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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리틀 드러머 보이의 죽음

by nasica-old 2010.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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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나 아시아 일부 지역에서 나이 어린 소년들(심지어는 소녀들도)이 연필대신 소총을 들고 전쟁터로 내몰린다는 기사가 가끔씩 나옵니다.  어른들의 탐욕과 광기가 어린 아이들의 안전과 행복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가슴 아픈 일이지요.




(원래 AK47 소총은 어린이와 잘 어울리는 편인가요 ?  제가 볼 때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만...)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신사' 계급의 장교들의 지휘 하에 다소 낭만이 통하는 전쟁을 치루었던 나폴레옹 시대에는, 이렇게 어린이를 전쟁터에 내보내는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행위가 없었겠지요 ?  불행히도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았습니다.





Sharpe's Battle by Bernard Cornwell (배경: 1811년 스페인) ------------------

(샤프 대위와 하퍼 중사는 엄폐물에 숨어서 프랑스군과 사격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하퍼가 말했다.  "그 불쌍한 소위 말입니다.  죽었어요."
"그 친구 흉부 부상이었어."  샤프가 총구에 총알과 화약을 장전봉으로 밀어넣으며 말했다. "가슴에 총상을 입고도 살아남는 사람은 별로 없지."
"그 불쌍한 녀석과 함께 있어주었어요."  하퍼가 말했다.  "그 친구 말이, 자기 어머니가 과부라고 하더군요.  집안에서 물려내려오던 식기들을 팔아서 그 친구 제복과 검을 사주셨대요.  그러시면서 그 친구가 세계 최고의 군인이 될 거라고 말씀하셨다는군요."
"그 친구 괜찮았어." 샤프가 말했다.  "겁에 질리거나 하지 않았쟎아." 그는 공이치기를 당겼다.
"저도 그렇게 이야기해줬어요.  기도도 해줬지요.  불쌍한 어린 친구 같으니라구.  생애 첫번째 전투였다는데."  하퍼는 방아쇠를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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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소설 속에서 전사한 소위의 나이는 10대 후반 정도였습니다.  이 정도면 가히 소년병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저렇게 전투에서 허무하게 죽어나가기 위해 가난한 집안의 가재도구를 내다 팔았다니 참 씁쓸하지요.  그 어머니는 얼마나 후회하고 슬퍼했을까요.

나폴레옹만 하더라도 17세의 나이로 소위에 임관했으니, 당시에는 10대 중반~10대 후반의 소년들이 장교랍시고 전쟁터에 나가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너무 나이어린 소년들이 전쟁터에 장교로 나가는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었습니다.  영국군의 경우 나폴레옹 전쟁 직전인 1793년~1795년 기간 중에 당시 영국왕 조지 3세의 아들인 요크 공작에 의해 몇가지 제도 개선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16세 미만의 소년들은 장교직을 살 수 없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영국군의 매관매직에 대해서는 나폴레옹 전쟁 - 왜 영국군이 이겼을까 ? 참조)  즉, 16세만 넘으면 장교, 그것도 전투에서 가장 전사하기 좋은 계급인 소위가 될 수 있다는 뜻이고, 그나마 그 이전에는 16세 이전에도 그렇게 전사할 기회를 돈을 내고 살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육군도 문제였지만 해군은 한술 더 떴습니다.  당시 유럽 각국의 해군에는, 미드쉽맨(midshipman에 대해서는 Midshipman의 생활 참조)이라는 독특한 제도가 있어서, 10대 초반의 코흘리개 꼬마들이 장교랍시고 중년의 선원들을 지휘하는 일이 흔하게 있었습니다.  넬슨 제독만 해도, 고작 12살에 해군에 미드쉽맨으로 입대했지요.  당연히, 그런 꼬마들이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는 일도 흔히 있었습니다.  대포알에는 눈이 없었으니까요.




(Michael Daintry 라는 이름의 영국 해군 미드쉽맨의 초상입니다.  이 친구는 나폴레옹 전쟁 때 미드쉽맨이었고, 1853년 노총각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당시 유럽 귀족 내지는 중산층에서, 왜 돈을 써가며 어린 자식들을 사지로 내몰았는지는 아직 저도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당시 의료 기술의 원시성으로 인해 어차피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삶과 죽음에 대해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을 수도 있고,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분위기가 팽배해있었을 수도 있지만, 여전히 잘 이해가 안가는군요.

