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들은 신격화됩니다. 영웅으로 떠받들어지는 사람의 실제 모습이 10 정도라면, 그 사람이 죽고 이야기가 부풀려지고 포장되다 보면 나중에 후손에게 전해지는 이야기는 약 100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좀더 나중에는 사람들의 환상을 깨려는 '잘난' 사람들이 이런저런 자료를 들춰내며 다시 깎아내리기는 하지요.
나폴레옹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그를 지나치게 영웅시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전설 중의 하나는 (아마도 나폴레옹이 영웅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데) 나폴레옹의 어머니 레티지아가 나폴레옹을 낳은 장소는 집 거실에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속 영웅들의 모습을 그린 양탄자 위에서라는 것입니다. 실은 이 양탄자 전설은 그리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나폴레옹 당대에도 떠돌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정작 당사자인 레티지아도 그 전설을 듣고 한마디 했다고 합니다.
"따뜻한 코르시카에서는 겨울에도 바닥에 양탄자를 깔지 않는데, 나폴레옹이 태어난 여름에 그럴리가...ㅋㅋㅋ"
(내 앞에서 헛소리들 하지 말란 말이다)
지금이야 나폴레옹이라고 하면 황제, 영웅, 화려함의 극치 등등 정말 성골 중의 성골이요 우리같은 평민들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 느껴집니다. 하지만 정작 당대 유럽의 왕족들 사이에서 나폴레옹은 초라한 서민 출신이었다가 혁명의 혼란 와중에 한몫 잡은 벼락출세자 정도로 치부되었습니다. 특히 누구보다도 나폴레옹이 항상 그렇게 생각했고 그것 때문에 많은 컴플렉스를 느꼈다고 합니다. 그런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1813년 나폴레옹이 몰락해가며 유럽 각국으로부터 정치적 양보를 할 것을 요구받을 때,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와 회견하며 나폴레옹이 한 말입니다.
"자네들같은 왕족이나 귀족들은 20번을 진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자신들의 궁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지만 서민 출신인 나는 그렇지 못하다."
(나폴레옹을 구스르거나 협박할 수 있었던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 메테르니히)
나폴레옹이 어려서부터 일리아드나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읽으며 영웅이 될 꿈을 키워왔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누구나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알렉산드로스나 케사르가 어린 나폴레옹의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그 중에서도 나폴레옹은 케사르를 자신의 롤 모델로 삼았습니다. 알렉산드로스야 태생부터 왕족이니, 자신은 그를 본받아 성장해나가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이 알렉산드로스, 케사르와 같은 반열에 오른 것을 알면, 나폴레옹은 저승에서도 진짜 "죽어서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면, 케사르보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닮은 점이 더 많습니다. 좀 의외지요 ? 코르시카 출신의 몰락 귀족 출신의 가난한 청년과, 강력한 왕국을 물려받고 인생을 시작한 알렉산드로스가 닮은 점이 많다니요 ? 그런데 사실입니다. 그런 점들을 정리해보았습니다.
(지금은 전설이 된 당대의 영웅,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1. 자신의 모국어를 다소 수치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다들 아시다시피 코르시카 출신으로서, 본명은 나폴리오네 부오나파르떼였습니다. 즉 이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 그러니까 어린 시절 프랑스에 유학왔을 때 그는 자신의 코르시카 국적에 대해 자긍심이 대단했고, 자신의 서투른 프랑스어와 촌스런 이탈리아식 이름을 비웃는 동료 프랑스 학생들을 끔찍하게 미워했습니다. 그러다가 청년 시절 코르시카의 실력자 파올리와 사이가 어긋나며 이름을 프랑스 식으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로 바꾸게 됩니다.
(흥, 나 파올리가 아니었다면 나폴레옹이란 사람은 세상에 없었을걸 ? - 진짜 그렇습니다.)
코르시카에서 쫓겨난 이후로는, 자신은 프랑스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 뒤로 코르시카의 이탈리아 방언은 거의 잊고 산 것 같습니다. 나중에 권력을 잡은 뒤에도, 리옹 시의 시장이 제딴에는 아부를 한답시고 "장군님은 참 대단하십니다. 프랑스인도 아니면서 프랑스를 위해 이렇게 많은 일을 하시다니오"라고 말하자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아무 말도 안하고 그 자리를 떴다고 합니다.
이점은 알렉산드로스도 비슷합니다. 그는 그리스 출신이 아니라, 그리스인들이 바르바로이, 즉 외국인(야만족)으로 분류하는 마케도니아 출신입니다. 알렉산드로스는 항상 그리스의 문화를 숭상했기 때문에, 무력으로써 그리스를 정복했으면서도 항상 진정한 그리스의 리더가 되고 싶어 했고, 또 모국어인 마케도니아 말은 거의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매우 흥분하거나 화가 난 상태에서는 저도 모르게 마케도니아 말이 튀어 나왔다고 합니다.
