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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나폴레옹과 캔맥주

by nasica-old 2009.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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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편도 뭐 꼭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이번 편은 별로 재미가 없습니다.  실은 제가 최근부터 모 군사잡지에 이 블로그 내용을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가뜩이나 빈약한 내용 그대로 올릴 수는 없고 이것저것 고쳐 올리다보니, 여전히 빈약한데도 의외로 손이 많이 갑니다.  이번에는 전에 올렸던 건빵과 염장 쇠고기 이야기를 쓰고 있는데, 아무래도 통조림 이야기가 안나올 수가 없어서 조사를 하다보니 이 포스팅을 쓰게 되었습니다.  별로 재미는 없지만, 그래도 공들인게 아까와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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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올렸던 절이고 말리고 그을리고... (http://blog.daum.net/nasica/6862307) 편에서 이미 상세히 말씀드렸듯이, 병사들, 특히 먼 바다를 항해하는 수병들은 신선한 음식의 부족으로 크게 고생을 했습니다.  바로 전의 글 영국군과 프랑스군, 누가 더 봉급이 많았을까 ? (http://blog.daum.net/nasica/6862363) 에서도 인용했듯이, 당시 병사들의 보급 식량 목록에는 기본적인 빵/밀가루와 고기가 들어있었는데, 이 중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바로 고기였습니다.  잘 말린 곡물에 비해, 고기는 쉽게 상하니까요.

 

 

 

(고기 진리교의 숭배 대상입니다)

 

 

바다에서야 그렇다치고, 육지에서는 좀더 쉽게 신선한 고기를 얻을 방법이 있기는 했습니다.  바로 가축을 몰고 다니면 되는 것이지요.  실제로도 많이 그렇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신선한 고기를 병사들이 약속된 양만큼 먹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세가지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첫째, 가축의 이동 속도는 군대의 이동 속도만큼 빠르지가 않았습니다. 

둘째, 살아있는 가축은 걸어다닌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계속 먹이를 줘야 하는 단점도 있었습니다.  사실 야전에 나가면 목초가 널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군대가 가는 곳마다 그 많은 소와 양을 먹일 목초지가 널려 있는 것도 아니었거든요.  대개의 경우 군마들에게 먹일 풀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 기병대들이 주력 부대와 헤어져 단독 작전에 나설 때는 안장 뒤에 커다란 건초뭉치를 달고 움직이기도 했습니다.

세째, 날고기를 그냥 먹을 수는 없으므로 대개 고기를 삶아먹었는데, 전쟁터에서 그 많은 병사들의 냄비를 끓일 연료를 구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게 야외에 나가면 널려 있을 것 같지요 ?) 

 

 

병사들의 꿈은, 뚜껑만 열면 요리가 다 된 음식을 그냥 먹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1800년, 무려 12,000 프랑(현재 가치로 약 1억2천만원)의 상금을 걸고 음식물의 장기 보존 방법에 대한 현상 공모를 실시합니다. 

 

여기에 당선된 사람이 바로 통조림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니콜라 아페르(Nicolas Appert, 1749~1841)라는 사람입니다.  이 양반은 사실 나폴레옹이 그런 현상 공모를 내걸기 4~5년 전부터 이미 음식물의 장기 보존 방법에 대해 연구를 시작했었습니다.  저 위 괄호 안에 소개한 이 분의 출생년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때쯤의 아페르는 이미 50대 정도였습니다.  젊었을 때, 아페르는 여관업을 했다가 맥주 양조업을 하기도 하고, 요리사로 전업을 했다가 그 무렵에는 파리에서 제과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통조림의 아버지, 니콜라스 아페르)

 

 

이렇게 다채로운 삶을 사셨던 양반이 대체 무슨 동기에서 '썩지 않는 음식물 보관법' 연구를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분이 발명한 병조림 기술은 완성하는데 무려 15년 정도가 걸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아페르가 나폴레옹 황제의 12,000 프랑 짜리 현상 공모에 당선된 것은, 공모가 발표된지 무려 10년 후인 1810년에서였다고 합니다.