귀족이나 부르조아들은 그렇다치고, 서민들 자식들은 어린 나이에 전쟁터에 끌려가는 일은 없었을까요 ?  억지로 끌려간 것인지는 불분명합니다만, 확실히 전쟁터에서 가난한 집 꼬마들을 꽤 많이 볼 수는 있었습니다. 

일단 해군에는 군함마다 아예 규정으로 정해진 수의 어린이들이 탑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powder monkey라고 하여, 전투시에 군함 최하갑판에 위치한 화약고에서 화약을 날라오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물론 평상시에는 이런저런 심부름을 하면서 뱃사람이 되는 것을 배웠지요.   가령 넬슨 제독이 지휘한 트라팔가 해전에서, 가장 어린 수병의 나이는 8살이었습니다.   왜 이런 일에 굳이 어린이를 썼을까요 ?  크게 두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 




(트라팔가 해전에서의 powder monkey의 모습)



첫번째는, 전투시에는 폭발의 위험성 때문에 화약고에서 화약을 조금씩 자주 꺼내오는 것이 상식이었으므로, 비좁은 배 안에서 어차피 가벼운 짐을 나르는 일이라면, 굳이 비싼 급료를 주고 어른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유가 되었습니다.  (어떤 2차 세계대전 종군 기자가 쓴 책을 읽어보니, 당시 미군 항공대에서 전투기에 탄약을 장착하는 역할을 맡은 병사들이 이구동성으로 '왜 이런 일에 사지멀쩡한 병사를 쓰는지 모르겠다... 징병검사를 통과하지 못한 약골이나 일부 신체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써도 충분할 것 같은데' 라고 말했다는데, 이와 일맥상통하는 바라고 할 수 있지요.) 


두번째는, 군함에 타고 싶어하는 어린이나, 태우고 싶어하는 부모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은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많았습니다.  당시 유럽은 산업혁명 초기로서, 온 동네에 빈민들이 득실거렸고, 평균 수명은 30대 중반 정도였으며, 최저 임금 따위의 개념은 전혀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저축은 커녕 그날 벌어 그날 먹기가 힘든 상태였지요.  그런데 군함에 타면 거의 매일 (소금에 절인 것이기는 하지만) 돼지고기며 쇠고기, 치즈 따위의 귀한 음식을 실컷 먹을 수 있었고, 게다가 럼주까지 충분히 주어지는데다, 몇 푼 안되기는 하지만 급료까지 지급되었으므로, 돈을 벌어오지는 못하고 먹기만 하는 '남는' 꼬마애를 군함에 태워 어디론가 보내버리고 싶어하는 빈민층 아빠엄마들이 꽤 많았습니다.  이렇게 지내면서, Jack Aubrey 시리즈에 자주 나오는 표현대로 전투나 사고로 'knocked on the head' 즉 '골로 가는' 일만 없다면 뱃사람으로서의 직업 훈련도 되므로, 일석삼조의 효과라고 할 수 있었지요.




(미국 남북전쟁 당시 미해군의 파우더 멍키랍니다.  그때 사진치고는 좀 너무 자연스러운데요...?)



문제는 점잖은 집안에 태어나 미드쉽맨으로서 군함에 타든, 막장 집안에 태어나 파우더 멍키로서 타든,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대포알에는 가리지 않고 다 쓸어버린다는 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군함에서의 삶과 죽음이 대포알로 결정되는 일은 극히 드물었고 오히려 질병이나 사고에 의한 죽음이 더 일반적이었으므로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 해군의 생활  참조) 전투의 위험은 다들 심각하게 생각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해군에서는 어린이들이 파우더 멍키로 활용되었다면, 육군에서는 주로 '드러머 보이' 즉 북치기 소년으로 어린이들이 고용되었습니다.  당시 무전기나 확성기가 없던 시절, 북소리는 전장에서 가장 확실하게 병사들에게 단체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수단이었으므로, 특히 횡대의 진열에 맞추어 전투를 벌였던 당시에는 드러머가 꼭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해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굳이 북치는 '가벼운' 일에, 많이 먹고 많이 마시는 장정을 쓸 필요가 없고, 또 군대가 아니면 먹고 살기 힘든 가난한 집 꼬마들이 많았으므로, 드러머는 자연스럽게 어린 소년들이 맡는 경우가 많았나 봅니다.

