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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설탕과 카리브해

by nasica-old 2009.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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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인용했던 글입니다만, Sharpe's Triumph 편에 나오는 맥캔들리스 대령의 대사입니다.

 

Sharpe's Triumph (1803년, 인도) ------------------------------

 

" 대부분의 연대는 사병으로 있다가 돈으로 장교직을 사는 사람들을 좋게 생각하지 않거든.  좋게 볼 이유가 없지 않나 ?  부모님의 영지로부터 용돈을 두둑히 받아들고 오는 젊고 패기있는 젊은 장교들이 수두룩한데, 교육도 제대로 못받은데다 자기 밥값조차 댈 수 없는 졸병이 장교로 오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나 ?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야.  서인도 제도에 배치된 연대에서는 소위직을 아주 싼값에 팔지만, 그거야 황열병 때문에 아무도 거기로 안가려고 하기 때문이지.  서인도 제도로의 발령은 곧 사형선고나 다음없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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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사를 인용한 것은 바로 서인도제도 때문입니다.  서인도제도는 카리브해에 있는 섬들인데요, 카리브해라고 하면 대개 스페인어를 쓰는, 스페인의 식민지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사실 서인도제도에는 스페인 뿐만아니라 프랑스와 영국도 상당히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령 자메이카 같은 곳은 상당히 유명한 영국 식민지였습니다.  생-도미니크, 즉 산토 도밍고 같은 곳은 독립전쟁 이후 아이티라고 불리게 되는데, 여기는 처음에는 스페인 식민지였다가 17세기에 프랑스가 빼았았지요.

제가 C.S. Forester의 Hornblower 시리즈 중에서 가장 명작이라고 생각하는 'Lieutenant Hornblower'도, 산토 도밍고와 자메이카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보면 카리브해는 내노라하는 유럽국가들이 피튀기게 싸움을 벌여가며 서로 눈독을 들이는 곳이었던 것 같은데요, 맥캔들리스 대령의 대사에 따르면 황열병 때문에 정작 생활 여건은 매우 안좋았던 것 같습니다.  황열병은 정말 무시무시한 병으로서, 모기에 의해 전염되는 바이러스에 의한 것입니다.  아이티 독립 전쟁이 일어났을 때, 1802년 나폴레옹이 그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한 4만명의 병력이 이 황열병 때문에 와해되어 버릴 정도였습니다.  그 희생자 중에는 원정군의 사령관이자 나폴레옹의 매제인 샤를 르클레르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니 할 말 다했지요.  사실 황열병에 대해서는 20세기 들어와서야 정확한 원인 바이러스가 밝혀졌고, 지금도 백신에 의한 예방말고는 아직 뾰족한 치료법이 없습니다.

 

(아래 사진이 비운의 프랑스 사령관 르클레르입니다.  나폴레옹의 여동생 중 가장 예뻤던 폴린의 남편입니다.)

 

 


 

그런데 대체 왜 유럽 열강들은 이런 죽음의 땅 한조각을 손에 넣으려고 애썼을까요 ?  그것도 수많은 자국군인들의 희생을 무릅쓰면서까지요 ?  카리브해에서는 유럽인들이 좋아하는 후추나 육두구 열매도 없었고, 금이나 은도 별로 없었는데요 ?

 

하지만 거기에는 인간이라면 다들 좋아하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바로 설탕입니다.  설탕은, 머나먼 외국에서 수입하는 신기한 물품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도, 남녀노소 국적 사회적 신분에 상관없이 모두가 좋아하는 사치품이었습니다.  가령 티는 영국에서만 광적으로 좋아했고, 커피같은 것은 아이들은 좋아하지 않지요.  담배는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았고... 육두구나 후추같은 향료는 고기를 먹을 수 없는 하층민들에게는 별로 매력이 없었지요.

 

사실 설탕, 그러니까 사탕수수의 원산지는 파푸아 뉴기니라고 하는데, 역사적으로는 인도가 최초로 설탕을 만든 곳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서구 사회에 이를 알린 것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부하인 네아르코스는 알렉산드로스의 명을 받아 함대를 이끌고 인더스 강을 따라 내려가 인도양을 건너 페르시아로 돌아오는데, 이 여행에서 보고들은 많은 것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꿀벌없이도 꿀을 만들 수 있는 갈대'에 대한 것이며, 이것이 유럽에 알려진 최초의 설탕입니다.

 

슈가라는 말이나 사카린이라는 말의 어원도 결국 '샤르카라'라는 인도 산스크리트어이고, 뜻은 자갈이라고 하네요.  아마 최초로 만들어진 조악한 품질의 당밀 덩어리가 자갈을 닯았기 때문인 모양입니다.  중국에서는 이를 사탕이라고 불렀는데, 이 사탕에서의 '사'자가 모래 사(砂)자라는 것이 우연이 아니지요 ?

 

정작 유럽에 진짜 설탕이 들어간 것은 아랍인들의 스페인 정복 덕택이었습니다.  이들을 통해 이베리아 반도에 설탕 및 사탕수수가 최초로 도입되었습니다.  또 십자군들도 팔레스타인에서 '달콤한 소금'을 보고 놀랐다고 합니다. 

