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극을 볼 때마다, 옛날 우리 조상들, 특히 왕족들이나 양반님네들은 찌는 여름에도 어떻게 저렇게 겹겹이 껴입고 지냈을까 하고 측은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아울러 여름철에 사극을 찍는 탤런트들도 정말 죽음이겠다 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럴 때는 그냥 머슴으로 나오는 역할을 맡은 배우가 오히려 부러워 보일 것 같아요.
나폴레옹 전쟁 시대, 그러니까 18세기 말 ~ 19세기 초의 유럽은 어땠을까요 ? 더 했으면 더 했지 결코 못하지 않았습니다.
Lieutenant Hornblower by C.S.Forester (배경: 1803년 영국전함 HMS Renown) -----
격전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리나운호에 밤이 찾아왔다. 리나운호는 육지에서 떨어진 위치에서, 무역풍이 가져오는 대서양의 파도에 가볍게 몸을 실을 수 있도록 돛을 약간만 올린 상태였다.
함장 대리를 맡고 있는 버클랜드는, 그의 새로운 선임중위인 부시와 현재 상황에 대해 걱정스럽게 토의하고 있었다. 산들바람에도 불구하고, 작은 선실은 마치 오븐처럼 무더웠다. 탁자 위의 해도를 비추기 위해 선실 대들보에 걸어놓은 2개의 등불이 방 안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뜨겁게 만드는 것 같았다.
부시는 셔츠 밑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것을 느꼈고, 목띠가 그의 두꺼운 목을 옥죄이는 것을 느꼈다. 가끔씩 그는 손가락 두개를 목띠에 넣어 당겨보았지만, 사실 전혀 도움이 안되었다. 그냥 그의 두꺼운 제복 코트를 벗고 목띠를 끌러버리면 아주 간단한 해결책이 되었겠지만,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그의 머리 속에 한번도 들지 않았다. 이 험한 세상에 육체적으로 불편한 것은 그냥 불평없이 참아야 하는 것이었다. 습관과 긍지의 힘이 이럴 때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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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구절은, 영국 해군 전함인 리나운호가, 스페인령인 산토 도밍고 (현재의 아이티) 섬의 요새를 공격했다가 격퇴당한 뒤, 후퇴하면서의 한장면입니다.
저 장교들은 그 전날밤도 거의 잠을 자지 못했고, 요새 공략적에서는 전함이 적의 포화 바로 아래에서 좌초해버리는 바람에 정말 죽다 간신히 살아난 상태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아주 기진맥진한 상황인 것이지요.
저 당시 장교들이 입고 있던 제복들은, 효율성이나 편의성은 안드로메다로 관광보내놓고 만든 것이었습니다. 일단 재질이 울이었습니다. 울로 만든 두꺼운 코트를 저 열대지방에서 입고있자면 그냥 가만히만 있어도 땀이 비오듯 했을 겁니다. 게다가 우리 조상들과는 달리, 쟤들은 일찍부터 목장식에 신경을 많이 써서, 목을 졸라매는 띠 장식을 많이 했습니다. 그야말로 '겨울연가'의 듄상이처럼 멋있었을지는 몰라도, 그렇게 목도리하고 습기차고 무더운 열대우림 지역을 해멘다면 정말 죽을 맛이었을 겁니다.
저런 상황에서는 저런 상황에 맞는 복장을 하는 것이 맞는 일일텐데요, 저 위 구절에 나오듯이, 당시 장교들은 무엇보다도 '신사로서의 긍지' 때문에 꼭 복장을 완전하게 차려입었다고 합니다. 일반 선원들은 그냥 대충 아무거나 주워입었기 때문에 전혀 상관없었는데요, 불쌍한 것은 바로 해병대원들이었지요. 해병대원들도 장교 못지 않게 복장 규정이 엄격했거든요. 이건 사실 '신사로서의 긍지' 수준을 벗어나, 약간 '허세부린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
저때 사람들은 왜 저렇게 바보같았을까 하고 욕할 게 아닙니다. 사실 현대에도, 많은 현대의 월급장이들은 때잘타는 와이셔츠에 답답한 넥타이를 졸라매고 양복 자켓까지 걸쳐입고 뜨거운 여름철에 일하러 나갑니다. 좀 격식을 따지는 회사에서는 양복 안에 반팔 셔츠도 못입게 하더군요. 대체 누굴 위해서 그러는 것일까요 ? 그냥 서로 편하게 입으면 좋을텐데요.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인들의 허세는 그냥 복장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예절과 형식을 지키는 것을 매우 중요시했습니다. 같은 책의 다음 구절을 보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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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 선임 장교인 부시는 아이티 섬에 상륙하여 대포로 항구에 갇힌 스페인 선박들에게 포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잠시 대포를 수리하는 도중에, 멀리서 누군가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부시는 망원경을 열어 눈에 갖다댔다. 그건 흰색 바지를 입은 사람이었는데, 때론 달리다가 때론 걷다가 하며, 마치 주의를 끌려는 듯 팔을 마구 휘저었다. 아마도 사관후보생(midshipman)인 웰라드인 것 같았다.