그런 전쟁터에서의 드러머 보이를 묘사한 그림 중에,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영국 여류 화가 엘리자베스 톰슨(Elizabeth Thompson, 버틀러라는 장군과 결혼했기 때문에 레이디 버틀러 (Butler)라고 더 많이 알려졌습니다)이라는 분이 그린 'Steady the Drums and Fifes' 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1811년 스페인 알부에라(Albuhera) 전투에서 영국군 제 57 보병 연대의 군악대를 묘사한 것인데, 치열한 포화 속에서도 꿋꿋이 서있는 드러머 보이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Steady the Drums and Fifes ...  더 큰 그림은 없더군요.)



그런데, 이미 계몽 시대를 거친 '이성적인' 유럽 사회에서, 정말 이런저런 이익에 부함한다는 이유로 어린 소년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야만적인 일이 많았을까요 ?

여기에 의문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은, 19세기 초반의 군용 드럼은 19세기 후반의 드럼에 비해 상당히 무거웠기 때문에 10대 초반의 소년들이 매고 다니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주장합니다.  또 당시 영국군 규정이, 군에 입대하기 위해서는 최소 만 16세 이상이어야 하고, 또 입대했다고 하더라도,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만 18세가 넘어야 했다고도 합니다.  또, 당시 병사들을 채찍질로 체벌할 때, 채찍을 휘두르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드러머 보이였고, 또 드러머 보이의 주된 역할 중 하나가, 전투 중에 부상을 입고 쓰러진 병사들을 부축하여 후방으로 나르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10대 초반의 꼬마가 20~40대의 아저씨들을 채찍질 하겠으며, 또 어떻게 부상입은 덩치 큰 아저씨들을 부축할 수 있었겠습니까 ?





Sharpe's Company by Bernard Cornwell (배경: 1812년 포르투갈) --------------------------------------

(샤프의 부하이자 친구인 하퍼 중사가 도둑이라는 누명을 쓰고 채찍질을 당하기 직전입니다.)

샤프가 앉았다.  "해그만이 (채찍질을 살살 하도록) 드러머 보이들을 매수하고 있어."

"소용없어요."  하퍼 말이 옳았다.  채찍질을 하는 드러머 보이들은 대개 처벌받는 병사의 친구들로부터 뇌물을 받기 마련이었지만, 장교들이 두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한복판에서는 결국 자신의 온 힘을 다해 채찍질을 하는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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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머 보이들이 때리는 것은 맞는데... 드러머 보이가 보이치고는 좀 크지요 ?)



애초에 장난치자는 것이 아니고 정말 체벌을 하는 것이라면, 장교들이 꼬마들에게 채찍을 들게 하지는 않았겠지요.

그렇다면 대체 버틀러 부인이 그린 드러머 보이들은 무엇일까요 ?

사실 버틀러 부인의 작품 'Steady the Drums and Fifes'는 사실 1897년, 빅토리아 여왕의 주문을 받아 만들어진 그림으로서, 레이디 버틀러가 1811년 당시의 상황을 눈으로 보고 그렸을리는 없었습니다.   당시 평화 시기의 영국군 국내에 주둔하던 연대에는 정말 어린 드러머 보이들이 존재했고, 이들은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고 주로 후방 부대에서 시가 행진을 한다든가 하는 행사 등에 동원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버틀러 부인은 그런 광경을 보고 어린 드러머 보이들의 그림을 그렸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사실 레이디 버틀러는 이렇게 1877년 결혼 직전 찍은 사진이 있을 정도로, 빅토리아 시대의 화가입니다.)


실제로는 어땠을까요 ?  통계치는 믿을 것이 못된다고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정말 little drummer boy는 존재했습니다.  우선, 전에 다루었던 '앞치마를 두른 병사 이야기' 편에서도, 워털루 전투 중 우구몽 농가에 침입한 프랑스군 중 유일한 생존자가 어린 드러머 보이 뿐이었다고 했었지요.  '리틀 드러머 보이'라는 캐롤송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한 드러머 보이들의 임무, 그러니까 채찍질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어린이가 수행했을까요 ?  그것도 사실은 아닙니다.




