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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앞치마를 두른 병사 이야기 - 나폴레옹의 전투 공병 "Sapeur"

by nasica-old 2010.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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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사극은 거의 불패의 시청률을 자랑합니다.  대조영, 왕건, 주몽, 용의 눈물 등의 대작들도 그렇고, 장희빈 같은 궁중여인들을 그린 사극도 일단 만들면 어느 정도 시청률은 기본으로 나오고, 왠만하면 시청률 탑을 기록합니다.  최근에는 저도 매우 재미있게 보았던 추노, 다모 같은 퓨전 사극도 나오고 있지요.  퓨전 사극하니까 전에 SBS에서 만들었던 사극도 기억이 납니다.  제목은 서동요, 남자 주인공은 잘 기억이 안나고, 여자 주인공은 이보영이었지요.  이보영의 아역으로서는 요즘 아이돌로서 인기가 절정인 '설리는 진리'의 그 설리가 어릴 때 출연했었습니다.  아, 순풍산부인과의 허간호사도 이보영의 연적으로 나왔습니다.




(이 아이는 지금도 얼굴이 거의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제가 이 드라마에서 대해서 인상이 깊게 박힌 것은 그 어설픔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와이프가 이 드라마를 매우 좋아해서, 처음엔 안보다가 나중에는 저도 열심히 봤는데, 일단 재미는 있더군요.  무엇보다도 그 시나리오가 매우 참신하고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 소품이나 규모, 그리고 연출의 어설픔은 정말 '이거 공중파 드라마 맞어 ?' 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어설펐습니다.  특히 맨 마지막 부분에서의 전투 장면은 너무 하다 싶을 정도였지요.  가령 주인공 서동이 이끈 부대와 악당 사택기루의 부대가 대낮에 정면 충돌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데, 갑자기 화면이 야간으로 바뀌면서 주변의 부하들은 다 죽었는지 어쨌는지 서동과 사택기루 둘만 남아서 열심히 칼 싸움을 벌입니다.  그러다가 수세에 몰린 사택기루가 도망을 치는데, 아무 설명도 없이 갑자기 도망치던 사택기루 앞에 서동이 (마치 뱀파이어가 순간 이동을 하듯) 불쑥 나타나 다시 열심히 칼 싸움을 벌이는 식입니다.




(왼쪽이 서동이고 오른쪽이 사택기루.  배우들 이름은 여전히 모릅니다.  남자배우에겐 원래 관심없어요.)



우리나라 사극들은 역사적 고증이나 엑스트라의 어설픔, 소품의 빈약함 (또는 지나침)으로 인해 소위 '역사빠'들의 질타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런 역사빠들께서는 잘 모르시는 (또는 알지만 외면하시는) 점들이 있습니다.  바로 드라마의 본질입니다. 

드라마라는 것은 그것이 트렌디 드라마이든 사극이든, 논문도 아니고 예술품도 아닌, 상품입니다.  즉, 최소의 비용을 들여 최대의 매출액을 올려야 하는 판매 제품입니다.  그래야 이윤이 극대화되니까요.  그러자면 엑스트라 최대한 적게 써야 하고, 소품은 나일론과 플라스틱으로 대충 만들어야 하고, 무엇보다 빨리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역사적 고증 같은 것은 사실 중요치 않습니다.  어차피 시청자들도 사극을 통해 역사를 배우자는 것이 아니고, 저처럼 피곤하고 짜증나는 직장에서의 피로를 그걸 보며 잠시 잊자는 것이 주목적이니까요.  그러니까 드라마 주몽에서 병사들의 식량으로 감자가 나오던 고구마가 나오던 중요치 않은 것입니다. 




(원래 역사서에는 주몽이 풀때기를 엮어 만든 자신의 궁전을 외국 사절에게 부끄럽게 여기는 장면도 있는데... 당시 저렇게 화려한 염색 기술이 있었겠습니까 ?)

