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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상

강철의 공작 vs. 홍차의 백작 - 혁명없는 민주주의는 가능한가 ?

by nasica-old 2015.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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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De l'esprit des loix)은 행정 입법 사법의 3권 분리를 주창한 유명한 정치 철학서입니다.   미국의 현재 국가 체제도 이 책에 영향을 입은 바가 크다고 합니다.  당시 계몽 사상가 및 혁명가들에게 이 책이 지녔던 상징성은 다음의 일화가 잘 말해 줍니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열혈 자코뱅이던 카파렐리 (Louis-Marie-Joseph Maximilian Caffarelli du Falga) 장군은 1799년 나폴레옹을 따라 시리아 원정을 갔다가 아크레 (Acre) 요새 포위전에서 투르크군의 포탄에 오른손을 잃는 큰 부상을 입고 결국 이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는데, 임종시 카파렐리 장군이 고해성사 대신 읽어달라고 했던 것이 이 책에 볼테르가 붙인 서문이었다고 합니다.




(1749년판 '법의 정신'입니다. 영어의 법(Laws)에 대응하는 불어 단어 복수형의 현대적 표기는 lois 인데 당시 표기는 loix 였답니다.  저 알아볼 수 없는 불어 단어들 속에서 몽테스키외의 이름을 찾으려 애쓰실 필요 없습니다.  당시의 검열 때문에 이 책은 무명씨 이름으로 출간되었으니까요.)



1748년에 출간된 이 책에서 몽테스키외는 영국의 정치 체제를 상당히 높게 평가했습니다.  또,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 시민들도 나폴레옹의 독재 정치에 대비하여 영국의 민주주의를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태양왕 루이 14세가 '짐이 곧 국가니라' (L'état, c'est moi) 라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을 때, 이미 영국은 헌법과 의회에 의해 왕권이 제한되고 있었고, 실제 권력은 의회를 장악한 수상이 쥐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의회를 채우는 의원들은 모두 시민들에 의해 선거로 선출되고 있었으므로, 절대왕정이던 몽테스키외 시절의 프랑스에 비해 영국은 정말 대단히 선진적인 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정치 체제를 이미 갖고 있던 영국인들은 혁명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많은 국력의 낭비가 있었던 프랑스와는 대조적으로 혁명이나 폭동을 겪지 않고 순조로운 국가 발전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학교 교과서에서 우리는 그렇게 배웠습니다.




(1649년 1월, 영국 국왕 찰스 1세의 재판 모습입니다.  결과는.... 사형 !)



과연 영국은 폭동이나 유혈 혁명 없이 민주주의를 이루었을까요?  영국 국민들은 나랏님이 시키는 대로 순종하고 법을 준수하며 착하게 살았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얻을 수 있었을까요 ?  아니라는 것을 다 아실 것입니다.  일단 영국도 올리버 크롬웰이 내전에서 국왕군을 격파하고 국왕 찰스 1세를 재판에 넘긴 뒤 결국 처형한 나라입니다.  신사들끼리 대화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나라가 전혀 아니었지요.  애초에 대화라는 것은 힘이 비슷하거나 대화로 해결이 안될 경우 쌍방이 큰 피해를 입는 것이 분명할 때나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순종만 한다면 국왕이 뭐하러 대화를 하고 권력을 나눠주겠습니까 ?