(예수님 태어나실 때 옆에 드러머 보이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사실 처음 듣지요 ?)



실은 당시 군대에는 어린이가 꽤 있었습니다.  다만, 그런 애들이 반드시 드러머 보이를 하는 것도 아니었고, 또 드러머 역할을 전적으로 애들이 수행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일단, 당시 군대에는 병사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고, 병사들의 가족들, 그러니까 와이프와 애들도 군대와 함께 (그것이 전쟁터라고 하더라도 !) 다녔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군의 가족' 참조)  이들은 풍족한 식솔들은 결코 아니어서, 먹고 살기 힘든 형편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특히, 이들 중 일부는 '공식 부인'의 지위를 가져서, 식량 배급을 따로 받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습니다만, 그런 경우는 드물었고, 대개는 비공식 식솔들로서 얼마 안되는 아빠의 급료로 어떻게든 꾸려 나가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장교 내지는 부사관의 묵인/허락 하에, 병사 명부에 자기 아들을 슬쩍 올리고 그 급료로 식구들이 먹고 사는 경우도 꽤 있었다고 합니다.  어차피 이미 전사 또는 탈영한 병사를 계속 명부에 올려두고 그 봉급을 횡령하는 장교도 많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정말 꼬마 애에게 자기 키보다 더 큰 머스켓 소총을 쥐어 줄 수는 없었으므로, 그래도 만만한 것이 드러머 보이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환 등의 명목으로 아예 군복을 입지 않은 꼬마들도 엄연한 부대 소속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꼬마들은 대개 사병들의 아들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즉, 이렇게 소년병이 되는 것도 아무나 되는 것은 아니고, 빈약한 '빽'이라도 있어야 했던 것이지요.





Sharpe's Siege by Bernard Cornwell (배경: 1814년 프랑스) -----------------------------------------

브리케 대위의 병력 중 살아남은 자들은 마을로 후퇴했다.  그들의 얼굴은 피범벅이 된데다 피로가 겹쳐 황량한 모습이었다.  머스켓 소총을 지팡이 삼아 걸어온 부상병 하나는 모래밭에 털썩 쓰려졌다.  요새의 정문으로 쳐들어갔다가 살아남은 드러머 보이는 아직 12살도 안된 어린이였는데, 서럽게 울고 있었다.  같은 부대의 하사관이었던 아버지가 요새 서쪽 벽에 대한 공격에 참여했다가 브리케 대위와 함께 전사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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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이만 하군요.  Sharpe's Waterloo 중의 한장면입니다.)



이렇게 꼬마들을 부대마다 몇 명씩 허용한 규정은 무려 17세기 중반의 크롬웰 시대의 군 개혁 때 이미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중세 시대에도 기사의 종자 역할을 소년들이 수행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서양에서는 군대에 애들이 따라다니는 것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었던 것지이요.  나폴레옹 전쟁 때는 1개 대대 (약 800 명 정도)에, 20명 정도의 소년들이 '규정상 허용'되었습니다.  즉, 전체 병력 중 약 2.5% 정도에 해당하는 꼬마들이 있었던 것이지요.  영국군은 스페인 전쟁 기간 동안 약 180개 정도의 대대를 이베리아 반도에 풀어 놓았으므로, 나폴레옹 전쟁 때 영국군에는 약 3,600 명의 꼬마들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규정상으로도 이 정도였으니, 실제로는 더 많았을 것입니다.

1815년 6월 18일 아침, 즉 워털루 전투 바로 당일 아침에 영국군의 일조 점호 명단을 보면, 전체 약 7만명 정도되는 영국군(네덜란드 군과 하노버 군 포함) 중에 소년병의 숫자는 무려 4천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나 블뤼허의 프러시아 군에도 그 비율은 비슷했을 것이므로, 워털루 전투에 참전한 꼬마들의 숫자는 양측 합쳐 총 1만명 정도나 되는 셈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이 꼬마들이 모두 드러머 보이로 활약했던 것도 아닙니다.  워털루 전투 당시 드러머 '보이'들의 평균 연령은 무려 26세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물론 드러머 보이 중 일부는 (전체 비율대로 하면 10%겠습니다만, 아마 드러머 보이의 경우는 이 비율이 더 높았겠지요) 실제로 소년이었겠지요.  하지만 드러머 보이의 역할이 비교적 덜 힘들었기 때문에, 실제로 가장 나이가 많은 고참병에게 드러머 보이 역할을 맡기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가령 워털루 전투에 참전한 제 23 보병 연대의 드러머 '보이'였던 존 리즈 (John Leeds) 라는 병사는 1802년에 49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입대했었고 (아마도 먹고 살기 힘들었나 봐요) 워털루 전투 당일날 그의 나이는 무려 62세였습니다.