 


물론, 고구려 시대 사극에 감자가 출연하는 것은 좀 개선해야 하는 거 아니냐 하실텐데, 맞습니다.  개선해야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불평하지 않고, 심지어 뭐가 잘못된 것인지 모르고 그냥 봅니다.  (아마 그 감자 장면에서 감자를 소품으로 준비한 스탶도 몰랐나 보지요.)  그러니까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시청자들이 '고구려 시대에 감자가 왠 말이냐'라며 펄쩍 뒤며 난리를 친다면 방송사에서도 역사쪽 큐레이터라도 고용해서 그런 것들을 바로 잡겠지요. 하지만 그러자면 추가 비용이 들어가고, 기업이란 곳에서는 추가 비용에 대해서 담당 PD가 '이 추가 비용을 써야 시청율이 올라간다'는 것을 정당화해야 합니다.  그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 그렇다면 해외 사극은 어떨까요 ?  나폴레옹 시대의 영국군 관련 소설인, 제가 좋아하는 Sharpe 시리즈를 보겠습니다.  이 소설 시리즈의 작가는 버나드 콘월(Bernard Cornwell)로서, 원래는 영국 BBC에서 PD일을 하던 영국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으로 이민간 뒤, 영주권이 없는 관계로 취직을 할 수 없자, 먹고 살기 위해 쓴 소설이 바로 이 샤프 시리즈라고 합니다.  글쎄요, 이 작가의 신상에 대한 이야기의 신빙성은 잘 모르겠습니다.  영국 BBC에서 잘 나가는 PD가 아무 대책없이 무작정 상경하듯 미국에 갔을 것 같지는 않네요.  아무튼 이 양반의 샤프 시리즈는 재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고증도 꽤 잘 되어 있는 편입니다.  이 소설의 끝 부분에는, 작가가 'historical note'라는 부분을 따로 만들어, 그 소설 속에 나왔던 여러가지 역사적 사실에 대해 설명을 따로 해주고 있습니다.  가령 주인공 샤프가 수행했던 이 임무는 원래 영국군 XX연대의 XX 중위가 해낸 일이다라던가, 이 전투가 벌어졌던 이 장소는 지금은 부동산 개발로 시가지가 되었다라던가 하는 것들이지요.  심지어 소설 속에서 묘사된 요리는 18XX년에 발간된 XXX 요리책에 나온 레시피이다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언젠가는 한글판도 정식 출판될 날이 있겠지요.)



그런데 이 샤프 시리즈가 소설의 인기를 등에 업고 BBC에서 미니시리즈로 제작이 되었습니다.  이미 여러번 소개드린 바와 같이, 주연은 반지의 제왕에서 보로미르 역을 했던 숀 빈 (Sean Bean)입니다.  원래 이 미니시리즈의 주연은 닥터 후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Paul McGann으로 정해졌었습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에서 샤프 첫 촬영이 시작되기 직전, 축구를 하다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그 역할이 숀 빈에게 넘어갔고, 그것이 숀 빈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이 되었습니다.  숀 빈은 그 뒤로 헐리웃에 진출했는데, 그 시니컬한 마스크 때문인지 주연급이 되지는 못하고, 007 시리즈에서 악당으로 나오거나 탐 클랜시의 패트리어트 게임즈에서 IRA 테러리스트로 나오는 등 주로 악당 역을 많이 맡았습니다.  반지의 제왕 보르미르로 사실 악역의 일종이었지요.  그래서 반지의 제왕에서, 부러진 전설의 검을 만져보다 손을 베이고는 'Still sharp...'  (아직도 날카롭군..) 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숀 빈의 팬들에게는 'Still Sharpe' (난 아직도 샤프야) 라고 들렸다고 합니다.





(이 장면 기억 나시나요 ?  Still Sharpe...)



이 미니시리즈 중에서도 Sharpe's Waterloo는 미니시리즈의 최종회이자 역사적 의미에서도 단연 대작으로서, 1997년에 터키에서 촬영되었고 전작들과는 달리 (미니시리즈치고는) 엄청난 규모의 엑스트라를 동원하여 찍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장면은 바로 우구몽(Hougoumont)에서의 격전입니다.  그리고 이 격전은 실제 역사적으로도 워털루 전투의 주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현재의 우구몽 샤또의 모습입니다.  20세기 초까지 실제 농장으로 쓰였으나, 이젠 폐가가 되어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고 합니다.  물론 영국에서의 목소리지요.)




