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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영국군 내부의 아일랜드 병사들

by nasica-old 2009.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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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년 포르투갈의 Fuentes de onoro 전투를 다룬 Sharpe's Battle 편의 주제는 아일랜드입니다. 여기서, 프랑스군에 협조하는 아일랜드인이 영국군 내의 아일랜드인들에게 '다시 아일랜드에 반란이 일어나 영국군이 아일랜드 본토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다'는 헛소문을 퍼뜨리는 내용입니다.  (참고로 이 에피소드가 제가 최초로 읽은 샤프 시리즈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것이 제가 읽은 샤프 시리즈 중에 가장 재미가 없는 것 같네요.)

 

당시 포르투갈에서 프랑스군과 싸우던 웰링턴의 영국군은, 1/3이 아일랜드인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나머지 2/3는 잉글랜드인이냐하면 뭐 그렇지도 않고,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처럼 '제대로 된' 영국인 외에도, 포르투갈인, 독일인 등 잡다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웰링턴이 포르투갈에서 프랑스군의 침입을 막아내느라 정신없던 이 시기에, 영국 정부는 대륙에서의 전쟁에 무척 소극적이어서, 병력 충원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 사단에는 영국에서 온 대대보다도, 포르투갈 정부가 충원해준 포르투갈 대대가 더 많았다고 합니다.  이 포르투갈 병사들은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무척 용감하게 잘 싸웠기 때문에, 영국군은 포르투갈군을 상당히 높게 쳐주었다고 합니다.  반면 기강이 엉망이었던 스페인군은 영국군의 멸시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전부터 대대로 포르투갈은 영국의 충실한 꼬붕 역할을 해왔고, 스페인과는 동맹을 맺은지 얼마안되는, 과거의 적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영국인들의 왜곡된 시각이 이러한 편견을 낳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아일랜드 병사들입니다.  세계에서 영국, 그러니까 잉글랜드를 가장 미워하는 민족을 꼽으라면 여러분들도 어렵지 않게 아일랜드인을 떠올리실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아일랜드의 청장년들은 가장 치열한 전쟁터에서 잉글랜드의 왕 조지3세를 위해서 피를 흘려가며 싸웠다는 것이 우습지 않습니까 ?  사실 우스운 일이 아니고 이건 비극이었습니다.

 

일제시대처럼 강제 징용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왜 아일랜드인들은 그토록 미워하던 영국군에 입대했을까요 ?  이유는 간단합니다. 먹고 살 길이 없어서였습니다.  사실 아일랜드는 초록색의 아름다운 섬이지만, 토양이 척박하여 감자나 귀리 정도의 농사 밖에 지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목축업에는 적절했고, 특히 당시에는 말의 산지로 유명했습니다.  당시 영국군 장교들의 군마로 가장 인기있었던 것이 아라비아 말과 아일랜드 말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목축업은 자본이 많이 들어가는 것인데, 땅과 돈을 모두 잉글랜드 출신의 신교도들이 쥐고 있으니 카톨릭 아일랜드인들은 감자 농사나 짓고 돼지 몇마리 키우는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아일랜드인들은 또 정력이 좋아서, 아이들을 씀풍씀풍 잘도 낳는 바람에 인구는 계속 급증했습니다.
이러다보니, (우리나라도 청년 실업 문제가 지금 심각하지만) 갈 곳없고 먹을 것이 없는 아일랜드의 이태백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야했던 것입니다.  특히 군대는 매일 술도 주었습니다 !  아무튼 아일랜드인 병사들은 대개 아일랜드 출신끼리 따로 편성이 되었습니다.  이는 영국군의 전통 때문에 그랬던 것인데, 당시 부대는 모병 지역별로 편성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잉글랜드 본토에도 일거리와 먹을 것을 찾아떠난 아일랜드인들이 많았는데, 취직에 실패하여 현지에서 입대를 선택한 아일랜드인은 해당 잉글랜드 지역의 연대에도 개별적으로 편입되기도 했습니다. 그 숫자도 무시못할 정도로 많았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아일랜드인들이 영국군에서 설렁설렁 싸우거나 태업을 하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흠... 이건 좀 미묘한 문제인데요, 가령 일제시대 때, 여러분이 강제 징집당해서 조선인들로만 구성된 부대를 따로 만들었다고 하면, 그 부대가 미군이나 중국군을 상대로 용감하게 잘 싸우는 것이 낫겠습니까, 아니면 설렁설렁 싸우다 맨날 져서 '역시 조선인들은 안돼' 라는 조롱을 일본군으로부터 받는 것이 더 낫겠습니까 ?  물론 정답은 부대 전체가 거꾸로 총을 들어 일본군과 싸운다겠지만, 사실 그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아뭏든 아일랜드인들의 선택은 전자였습니다. 즉, 아일랜드인은 상당히 용감하게 잘 싸웠습니다.  Connaught 연대나 Inniskilling 연대는 Sharpe 시리즈에도 자주 나오는 부대들인데, 매우 사납고 용감한 것으로 유명했답니다.  영국인들에 쌓인 스트레스를 그런 식으로 풀었던 것일까요 ?