어쨌거나, 나폴레옹 전쟁을 승리로 끝낸 영국은 이미 그런 유혈 사태를 거친 뒤 상하 양원으로 이루어진 강력한 의회를 가지고 있었고, 귀족이 아닌 일반 서민들도 하원 의원들을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할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뭘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  그 이상을 요구한다면 그건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겠지요.  당시 영국인들도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  언제나 그렇습니다만, 당연히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 영국의 선거 제도는 희한한 구석이 많았습니다.  영국의 지역 사회는 유서 깊은 역사에 따라 제각각 발전하다보니, 어떤 지역구에서는 토지를 소유한 상당한 자산가만이 투표권을 가질 수 있었으나, 어떤 지역구에서는 그저 남비로 물을 끓일 수 있을 정도의 화로가 갖추어진 집에서 살고만 있으면 (집의 소유권 여부에 상관없이) 투표권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어느 곳이나, 기본적으로 투표권은 어느 정도의 재산권에 기반하고 있었고, 대부분의 노동자 계급은 투표를 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매우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 논리는 올리버 크롬웰의 사위이자 의회군의 장군이었던 아이어턴 (Henry Ireton)의 입을 빌리자면 이러했습니다.  "아무 재산이 없는 자들은 이 나라에 영구적이고 고정적인 이해 관계가 없는데 그런 인간들에게 이 나라의 국가 대사에 대한 투표권을 준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또,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선거구 자체가 엉망으로 관리되고 있어, 국민의 뜻이 의회에서 대표되기에는 부적절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령 이제 막 시작된 산업 혁명 덕분에 이런저런 신흥 공업도시들이 급속도로 커지면서 많은 인구를 가지게 되었으나, 그런 도시에서는 하원 의원 선거 자체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런 공업 도시에서 열악한 처우에 시달리며 일해야 했던 수만 명의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에 비해 적지 않은 선거구들에는 불과 수십 명의 유권자들만 있었는데, 그런 곳에서도 하원 의원이 선출되었습니다. 

그렇게 작은 선거구는 흔히 썩은 선거구 (rotten borough)라고 불리웠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게 유권자의 수가 작을 수록 여러가지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령 전에 제 블로그에서 소개해드린 (http://blog.daum.net/nasica/6862329)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풍운아 토마스 코크레인 (Thomas Cochrane) 경의 경우를 보지요.  이 양반도 하원 의원이 되겠다고 작은 지역구에 출마했는데, 이런 곳에서는 유권자의 수가 불과 수십 명이었으므로, 뇌물을 주고 표를 사는 경우가 아주 흔했습니다.  심지어 1표당 5기니(guinea, 현재 가치로 5기니는 약 135만원 정도)라는 공정가(?)가 매겨져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코크레인은 단 한푼의 뇌물도 제공하지 않았으므로 당연히 낙선했습니다.  그런데, 낙선하고 나서, 코크레인은 자기에게 표를 준 몇 안되는 사람들에게 공정가의 2배인 무려 10기니의 사례금을 줍니다.  1년 뒤, 같은 지역구에 코크레인이 또 출마했는데, 이번에는 사람들이 사후에 10기니를 받을 것을 기대하고 너도나도 코크레인에게 투표를 합니다.  이렇게 당선된 코크레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입을 싹 닦고 한푼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분이 코크레인 경입니다.  이 분의 드라마틱한 삶과 모험은 Patrick O'Brian의 명작 해양 소설 Aubrey & Maturin 시리즈의 주요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이 시리즈는 국내에는 황금가지 사에서 일부 번역되어 출간되었습니다.)



여기서 아마 의문을 가지실 겁니다.  어떤 사람이 누구에게 투표를 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아주 간단했습니다.  당시에는 비밀 투표라는 것이 없었고, 모든 것이 기명 투표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당시 기득권들은 "자신이 떳떳하다면 왜 자기가 누구에게 투표를 했는지 못 밝힌다는 말이냐 ?" 라며 기명 투표를 옹호했습니다.  하지만 떳떳하더라도 비밀 투표가 필요한 이유는 많습니다.  무엇보다, 코크레인 경의 경우처럼 뇌물 선거를 막을 방법이 없었고, 또 많은 경우 귀족이 대지주인 선거구에서 그 귀족이 지시하는 대로 투표를 하지 않을 경우 그 귀족 땅에서 소작을 하는 농부들은 당장 소작권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썩은 선거구들은 귀족들이 하원을 통제하는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 되고 있었습니다.  가령 노포크 (Norfolk) 공작은 이런 썩은 선거구 11개를, 론스데일 (Lonsdale) 백작은 9개를 쥐락펴락 통제했습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투표일' (The Polling)으로서, 1755년 그려진 William Hogarth의 4부작 풍자화 중 세번째입니다.  풍자화답게 곳곳에 이런저런 당대의 엉망진창이었던 투표 모습을 비꼬고 있습니다.  가령 저 뒤 마부들이 무심하게 카드 놀이를 하는 동안 차축이 부러진 마차를 타고 있는 귀부인은 영국을 의인화한 것입니다.)



