면 정말 대단한 영광이었겠지요.  그러므로, 평상시 따로 초대를 받지 않고도, 일상적으로 나폴레옹의 궁정 내에서 식사를 하는 궁정 식솔들의 숫자는 매우 작았습니다.  나폴레옹의 일가 형제들은 주로 여러 곳에 왕이나 대사 등으로 파견 나가 있었으므로 나폴레옹의 식탁에서 밥을 먹을 가족들이 그리 많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과 혈연을 맺은 관계도 아니면서 평상시 튈르리 궁에서 나폴레옹의 식솔들과 한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는 인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바클레르 달브(Bacler d'Albe)라는 40대의 군인이었습니다.

 

 

 

(꽃이 만발한 튈르리 궁의 정원.  더 나이먹기 전에 가족 데리고 한번 가봐야 할텐데... 쿨럭)

 

 

이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  계급은 고작 대령으로서, 나폴레옹의 내노라하는 원수들 중 하나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빛나는 승리 중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공적을 세운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사람은 나폴레옹의 식탁에서 천연덕스럽게 식사를 할 수 있었을까요 ?

 

아까 나폴레옹의 일상 생활이 무척 바쁜 편이었다고 잠깐 언급했습니다만, 그가 바쁜 것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천성적으로 다른 사람을 별로 믿지 않았기 때문에, 중요 사안의 거의 대부분의 일을 자기 혼자 처리하려고 했고, 특히 어떤 중대 사안을 결정할 때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묻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바쁠 수 밖에 없었겠지요.  가령 나폴레옹의 원수 베르티에조차도 "나폴레옹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이해는 못하지만 일단 명령대로 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는 말을 할 정도였습니다.

 

 

 

(나폴레옹의 원수 중 가장 나폴레옹의 마음을 잘 파악했다는 뇌샤텔 공 베르티에) 

 

 

그런데 단 한사람, 나폴레옹이 의견을 묻는 사람이 한명 있었습니다.  바로 바클레르 달브였습니다.  이 사람은 나폴레옹 학회(Napoleonic Society)로부터 '나폴레옹 천재성의 신경 중추의 비밀'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작전을 세울 때면 항상 이 사람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시작했고, 나폴레옹이 야전에서 새로 작전을 짤 때도, 나폴레옹 개인 천막 안에서 밤이나 낮이나 나폴레옹과 함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독보적인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은 나폴레옹의 정식 궁정 멤버가 되었던 것입니다.

 

대체 바클레르 달브는 별로 잘 알려져 있지도 않은 인물인데, 대체 무슨 재주가 있었길래 나폴레옹에게서 이렇게 우대받았던 것일까요 ?  본명이  루이 알베르 귀슬렝 바클레르 달브(Louis Albert Guislain Bacler d'Albe)인 이 사람은 바로 다름아닌 지도 제작자였습니다. 

 

지도의 중요성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특히 아직 항공기가 없어서, 전장의 지형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던 19세기 초에는 더욱 중요했습니다.  병법서의 고전인 손자병법에도, 지형의 중요성에 대해 논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즉 지형의 멀고 가까움, 넓고 좁음, 험난하고 평탄함 그리고 사지인가 활로가 유리한 땅인가를 잘 판단해서 이용해야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전국시대 이후,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던 진나라가 항우와 유방에 의해 멸명될 때, 한나라의 고조인 유방이 진나라 수도인 함양에 진입했을 때의 일입니다. 유방의 다른 부하들은 (심지어 유방 본인마저도 !) 모두 금은보화와 황실의 미녀들을 약탈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 오직 소하만은 승상부의 각종 문서들을 챙겼고, 이로 인해 천하의 인구, 토지, 지형들을 모두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유방이 항우를 무찌르고 한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 전술의 핵심은 기동력입니다.  그렇다고 나폴레옹의 군대가 모두 기병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고, 특별히 프랑스인들의 다리가 더 튼튼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른 나라의 군대들보다 빨리 움직이기 위해서, 나폴레옹은 주로 병력을 분할해서 여러 경로를 이용해 병렬로 진격했습니다.  당시의 열악하고 한정된 도로망을 따라, 특히 정규 보급도 없이 10만 대군을 움직이려면, 병력을 여러 경로를 통해 분할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10만 병력이 길 하나를 이용해서 행군하려면, 길이 막히는 것은 물론이고, 그나마 앞에 가는 부대들이 인근 지역의 식량과 건초를 싹쓸이 해버리므로 뒤에 오는 병력들은 행군은 커녕 굶어죽기 딱 알맞았거든요.   나폴레옹 전법의 또다른 핵심은 병력의 집중입니다.  앞에서 말한 병력의 분산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부분인데, 이 두 측면을 교묘하게 조합한 것이 나폴레옹 전술의 묘미입니다.  즉, 분산되어 진격하던 나폴레옹의 각 부대는, 예정된 집결지에 정말 정확히 딱 모여 다시 대군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유럽 전체로 보면 프랑스군이 소수일지는 몰라도,  전장에서는 항상 프랑스군의 쪽수가 부족한 편이 아니었습니다.  아우스테를리츠에서도 프랑스군 9만 vs. 러시아+오스트리아군 8만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  요즘의 정밀한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기차나 비행기도 연착이 흔한데, 그보다야 오차율이 심했겠지만, 어떻게 나폴레옹은 그 많은 병력의 분산 이동과 집결을 정밀하게 제어할 수 있었을까요 ?  그 비밀의 핵심은 바로 지도, 즉 바클레르 달브가 총책임자로서 작성한 유럽 지도에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군이나 오스트리아군이 가지고 있던 지도는 어린이 학습만화에나 나올 법한 그런 지도라서, 등고선조차 제대로 표현되어 있지 않고 도로나 교량 등의 위치가 엉망으로 표시되어 있었지만, 나폴레옹은 유럽 전역을 마치 손바닥 들여다 보듯 군대의 이동과 전투를 제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지도상에서야 쉽지만, 실제로 배낭 매고 걷는 병사 입장에서는 죽을 맛...) 