(저 위 사진의 오른쪽 벽에 붙은 동판입니다.  당시 이 우구몽을 사수했던 콜드스트림 연대의 전사자들을 위한 명패입니다.)



우구몽 샤또(chateau라고 쓰고 농가라고 읽습니다)는 글자 그대로 번듯한 농가인데, 꽤 튼튼한 건물 및 담장으로 되어 있어서,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군 우익의 주요 방어 거점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 곳을 점령함으로써, 영국군의 예비 병력이 이쪽으로 투입되도록 유도하고, 자신은 주력을 영국군의 중앙으로 집중하여 정면 돌파를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이 꼬이느라고, 영국군이 이 곳을 끝까지 악착같이 지켜내는 바람에, 오히려 프랑스군 병력의 상당수가 이쪽에 투입되어 버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 방어전에서, 영국군이 지키는 농가의 대문짝을 프랑스군이 도끼로 빗장을 부수고 난입하여 이 농가가 함락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국군은 일부 프랑스군이 난입한 상황에서도, 다시 이 대문을 밀어닫고 빗장을 지른 뒤, 마당으로 이미 침투한 프랑스군 수십명을 모조리 죽여 버렸습니다.  (이때 함께 들어온 어린 프랑스군 드러머 보이만 살려주었다고 합니다.)  웰링턴은 전투 후에, 이 우구몽 전투에서 대문을 다시 닫고 빗장을 지른 행위가, 워털루 전투 전체의 승패를 좌우했던 순간이라고 회고했습니다.




(우구몽 샤또의 문을 닫는 영국군 수비대의 모습.  정말 유명한 장면이지요.  앞에 쓰러진 프랑스 병사 손에 도끼가 쥐어져 있군요.)



이 장면은 워낙 유명하고 또 중요한 순간이어서, 샤프 시리즈의 워털루에서도 그대로 재연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그 어린 프랑스군 드러머 보이까지 묘사되었습니다.





(드라마에서도 이 꼬마는 죽지 않고 살려줍니다.)



이 드라마의 이 장면을 보신 분들께서는 아마도 가장 인상적인 인물로 저 프랑스군 중 턱수염을 기르고 앞치마를 두른, 도끼를 든 거구의 병사를 기억하실 것 같습니다.  이 병사가 우구몽의 문짝을 도끼로 열어젖히고 그대로 뛰어들어와 영국군들을 도끼로 막 까대지요.  그러다가 역시 주인공 리처드 샤프의 칼에 쓰러집니다.  이 친구는 누구인데 앞치마와 도끼라는 어색한 조합의 복장을 하고 설쳐댔던 것일까요 ?





(다 부셔 버릴꼬야 ~~~  우와와와와와왕 !!!!)



이 친구는 프랑스의 각 대대마다 4명 정도씩 배치되었다고 하는 sapeur, 즉 전투 공병입니다.

전투 공병이라고 하면, 현대전에서의 의미는 조금 다르겠습니다만, 고대로부터 꼭 필요했던 존재였습니다.  BC 2세기 경에,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로마군에게 패배당한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5세는 일단 로마와 화평을 맺고, 로마의 동맹국이 됩니다.  (결국 그 아들인 페르세우스가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마케도니아를 완전히 말아먹지요...)  그래서 로마군과 마케도니아군이 합동 작전으로 어떤 성을 공략한 일이 있었는데, 로마군은 주로 공성용 기계를 이용하여 성벽을 공격했고, 마케도니아군은 주로 땅굴을 파서 성벽을 공략하려고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마케도니아군의 땅굴 전법은 별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 기록을 봐도, 고대부터 땅굴을 파는 병사(sapper)가 따로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을 기록한 프롸사르(Froissart)의 연대기에도 이런 땅굴 파는 병사들, 즉 sapper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사실 프롸사르는 이들을 병사로 보지는 않았고, '땅굴을 파는 거친 사내들 (rough fellows)' 정도로 기록을 해놓아서, 이렇게 땅굴을 파는 직업이 좋게 평가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 연대기에는 프랑스의 성채를 공격할 때, 영국군은 주로 땅굴을 넉넉하게 파놓고, 그 땅굴을 지지하는 버팀목에 불을 질러 땅굴을 무너뜨리는 방법으로 성벽을 무너뜨리는 전법을 즐겨 쓴 것으로 나옵니다.  당연히 이런 작업은 힘든 것은 물론이고, 적의 땅굴 탐색 공격이나 또는 단순 사고로 사상자가 많이 나오는 위험한 직업이었습니다.