당시 영국인들은 이런 선거 제도의 개혁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급진파들은 재산 소유 여부에 상관없이 모든 성인 남자들이 투표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보통 선거권 (universal suffrage)과 비밀 투표, 그리고 가난한 노동자들이 먼 거리를 걸어와서 투표할 수 있도록 투표일을 유급 휴일화해 줄 것을 요구했고, 심지어 당시로서는 정말 혁신적인 여성 투표권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온건 개혁파들이 1차적인 타겟으로 삼은 것은 바로 저 '썩은 선거구'들의 폐지였고, 그 대신 새로 형성된 인구가 많은 공업 도시들에게 선거구를 만들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나마 진보당이라고 할 수 있는 휘그(Whig)당에서 이런 주장이 프랑스 대혁명 이전부터도 계속 나왔었습니다.  과격파들의 주장은 그렇다치고, 온건 개혁파들의 이런 요구는 당시 기준으로 보았을 때도 매우 적절하고 이성적인 것이었습니다.  상식적이고 대화를 중시하는 영국 귀족들은 이런 개혁 요구에 순순히 응했을까요 ? 

천만에 콩떡이었습니다.  이들은 이런 개혁 요구를 철저히 묵살했습니다.  뭐하러 자신의 기득권을 스스로 포기하겠습니까 ?  특히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자, 영국 사회는 완전히 우향우를 하여 온건파들의 요구조차도 철저히 탄압했습니다.  이렇게 이웃 나라에서 혁명 등이 벌어지면 국내의 개혁파들이 철퇴를 맞는 것은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인가 봅니다.  그러다 긴 나폴레옹 전쟁이 마침내 승리로 끝나자, 다시 선거구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특히 전후에 불황이 밀어 닥치고 실업률이 높아지자, 맨체스터와 같은 신흥 북부 공업 도시의 노동자들은 당장의 생활이 크게 곤궁해지면서 사회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선거권이 없기 때문에 자신들의 권익이 무시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들은 과격파들의 대의에 동조하게 되었습니다.




(멀리서 본 1850년대의 맨체스터의 모습입니다.  미세먼지와 스모그가 장난 아니네요.)




여기서 이야기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고향인 맨체스터로 옮겨가 보지요.  1815년 6월 벨기에 워털루 (Waterloo)에서 웰링턴 공작의 지휘 하에 나폴레옹의 프랑스군과 혈전을 벌였던 영국 병사였던 존 리스(John Lees)는 전쟁이 끝난 이후 제대하여 귀국했습니다.  맨체스터 인근인 올덤 (Oldham)에 새로 생긴 방직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리스도 나날이 팍팍해지는 살림살이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는 1819년 8월 초, 당시 선동가로 유명하던 소위 재야 인사 헨리 헌트 (Henry Hunt)가 주도하는 대규모 선거권 요구 집회가 인근 공터인 세인트 피터 들판 (St. Peter's Field)에서 벌어진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당시엔 이런 노동자들의 집회가 종종 있었는데, 당시 점잖은 중산층 사람들, 특히 런던 같은 남부의 중산층들은 이런 집회에 모이는 북부 공업 도시 노동자들의 초라한 옷차림과 투박하고 거친 말투와 행동을 공공연하게 조롱하곤 했습니다.  당시 노동자들과 그 지도자들은 그런 조롱에 또 민감하여, 이 집회에 나올 때는 일요일 교회 갈 때 입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나올 것과, 집회에서는 반드시 질서있고 점잖게 행동할 것을 여러차례의 사전 집회를 통해 부탁하고 강조했습니다.  이런 집회는 당연히 지역 치안 기관의 주목을 받고 있었고, 이렇게 노동자들이 사전에 모여서 조별로 질서있게 입장하고 퇴장하는 연습을 하는 것을 "노동자들이 자체적으로 군사 제식 훈련을 하고 있다" 라고 보고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따라 긴장감이 고조되었고, 이 집회는 두차례나 연기되기도 했습니다.




