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폴레옹의 시대

모든 것은 바람에 달려있다 !

by nasica-old 2008. 10. 17.
반응형

 

제가 카투사로 복무하고 있었을 때, 우리 부대 카투사들에게 가장 흥분되는 사건 하나가 있었습니다.  뭐 별 건 아니었고, 그 전에 있던 띨팍하게 생긴 백인 남자 소위 하나가 전출간 뒤, 그 후임으로 여자 소위 하나가 전입올 예정이었는데, 부대 행정병이었던 고참이 서류에서 본 바에 따르면 그 여자 성이 'Lee'라는 겁니다.

 

우리 부대는 전체 인원 약 30명 정도되는 작은 Finance Unit, 즉 경리부대로서, 카투사 5명에, 한국계 미국인인 아저씨들이 한 2명 정도 있었습니다.  카투사 병사들과 이 한국계 아저씨들하고는 사이가 좋은 편이었습니다.  대개 이 아저씨들은 (계급은 상병~하사 정도였지만) 나이도 30대~40대였고, 대개 소탈한 성격의 서민 출신의 아저씨들이었거든요.  영어로 부르지 않을 때는 그 아저씨들은 'X상병' 또는 '어이, 이봐' 정도로 친근한 호칭을 했고, 우리는 그 아저씨들을 '심형' '김형'이라는 호칭으로 존대를 했습니다.  사이가 나쁠래야 나쁠 수가 없었지요.

 

 

(저도 저렇게 마일즈 기어 매고 야전 훈련할 때가 있었지 말입니다.) 

 

그런데 새파란 한국계 여자가 소위로서 전입을 온다 ?  당연히 우리들은 흥분했습니다.  그 여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을 해야 하나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대개는 '과연 이쁠까 ?'라는 기대감이 더 컸습니다.  아무튼 남자들이란...

 

그런데, 더플백을 매고 온 그 여자를 보는 순간...  이런 젠장, 새카만 얼굴에 머리를 금발로 물들인 흑인이었던 겁니다 !!  제가 뭐 특별히 흑인을 싫어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때 만큼은 그 뇬의 새침한 얼굴을 쥐어 박고 싶었습니다.  왜냐고요 ?  글쎄요, 아무튼 그때는 저나 다른 부대원들이나 다 그랬습니다.  그때서야 미국 남북전쟁 때 남군 사령관의 성도 Lee 였다는 것이 생각나더군요.

 

 

 

(뭐 ㅂㅅ아, 싸울래 ?) 

 

그런데 대개 영어 이름은 직업이나 장소, 지형 등을 따서 만들쟎습니까 ?  Lee라는 단어에도 뜻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야후 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lee (the ~) 1. 보호, 비호. 2. 바람을 받지 않는 곳, 가리워진 곳. 

 

그러니까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보았을 때, 이렇게 해석하기 쉽습니다.

 

I have him under my lee now.  - 지금은 내가 그를 보호하고 있다.

 

하지만 이건 대개의 경우 틀린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lee 라는 단어에는 다음과 같은 뜻도 있거든요.  역시 야후 사전에서 찾았습니다.

 

lee〈해사〉 바람이 불어가는 쪽의.  반대말 : weather, windward

 

그러니까 위의 문장은 다음과 같이 해석되어야 합니다.

 

I have him under my lee now.  - 이번에는 내가 그 사람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다.

 

왜 그러냐고요 ?

 

이걸 이해하시려면 범선 시대의 해전 전술에 대해서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범선은 바람으로 움직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은 바람에 달려 있습니다.  물론 바람의 방향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가능합니다만, 특히 사각돛을 많이 단 대형 군함에 있어 그건 상당히 힘든 일이었습니다.  최악은 전에 소개드린 바 있듯이, 아예 바람이 전혀 안 부는 경우였지요.  그에 대해서는 '바람과 증기, 그리고 Admiral Brown'편에서 말씀드린 바 있지요.  ( http://blog.daum.net/nasica/6862313 참조)  다행히 지구라는 환경은 여러가지 불균일한 기상 에너지 때문에 어느 방향으로든 바람은 대개 불어오는 편입니다. 

 

 

 

 

 

문제는 적함과 교전을 할 때, 바람의 방향이 어느 쪽으로 불어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 유리할 것 같습니까 ?

 

1) 바람이 적함에서 우리 쪽으로 불어올 때 (내가 leeward에 있을 때)
2) 바람이 우리 쪽에서 적함으로 불어갈 때 (내가 windward에 있을 때)

 

정답은 2번입니다.  왜냐고요 ?  크게 2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우선, 바람을 등지고 있다는 것은, 이쪽이 원할 때 원하는 기동을 할 수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이쪽이 유리할 때 바람을 타고 득달같이 적함에 달려들 수도 있고, 반대로 불리하면, 최소한 도망을 치지는 못하더라도 적함과의 거리를 유지하는데 유리했습니다.  잘 이해가 안가신다고요 ?  당연합니다.  사실 바람을 등지고 있다고 해서 꼭 적함보다 빠른 것은 아니거든요.  가령 내가 적함에게 바람을 등지고 달려들 때, 자기 못지 않게 빠른 적함도 온갖 돛을 활짝 펴고 달아난다면 못따라 잡을 겁니다.  하지만 최소한 바람을 등지고 있는 편이 공격이나 후퇴냐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것은 맞습니다.