(프롸싸르의 연대기에 나온 sapper들은 너무나 미천하여, 이런 그림조차도 묘사된 것이 없습니다.)



전투 공병은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에서도 큰 전과를 세웠습니다.  가령 1917년 메신느(Messines) 전투에서, 영국군은 근 2년 동안이나 21곳의 땅굴을 판 뒤, 여기에 무려 450톤의 고폭약을 설치한 뒤 전투 직전에 폭파했습니다.  이중 19곳에서 폭발이 일어났는데, 이 폭발만으로 약 1만명의 독일군이 산화할 정도의 엄청난 위력이었다고 합니다.  나머지 2곳 중 1곳은 1년 뒤에 폭파되었고, 나머지 1곳은 끝내 폭약이 묻힌 곳을 찾아내지 못해 아직도 벨기에 어딘가에는 몇십톤의 화약이 그대로 묻혀있다고 합니다.




(1916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Hawthorn 능선에서의 땅굴을 통해 독일군 진지 지하에 묻어둔 폭약을 폭파하는 장면입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는 전투 공병이 이런 땅굴을 파는 작업에 많이 동원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각종 요새를 공략할 때, 시가전에서 적의 바리케이드를 치울 때는 떡대가 좋고 튼튼한 도끼를 손에 든 병사가 있다면 아주 좋았겠지요.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sapeur, 전투 공병입니다.  이들은 직업 특성상 힘이 좋아야 했으므로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따라서 부대원들 중에 엘리트로 취급되어, 척탄병들처럼 곰가죽으로 만들어진 미트레이(mitre) 모자를 썼습니다.  또, 도끼질을 하다보면 나무나 돌의 파편이 튈 수도 있으므로, 그 보호를 위해 긴 가죽으로 된 앞치마(apron)을 둘렀고, 도끼질하는 손의 보호를 위해 가죽 장갑을 꼈습니다.  그래서 저 Sharpe's Waterloo에서 우구몽의 대문을 쪼개고 쳐들어온 거구의 병사가 그런 차림이었던 것입니다.




(웃고 있으니 저 위의 샤프 드라마 속의 광폭한 모습과는 많이 달라 보이는군요.)




(지금도 프랑스 외인부대의 공병단은 저렇게 흰 장갑에 앞치마, 그리고 도끼를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턱수염까지도 그대로...)



하지만 드라마의 이 장면은 역사적인 사실과는 약간 거리가 있습니다.  즉, 그날 우구몽의 대문을 도끼로 때려부순 사람은 sapeur가 아니라 제1 경보병 연대(1st Legere Regiment) 제1 대대 소속의 기병총 (carabinier) 중대 소속의 르그로 소위(sous-lieutenant Legros)였다고 합니다.  (경보병 연대에서의 기병총 중대는 일반 보병 연대의 척탄병 중대같은 것입니다.)  다만, 이 르그로 소위가 커다란 전투 공병용 도끼로 문을 부순 것은 맞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 드라마에서는 르그로 중위가 아닌 전투 공병이 문을 부순 것으로 묘사되었을까요 ?  혹시 Sharpe's Waterloo의 원작 소설에서도 그렇게 묘사되었기 때문일까요 ?  한번 보시지요.




(이 그림이 당시 상황을 아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도끼를 손에 든 사람이 르그로 소위.  앞치마는 없어요.)