  (드러머 보이들이 아니라 드러머 할아버지들이라고요 ?  실제로도 그랬답니다 !)



영국군의 기록된 것 중 가장 나이 어린 병사는 (역시 아마도 드러머 보이로 활동하지 않았을까 하는데) 제 9 보병 연대의 제임스 웨이드(James Wade)라는 병사로서, 1800년 7월 10일, 자신의 7번째 생일날 입대를 해서, 거친 나폴레옹 전쟁 속에서 용케 살아남아서, 1821년 28살의 나이로 제대한 것으로 나옵니다. (물론 이 친구의 실제 입대는 이보다 더 나이가 많은 상태였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에는 이렇게 기록 상으로만 입대를 해놓고 급료를 빼돌리는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이런 어린 드러머 보이들은 캐롤송에 나오는 것처럼 착하고 순수한 소년들이었을까요 ?  전혀 아니올시다였습니다.  아무래도 거친 환경에서 거친 병사들과 함께 지내다보니, 신사들이 보기에는 꼬마 악당들로 보였을 것입니다.  어떤 기록에는 나폴레옹 전쟁 기간 중 코루나 전투에 참전한 어떤 대위가, 자신의 어린 아들을 부내 내에 데리고 있었는데, 이 아들에게 절대 드러머 보이들과 어울려 놀지 말라고 다음과 같이 당부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네가 어른 병사들의 막사에 놀러가는 것을 막지는 않겠다.  거기서는 괜찮을 거야.  하지만 꼬마들 사이에서는 네가 나쁜 버릇을 배우게 될까봐 걱정이구나.  그 놈들 중 몇몇은 완전 100% 꼬마 불한당이거든."



(100% 불한당 ?  누가 ?  내가 ?)



다 좋은데, 이런 드러머 보이들의 전상률은 어느 정도 되었을까요 ?  카트르 브라(Quatre Bras) 및 워털루 전투 당시, 영국군에는 총 304명의 드러머들이 있었습니다.  이중 몇 %가 어린 소년이었는지는 통계가 없습니다만, 이들 중 2명이 전사하고 26명이 부상을 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약 10%의 전상률을 냈다는 것이지요.  총알이나 대포알에는 눈이 없으니, 아마도 같은 비율의 소년병들이 죽거나 다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체 병력 중 약 6%가 소년들이었는데, 아무래도 소년병의 비율이 높을 수 밖에 없는 드러머들이니만큼, 아마도 드러머들 중의 소년병의 비율은 20% 정도는 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럴 경우, 약 6명의 어린 소년들이 죽거나 다쳤다는 이야기지요.

이렇게 나폴레옹 전쟁에서 희생된 소년병들 중 가장 유명하다고 할 만한 소년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영국 쪽이 아니라, 프랑스 쪽입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나폴레옹 전쟁이 아니라 1793년 프랑스 혁명 전쟁 중 방데(Vendee) 지방의 내란에서였습니다.  (방데 지방의 반란에 대해서는 '나폴레옹은 왜 교황과 화해했을까 ?'  참조)  소년의 이름은 조셉 바라 (Joseph Bara), 전사 당시 불과 14살이었습니다.




(생전의 조셉 바라.  Jean Joseph Weerts 작. 당연히 상상도겠지요.)



이 소년은 (어린 나이에, 그것도 18세기 말에 왕정 또는 공화정이라는 개념에 대해 얼마나 이해를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열렬한 공화정부 지지자로서, 방데 지방에서 왕당파의 반란이 일어나자 '13세의 나이에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공화정을 위해 군문에 몸을 던졌다가 포악한 왕당파와의 전투에서 한떨기 꽃으로 산화한 어린 영웅'이었습니다. 