 

 

 

 

(아,아, 이건 아입니다, 이건 아입니다...  러시아의 베레지나 강을 건너 철수하는 나폴레옹) 

 

 

1761년 생인 바클레르 달브는 원래 몽블랑 지방의 화가였습니다.  그러다가 프랑스 대혁명이 터지면서 조국이 외국의 침공을 받게 되자, 1793년 군에 자원 입대하여 리옹 포위전과 툴롱 포위전에서 포병 장교로 활약했습니다.  아마 여기서 궁금해들 하실 것입니다. '일개 화가가 어떻게 포병 장교 노릇을 했을까 ?'  사실 잘 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당시 프랑스 공화국 정부에는 인재, 특히 군대에 전문 인력이 부족하여, 조금이라도 두각을 나타내면 금방 출세의 길이 열렸는데, 바클레르 달브는 그런 면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하지는 못했나 봅니다. 아무래도 포병 장교는 상당히 전문 지식을 쌓아야만 할 수 있는 것이었거든요.  나폴레옹이 코르시카에서 쫓겨나 프랑스에 발을 붙이려 할 때, 출세의 발판이 되었던 것도 툴롱 포위전이었는데, 거기서 나폴레옹의 그리 깊지 않은 포병 전문 지식이 크게 돋보일 정도였으니까요.

 

 

 

(전쟁 이전, 화가 시절의 바클레르 달브가 그린 작품, 몽블랑 전경...  솔직히... 뭐 그리 잘 그린 것 같지는...) 

 

 

바클레르 달브의 재주는 다음 임무에서 빛을 발합니다.  달브는 다음에 이탈리아 방면군에 배속되는데, 원래 화가였던 달브의 재주를 알아본 참모부는 그에게 지도 제작의 임무를 맡겼습니다.  군인으로서의 자질도 뭐 그렇게 떨어지는 편은 아니었는지, 나폴레옹의 유명한 전투 중 하나인 아르콜레 전투에서도 잘 싸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바클레르 달브를 다른 방면에서 더 잘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립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업적을 프랑스 대중에게 알릴 수 있도록, 바클레르 달브를 종군 화가로 임명하여 자신의 승리를 그림으로 그리게 하여 파리에 전시합니다.  바클레르 달브가 그린 나폴레옹의 초상화는 나폴레옹의 여러 초상화 중 최초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도 이 과정 중에, 나폴레옹은 바클레르 달브가 지도 제작 전문가로서, 크게 쓸모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입니다.

 

 

 

(바클레르 달브가 그린 나폴레옹의 초상화)

 

 

1799년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서 돌아와서 쿠데타로 정권을 잡자, 그는 바클레르 달브를 자신의 개인 참모진으로 불러 들였고, 이때부터 1815년 나폴레옹 제국의 몰락까지 그는 지도 전문가로서, 나폴레옹의 곁을 떠나지 않게 됩니다.  나폴레옹은 어디론가 원정을 계획할 때면 항상 바클레르 달브를 먼저 찾았고, 야전에서도 황제 개인 천막 안에 긴 테이블 위에 달브의 지도를 펼쳐놓고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좋은 작전지를 찾다가 서로 머리를 세게 부딪혀서 나폴레옹으로부터 악 소리가 터져나오는 일도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의 모든 작전은, 단 한건도, 바클레르 달브와 협의하지 않고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미국 오클라호마 박물관에 전시된 나폴레옹의 천막.  실제 나폴레옹의 천막은 내부가 칸막이로 침실, 사무실 등이 나누어진 상당히 큰 것이었습니다.  여기서는 나폴레옹의 침실 부분만 전시된 것인 듯 합니다.)