(헨리 헌트입니다.  그는 부유한 농부 출신으로서, 나폴레옹 전쟁 기간 중 급진 사상에 물들어 여기저기서 급진 개혁에 대한 주장을 선동하고 다녔습니다.  워낙 언변이 뛰어나 '웅변가'로 불린 그는, 결국 피털루 학살 현장에서 체포되어 2년형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출소한 이후에 아침식사용 곡물 가루 (Corn Meal) 사업과 구두 광택제 사업을 하기도 했으나, 그러는 와중에도 급진 성향의 정치 활동을 계속하여 짧은 기간이나마 국회 의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8월 16일, 예고된 대로 대규모 집회가 세인트 피터 벌판에 열렸습니다.  모인 군중은 대개 맨체스터 시내와 인근 지역에서 몰려온 노동 계급으로서, 주최측에 따르면 15만명, 정부 추산으로는 3만명, 역사가들의 추산으로는 7만명 정도가 모였다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최대 규모의 민중 집회로서, 당국을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었습니다.  맨체스터 및 그 인근 지역 인구의 절반이 집결한 규모로서, 당시 맨체스터 시내가 텅빈 유령 도시처럼 보일 정도였다고 하니까요.  이 집회에 모인 군중들은 주최측의 바람대로, 비교적 깨끗한 차림새로 질서있게 행동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임을 주시하고 있던 군경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집회 인근에는 일종의 자치 민병대라고 할 수 있는, 맨체스터(Manchester)와 살포드(Salford)의 향사 (Yeomanry) 기병대가 소요 사태에 대비해 대기 중이었습니다.  흔히 향사라고 번역되는 요맨리(Yeomanry)는 해당 지역의 방위 및 치안 유지를 위해 그 지역 중산층들이 비상근 형식으로 모여 훈련하고 동원되는 자원 민병대로서, 프랑스의 국민 방위군 (la Garde Nationale, 앙졸라와 함께 바리케이드로 http://blog.daum.net/nasica/6862535 참조)과 비슷한 조직이었습니다.  유복한 중산층으로서 기득권층이었던 이들은 선거권을 요구하며 머리수로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노동자들을 경멸하고 증오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 따르면 이들은 "무장한 토리당 (Tory, 당시 보수당) 젊은이들", "급진파에 대한 증오심으로 소집에 응한 열혈 (hot-headed) 젊은이들", 심지어 "말을 탄 지역 사업체 마피아들" 정도로 묘사되었습니다.  