2. 제 2인자를 양성하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의 휘하에는 기라성같은 장군들이 많았습니다. 다부, 란, 마르몽, 베르티에, 베시에르 등등 모두가 당대의 영웅이었지요. 그러나 그 중 누구도 나폴레옹에 필적할 만한 실력자는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도구였을 뿐이지요. 나중에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그의 부재를 몹시 아쉬워했다는 베르티에 원수조차도 이런 말을 할 정도였습니다.
"우리의 의무는 나폴레옹의 뜻을 그대로 수행하는데 있다. 비록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이건 알렉산드로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알렉산드로스는 왕이었고, 또 후계자를 생각하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이기도 했습니다만, 그래도 죽어가는 병상에서 '후계자는 누구로 ?'라는 질문을 받자, '니들끼리 맞짱떠서 센 놈이 먹어' 이런 식으로 대답을 한 것은 너무 무책임한 일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런 성격은 두 사람 모두 자존심이 너무 센 나머지 질투심이 강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 두 사람은 공적과 명예를 나눠가지는 것을 몹시 싫어했고, 그런 사람이 생기면 절대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숙적이 각각 있었고, 결국 이 두 사람은 그 시기의 대상을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나폴레옹의 경우 자신이 제1통령일 때 군부에서 명망을 얻고 있던 실력자 모로 장군을 매우 미워했습니다. 특히 모로 장군이 이루어 낸 호엔린덴 전투의 빛나는 승리가, 자신의 마렝고 전투 승리의 빛을 바래게 한 것도 그들 사이 알력의 큰 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모로 장군은 망명을 해야 했고, 나중에는 러시아 편에서 서서 나폴레옹의 몰락에 공헌하는데, 불행히도 1813년 드레스덴 전투에서 대포에 맞아 전사하게 됩니다.
(아, 그냥 미국에서 조용히 사는 건데... 괜히 왔다가 대포알에 그만...)
알렉산드로스의 경우는 더욱 비극적입니다. 그와 공적을 다투고, 그의 시기를 받았던 사람은 바로 그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어디서 큰 승리를 거두고 어디를 정복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알렉산드로스는 '이러다가 아버지가 다 정복해버려서 내가 정복할 땅이 남아나질 않겠다'며 화를 냈습니다. 결국 필리포스는 암살되었는데, 그의 암살에 알렉산드로스가 깊이 관여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영화 알렉산더에서 발 킬머가 열연한 필리포스. 우리 와이프가 좋아했던 탑건의 아이스맨은 어디가고...)
3. 시대를 지나치게 앞선 대연방주의를 꿈꿨습니다.
나폴레옹이 실질적으로 지배한 민족은 프랑스인들 뿐만 아니라, 폴란드인, 이탈리아인들과 라인연방의 독일인들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소극적이었지만) 나중에는 그의 대육군(Grand Armee)에 독일과 이탈리아 출신 병사들도 징집해서 편성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진심으로 자신의 대의를 위해 싸워주기를 바랬습니다. 물론 그런 바램은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산산이 깨져버렸습니다. 결국 외국인들은 프랑스를 위해 싸우지는 않았지요.
후에 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은 자신이 유럽을 하나로 통합된 일종의 연방제 집단으로 만들려고 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래야 쓸데없는 전쟁과 반목을 피하고, 진정한 평화와 번영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서 온 유럽이 하나의 통화 단위와 하나의 미터법을 쓰도록 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건 어디서 많이 들으시던 소리일 것입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 EU가 탄생되는 것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 유럽의 화폐가 유로화로 통합된 것은 불과 몇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나폴레옹의 구상은 그의 몰락과 함께 실패로 끝났지만, 오늘날 유럽이 EU로 통합되면서 이젠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사이에 전쟁의 위협은 거의 사라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폴레옹의 구상이 근본적으로는 옳았던 것 같습니다. 단지 너무 시대를 앞섰다는 것이 흠이었지요. 유럽 사람들이 그의 구상대로 움직이려면, 세계대전을 2차례 정도 거치면서 뭔가 배워야 할 교훈이 필요했나 봅니다.
이런 몽상적인, 시대를 앞선 대연방주의는 알렉산드로스에게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도 점령한 페르시아 왕국을 그저 피점령지로 보지 않고, 페르시아인들을 마케도니아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진정한 신민으로 만들려 노력했습니다. 가령 페르시아의 귀족 청소년들을 훈련시켜 자신의 기존 근위대를 교체할 생각까지 했습니다. 또 페르시아의 문물과 관습을 적극 수용하려고 노렸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자신의 마케도니아 장병들의 분노를 샀고, 결국 뜻있는 결말을 맺지 못합니다.