 

보통 유럽인들은 외국에서 들어온 식품에 대해서 처음에는 무척 경계심과 적대감을 나타내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감자도 그랬고, 옥수수, 커피 모두 처음에는 적대감의 대상이었습니다.  성경에 나오지 않는 식품이라는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설탕은 달랐습니다. 어느 누구도 설탕을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설탕은 매우 비싼 것으로서, 요리의 마지막에 나오는 디저트가 바로 그 주인장의 부를 자랑하는 척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보통 '마지판'이라고 불리는 아몬드설탕과자가 바로 그것인데, 17세기만 하더라도 설탕은 같은 무게의 금과 가격이 비슷했다고 하네요. 요즘도 결혼식이나 생일파티 등에는 꼭 케익이 등장하는데, 이건 설탕이 귀했던 시절, 설탕과자를 내놓던 전통이 이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유럽에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남쪽 따뜻한 곳에서 사탕수수가 일부 재배되다가, 결국 카나리아 제도 등의 남쪽 섬지방까지 이것들이 퍼집니다.  그러다가 네덜란드인들이 1625년에 최초로 카리브해 섬들에 사탕수수를 심게됩니다.  이때부터 카리브해와 설탕 산업이 그 악연을 맺게 됩니다.  악연이라고 할 만한 것이,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에 의해 학살되거나 유럽인들이 가져온 천연두에 의해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습니다.  게다가 유럽인들 자신은 위에서 언급한 황열병때문에 사탕수수 농사를 지을 수 없는 형편이었고요.  이때 도입된 것이 바로 아프리카 흑인 노예였습니다.  우수한 신체 조건에, 풍토병에 대한 저항도 강한 흑인 노예들은 사탕수수 농사에 딱 적격이었습니다.  흑인 노예에 대해서는 왜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흑인들을 노예로 썼을까 ? http://blog.daum.net/nasica/6862324 를 참조하세요.

우리 선조들의 첫 미국 이민도 하와이에 사탕수수 농장의 일꾼으로서였지요.  아무튼 설탕에는 단맛만 있는 것이 아니고 쓴맛도 깊이 있는 모양입니다.

 

 


 

카리브해 섬들에서의 사탕수수 농장은 너무나도 성공적이었습니다.  모두 적절한 기후와 흑인 노예들의 희생 덕분이었지요.  1701년과 1810년 사이 약 110년 동안 대서양을 건너 자메이카와 바베이도스로 끌려온 흑인노예의 숫자는 무려 100만명에 다다랐다고 합니다.  이러한 희생 덕분에, 유럽인들의 입맛은 달콤함에 길들여져 설탕 소비가 급증했습니다.  잼, 캔디 등은 물론이고, 차와 커피에도 설탕이 듬뿍듬뿍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차에 설탕을 넣다니 !  차의 원산지인 중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요. 

 

18세기~19세기초 카리브해의 사탕수수 농장을 장악한 것은, 역시 로열 네이비, 즉 영국 해군의 덕택을 본 영국이었습니다.  물론 카리브해의 설탕으로 인해, 18세기 들어 영국에서의 설탕 가격은 급속하게 낮아졌지만, 설탕 소비가 워낙 급증하는 바람에 설탕 플랜테이션은 정말 호황을 구가했습니다.  이때 자메이카 등에 사탕수수 농장을 가진 설탕 부르조아들의 부는 상상을 초월했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되어 재미있는 일화도 있습니다.  영국의 조지왕이 수상과 함께 마차를 타고 런던거리를 지나가며 국사를 논하는데, 옆을 사탕수수로 떼돈을 번 부르조아가 국왕의 마차보다 훨씬 더 호화로운 마차를 타고 지나가더랍니다.  그 호화로움에 어안이 벙벙했던 조지왕은 곧 정신을 차리고 수상에게 '세금, 세금을 제대로 걷어야 한단 말이오'하고 짜증을 부렸다고 합니다.

 

영국의 해양봉쇄로 인해, 나폴레옹 전쟁당시 프랑스는 사탕무우에서 뽑아내는 설탕에 의존했습니다. 지금도 세계 설탕 생산량의 30%는 사탕무우를 원료로 한다는데요 ?  (이거 정확한 건지 모르겠네요.  출처는 위키디피아입니다.)

 

카리브해의 사탕수수 농장은 설탕 말고도 대단히 많은 경제적 효과를 낳았습니다.  가령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뽑고 남은 찌꺼기로는 대영제국 육해군의 필수품 럼주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설탕을 만들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사왔고요.  거기에 노예들을 먹여살리기위해 뉴잉글랜드 지방의 염장대구 산업이 또 발달했지요.  염장대구와 노예와 럼주의 삼각관계에 대해서는 "세계를 바꾼 어느 물고기의 역사"  (마크 쿨란스키, 미래M&B) 라는 책에 잘 나와 있습니다.

 

지금도 설탕은 경제 발전과 어느 정도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현재 에티오피아의 1인당 연간 설탕 소비량은 약 3kg인데 비해, 벨기에는 약 40kg이라고 합니다.  대개 1인당 GDP와 설탕 소비량은 거의 비례하여 늘어나는데, 1인당 연간 35kg 정도에서는 더 늘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출처는 위키디피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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