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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나폴레옹 전쟁 - 왜 영국군이 이겼을까 ?

by nasica-old 2008.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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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군대는 당시 유럽 대륙의 지배자였습니다. 

 

 

(불만있으면 싸워보든가...)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등등 당시 힘깨나 쓰는 축에 속하는 왕국들도 모두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을 당해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야전에서 끝내 꺾지 못한 군대가 있었으니, 바로 영국군이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을 결국 꺾은 것은 러시아군이었습니다만, 러시아군의 승리는 광활한 영토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으므로, 약간 하향 평가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있거라'에도 나오지만, 세계 어느 나라가 러시아처럼 '청야전술'을 그렇게 광범위한 스케일로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

 

 

 


영국군은, 숫자도 그리 많지 않은 것에 비해, 끈질기게 나폴레옹의 골치를 아프게 했고, 실제로 프랑스군은 영국군을 상대로 해서는 그리 신통한 결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제가 여태까지 당시 영국군에 대해서 올린 글에 대한 답글을 보면 '대체 이 따위 군대가 어떻게 나폴레옹을 꺾었을까'라고 의아해하시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실은 저도 그 점이 궁금합니다.


원인이라고 생각되는 점을 하나하나 짚어봅시다.

 


1. 병사들의 자질


당시 프랑스군은 모두 징집병이었습니다만, 영국군은 모병제였습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원래 모병제를 하게 되면 사회의 낙오자들만 군대에 가게 되는 경우가 많았고, 당시 영국군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영국군은 거의 99%가 술주정뱅이, 범죄자 또는 자포자기한 인생말종이었습니다. 극히 소수는 그냥 세상 구경을 해보고 싶은 청년이었습니다.  사실 당시 영국의 평민들은 태어난 마을에서 반경 30마일 밖으로 나가보지 못하고 인생마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세상 구경을 해볼 기회는 군대가 유일했겠지요. 


따라서 당연히 프랑스군이 인적 구성은 질적으로 더 우수했습니다.  실제로, 프랑스군 중 많은 장교들이 일반 사병 출신이었던 것에 비해, 영국군은 사병 출신 장교가 극히 적었습니다.  뭐, 일단 영국군 사병들 중에 문맹이 아닌 사람을 찾기가 힘들었으니까, 이는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 나의 근위대는 졸병까지도 모두 카와이하고도 간지나는 프랑스어를 쓴다네...) 


물론, 심지가 똑바로 박혔다고 훌륭한 병사가 되는 건 아닙니다.  실제 전투에서는 거칠게 살아온 영국군의 불량배 출신 병사가 라틴어 교육을 받은 곱상한 프랑스군 병사보다 더 잘 싸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병사들의 질은 프랑스가 더 우수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단적인 예로, 영국군은 병사들을 채찍질로 다스렸지만, 프랑스군에는 채찍질이 없었습니다.  이를 뒤집어 생각해보면, 영국군 병사들은 채찍질같은 체벌이 없으면 통제가 안되었던 것이지요.  영국군은 인도에서 모집한 세포이 병사들에게도 채찍질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국군에게는 무자비한 채찍질을 했지요.  그만큼 영국군은 통제가 어려웠고, 따라서 이들에게서 애국심이나 전술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결론 : 프랑스 승
 


2. 민족적 폭력성 (용기?)


일반적으로 흔히 프랑스인은 문화를 사랑하고 부드럽고 세련되었지만, 영국인은 무뚝뚝하고 사납고 호전적이라고 생각들 하시지만, 당시,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때도, 주변국 어느 누구도 프랑스인을 치즈나 먹는 물렁한 인간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영국군도 모두 프랑스군의 우수성을 인정했고, 심지어 프랑스가 볼썽사나운 꼴을 보였던 제2차세계대전 때도, 독일군은 프랑스군을 훌륭한 병사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독일군의 수기를 보면 '영국군은 매우 용감한 전사이고, 프랑스군도 훌륭했지만 단지 지휘관이 나빴고, 러시아군은 정말 형편없었으며, 미군은 (노르망디 이전에는) 부딪혀 본적이 없어서 모르겠다'라고 적어놓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당시 프랑스군의 우수성은 유럽 대륙을 제패했다는 사실 자체가 증명해보입니다.  그에 비해, 영국군은 바다에서는 무적이었으나, 육군은 매우 규모가 작아서, 별 큰 활약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인들의 폭력성과 사나움에 대해서는 프랑스도 잘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19세기에 영국을 여행한 어느 프랑스인의 수기에는, 영국인 신사가 길거리의 부랑자와 다투는 장면을 목격한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해 놓았습니다.