(런던 지역 요맨리 Yeomanry의 사열 모습입니다.  겉으로 봐서는 정규군과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집회가 시끌벅적해진 것은 선동혐의로 원래부터 체포영장이 발부되어 있던 주최자인 헨리 헌트가 현장에 도착한 순간이었습니다.  멀리서 그의 도착을 확인한 치안관(constable)들은 요맨리 기병대의 호위를 받으며 군중 속을 밀치고 들어가 헌트를 체포했습니다.  그러나 수만명의 군중을 거칠게 밀쳐내는 과정이 순조로왔을 리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요맨리 기병대원들은 원래부터 노동자 계급을 경멸하고 증오하는 이들이었으니 밀어도 살살 밀지는 않았을 것이고, 눈 앞에서 자신들의 집회 지도자를 잡아가는 모습을 본 군중들도 기분이 썩 좋았을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 이 기병대원들이 헌트를 체포한 뒤에도 단상 주변의 깃발과 현수막 등을 거칠게 때려부수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항의하는 고함 소리와 함께 돌맹이들이 날아들기 시작했습니다.  그에 응해 화가 머리 끝까지 나고 또 겁에 질린 요맨리 기병들도 이미 뽑아 들고 있었던 군도를 닥치는 대로 휘두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던 치안관들은 군중들이 법 집행 요원들을 공격하고 있다고 판단하고는 인근에서 대기하던 정규군 기병대를 투입했습니다.  흥분한 이들은 군도를 뽑아들고, 아무 무기를 들지 않은, 그리고 여자들과 일부 아이들도 섞인 군중들을 향해 닥치는 대로 내려쳤습니다.  겁에 질린 군중들이 이리저리 도망치려 해보았으나, 워낙 사람들이 빽빽하게 몰린데다 군중 해산 경험도 없고 지나치게 흥분한 기병들이 군중들이 빠져나갈 구멍을 내주지 않고 마구잡이로 칼질을 해대는 바람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결국 여기서 십여명이 사망하고 6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상을 당하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워털루 전투에 참전했던 제대 군인 존 리스도 그 사망자 중 한명이었습니다.  그는 기병들의 군도 세례에 큰 부상을 입고 신음하다 결국 보름 정도 지난 9월 9일 사망했는데, 죽기 전 그는 병상을 지키던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워털루에서는 남자 대 남자의 대결이었는데, 거기서는 그냥 노골적 살인이었어."  ("At Waterloo there was man to man but there it was downright murder.")





(당시 피털루 학살 사건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이 평화적으로 시작된 민중 집회가 군경에 의한 살육으로 이어진 이 사건은 당시 영국 사회에 큰 충격과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현장에는 기자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에 대한 소상한 보도가 호외 형식으로 불티나듯 팔려나갔습니다.  이 사건은 흔히 4년전 워털루 전투에 비교되어, 피털루 (Peterloo) 학살이라는 비아냥거리는 명칭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소된 요맨리 및 정규군 장교 및 병사들은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오히려 당시 왕세자로부터 '치안을 위해 세운 공'에 대한 치하를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급진파들의 주장을 주로 보도하던 소위 종북 좌빨 신문들이 꽤 있었는데, 이런 신문들은 당연히 이 피털루 학살 사건에 대해 끈질기게 보도했고, 당국은 이런 신문사들과 기자들에 대해 체포 및 재판, 구금 등 가혹한 탄압으로 대응했습니다.  그런 종북 좌빨 신문 중 대표격인 맨체스터 옵저버 (Manchester Observer) 지는 당국의 탄압으로 끊임없이 정간을 당하다 결국 1820년 2월 아예 폐간을 하게 됩니다.   당시 이 옵저버 지는 새로 만들어진 온건 개혁파 신문이던 맨체스터 가디언 (Manchester Guardian) 지와 치열한 대립 및 경쟁 관계였습니다.  원래 급진 개혁파의 최대 적수는 보수파가 아니라 급진파의 김을 빼놓는 온건 개혁파거든요.  그러나 옵저버 지는 폐산하면서 사설에 이제 자신들은 폐간하니 피털루 학살의 이어지는 소식은 맨체스터 가디언 지로부터 들으라고 권고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 피털루 사건은 당장은 아무런 결과를 낳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개혁파들이 된서리를 맞는 대대적 공안 정국만 불러왔지요. 




(당시 집권층은 피털루 학살을 '폭도들을 진압한 정당한 공권력 행사'라고 주장하며 언론과 여론을 탄압했습니다만, 역사는 결국 진실을 말해줍니다.  저 명패는 피털루 현장을 기념하며 만들어졌습니다.  맨체스터에 가실 일 있으면 올드 트래포드와 함께 꼭 가보셔야 할 명소라고 생각합니다.)




