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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상

Sloan의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중 부르봉 왕정 복귀 직후 상황

by nasica-old 2015.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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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바쁜 일도 있고, 상황도 시끄럽고, 이번주는 읽던 책 중의 한 구절이나 올리겠습니다.


모두들 '용기와 희망'을 !






하지만 (루이 18세의) 정부는 그 자살이나 다름없는 코스를 계속 밟았다.  심지어는 (나폴레옹에게 끝까지 반항했던) 방데 (Vendée) 지방까지도 루이 18세의 왕정에 대해 정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중략)

심지어는 온건 왕당파들조차도 흔들리기 시작했고, 누군가 그들에게 (루이 18세의) 새로운 질서를 '가부장적 무정부 상태'라는 딱 어울리는 이름으로 조롱할 때 뭐라고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망명지에서 돌아온) 젊은 귀족들에게 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기존 장교들이 수십명씩 해임되는 것과, 그들의 동료들이 반액 휴직 (half-pay)이라는 이름 하에, 실제로는 생계가 곤란한 상태로 은퇴를 하는 것을 보고, 병사들은 고참병이나 징집병이나 할 것 없이 많은 숫자가 탈영했다.  오래지 않아 병사들은 나폴레옹의 초상이 새겨진 은화를 서로에게 보여주며 '용기와 희망' 또는 '그는 황제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든가 '프랑스인이여 깨어나라, 황제가 깨어나고 있다' 와 같은 암구호를 주고 받기 시작했다.

(중략)

파리에서는 상황이 더 심각했고, 마르몽은 그의 주군을 배반한 유다로, 베르티에는 주군을 부정한 베드로로 비유되었다.  개의 꼬리에 흰색 모표 (cockade, 흰색은 부르봉 왕가의 상징)를 달아두는 것은 매우 흔한 장난이었다.  의회가 열리기 전에 각 분파들은 공공연하게 스스로를 왕당파나 보나파르트파, 또는 자유주의자 혹은 자코뱅파라고 선언했다.  금전적으로 보자면 왕을 모시는 것이 황제를 모시는 것보다 훨씬 더 비싸게 먹힌다는 것이 분명했다.  귀족들로 이루어진 상원이 (혁명 때 도망쳤던) 망명 귀족들의 몰수 재산에 대해 변상을 해주는 법안에 찬성했을 뿐만 아니라 언론 검열을 확립하는 법안도 통과시키자, 현재 상태가 이대로 지속될 수는 없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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