 

아페르의 방법은 요즘 기준에서 보면 상당히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두껍고 주둥이가 큰 유리 병에 온갖 종류의 음식물 (쇠고기, 닭고기, 우유, 계란, 각종 요리 등등)을 위에 약간의 공기가 들어갈 여유 공간을 두고 채워넣고, 코르크 마개를 바이스를 써서 꽉 틀어막고 캔버스 천으로 감싼 뒤, 끓는 물에 몇시간 정도 담궈서 내용물을 충분히 익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난 뒤 공기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밀납으로 병 입구를 완전히 밀봉했습니다.  대중에게 가장 크게 어필되었던 광고용 작품은 한마리 분의 양고기 덩어리를 통째로 담은 병조림이었다고 하네요.

 

 

 

 (저런 병 속에 어떻게 양 한마리를 집어넣었는지 다들 연구해 BoA요)

 

 

가열 살균한 음식물을 공기 중의 세균으로부터 격리하는 이 병조림 기술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고 아주 간단한 것이지만, 당시로서는 정말 획기적인 기술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음식물의 부패가 세균과 상관이 있다는 것을 몰랐거든요.  게다가 아페르의 병조림은 파스퇴르가 열처리를 하면 세균이 죽는다는 것을 발견한 것보다 무려 100년 전의 발명이었습니다.  아페르 본인도, 대체 왜 이렇게 처리를 하면 음식물이 상하지 않는지 죽을 때까지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걸 비유하자면, 원자라는 존재도 모르면서 우연히 원자 폭탄을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기술 개발에 15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파스퇴르의 저온 열처리 - 특정 상품 광고와는 무관합니다)

 

 

아무튼 아페르는 그렇게 번 12,000 프랑으로 무엇을 했을까요 ?  서양 사람들은 성공하고 나서도 자신이 하던 일과 관련된 일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가령 햄버거집 여종업원이 로또에 당첨되어 큰 돈을 벌게 되면, 아예 그 햄버거집을 인수하여 햄버거집 사장이 되는 것처럼요.  아페르도 비슷했습니다.  그는 그 상금으로 세계 최초의 상업 병조림 공장을 만들었습니다.  이 공장의 병조림 제품은 나폴레옹의 병사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공급되었습니다만, 불행히도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1814년, 전쟁이 프랑스 국내에서 벌어지는 과정에서, 그 공장은 불타버리고 맙니다.  이후 아페르가 다시 사업 재개에 성공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게다가, 정작 나폴레옹 본인은 병조림같은 거 먹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사실, 병조림은 비싸고, 무겁고, 깨지기도 쉬워서, 널리 보급될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지금 병조림 같은 거 먹을 기분으로 보이나 ? 응 ?) 

 

 

하지만 아페르가 만들어낸 이 음식 보존 기술로 크게 성공한 사람은 따로 있었습니다.  1810년, 그러니까 아페르의 방법이 발표되자마자, 피터 듀런드(Peter Durand)라는 이름의 영국인(사실은 본명이 피에르 뒤랑이었던 프랑스인)이, 깨지기 쉽고 무겁고 비싼 유리병 대신 주석 도금의 얇은 철판으로 만든 깡통을 사용하는 방법으로 특허를 받습니다.  그렇다고 이 듀런드라는 사람이 상업적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고, 이 듀런드로부터 특허권을 산 브라이언 도어킨(Bryan Dorkin)과 존 홀(John Hall)이라는 진짜 영국인들이 1813년 통조림 공장을 열었습니다.  결국 어떤 기록을 보면,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영불 양국군 병사들은 모두 병조림/통조림을 먹었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글쎄요, 과연 몇명이나 먹었을지 의문입니다.  대부분의 양군 병사들은 모두 전통적인 건빵과 염장 고기를 먹었습니다.   1820년대가 되어서도, 대부분의 영국 육해군 병사들은 통조림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고 합니다.  사실 그런 편이 더 나았을 것 같습니다.  초기 통조림은 그 이음매를 납으로 때웠는데, 이는 납 중독을 일으켰거든요.  실제로 1840년대에 북극 탐험을 했던 영국 탐험대원들은 2년간 이런 통조림을 장기간 먹었다가, 납 중독으로 고생했다고 합니다.