...중략...
웰라드는 이젠 그들 모두에게 다 잘 보였다. 울퉁불퉁한 지면때문에 그는 걷고 뛰고 넘어지기까지 하며 다가 왔다. 그는 부시 일행의 대포 앞에 숨을 헐떡이며 겨우 당도했다. 땀이 그의 얼굴에 비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말입니다, 중위님 ?" 그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부시는 이 예절에 어긋난 말투에 불호령을 내리려고 했으나, 웰라드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그는 흐트러진 코트와 어설프게 썼던 모자를 바로 하고는, 헐떡거리면서도 최대한 뻣뻣한 자세로 앞으로 한걸음 걸어나왔다.
"미스터 혼블로워가 안부를 전하십니다(Mr Hornblower's respects), 중위님." 그는 손을 올려 경례를 하며 말했다.
"그래, 뭔가, 미스터 웰라드 ?"
"포격 재개를 중지해주실 것을 요청드립니다, 중위님."
웰라드의 가슴은 들썩거리고 있었고, 그 한마디가 그가 두번 헉헉거리는 사이에 말할 수 있는 전부였다. 눈으로 흘러내리는 땀 때문에 그는 눈을 깜빡거렸는데, 그래도 웰라드는 남자답게 그걸 무시하고 차렷자세로 서 있었다.
"그 이유가 뭔지 말해주겠나, 미스터 웰라드 ?"
부시도 그 이유가 뭔지 알 만했다. 하지만 그렇게 질문한 것은 이 꼬마 친구도 진지한 대접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군이 무조건 항복에 동의했습니다, 중위님."
"잘 되었군. 그렇다면 저 스페인 선박들은 ?"
"우리의 노획물이 되었습니다, 중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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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이, 이미 항복한 적에 대해, 그것도 소중한 노획물에 대해 포격이 재개되려는 긴박한 순간에서도, '긍지높은 영국 신사'는 정해진 격식과 예의를 갖추어 메시지를 전해야 하나 봅니다.
사실 예의가 나쁜 건 절대 아닙니다. 특히, 제대로된 예의는 비단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대할 때 뿐만 아니라,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대할 때도 지켜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역시 같은 책에서 나오는 다음 구절을 보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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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나운호의 새로운 함장 콕스힐이 버클랜드와 부시, 혼블로워와 함께 함장실에서 오찬 중인데 제독으로부터 전령이 옵니다.)
"메시지의 내용이 뭔가 ?" 콕스힐이 물었다.
"제독님께서 안부를 전하십니다 (The admiral's compliments), 함장님. 제독님께서는 미스터 혼블로워가 시간이 나는대로 기함을 방문해주었으면 하고 바라십니다."
"아직 오찬이 반도 안끝났는데 !" 콕스힐이 한마디하고는 혼블로워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제독님이 '시간이 나는대로' 라고 표현을 한 것은, '지금 당장'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뭐 중요한 일도 아닐 것이었다.
"허락하신다면 저는 지금 일어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함장님." 혼블로워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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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형식적으로나마 아랫사람을 존중해주는 말로 명령을 받으면 기분이 좀 나아지나요 ? 어, 제 경험으로는 훨씬 낫습니다. 여러분 대부분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 글의 제목도 '허세부리지마 !' 보다는 '허세부리자 !' 가 더 맞을 것도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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