 

또, 이건 다소 사소한 부분입니다만, 당시의 흑색 화약 때문입니다.  당시의 대포나 머스켓 소총은 모두 흑색 화약을 썼습니다.  대포의 일제사격(broadside)을 퍼붓고나면, 많은 양의 연기가 발생합니다.  이 연기는, 머스켓 사수에게나 포수에게나 조준 사격의 의미를 무색케할 정도로 짙은 연막으로 작용했습니다.  당연히, 이 연기는 바람을 타고 흘러갔고, 이는 바람 불어오는 쪽, 즉 windward에 있는 편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습니다.  일제 사격을 몇번 퍼붓고, 아직 적이 우리 편의 포연 속에서 앞못보는 장님 신세일 때, 재빨리 접근해서 육박전을 위해 적함에 옮겨타기(boarding)를 시도할 수 있었으니까요.


실제 역사적 해전에서의 경우를 보면, 가령 16세기 후반에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을 침공할 때, 그에 맞서는 호킨스 및 드레이크가 이끄는 영국 함대는 영국과 무적함대 사이에서 무적함대에 맞서 싸운 것이 아니라, 영국으로 항행하는 스페인 함대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바람 불어오는 방향이 그랬거든요.  스페인 제독으로서도 바람 불어오는 방향에 위치를 잡고 싶었지만, 자신은 임무상 어쨌거나 항진 방향을 영국으로 잡아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바람 불어가는 방향에 위치를 잡아야 했습니다.

 

 

(항로를 보니... 스페인 애들 정말 영국 상륙을 노린게 맞긴 맞나 싶지요 ?)

 

트라팔가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넬슨은 바람을 등지고, leeward에 늘어선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에 돌격해들어가서 역사에 길이 남는 전과를 이루었습니다.  (그림 밑부분에 바람 방향 화살표 보이세요 ?)

 

 

 

(대포알보다 먼저 더러운 뻥글랜드 놈들의 노린내가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아무튼, 그래서 항상 해군은 바람 불어오는 방향(windward)을 선호했습니다.  가령 군함에서, 전통적으로 함장이 위치하는 곳은 항상 후갑판(quarterdeck)의 바람 불어오는 쪽 난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함장이 선실에 있다가 후갑판으로 올라오면, 후갑판에 있던 다른 장교들은 자연스럽게 바람 불어오는 측면을 비워주고 바람 불어가는 쪽, 즉 leeward 난간으로 모여야 했습니다.  군함에서 함장은 기본적으로 왕 또는 신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따로 함장이 부르지 않는 한 항상 혼자 있는 것이 기본이었고, 함부로 먼저 말을 걸어서도 안되었거든요.

 

그러다보니, 해군 소설의 주인인 혼블로워 함장은 기본적으로 혼자 생각하는 장면이 아주 많이 나옵니다.  특히 혼블로워는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나오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대개 그렇게 주인공의 내면 묘사에 치중하는 소설은 지루하기 쉽상인데, 다행히도 혼블로워 작가 C.S.포레스터는 뛰어난 작가라서, 그런 장면도 꽤 재미있게 묘사했습니다.  사실 그래서 '마스터 앤드 커맨더'의 작가 패트릭 오브라이언은 해군 함장인 잭 오브리 외에도, 군의관인 스티븐 머투어린을 잭의 친구로 내세웠습니다.  아무래도 혼블로워와는 달리 우스개소리도 잘하고 재기에 넘친 잭 오브리가 혼자서 끙끙 고민하는 장면만 주욱 늘어놓는 것은 오브라이언이 보기에도 너무 아니다 싶었나봐요.

 

이야가기 약간 빗나갔습니다만, 바람이 전쟁의 향방을 정했다 - 라는 것은 굳이 유럽 쪽 해전에서만 있었던 일은 아닙니다.  가령 (실제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갈공명이 동남풍을 타고 화공책을 써서 적벽에서 조조의 침공 함대를 무찌르는 장면은 삼국지에서 거의 클라이맥스 부분이라고 할 만한 부분입니다.  또, 우리나라 역사에서 거의 최후로 있었던 대규모 야전에서의 승리였던, 고려-거란 전쟁의 결정판인 귀주대첩에서도, 고려군은 갑자기 불어온 바람을 등지고 돌격하여, 팽팽하던 전세를 뒤집고 거란군을 무찔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즘도 바람은 전투에서 상당히 중요합니다.  귀주대첩에서와 같이 바람은 화살의 위력 및 명중률에 영향을 크게 줍니다만, 총알이나 대포알, 로케트탄도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특히 요즘 전차전에서 많이 사용된다는 APFSDS탄 (날개안정파갑탄) 같은 경우, 사실상 커다란 화살, 즉 대장군전 같은 것이라서, 그 명중률은 측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탱크에는 풍향/풍속 측정기도 달려 있다고 들었는데, 정확한지는 모르겠네요.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