(이 맨체스터 가디언 지가 오늘날 영국의 대표적인 진보파 매체인 가디언 (The Guardian) 지입니다.  가디언지는 당연히 영국 총리 선거에서 에드 밀리번드 편을 들겠지요 ?  영국에서도 노동당 당수인 에드는 '빨갱이 에드' 라고 불리더군요.)






하지만 닭의 목을 쳐도 새벽은 온다고, 결국 다시 '썩은 선거구'의 폐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하원을 포함한 영국 사회 곳곳에서 울려펴지기 시작했습니다.  1830년 국왕 조시 4세 (George IV)의 사망으로 인해 관례적으로 의회가 새로 꾸며지며 이 개혁안이 상정되자, 이번에도 귀족들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은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그 반개혁 세력의 중심에는 바로 워털루 전투의 영웅, 새로 구성된 의회의 총리이자 웰링턴 공작인 아서 웰슬리 (Arthur Wellesley)가 있었습니다.  그는 '지난 수백년에 걸쳐 지식과 경험이 쌓인 결과로 형성된 이 나라의 입법부는 현재의 상태가 최상의 상태이며, 이런 최고의 제도를 인위적으로 바꾸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난다면 그에 반대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한다'라며 그야말로 수구적인 태도를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노년의 웰링턴 공작입니다.  매부리코는 여전하네요.)



이런 수구꼴통적인 태도는 심지어 집권 토리당 내에서도 반발을 불러일으킬 정도였습니다.  이 발언을 한 지 불과 2주만에 그는 불신임안 표결에서 패배하고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는 굴욕을 당해야 했으나, 그는 자신의 주장을 절대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의 별명으로 흔히 알려진 '강철의 공작' (Iron Duke, 금속공학적으로 보면 강철이 아니라 무쇠의 공작이지요)이라는 호칭은 사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전장에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의 고집스러울 정도로 수구꼴통스러운 강경 자세 때문에 이 시기에 얻은 것으로서, 좋은 뜻이 아니라 비아냥거리는 투로 붙여진 것입니다.  특히 다음해인 1831년에 선거 개혁안에 대한 국민적인 항의가 격렬해지며 항의 군중이 돌을 던져 그의 저택인 앱슬리 장 (Apsley House)의 유리창을 박살낸 뒤, 그 유리창에 쇠창살이 쳐지면서 그의 이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웰링턴 공작이 런던 시내에 머물 때 살기 위해 구입한 앱슬리 관입니다.  이 건물은 지금도 잘 보존되어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돌을 던지는 폭도들이 없는 관계로 쇠창살은 제거했나 봅니다.)




웰링턴 공작이 실각한 뒤 뒤를 이은 총리는 진보파인 휘그당의 그레이 백작 (Earl Grey)였습니다.  그는 개혁안의 지지자로서, 선거구 개혁안을 제출했으나, 기득권 세력이 장악한 의회는 다시 한번 그 개혁안을 부결시켰습니다.  그러자 그레이 백작은 그에 굴하지 않고 국민들의 뜻을 묻기 위해 1831년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했습니다.  당시 선거구 개혁에 대한 민중의 열의가 대단하여, 이 총선에서 보수 토리당은 '썩은 선거구'를 제외하고는 모든 선거구에서 패배했고, 결국 진보당으로 채워진 하원에서 이 개혁안은 기어이 통과되고 말았습니다.  




(이 양반이 찰스 그레이, 제2대 그레이 백작입니다.  이름에서 눈치 채셨겠습니다만, 홍차 종류 중에 얼 그레이 (Earl Grey)라는 것은 바로 이 분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 홍차에 이 분의 이름이 붙은 것은 이 양반이 중국에 갔을 때 물에 빠진 어떤 중국 상인의 아들을 이 양반 배의 선원이 구해준 것에 대한 감사 표시로 그 중국 상인이 그런 홍차를 선물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이 양반은 중국 근처에도 가 본 적이 없다는 것이 에러...)