'시비가 붙자, 그 신사는 (프랑스에서라면 지팡이로 그 부랑자를 후려쳤을텐데) 지팡이를 내려놓고 코트를 벗고는 (부랑자와 마찬가지로) 주먹을 불끈 쥐고서 그 부랑자를 상대했다.'

 

 

 

(아 휘발... 내가 왕년에 런던 뒷골목에서 썡양아치 애들하고 17대1로 붙었을 때 말이지... )


사실 이 비교는 무의미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당시 영국군의 1/3은 아일랜드인이었고, 1/3은 독일인(당시 영국령이었던 하노버 출신들)과 스코틀랜드인이었습니다.  즉 1/3만 영국인이었던 셈이지요.  게다가 프랑스군에도 독일인이나 폴란드인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결론 : 영국이 근소한 차이로 더 폭력적

 


3. 장교들의 자질


당시 영국군이나 프랑스군이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계급이 매우 높은 장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어떻게 그렇게 높은 계급에 올랐는지는 배경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영국군은 매관매직을 했습니다.  이를 purchase system이라고 했는데, 일단 장교가 되려면 시험을 보거나 그러는 것이 아니고, 돈을 주고 장교 계급을 사야 했습니다.  그리고 일정한 연한을 채우고 나면, 돈을 더 내고 상위 계급을 또 살 수 있었습니다.  능력이 뛰어나서 승진을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만, 이는 대개 임시 명예 진급(brevet)에 그쳤고, 확실한 승진은 오직 돈을 내야만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프랑스군의 진급은 순수하게 능력 위주였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자유주의 사상과 혁명의 기상이 한창이었으므로,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나폴레옹의 장군들 중에, 어느 누구 하나 공연히 밥만 축내는 장군이 없었습니다.  그에 비해 영국군 장군들은 무능의 극치를 달리는 인간들이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스페인 전쟁 초기에 프랑스군에게 대패를 당하고 전사한 무어 경이 있겠네요.  아, 같은 영국군이라도 해군은 사정이 달라서, 해군에서 함장으로의 승진은 오로지 능력 위주였습니다.


결론 : 프랑스의 압승

 


4. 훈련


일단, 프랑스는 유럽 최초로 징집에 의한, 진정한 의미의 국민개병제에 입각한 시민군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사실 그 이전의 유럽 군대는, 대개 귀족들이 이끄는 사실상의 사병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상비군의 개념도 미비했습니다.  그러다가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해, 프랑스가 사방의 적군에 고립, 포위되자,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유례없는 징집제로 온 나라의 젊은이들을 군인으로 만든 거지요.


당연히 훈련 기간도 짧을 수 밖에 없었고, 특히 단시간 내로 대규모 군대를 키우다보니, 물자가 많이 부족했습니다.  그에 비해, 영국군은 대개가 죽을 때까지 복무하는 조건으로 입대한, 직업 군인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므로, 훈련은 훨씬 더 많이 받았습니다. 

 

 

 

(보병 방진은 말로는 쉽지만, 모든 부대가 네이 원수의 기병 돌격을 이렇게 막아낼 수는 없지요.)


