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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뮈라(Murat), 이탈리아 통일의 선구자가 되다 ?

by nasica-old 2010.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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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진정한 불꽃 남자, 요아킴 뮈라 ( http://blog.daum.net/nasica/6862378 참조) 편에서 뮈라에 대해서 다루었지요.  그때 뮈라가 나폴레옹을 배신한 이야기와 어떻게 죽음을 당했는지에 대해 간단히 다루었습니다.




(나의 잘 생긴 얼굴을 또 보게 되어 반갑지 ?)



그런데, 어떻게 보면 뮈라의 역사적 가치와 중요성은 나폴레옹 휘하에서 빛나는 전공을 세울 때보다도,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바둥거릴 때 더 빛났던 것 같습니다.  전에 말씀드렸듯이,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나폴레옹의 몰락이 거의 확실해지자, 뮈라는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연합국 측에 붙습니다.  그러니까 뮈라의 나폴리 왕국은 나폴레옹 전쟁 막판에 편을 바꾸어, 당당한 전승국 대열에 끼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나폴레옹이나 뮈라 같은 번개치기 왕족과는 달리, 소위 진짜 왕족들의 세계는 뮈라가 생각했던 것처럼 녹녹하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의 뒤치다꺼리를 위해 열린 비엔나 회의의 분위기는, 모든 것을 나폴레옹 이전으로 되돌리는 것으로 수렴되었고, 특히 뮈라가 차지했던 나폴리 왕국의 왕좌는 원주인인 부르봉 가문의 페르디난드 4세에게 돌아가는 분위기였습니다.

여기서 잠깐, 대체 페르디난드 4세라는 인간은 어떤 사람이었고, 부르봉 가문인 것을 보니 프랑스인인데 어떻게 이탈리아에서 왕 노릇을 할 수 있었으며, 또 어쩌다 왕좌를 뮈라에게 빼앗겼고, 또 그렇게 왕위를 박탈당한 동안에는 어디서 무엇을 해먹고 살았는지가 궁금해지지 않으십니까 ?  저는 약간 궁금했습니다.




(니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대부분이 나에 대해서는 관심이 별로 없더군... 섭섭해...)



원래 이탈리아는 로마 제국 멸망 이래로,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군소 국가로 분할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쨌거나 이탈리아는 많은 문화 유산 뿐만 아니라, 비옥한 토지와 함께 여러가지 산업이 발달한 풍요의 땅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지방에 강력한 정치 군사력이 없다면 결과는 뻔합니다.  무식하지만 힘은 센 프랑스 및 독일 계통의 왕조들이 이탈리아에 마수를 뻗쳐 분할 통치했습니다.  특히, 이탈리아 남부와 시실리섬은 13세기 후반에 프랑스 루이 9세의 동생인 앙주 가문의 샤를(Charles)이, 당시 이 지역을 지배하던 세력인 독일계 호헨스타우펜(Hohenstaufen) 가문으로부터 무력으로 빼앗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유럽의 실력자인 스페인 아라곤 왕국의 개입으로 결국 시실리 섬은 상실하고, 이탈리아 남부만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폴리 왕국 (Kingdom of Naples)이 된 것이지요.  시실리 섬은 아라곤의 피터 3세(스페인 식으로는 페드로 3세)가 점령하여 시실리 왕국이 되었습니다.




(앙주 가문의 샤를, 또는 시실리 왕국의 샤를 1세입니다.  나폴리 왕국의 시조라고 할 수 있지요.)

 