하지만 양원제로 대표되는 보수의 힘은 막강했습니다.  미국이나 영국처럼 상하 양원제로 이루어진 입법부에서 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것은 하원입니다.  하원에서만 새로운 법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법안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상원을 통과해야 하지요.  당시 영국 상원은 모두 귀족(Peers)들로만 이루어진 그야말로 기득권 세력의 마지막 보루였고, 당연히 여기서는 하원을 통과한 그 개혁안을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뒤따른 것은 폭동이었습니다.  상원이 법안을 거부한 바로 그날 저녁부터 전국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나 교도소를 때려부수고 귀족들의 성채에 불을 질렀습니다.  심지어 브리스톨 (Bristol)에서는 폭도들이 도시를 3일간이나 점거했지요.  '썩은 선거구를 걷어내자'라는 선거구 개혁안은 18세기 후반부터 꾸준히 주장되어온 것으로서, 그다지 새로운 이슈가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아우스테를리츠 대승 소식에 충격을 받아 사망했다는 소 피트 (William Pitt the Younger) 총리도 이런 선거구 개혁안을 제출한 바가 있었지요.  그러나 그때는 아직 국민들의 자각이 충분치 못하여 하원에서 그런 안들이 부결되어도 일반 서민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산업 혁명의 결과로 공업 도시 인구들이 많아지고, 자신의 권리를 인정 받으려는 그런 공업도시 중산층 및 노동자 계층의 자각이 이루어지자,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시민들이 힘으로 들고 일어난 것입니다.

하원에서는 1832년 다시 법안을 제출하여 통과시켰으나, 이대로는 상원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 뻔했습니다.  남은 것은 진보파 인사들에게 잔뜩 작위를 주어 상원을 진보파 귀족으로 채워버리는 수 밖에 없었는데, 그럴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유일한 사람인 국왕 윌리엄 4세 (William IV)가 그에 반대했습니다.  그러자 진보파 총리이던 그레이 백작이 그에 대한 항의 표시로 사임해버렸습니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국왕 윌리엄 4세는 영원한 보수의 아이콘 강철의 공작 웰링턴을 다시 총리로 임명하려 했습니다.  그 결과는 대대적인 폭동과 항의 시위였습니다.  이때는 정말 영국 전체가 혁명이 일어날 것을 염려할 정도로 거센 항의가 있었는데, 특이한 점으로는 시민들이 금융적인 방법으로 국왕과 귀족들을 물먹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의 구호는 '공작을 막아라, 금을 뽑아라' (Stop the Duke; go for gold!) 였는데, 이는 당시 금본위제였던 영국 금융체계를 마비시키기 위해 시민들이 은행으로부터 대대적인 예금 인출 사태, 즉 뱅크 런 (bank run)을 일으키려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영란은행 (Bank of England)이 보유한 금의 양은 약 700만 파운드 상당이었는데, 이 운동이 벌어진 첫째날에만 180만 파운드의 금이 인출되었다고 합니다.  이와 함께 세금 거부 운동도 일어났고, 일부에서는 아예 귀족제도 및 왕정 자체의 폐지까지 거론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되자, 국왕도 한발 물러서서 '상원을 진보파 인사들로 채우기 위해 새로운 귀족을 대량 양산'하는데 동의했고, 이 소식이 알려지자 그런 굴욕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상원도 양보해야 했습니다.  즉, 개혁안이 상원을 마침내 통과한 것입니다.  이 개혁안은 1832년 대개혁안 (Representation of the People Act 1832, the 1832 Reform Act, Great Reform Act)이라고 불립니다.




(1832년 개혁안의 시작부가 적힌 양피지입니다.  맨 윗부분에 당시의 관례대로, "Le Roy le veult" (The King wills it, 왕께서 원하신다)라고 노르망디 프랑스어로 적혀 있습니다.   영국이 어쩔 수 없이 문화적으로는 프랑스에 꿇린다는 것이 여기서도 나오네요.)