일단, 단적인 예가, 평상시에 실탄으로 사격 훈련을 하는 군대는 당시 영국군이 유일했습니다.  프랑스군 같은 경우, 머스켓 소총 사격 훈련을 할 때는 실탄을 물론이고, 부싯돌도 아끼기 위해 부싯돌 대신 나무조각을 콕에 끼워놓고 사격 훈련을 했습니다.  실탄 없이 어떻게 명중했는지 아냐고요 ?  당시 사격 훈련은 사격의 정확성을 위한 것이 아니고, 얼마나 실수없이 구령에 맞춰 신속하게 총알을 장전하고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지에 집중되어 있었으므로 사실 실탄이 없어도 되었습니다.  당시 소총의 정확성이 워낙 떨어지다보니, 명중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거든요.  ( 머스켓 소총을 둘러싼 이야기  참조 http://blog.daum.net/nasica/4768750 )

 

 

 


아뭏든, 훈련의 양에 있어서는 영국군이 더 우수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나폴레옹 전쟁이 장기화 (거의 20년)되면서, 프랑스군의 고참병들이 많이 죽거나 다쳐서 신병들이 대규모로 들어와야 했으므로, 프랑스군의 훈련 부족 문제는 영국군이 반도 전쟁에 개입하게 되는 1809년 이후로는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결론 : 영국 승



5.  전술


이건 매우 잘 알려진 이야기인데, 영국군은 얇은 횡대, 프랑스군은 굵은 종대로 싸웠습니다.


프랑스군은, 적군과 싸울 때 세로로 길쭉한 종대를 몇개 만들어서, 마치 쐐기로 적진을 뽀개듯이 쳐들어갔습니다.  이 전술은 2가지 장점을 주었습니다.  첫째, 돌격하는 아군 병사들에게 자신감과 안도감을 주었습니다.  앞뒤옆으로 아군이 잔뜩 몰려있으면, 아무래도 심적으로 안정이 되겠지요 ?  둘째, 그 광경을 보는 적군에게 공포심을 주었습니다.  특히, 이쪽은 혁명사상 또는 황제에 대한 충성심으로 잘 정신무장되어있고, 적군은 그냥 아무 생각없이 귀족들 시키는대로 끌려나온 상태라면, 이 전법은 큰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그에 비해, 영국군은 2열 또는 3열 횡대로 병사들을 횡대로 쫘~악 늘어세웠습니다. 이는 한꺼번에 가장 많은 화력을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의 종대 전술은, 종대의 맨 앞에 선 병사들만 총을 쏠 수 있는데 비해, 영국군의 횡대 전술은 모든 병사들의 소총이 사격을 가할 수 있었으므로, 화력 운용에서 훨씬 유리했습니다.  다만, 이렇게 얇은 횡대는 아무래도 심리적으로 너무 불안했고, 특히 프랑스군같은 강적이 돌파에 성공한다면 삽시간에 통제 불능에 빠져버리므로 무척 위험했습니다.  영국군은 이 통제를 유지하는데 노력을 집중했고, 그 수단으로 무자비한 채찍질을 사용했습니다. 

 

 

 

(날 죽이려는 거야 ??) 


이런 관계로, 프랑스군의 종대 전술은 다른 유럽국가를 상대할 때는 대성공을 거두었으나, 영국군에게는 이것이 먹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프랑스군도 그 사실을 깨닫고, 나중에 워털루 전투에서는 종대로 전진을 하다가 도중에 횡대로 진형 변경을 꾀하기도 했는데, 역시 중간에 진형을 바꾸는 것은 어려워서, 결국 실패했다고 합니다.


결론 : 영국 승



6.  보급


영국군은 당시 세계의 바다, 즉 무역을 장악하고 있었고, 또 상대적으로 육군의 숫자도 적고 전쟁을 벌이는 지역도 국한되어 있었으므로, 보급은 비교적 원활한 편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프랑스는 유럽 대륙 전체가 전장인데다가, 영국 해군의 봉쇄로 인해 물자가 많이 부족한 편이었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은 항상 기동성을 강조하여 식량은 현지 조달, 즉 현지 약탈에 의존했으므로, 보급 사정이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럽의 많은 지식인들은 혁명사상을 동경하여 프랑스군의 입성을 내심 환영하다가, 프랑스군의 약탈 행위를 보고 그 환상을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혼블로워나 샤프 시리즈 모두, 프랑스군은 항상 배가 고픈 것으로 묘사됩니다. 


결론 : 영국 승

 


결국 모아놓고 보니, 사람은 프랑스가 더 우수하지만, 제도는 영국이 더 우수하네요.  뭔가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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