Sharpe's Waterloo by Bernard Cornwell (배경 : 1815년 벨기에 워털루) ----------------------------

북쪽 문이 심하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프랑스군이 요령껏 우구몽 뒤쪽으로 돌아들어가 그 북문의 대문을 부수기 위해 힘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그 대문은 쇠로 된 꺽쇠에 끼워져 있는 나무 빗장으로 잠겨져 있었는데, 대문은 워낙 낡아서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고, 프랑스군이 힘을 줄 때마다 점점 더 틈이 벌어졌다.  프랑스군의 머스켓 소총이 그 틈 사이로 불쑥 삐져나와 발사되더니, 그 다음에는 그 틈 사이로 도끼날이 나타났다.  도끼는 엄청난 힘으로 빗장을 내리찍었다.  영국군 콜드스트림(Coldstream) 연대의 중위 하나가 수비대의 예비 병력을 그 대문 쪽으로 끌고 왔지만, 예비대가 도달하기도 전에, 도끼가 다시 엄청난 힘으로 내리쳤고, 그 힘에 이번에는 빗장이 부러지면서 부러진 한 쪽은 아예 꺽쇠에서 벗어나 멀리 날아가 버렸다.  결국 대문이 활짝 열리면서 함성을 질러대는 프랑스 병사들이 앞마당으로 밀려들어왔다.  이 돌격은 키가 하퍼 중사보다도 더 큰 중위가 이끌고 있었는데, 대문의 빗장을 부순 거대한 공병용 도끼를 손에 든 것은 바로 그 중위였다.

"발사!" 콜드스트림 연대의 중위가 외쳤으나, 곧 영국군 수비대는 프랑스군의 돌격에 덮혀버렸다.  총검이 내질러졌다가 붉은 색이 되어 되돌아왔다.  도끼가 악랄하게 휘둘러지며 한 근위대 병사의 갈비뼈를 활짝 열어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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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작가인 버나드 콘월은 역사적 사실을 가능한한 그대로 썼네요.  그런데 왜 BBC 드라마에서는 굳이 기병총 중대의 르그로 소위를 전투 공병으로 바꾸어 놓았을까요 ?  글쎄요, 이럴 때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오히려 너무 많이 아는 것이 문제 아니었나 싶습니다.  실제로 그런 전투에서는 전투 공병이 도끼를 들고 앞장 서서 적의 요새 대문을 내리찍는 것이 정상이었거든요.  아마도 그 드라마를 찍던 스태프는 프랑스군의 sapeur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의 특이한 복장이 이 장면에서 더 깊은 인상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일부러 그렇게 바꾼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장면이 더 기억에 남는 것이 사실이니까, 결국 그 의도가 적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공병에 대해서는 또 다른 문학작품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게다가, 여기서도 역사적 오류가 나옵니다.  Sharpe 시리즈보다 훨씬 고전인, 발자크의 시골 의사입니다.




(1799년생으로서, 감수성이 예민한 10대를 나폴레옹 제정 시대에 보낸 발자크는 나폴레옹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시골 의사, Balzac 작  (배경: 1830년대 프랑스) -------------------

"제가 말씀드린 그 친구(공드렝)는 베레지나 강에서의 부교병(pontooner) 중 한명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프랑스군이 그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다리를 놓는데 공헌을 했지요.  그 첫번째 말뚝을 강 속에 박을 때 허리까지 들어차는 물 속에 서있었다고 합니다.  에블레(Eble) 장군이 당시 부교병들 지휘관이었는데, 당시 병사들 중, 공드렝(Gondrin)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런 일을 할 만큼 팔팔한 친구가 42명 밖에 없었답니다.  장군은 몸소 물 속까지 내려와 병사들을 격려하면서 레종 도뇌르 훈장과 1천 프랑의 연금을 약속했지요.  베레지나 강물 속에 처음으로 들어간 병사는 떠내려 오는 얼음 덩어리에 다리가 잘려 나갔고, 병사 본인도 급류에 떠내려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 임무의 어려움은 이야기의 맨 마지막 부분을 들으면 더 잘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군요.  그 42명의 지원병 중에, 공드렝이 오늘날 유일한 생존자입니다.  39명은 베레지나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고, 다른 2명은 폴란드 병원에서 아주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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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교병(pontooner)이라는 병과도 전투 공병들처럼 가죽 앞치마를 입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1812년 11월, 베레지나 강에 부교를 놓은 공병들은 그 자재를 인근 마을인 스투디안카(Studianka)에서 구해왔다고 하니까, 적어도 전투 공병처럼 도끼를 휘둘러 집을 부수고 목재를 마련했던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원래 나폴레옹은 지금쯤이면 베레지나 강이 꽁꽁 얼어있을 것이므로 강을 건너는데 다리는 필요없을 것으로 생각하여, 공병들의 이동식 대장간과 기타 도구 마차를 모두 태워버리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지휘관이자 발자크의 소설 속에서도 이름이 언급된 에블레 장군이 그에 반대하여, 황제 몰래 이동식 대장간은 물론, 거기에 쓸 석탄도 마차 2대 분을 확보해 놓았습니다.  이것들이 없었으면 나폴레옹과 그의 대군단 (Grande Armee)의 잔존 병력 중 살아서 베레지나를 건넜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겠지요. 




