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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왜 위그노는 프랑스를 떠났을까

by nasica-old 2009.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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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rpe's Waterloo by Bernard Cornwell (배경: 1815년 벨기에) -----------

 

(나폴레옹의 침공이 임박한 브뤼셀에서 영국측이 연회를 베풉니다.  여기에 샤프의 아내 루실은 아는 사람이라고는 어떤 백작 부인 뿐인데, 이 백작 부인은 대부분의 벨기에 사람들처럼 프랑스군이 빨리 와서 벨기에를 해방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신은 프랑스인이지만 남편이 영국군인 루실은 입장이 난처한 상황입니다.)

 

백작 부인은 왠 젊고 잘 생긴 영국군 장교가 루실에게 다가와 자유분방하면서도 깊숙히 절을 하자 못마땅하다는 듯이 침묵에 들어갔다.

 

"친애하는 루실 !"  피터 달렘보드(d'Alemboard) 대위는 진홍색 코트와 하얀 바지를 입은 모습이 아주 멋져보였다.

 

"대위님!" 루실은  정말 기뻐했다.  "여기서 친숙한 얼굴을 보게 되니 정말 반갑네요."

 

"제가 모시는 대령님이 여기 초대장을 받기는 했는데, 이런 연회에 익숙하질 않으셔서, 초대장을 제게 주시더군요.  당신이 샤프 중령님을 여기 참석하도록 설득했다니 믿어지지가 않는군요.  아니면 그 사이에 당신이 중령님을 춤꾼으로 변모시키신 건가요 ?"

 

"남편은 네덜란드 왕자님을 수행하게 되어 있어요."  루실은 달렘보드를 모베르쥬 백작 부인에게 소개시켜 주었는데, 백작 부인은 그를 아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꼬나보았다,

 

"자네 이름은 프랑스식이쟎아 !" 백작 부인은 그를 (적국인 영국측에 붙었다고) 비난했다.

 

"제 가족은 위그노(Huguenots)였습니다, 부인, 그래서 아름다운 프랑스에서는 저희를 원치 않았지요."  달렘보드의 프랑스에 대한 모욕적인 경멸은 백작 부인을 흠칫하게 했지만, 그는 이미 루실을 돌아보고 있엇다.  "제게 함께 춤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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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보면 프랑스인들 중에는 영국식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은 것 같지는 않으나, 영국인들 중에는 프랑스식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드문 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영어 단어 중 많은 것이 프랑스에서 올 정도로, 영국은 프랑스로부터 많은 문화적 전수를 받았습니다.  (요즘은 반대라지요 ?  물론 프랑스 내에 영어가 침투하는 것은 영국 때문이 아니라 미국 때문이긴 하겠지만...)  그러니까 두 나라 사이에는 교류가 많았던 것은 확실하지요.  그런데 누가 봐도 사람이 살기에는 음습하고 축축한 영국보다는 밝고 아름다운 분위기의 프랑스가 더 나아 보이지 않습니까 ?  그러니까 오히려 프랑스에 영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더 많이 살아야 할 것 같은데, 정 반대인 것 같네요.

 

의외로 많은 프랑스인들이 18세기 들어서, 영국, 네덜란드, 그리고 독일과 미국 등지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 중에서도 바로 옆나라인 영국이 이 프랑스인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이민자들이 바로 위그노였습니다.  혹자는 영국이 산업혁명을 제일 먼저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위그노들이 영국으로 많이 건너갔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까지 합니다.  이 위그노는 뭐하는 사람들이었을까요 ?

 

사실 여기서는 위그노의 기원과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뇌입원 지식인에만 가도 많이 뒤져보실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는 그 중 프랑스 역사상에서 샤를마뉴 대제나 잔다르크 등과 함께 존경받는 인물인 앙리 나바르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개럿 매팅리라는 사람이 지은 '아르마다 (The Armada, 가지않은 길 출판)'라는 책이 있습니다.  논픽션 작품이고, 저자에게 1960년 퓰리처상까지 쥐어준 책입니다.  제목 보면 아시겠지만,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을 다룬, '역사책'입니다.  여기서 가장 매력적으로 묘사된 인물은 엘리자베드 여왕도 아니고, 해적왕 드레이크도 아니고, 바로 프랑스의 앙리 나바르입니다.

 

당시 프랑스는 위그노 전쟁이 한창이었습니다.  위그노 전쟁은 카톨릭과 신교 (여기서는 주로 칼뱅의 영향을 많이 받은 프랑스의 신교인 위그노) 간의 종교 갈등으로 벌어진 전쟁인데, 특히 카톨릭 국가인 스페인과 교황청, 그리고 신교를 받아들인 독일과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의 개입으로 인해 무척이나 복잡한 양상을 띄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 위그노 전쟁은, 바로 당시에는 '세 앙리의 전쟁'이라고 불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당시 프랑스의 왕이자, 발로아 가문의 마지막 존재이며, 종교적으로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하려는 앙리 3세, 그리고 과격한 카톨릭파인 로렌가의 앙리 기즈 공작, 마지막으로 프랑스 위그노의 수장인 나바르의 왕인 앙리 부르봉 간의 세력 다툼이 한창이었습니다. 

 

이중 카톨릭파인 앙리 기즈 공작은, 바로 위그노 전쟁을 일으킨 주범이라고 할 수 있는 장본인이었습니다.  1562년 바시에서의 위그노 학살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거든요.  게다가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학살을 일으킨 당시 섭정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의 보호를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앙리 나바르는 성 바르톨로메오 학살의 피해 당사자였습니다.  성 바르톨로메오 학살이란,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가 신구교 화해를 목적으로 자신의 딸과 앙리 나바르를 결혼시키겠다고 하여 위그노들을 끌어모은 뒤 일망타진으로 학살해버린 사건이었거든요.  당시 앙리는 죽음은 면하였으나 몇년 동안이나 궁정에 갇혀 개종을 강요받다 간신히 탈출하여 이후 위그노 전쟁을 이끌게 됩니다.