이 개혁안으로 맨체스터 등에도 선거구가 생기고 몇몇 귀족들의 손아귀에 있던 썩은 선거구들이 폐지되는 등 소기의 성과가 있었으나, 이 개혁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재산권에 상관없이 모든 시민들에게 선거권을 달라는 보통 선거권 요구는 묵살되었고, 특히 비밀 투표 등은 1870년대가 되어서야 실행되었습니다.  이런 결과에 대해 1832년 개혁안을 이루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룬 노동 계층은 '중산층들의 배신'이라며 크게 반발했고, 결국 이는 1840년대의 차티스트 (Chartist) 운동으로 이어집니다.





(1848년 케닝턴 공유지 Kennington Common에서 열린 차티스트 집회입니다.  결국 이 운동도 빛을 보기 위해서는 수십년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영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런 역사를 볼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요 ?  역시 민주주의는 피를 머금고 피어나는 꽃이니 준법 투쟁이고 뭐고 거리로 나가 불법 시위를 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  글쎄요.  1832년 개혁안 통과를 위한 노력에서 가장 많은 희생을 몸으로 치룬 노동자 계층들은 모두 그 개혁안의 혜택을 보지 못하고 군경의 칼에 맞아 죽거나 차가운 감옥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 과실은 모두 이미 먹고 살만 했던 중산층 계급이 가져갔지요.  그리고 피털루 학살로부터 개혁안 통과까지는 무려 13년이나 걸렸습니다.  보통 선거와 비밀 투표는 그로부터 또다시 40년 정도가 더 필요했지요. 

그러니 좌빨들의 선동에 속지말고, 그저 법 잘 지키고 지배층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살아야 할까요 ?  만약 그랬다면 지배층은 결코 아랫것들의 요구에 귀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저 1832년 개혁안을 둘러싼 갈등과 폭동이 보여줍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요 ?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호소하고 싶은 것은 딱 하나, 여러분들이 가진 투표권 하나는 전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피와 눈물을 흘린 댓가로 얻어진 것입니다.  부디 현명하게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저렇게 개혁안을 통과시킨 그레이 백작은 자타가 공인하는 기득권층 중의 최상위 기득권층이었습니다.  왜 이 양반은 굳이 그 난리를 피워가며 개혁안을 통과시키는데 앞장 섰을까요 ?  이 사람도 종북좌빨이었을까요 ?  그에 대해서는 정계에서 비교적 일찍 은퇴한 그가 스스로의 입으로 그 입장을 밝힌 바 있습니다. 

"그 개혁안의 목적은 기존의 헌법을 보존하고, 대중들, 특히 이 개혁안의 주된 수혜자인 중산층에게 헌법을 보다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민중의 지적 수준 향상과 시대의 필요에 따른 향후의 개혁들이 (급진적인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수립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즉, 그레이 백작의 개혁은 기득권층을 몰락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기득권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개혁은 피할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날 영국이 아직 왕정과 귀족 제도가 남아 있는 것에 더 많은 공을 세운 것은 강철의 공작보다는 홍차의 백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의 사진이 얼 그레이 홍차입니다.  홍차 잎에 베르가뭇을 약간 넣어 상큼한 향이 나게 한 일종의 혼합 차이지요.  베르가뭇이라는 것은 이탈리아 등에서 나는 못생긴 오렌지의 일종입니다.  그레이 백작 가문에 따르면 그레이 백작의 고향인 잉글랜드 북부 노썸벌랜드 (Northumberland) 호윅 (Howick)의 식수에는 석회질이 섞여 맛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 상인이 알려준 방식대로 베르가뭇향을 넣은 홍차를 즐겨 마신 것에서 얼 그레이의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아무도 그레이 백작을 홍차의 백작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건 그냥 제가 강철의 공작에 대비시켜 붙여 본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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