(베레지나 도강 장면... 저 뒤에 두개의 다리 중 하나가 끊어진 것이 보이시나요 ?  그것이 아마도 포병대용 다리일 것입니다.)



아무튼 11월 23일에 베레지나 강가에 프랑스군이 처음 도착했고, 에블레 장군과 그의 공병들은 11월 25일 저녁에 베레지나 강가에 도착했는데, 26일 낮에 길이 120m 정도의 다리가 완성되어 병력들이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고, 포병대용 다리를 하나 더 만들어서 결국 250문의 대포들까지 무사히 강을 건더도록 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성과지요.  다만, 워낙 자재도 없는데다 서둘러 만드느라고, 이 다리들은 몇번씩 군데군데 무너져 내렸고, 그때마다 강가에서 불을 쬐던 공병들이 다시 차가운 얼음물 속에 들어가서 다리를 수리해냈습니다. 

저 위 발자크의 소설에서 역사적으로 잘못된 부분이 어디냐고요 ?  짐작하실 겁니다.  베레지나 강의 부교를 만든 공병들은 베레지나 도강 이후 며칠 내로 모두 죽었습니다.  공드렝이라는 생존자가 있었다는 것은,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해 발자크가 만들어낸 허구입니다.  심지어 공병단 지휘관인 에블레 장군조차도, 어떻게어떻게 동프러시아의 쾨닉스베르그(Konigsberg)까지는 왔습니다만, 결국 탈진으로 거기서 사망합니다.  에블레 장군 뿐만 아니라, 이렇게 어렵게 다리를 건넜던 나폴레옹 대군단의 생존자 6만명 중 절반 정도가, 결국 추위와 굶주림, 탈진에 길가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공병들이 어렵게 만든 포병대용 다리로 강을 건넜던 250문의 대포도 모두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니우스 근처에서 버려졌습니다.  그래도 3만명이나마 목숨을 건진 것은 모두 저 공병들의 자기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Jean Baptiste Eblé 장군.  최소한 3만명의 생명을 구하고 1812년 12월 31일 사망합니다.)



한가지 더, 지금도 프랑스 파리의 소방대원들은 Sapeurs-Pompiers (sapper-pumper, 공병-펌프병)으로 불립니다.  이들을 창시한 것도 바로 나폴레옹이었습니다.  1810년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의 황녀 마리-루이즈와 결혼하는데, 이 결혼에 대해서는 오스트리아 출신인 마리-앙토네와트를 기억하는 파리 시민들의 반응이 '또 오스트리아 여자야'라며 영 떨떠름했고, 또 이 결혼을 축하하는 오스트리아 대사관의 무도회장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주요 인사들이 다치는 사태가 벌어지는 등 분위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이 오스트리아 대사관 화재를 계기로, 나폴레옹은 좁은 파리 시내에서의 화재에 제대로 대응하기 위해 전문적인 소방관을 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결국 프랑스 육군의 전투 공병들 중 일부를 차출하여 소방대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 프랑스 소방대인 Sapeurs-Pompiers입니다.  출신이 그래서인지, 지금도 프랑스 소방대는 그 조직이나 문화가 상당히 군대식이라고 합니다.  인터넷 게시판에 영국 소방대원이 프랑스 소방대원들과 합동 훈련을 한 뒤에, '프랑스 소방대는 우리와는 달리 모든 것이 상당히 군대식이더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더군요.




(프랑스 소방대는 여전히 Sapeurs-Pompi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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