조셉 바라는 어려운 가정 출신이었습니다.  아마도 일찍 과부가 된 어머니를 둔 모양이었는데, 계기야 어찌 되었건 정말 13세의 나이에 자원병으로 입대하여, 방데 지방의 반란군 진압에 나섰습니다.  이 아이는 제8 경기병 연대의 드러머 보이로서, 방데 지방에서의 작전에 약 1년 정도 참여했었는데, 이 방데 지방의 내란은 무척이나 참혹하고 잔인했던 전쟁이라서, 민간인 학살도 자주 일어나곤 했던, 한마디로 몹쓸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조셉 바라의 활약상이 어떠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고 (14세의 꼬마에게 뭔가를 기대한다는 것이 무리지요) 어떻게 죽었는지도 사실은 불분명한 모양입니다.  어떤 기록에는 적의 군도에 얼굴을 얻어맞고 쓰러졌는데, 죽어가면서도 혁명의 상징인 삼색 장식물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있었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또 다른 기록에서는 왕당파 반군의 함정에 빠져, 왕당파들이 'Vive le Roi' (국왕 폐하 만세)를 외치면 살려주겠다고 했으나, 그 면전에서 'Vive la Republique' (공화국 만세)를 외쳐서 죽임을 당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조셉 바라의 죽음.  Jean Joseph Weerts 작)


아무튼, 이 소년의 죽음은 그 부대의 지휘관이었던 데스메레(Desmeres) 장군이, 자신의 형편없는 지휘에 대한 비난에 물타기를 하려고, 별다를 것 없는 이 소년 병사의 죽음을 일부러 극적으로 묘사하여 보고하는 바람에 국가적 관심이 대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데스메레 장군은 그 물타기 효과를 보지 못하고 결국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특히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는 '오로지 프랑스에만 13살짜리 영웅이 존재한다'라며 대중에 대한 선동에 이 소년의 죽음을 크게 활용했습니다. 




(조셉 바라의 죽음.  무려 David의 작품입니다만... 어째 19금 분위기가 납니다 그려 ???)



조셉 바라의 시신을 판테온에 이장하도록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어머니와 그의 두 어린 형제가 국민 공회의 공식적인 후원을 받게 했고, 그의 영웅적인 모습을 묘사한 조각판을 공공 비용으로 만들어 전국의 각 소학교에 전시하도록 했습니다.  심지어, 당시 막 건조된 테메레르(Téméraire)급 74문 짜리 전열함도 바라(Barra)라는 이름으로 명명할 정도였습니다.  다만, 불행히도 이 전함은 1798년 영국 해군에게 나포되어 HMS Donegal로 개명되어, 영국 해군에서 활약했습니다.  이후로도, 다비드를 포함한 많은 예술가들이 이 애국 소년의 죽음을 묘사하는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다만, 로베스피에르의 실각 이후, 이 소년의 우상화에는 약간 제동이 걸렸습니다만, 그래도 혁명의 상징성으로서의 존재는 여전하여, 이 소년 이야기는 비교적 최근까지도 프랑스의 소학교 교과서에 실렸었다고 합니다. 




(1806년 산 도밍고에서의 해전 당시 HMS Donegal의 모습이 저 왼쪽 끝에 보입니다.)



우리나라에도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다 살해된 소년 이야기가 있었지요.  제가 어릴 때는 학교에서도 열심히 배우던 이야기인데, 요즘엔 그 소년 이야기를 학교에서는 가르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글쎄요, 교육계에 '좌빨'들이 판을 치기 때문일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어린 미성년자가 정치 이념 때문에 죽고 다치고 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소년들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마치 (설마 그런 뜻이야 있었겠습니까마는) '니들도 이런 상황에서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행동해라'라고 가르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뭐가 어떻게 되었든간에, 어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념에 따라 죽거나 다치는 것은 상관할 바 아니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애들이 그런 어른들에게 홀려서 죽거나 다치는 것은 (조셉 바라처럼 자발적이든 아프리카 소년병들처럼 비자발적이든) 절대 있어서는 안되겟지요.




(역시 조셉 바라의 죽음.  Charles Moreau Vauthier 작입니다.  이 그림을 보고 슬픔이 아닌 애국심을 느낀다면, 그 자체가 야만스러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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