그 뒤로도 이 두개의 왕국은 프랑스와 스페인(정확히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무력 각축장이 되면서, 하나로 합쳐졌다 분할되었다를 반복하면서 끊임없이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다 18세기 초반의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과 1734년의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을 거치면서, 결국 프랑스의 부르봉 가문이 모든 것을 독식하게 되었습니다.  즉, 스페인 뿐만 아니라, 나폴리 왕국과 시실리 왕국에도 부르봉 가문의 왕이 들어섰던 것입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스페인에 부르봉 가문의 왕이 들어서는 대신, 프랑스와 스페인의 정치적 통합은 금지되었던 것처럼, 이 나폴리 왕국과 시실리 왕국도 한명의 부르봉 왕족이 왕으로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두개의 독립적 왕국으로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도 이탈리아 남부는 바로 이 상태, 즉 부르봉 가문의 페르디난드 4세가 2개 국가의 왕관을 머리에 쓴 상태였습니다.  페르디난드 4세는 종가인 부르봉 가문을 프랑스에서 몰아낸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을 당연히 적대시했지만, 도저히 나폴레옹의 상대는 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영국과 러시아, 오스트리아 측에 붙어서 프랑스를 공격했습니다만,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대승을 거두고 남부 이탈리아로 군대를 파견한 나폴레옹에 대항해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 소유의 또 하나의 왕국인 시실리 섬으로 튀는 것 외에는 없었습니다.  영국 함대가 없었다면 페르디난드 4세는 정말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되었을 것입니다.  페르디난드 4세가 버리고 간 나폴리 왕국에 나폴레옹은 자신의 형 조제프를 왕으로 앉혔다가, 1808년에 그를 다시 스페인 왕좌에 앉히면서 그 빈자리에 자신의 매제인 뮈라를 앉혔습니다.

 

 

 

(저 주황색으로 칠한 부분이 나폴리 왕국입니다.  상당히 넓지요.)

 


아무튼 1815년, 비엔나 회의 결과가 자신에게 매우 안좋은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감지한 뮈라에게, 남은 것은 모든 것을 운명에 걸고 자신의 전쟁을 벌이는 것 뿐이었습니다.  게다가, 뮈라에게 엘바섬의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하여 프랑스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뮈라는 이를 기회로 삼았습니다.  (물론 이미 알고 계시는 것처럼, 나폴레옹은 배신자 뮈라와 두번 다시 얼굴 마주치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요.)  나폴레옹이 1815년 3월 1일에 프랑스 남부 골페-주앙(Golfe-Juan)에 상륙했고, 뮈라의 대 오스트리아 선전 포고는 3월 20일이었으니, 분명히 뮈라가 나폴레옹의 복귀를 기회로 삼아 덕을 보려고 타이밍을 맞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엘바 섬에서 귀환하여 골페-주앙에 상륙하는 나폴레옹)

 


하지만 정작 뮈라가 일으킨 생계형 전쟁인 '나폴리 전쟁'은 뮈라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나폴레옹이 뮈라를 도왔다기 보다는 뮈라가 오히려 나폴레옹을 돕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뮈라가 선전포고를 할 때, 뮈라 휘하에는 톡톡 털어 대략 5만 명 정도의 나폴리 병력이 있었는데, 이와 대치한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 북부에 무려 12만 명의 병력을 투입했습니다.  원래 이 병력의 원래 목표는 뮈라가 아닌, 나폴레옹의 복귀에 대응하여 남부 프랑스 침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뮈라가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의 10만 대군을 잡아두고 있지 않았다면, 나폴레옹은 더 위험하고 급박한 상황으로 내몰렸을 것입니다.