 

 

 

 

Sharpe와 함께 프랑스군과 싸웠던 (1809년~1815년) 아일랜드 병사들은 대개 청소년 시절에, 1798년의 아일랜드 대반란 사건을 겪었을 것입니다.  위의 저 그림은 총과 대포로 무장한 영국군에게 창을 들고 돌격하는 아일랜드 반란군의 모습입니다.  이 사건은 쌓이고 쌓였던 잉글랜드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온 반란 사건이었는데, 결국 오래 못가 무참히 진압되었습니다.  아일랜드 전지역에서, 약 1만5천~3만명이 살해되었는데, 그 중 10% 정도만이 아일랜드 반란군에 의해 살해된 영국군이나 잉글랜드 출신의 신교도였고, 90%는 영국군에 의해 학살된 아일랜드 주민이었다고 합니다.  보니까 영국군도 일제시대의 일본군 못지않게 온갖 못된 짓은 다 했더군요. 죄없는 주민들도 목매달고, 불태워 죽이고, 강간하고...


 

 


특히 1798년의 이 대반란에는 프랑스도 적극 개입했습니다.  만약 미국이 1941년 쯤에 한 3만명의 미군을 상륙시켜 조선의 반란을 유도했다면 결과가 어땠을까요 ?  실제로 1796년에 프랑스 Hoche 장군이 1만5천명의 프랑스군을 아일랜드에 상륙시키기 위해 바로 해안까지 접근했으나, 폭풍과 프랑스 해군의 서투름때문에 그냥 되돌아간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프랑스가 아일랜드에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원정군을 보낸다는 것은 영국의 진짜 악몽으로서, 영국해군 장교의 모험담을 그린 Hornblower 시리즈에도 그런 목적의 프랑스 함대를 물리치는 내용이 나옵니다.  결국, 1798년에, 비록 이미 반란이 진압된 이후이기는 하지만, 프랑스군 1천명이 아일랜드에 상륙했습니다.  이들이 상륙하자마자, 끔찍한 반란 진압에서 살아남은 아일랜드인 5천명이 가세하여 영국군과 싸우고 작은 승리를 거두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모두 진압되고 맙니다.  프랑스군은 포로로 간주되어 결국 영국군 포로와의 교환 조건으로 프랑스로 송환됩니다만, 여기에 가세했던 아일랜드인들은 모두 학살되었습니다...

 

청소년 시절에 붉은코트를 입은 영국군들이 마을 사람들을 그렇게 학살하는 것을 지켜보며 성장한 아일랜드 청년이, 결국 그 붉은코트를 입고 그때의 그 잉글랜드 왕을 위해 피를 흘리며 싸워야 했으니, 그 심정이 어땠을까요 ?

 

참고로, 웰링턴 공작도 아일랜드의 신교도 출신입니다.  그러나, 웰링턴 공작 자신은 자신이 아일랜드 태생이라는 사실을 전혀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았고, 또 자신을 아일랜드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인도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뒤에, 잉글랜드의 작위를 신청했으나, 아일랜드의 작위가 부여되자 무척 분개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런저런 이유로, 작가인 Bernard Cornwell은, Sharpe의 부하이자 친구로 아일랜드인을 골랐습니다.  Patrick Harper 중사가 바로 그 사람인데, 이 Donegal 출신의 거구의 아일랜드인은 Sharpe 시리즈 곳곳에서, 잉글랜드를 미워하는 마음을 유머스럽게 나타내면서도 아일랜드의 명예를 위해 용감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결국 이 친구는 Sharpe와 함께 Vitoria 전투에서 막대한 양의 전리품을 슬쩍하여, 큰 부자가 됩니다.  Sharpe 소령이 와이프의 배신으로 다시 빈털털이가 되는 동안, Harper 상사는 그 돈으로 고향 아일랜드에서 술집과 함께 도둑맞은 말 장사를 하여 크게 성공합니다. 


요즘은 금융 위기 때문에 아일랜드 형편이 급격히 안좋아진 모양이지만,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아일랜드는 외자의 성공적인 유치로 영국보다 오히려 1인당 GDP가 더 높았습니다.  Sharpe와 Harper의 사정이 묘하게 투영되는 것 같지 않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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