4. 신분 상승을 위해 자신이 정복한 외국의 공주와 결혼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자신의 출신 성분이 비천한 것에 대해 컴플렉스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특히 오스트리아나 러시아의 황제 앞에 서면, 아무리 자신이 전투에서 그들을 패배시켰다고 하더라도 내적으로는 뭔가 꿇린다는 것을 느꼈나 봅니다. 또, 자신처럼 근원이 없는 사람이 진정한 황실을 이루려면, 진짜 명문가와 혼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역시 별로 명문가 출신이라고 할 수 없던 첫번째 황후 조세핀과 이혼하고 오스트리아 프란츠 황제의 딸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리 루이즈와 결혼합니다. 나폴레옹은 이 두번째 황후를 비록 정략적으로 맞아들였지만, 정말로 사랑했다고 합니다. 정말인지 모르겠으나, 나폴레옹이 진짜 처녀와 관계를 맺은 것은 이 마리 루이즈가 최초였다고 하네요. 그 이전에도 물론 수많은 여자를 상대했으나, 모두 다른 남자의 부인이거나, 정숙한 것과는 거리가 먼 귀부인들의 시녀들이었습니다. 조세핀도 나폴레옹과 결혼할 때 이미 다 큰 애가 둘이나 딸린 미망인이었지요. 아무튼 나폴레옹은 마리 루이즈와의 결혼 이후 자신이 부르봉 왕가의 조카가 되었네 케사르의 피가 자신의 혈관에 흐르네 하며 온갖 오버스러운 말을 신하들과 외국 대사들에게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처음 만난 날, 코르시카의 풍습대로 나폴레옹은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그날 밤 공주를... 19금입니다)
알렉산드로스도 처음 여자는 나폴레옹처럼 미망인이었습니다. 페르시아 왕의 부하로 있던 아테네의 제독 멤논의 미망인과 동거를 했다가, 나중에 박트리아 귀족의 딸 록산느와 결혼을 했고, 더 나중에는 이미 죽은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의 딸 스타테이라와 성대한 결혼을 합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미 절정의 권력을 지닌 상태였으므로 스타테이라와의 결혼이 그의 신분 상승에 뭐 별로 도움이 될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사실은 도움이 되었고, 적어도 알렉산드로스는 그렇게 되길 바랬습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와 아시아 지역에 대해, 단순한 외국 정복자가 아니라 진정한 다리우스의 후계자가 되고 싶어 했고, 그러자면 다리우스의 사위로 자신의 신분을 업그레이드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사실 당시 문화적이나 경제적 기준으로 따지면 마케도니아는 페르시아에 비해 듣보잡에 불과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여보게 사위, 자네 마음 다 아니까 우리 말로 하세, 응 ?)
5. 기타 잡다한 것들
이 외에도 많습니다.
둘다 병사들로부터 절대적인 인기를 얻었으나, 지나친 장기 원정과 끝없는 전쟁으로, 나중에는 병사들로부터 원성도 많이 들었습니다.
또 둘다 아들을 하나씩 두었으나, 둘다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아버지의 사후, 대성하지 못하고 일찍 죽었습니다. 특히 알렉산드로스의 아들은 아직 아기일 때, 후계자 다툼 과정에서 살해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아들은 오스트리아 황제의 손자이기도 했으므로,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귀족 대우를 받기는 했지만, 평생을 메테르니히의 감시 하에 살다가 21세의 꽃다운 나이에 아무것도 해보지 못한 채 결핵으로 죽었습니다. (메테르니히가 조금씩 독살했다는 설도 있습니다만, 정설은 아닙니다.) 그래서 나폴레옹 1세 다음에 황제가 된 나폴레옹의 조카는 나폴레옹 2세가 아니라 나폴레옹 3세가 된 것입니다.
(너 이... 눈 안 깔아 ? 우리 아빠가 누군지 알아 ?)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로스 모두 이집트를 정복했다는 경력도 동일하고, 또 자신들의 부하 장군 중 나중에 왕이 나왔다는 점도 비슷합니다. 알렉산드로스의 부하 장군 중 안티고누스는 마케도니아 본토에서, 안티오쿠스는 시리아에서, 프톨레메우스는 이집트에서 각각 로마에 멸망될 때까지 굳건한 왕조를 세웠습니다. 클레오파트라가 바로 그 직계 후손이지요. 나폴레옹의 부하 중에는, (비록 나폴레옹을 배신한 댓가로 얻은 자리이긴 하지만) 베르나도트가 스웨덴의 카를 14세가 됩니다. 현재의 스웨덴 왕가는 바로 이 베르나도트의 직계 후손입니다.
(배신자의 후손이면 좀 어때 ? 내가 바로 스웨덴의 킹왕짱, 구스타프하고도 16세시다 !!)
'나폴레옹의 시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클레르 달브 (Bacler d'Albe), 나폴레옹의 중추 신경 (0) | 2009.04.19 |
---|---|
허세 부리지마 (0) | 2009.04.14 |
설탕과 카리브해 (0) | 2009.04.08 |
나폴레옹과 캔맥주 (0) | 2009.04.04 |
왜 위그노는 프랑스를 떠났을까 (0) | 2009.04.0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