어쨌든 뮈라는 오스트리아와 한판 싸움을 피할 수 없었고, 자신의 작은 왕국에 비해 엄청난 대적이었던 오스트리아와 싸우기 위해서는 이탈리아의 거국적, 거족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결과로, 실무적으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역사적으로는 꽤 의미가 있는 리미니 (Rimini) 선언을 합니다.  여기서 뮈라가 호소한 것은, 모든 이탈리아인은 이탈리아를 분할 통치하며 수탈하는 오스트리아에 맞서 무기를 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탈리아 남부가 나폴리 왕국과 시실리 왕국으로 분할되어 있는 동안,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를 정복하기 전까지 밀라노를 비롯한 북부 이탈리아는 밀라노 공국, 투스카니 공국 등의 이름으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아직도 남북 이탈리아는 하나로 통합되지 못하고 지역 감정이 심하다고 합니다.)  이탈리아인들은 독일어를 쓰는 오스트리아인들이 이탈리아를 지배하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장에 몰린 프랑스인 뮈라로부터, ‘모든 이탈리아인이여, 단결하여 오스트리아를 몰아내고 이탈리아를 통일하자’는 이야기가 나온 것입니다.  이 선언은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효시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뮈라가 1815년 나폴리 전쟁 동안 휘젓고 다닌 경로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당대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아무도, 심지어 꼴보기 싫은 오스트리아인들이 다시 권좌를 차지하는 것을 참아야 했던 밀라노나 투스카니의 이탈리아인들조차도, 뮈라의 대(對) 오스트리아 항쟁 선언에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뮈라가 일으킨 ‘나폴리 전쟁’을 그저 왕좌에서 쫓겨나게 된 나폴레옹 패잔병의 최후의 발악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뮈라는 나폴리 왕국의 왕이 된 이후에도, 나폴리 왕국에 애정을 가지고 이탈리아인들을 지배했다기보다는, 모든 법령과 관습을 프랑스식으로 하여 통치할 뿐이었고, 특히 칼라브리아(Calabria) 지방의 민족적 저항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경력조차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뮈라는 초반 작은 승리들을 잇달아 거두면서, 오스트리아의 직접 지배를 받는 북부 이탈리아 왕국까지 침공해 들어갑니다.  특히, 뮈라는 일단 밀라노까지 점령하고 나면, 과거 나폴레옹의 대군단(Grande Armee)에서 나폴레옹 및 자신의 휘하에서 싸웠던 역전의 이탈리아 고참병들 약 4만명이 자신의 휘하로 모여들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에게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첫 패배를 안겨줄 정도였던 오스트리아군의 위세는 뮈라에게는 조금 벅찼나 봅니다.  오스트리아군이 증강되면서, 결국 뮈라는 전술적, 전략적 후퇴를 거듭하게 됩니다.

 

 

 

(톨렌티노 전투.  나폴레옹의 전쟁화보다는 확실히 좀... 역량이 떨어지는 화가가 그린 것 같습니다...)


남부로 후퇴하던 뮈라를 뒤쫓던 것은 비앙키(Bianchi)와 나이페르그(Neipperg) 장군이 각각 이끌던 2개 군단의 오스트리아군이었습니다.  이때, 이 두 개 군단은 아페닌 산맥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뮈라도 나폴레옹처럼 분산된 적을 각개 격파한다는 작전을 세웁니다.  즉, 산맥 서쪽의 비앙키 군단을 먼저 무찌르고 이어서 나이페르그를 손봐준다는 것이었지요.  불과 1달 뒤 워털루에서 나폴레옹도 뮈라와 똑같은 작전을 세웁니다.  즉, 영국군과 프러시아군이 합류하기 전에, 먼저 영국군을 격멸하고 프러시아군을 나중에 상대한다는 생각이었지요.  하지만 나폴레옹과 뮈라는 모두 실패합니다.  워털루에서 웰링턴의 영국군을 패배시키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했던 나폴레옹처럼, 뮈라도 톨렌티노 (Tolentino) 전투에서 비앙키를 상대하는데 너무 오래 걸리는 바람에, 뒤에서 다가오는 나이페르그의 위협에 어쩔 수 없이 후퇴를 하게 됩니다.  이 후퇴는 결국 그대로 그의 몰락으로 이어집니다.

전에 썼던 것처럼, 완전히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뮈라는, 일단 코르시카 섬으로 피신했다가, 나폴레옹처럼 딱 28명의 수행원만을 이끌고 피조(Pizzo)라는 이탈리아의 장화 콧등 부분에 해당하는 작은 도시에 상륙하여 다시 나폴리 왕국을 되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확실히 뮈라는 나폴레옹이 아니라, 나폴레옹의 칼에 불과했나봅니다.  나폴레옹의 상륙 때와는 달리 아무도 환영하지 않았고, 그는 곧 숙적 페르디난드 4세에게 체포되어 상륙 5일 만에, 한낱 범죄자처럼 병사들에게 총살당하게 됩니다.  이때 처형장에서의 일화, 즉 '얼굴 다치지 않게 가슴을 똑바로 겨냥하라, 발사 !'를 직접 외쳤던 그의 이야기는 이미 지난번에 소개드린 바와 같습니다.

현재 이탈리아에서 뮈라를 이탈리아 통일의 선구자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그가 처형되었던 피조에서 호텔 이름으로 쓰이면서 관광객 유치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합니다.





(약 150년 뒤, 자신의 이름이 작은 시골 도시 호텔 간판으로 걸릴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뮈라는 뭐라고 생각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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