 

 

 

(미국 남북 전쟁 당시의 과일 통조림... 황도일까 백도일까 ?) 

 

 

통조림의 탄생 이후 10년 뒤, 미국으로 이 통조림 기술이 전파되는데, 여기서 비로소 통조림은 제 세상을 맞이하게 됩니다.  1860년대의 미국 남북전쟁 당시, 비로소 군대에 어느 정도 규모있는 통조림 보급이 이루어졌습니다.  물론 제2차 세계대전 때처럼 풍족한 양은 아니었지요.  그래도 전쟁 초기 연간 생산량 5백만개였는데, 1870년에는 3천만개로 늘어났으니, 이 전쟁이 미국 사회에 통조림의 저변화에 크게 기여한 것은 맞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남북전쟁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이 전쟁 중에 통조림 따개가 북군에 의해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통조림은 철판이 너무 두꺼워서 정말 대검과 끌, 망치같은 것들을 이용해서 따야 했습니다만, 금속 가공 기술의 발달로 철판이 점점 얇아져서, 마침내 1858년 에즈라 워너라는 사람이 최초의 깡통 따개에 대한 특허를 냈거든요.

 

 

 

(요즘 미국애들은 이렇게 생긴 깡통 따개 안써요)

 

 

그래도 정말 통조림 전성시대가 온 것은 20세기 들어서의 미국이었습니다.  최근 금융 위기로 인해 미국 가정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날재료를 사다 요리를 해먹는 미국인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만, 원래 미국인들은 집에서 제대로 된 요리를 해먹는 것을 잘 안하는 모양입니다.  미국 주부들 중 한번도 채소를 다듬어서 요리를 만들어보지 않은 주부들의 비율이 무려 50%나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나라에서 통조림이 날개돋친 듯 팔린 것이 당연하겠지요.

 

통조림을 영어로는 캔이라고 하지요.  영국식 영어로는 틴 캔 (tin can, 주석 깡통)이라고 하던가, 차라리 틴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만, 미국에서는 그냥 캔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어쩌면) 당연히 미국식 영어로 캔이라고 부릅니다.  이 캔(can)이라는 것은 깡통 내지 성합을 뜻하는 canister의 준말입니다.  20세기 초반 대에 식품회사 영업 사원들이 canister를 줄여서 can이라고 주문서를 썼던 것에서 유래된 단어라고 합니다.

 

사실 요즘은 통조림의 중요성이 많이 떨어진 편입니다.  냉장고 때문에요.  하지만 여전히 통조림이 매우 인기있는 품목이 있습니다.  바로... 그렇지요 !  바로 캔맥주입니다.  

 

 

 

(이름과는 달리 크림은 안들어 있대요)

 

 

최초의 캔맥주는 1935년 크루거 크림 에일 (Krueger Cream Ale)이라고 합니다.  1937년에 나온 미국 잡지 Modern Mechanix를 보면, 최근 2년간 캔 맥주 열풍이 전국을 휩쓸고 있으며, 그 전에는 병맥주 같은 포장 맥주가 전체 맥주 소비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25% 정도였으나, 캔맥주 등장 이후 35%로 껑충 뛰었다고 씌여 있습니다.  이로 인해 위기를 느낀 당시 와인 업계에서는 캔 와인의 생산도 계획했었다고 합니다.  결국 실현되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생각해보니 저만 해도, 캔 와인을 사마실 것 같지는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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