 

 

이런 중요한 위치에도 불구하고, 달브의 계급 자체는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아무런 지휘권도 없는 일개 엔지니어라는 점이 한계였겠지요.  그래서 1807년에야 대령으로 승진했고, 이미 나폴레옹 제국이 몰락으로 치닫던 1813년에야 준장으로 승진했습니다.  다만, 그의 공로를 높이 산 나폴레옹에 의해, 1810년 자작 작위가 수여됩니다.  특히, 바클레르 달브는 세인트 헬레나에서 씌여진 나폴레옹의 유언장에도 그 이름이 언급될 정도로, 나폴레옹으로부터 높이 평가되었습니다.  즉, 나폴레옹은 유언장에 자신의 아들인 로마 왕의 교육을 몇몇에게 부탁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달브였습니다.

 

 

 

(서재에서의 나폴레옹과 로마 왕.  나폴레옹 퇴위 이후, 로마 왕은 바클레르 달브는 커녕 있던 프랑스 유모마저 박탈당해서 프랑스어마저 잊어버릴 정도였다는...)

 

 

바클레르 달브는 현대 프랑스 지도 전문가들로부터, '나폴레옹 시대의 지도학은 이 사람 개인의 능력에 따라 좌우되었다'고 평가를 받을 정도로 뛰어났습니다.  특히 당시 사용되던 고도 표시법을 버리고, 최대 경사면 처리법을 택하여 고도 표시에 음영 효과를 넣은 것이 유명했습니다.  1802년 ~ 1803년 사이에는 각종 표시의 표준화, 미터법의 적용, 해면을 기준으로 한 고도 표시, 지도 척도의 표준화 등을 확립했고, 이러한 특징들은 오늘날의 지도에도 쓰이고 있습니다.  또한 바클레르 달브는 미술가답게, 이러한 지도의 석판 인쇄술에도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가 수장으로 있었던  군수창(Dépôt de la Guerre)은 나중에 육군 지도국(Service géographique de l'armée, SGA)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현재는 국립 지리원 (Institut géographique national, IGN)이 되었습니다.

 

바클레르 달브가 제작한 지도 중 기념비적인 것은 1797년부터 1802년 사이에 완성된 이탈리아 전역 지도(척도 1:256,000)와, 1809년부터 1812년 사이에 완성된, 최초의 균질 유럽 전역도(척도 1:100,000)가 가장 유명합니다.  특히 이 유럽 전역도는 '황제 지도'라고 불리웠는데, 이 지도는 딱 1부만 만들어져서 나폴레옹의 원정길을 따라나섰는데, 러시아에서의 후퇴 와중에 일부가 유실되어버린 것으로 더욱 유명합니다.

 

바클레르 달브는 전쟁 화가로서도 계속 활동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비록 황제이긴 했습니다만, 자신의 권력이 대중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의 영광에 대해 프랑스 대중에게 선전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승전 장면을 그린 작품을 많이 만들게 했고, 바클레르 달브도 그에 일조를 했습니다.  확실히 그로나 다비드, 르죈 등에 비해 작품성은 좀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만, 다른 화가들이 풍경을 그리고 그 속에 인물을 꿰어 맞추는 식의 그림을 그렸던 것에 비해, 달브는 자신이 군인으로서 현장을 수없이 누볐으므로, 그림 속 각 인물에 중점을 두어 사실적으로 그린 것이 특징입니다.

 

 

 

(바클레르 달브의 아르콜레 전투 전경) 

 

 

 

(아르콜레 전투의 하단 우측의 확대 부분)

 

 

 

(바클레르 달브의 리볼리 전투)

 

 

 (바클레르 달브의 로디 전투)

 

나폴레옹이 세인트 헬레나로 유배되고, 다시 부르봉 왕가가 복귀한 1815년, 나폴레옹의 일부 부하, 가령 네이 원수같은 사람은 총살을 당하는 등 박해를 받고, 술트 원수같은 경우는 나폴레옹을 배신한 댓가로 부르봉 왕가에 의해 중용됩니다.  하지만 순수 기술자라고 평가되었던 바클레르 달브는 부르봉 왕가에 의해 완전히 무시되어 처벌도, 재임용도 되지 않습니다.  바클레르 달브도 관직에 더 미련을 가지지 않고, 고향인 세브르(Sevres) 지방으로 내려가 거기서 본업인 예술 활동을 활발하게 시작합니다.  주로 원정 기간 중 그려둔 것을 석판으로 새기는 작업을 하여 당대 석판화 기법의 발달에 많은 기여를 했고, 근처 도자기 공장의 컵, 접시 등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이 죽은지 불과 3년 뒤인 1824년 고향에서 조용히 생을 마칩니다.  이공계 출신다운 (오늘날 교육청 기준으로는 원래 예체능 출신이었지만), 참 깔끔한 일생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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