 

당시 위그노들은 아무래도 쫓기는 입장이었고, 말이 전쟁이지 사실상 게릴라 전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다 1587년 10월경 앙리 나바르를 비롯한 당시 위그노의 주요 간부들은 프랑스의 작은 마을 쿠트라 인근에서, 조이스 공작이 이끄는 카톨릭 대군의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대개 이런 대부대를 만나면 잽싸게 빠져나가던 위그노 군대는 덜컥 본의아닌 전투를 치르게 됩니다.

 

여기서 특이한 사항은, 조이스 공작이 이끄는 카톨릭 군대에 그야말로 유럽 최후의 기사단이라고 할만한 기병대가 있어다는 것입니다. 빛나는 갑옷과 투구, 화려한 깃발을 단 창 등, 당시로서도 이미 보기 어려워진 귀족 기사단이 잔뜩 모여있었다고 합니다.  그에 비해 소수인 위그노 중기병대는 검소한 가슴받이 갑옷과 투구만을 한 채, 기병용 권총과 넓은 칼로만 무장한 상태였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르마다'라는 책을 사든빌리든 읽어보시고, 암튼 전투는 뜻 밖에도 위그노 부대의 대승리로 끝납니다.  규모가 더 작았지만 베테랑의 실력을 가진 위그노 포병대가 큰 위력을 발휘했다고 합니다.   (아르마다 제8장 '즐거운 날이 왔도다' 참조)

 

이 쿠트라 전투에서 앙리 나바르는 직접 중기병대 선두에서 공격을 지휘했고, 적의 창에 머리를 얻어맞기도 했다고 하며, 또 적장 샤스또 레누와를 직접 포로로 잡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전투로 인해, 위그노가 더 이상 시골 지역의 게릴라 노릇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유럽 전역에 날렸다고 하네요. 

 

결국 세 앙리의 전쟁은 결국 싱겁게 막이 내려집니다.  먼저, 앙리 기즈 공작이 카트린느 드 메디치와 카톨릭이 대다수인 파리 시민의 협력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중립파였던 앙리 3세를 쫓아냅니다.  앙리 3세는 굽히는 척 하다가 앙리 기즈를 암살해버립니다.  하지만 앙리 3세도 결국 카톨릭 광신자에게 암살당하고 맙니다.  당시 여성의 왕위 계승을 부정하는 게르만 전통의 샬리크 법전에 의해, 앙리 3세의 뒤는 앙리 나바르가 잇게 됩니다.  앙리 3세는 죽기 전 앙리 나바르에게 '프랑스를 위해 카톨릭으로의 개종'을 권유하고, 결국 앙리 나바르는 그에 따라 카톨릭으로 개종을 합니다.  이 사람이 바로 프랑스의 성군 중 한명인 앙리 4세이자, 그 유명한 부르봉 왕가의 첫번째 왕입니다.

 

앙리 4세는 비록 카톨릭으로 개종은 했지만, 위그노를 배신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낭트 칙령을 내려 위그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포함하여 공직 취임 등 많은 권리를 인정하여, 마침내 위그노 전쟁을 끝내게 됩니다.  이외에도, 프랑스를 오늘날의 프랑스로 만드는 여러가지 업적을 남깁니다.  그러나 최후는 다른 앙리들과 마찬가지여서, 결국 카톨릭 광신자에게 역시 암살을 당하고 맙니다.

 

자, 그런데 저 위에서 달렘보드 대위의 선조는 왜 위그노로서 프랑스 땅을 떠나야 했을까요 ?  그 이유는 바로 앙리 4세의 후손들 때문입니다.  먼저 그와 마리 드 메디시스 (원래 성 바르톨로메오 학살의 원인이었던 카트린의 그 딸) 사이에 난 아들인 루이 13세가 재상이자 추기경인 리셜리외와 함께, 위그노 학대 모드에 들어갑니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알렉상드르 뒤마의 역사 소설 '삼총사'에서도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중 라 로쉘 포위전은  제 다른 글 용기병은 과연 빵에 무엇을 바른 것일까 ?http://blog.daum.net/nasica/5126836 ) 에서도 언급했었지요.  사실 리셜리외는 카톨릭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프랑스의 정치적 통일을 위해 위그노를 공격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리셜리외의 군사 작전으로 인해, 프랑스의 위그노는 더이상 '위그노 전쟁'을 일으킬 능력이 없는, 비무장 세력이 되었다고 하네요.

 

 


 

결정적으로 위그노들의 탈 프랑스를 강요한 것은 유명한 태양왕 루이 14세였습니다.  그는 위그노들이 많이 사는 도시에 흉폭한 용병들을 주둔시켜 일부러 행패를 부리게 하는 등 탄압을 가하여, 많은 위그노들로 하여금 영국이나 네덜란드, 미국과 독일 등지로 이민을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위그노들은 대개 부르조와 계급의 시민들로서, 의사, 군인, 기술자, 법률가 등이 많았대요.  그래서 이들이 빠져나가면서 당시 유럽 제1의 대국이었던 프랑스 발전이 느려지고 이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영국이 오히려 먼저 산업혁명을 시작했다고까지 말해지곤 합니다.

 

 

 


(이 그림은 루이 14세의 용병이 위그노 시민을 협박하여 개종하게 만드는 장면)

 

 

신구 양교의 화합을 그토록 바랬던 나바르의 왕 앙리 부르봉.  그는 과연 저승에서 자기 아들과 손자의 행태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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