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7년, 나폴레옹은 예나-아우어슈타트 및 아일라우 전투의 성과를 틸지트(Tilisit)에서 거두어 들입니다. 즉 러시아의 젊은 짜르 알렉상드르와 평화 회담을 가진 것이지요. 이 회담의 결과로 유럽 대륙은 프랑스와 러시아 2대 강국의 연합 체제로 개편되고, 과거의 강국이었던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자신들의 찌그러든 처지를 실감해야 했습니다.
(나폴레옹도 히틀러처럼 처음에는 러시아와 평화 조약을 맺었다가 결국 러시아에서 망합니다. 히틀러와 나폴레옹이 다른 점은, 나폴레옹은 왠만하면 정말 러시아와 평화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어했다는 점이지요.)
특히 예나-아우어슈타트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이 쌓아놓은 프로이센의 이미지를 일거에 말아먹은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몹시 형편이 좋지 않았습니다. 마그데부르크 시를 비롯한 알짜배기 영토를 베스트팔렌 등 나폴레옹의 꼭두각시 라인연방 국가들에게 빼앗긴 것입니다. 아마도 이때 빌헬름 3세는 자기 와이프인 루이제 왕비를 속으로 많이 원망했을 것입니다. 프로이센을 나폴레옹과의 전쟁에 몰아넣은 것에는 자기 와이프인 루이제 왕비의 부추김이 꽤 큰 역할을 했거든요.
사실 나폴레옹도 허접한 빌헬름 3세보다는, 군복을 입고 병사들의 환호에 응답하며 불굴의 전의를 불태웠다는 이 젊고 아름다운 프로이센 왕비에게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베를린 점령 직후, 직접 이 도망친 왕비의 침실까지 직접 들어가 화장대의 편지들까지 읽어봉았다고 하니까, 약간 스토커 기질도 있는 모양입니다. 거기다가, 조세핀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이 루이제 왕비가 자기를 유혹하려고 애를 많이 썼지만 자기는 전혀 동하지 않았다고 한 것을 보면, 나폴레옹은 도끼병까지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야, 정말 미인인데요 ? 프러시아의 왕비 루이제)
나폴레옹은 틸지트 조약 직후, 인근의 어떤 제분업자의 저택을 찾아가 그곳에 찌그러져 있던 프로이센 왕을, 사실그보다는 관심의 대상이었던 왕비를 마침내 만납니다. 이때 루이제 왕비는 터키식 터번을 머리에 쓰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 동방의 패션을 모방하는 것이 유행이었나 봅니다.) 루이제 왕비에게 수작을 걸어보고 싶었던 나폴레옹은 "프로이센 왕비가 왜 터번을 쓰고 있소 ? 그런 옷차림으로는 투르크와 전쟁 중인 러시아 짜르의 환심을 사기가 어려울텐데 ?" 하고 조롱을 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나폴레옹은 초딩스러운 점이 많습니다. 그냥 "아름다우시군요" 라든가 "기품이 넘치십니다" 등으로 접근을 하는 것이 좋았을텐 말입니다.
그러자 남편과는 달리 전혀 멍청하지 않았던 루이제 왕비는 나폴레옹의 뒤를 힐끗 쳐다보고 이렇게 대꾸합니다.
"글쎄요, 루스탐을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고 해두지요."
대체 루스탐이 누군가요 ?
이야기는 1798년 이집트 원정으로 되돌아갑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사실 약간 황당한 사건이었습니다. 주변국들과 불안한 휴전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약 3만명에 이르는 대병력을, 바다의 지배자 영국 해군의 감시망을 뚫고 이집트까지 보낸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모험이었지요. 그리고 그 전에, 대체 뜬금없이 이집트에는 왜 쳐들어간 것인지가 의문이지요. 하지만 이집트 원정 계획은 거의 100년 전인 태양왕 루이 14세 때부터 줄곧 이야기되어오던, 프랑스 남자들의 로망이었습니다. 영국에 비해 해군력이 빈약했던 프랑스로서는, 영국이 독식하다시피 하던 인도 등 동방 무역에 숟가락을 올려놓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나폴레옹과 당시의 집정관 정부에서는, 이집트를 정복하면 수에즈 지협으로부터, 영국 해군의 방해를 뿌리치고 인도로 병력을 보내, 당시 인도에서 영국의 침공에 저항하던 티푸(Tippo) 술탄과 연합하여 영국 세력을 인도에서 축출할 수도 있다고 망상에 젖어 있었습니다. (티푸 술탄과 영국의 전쟁이 제가 좋아하는 소설 Sharpe 시리즈의 1권인 Sharpe's Tiger 편입니다. 영국의 인도 침략에 대해 http://blog.daum.net/nasica/6862359 참조)
(1799년 인도 중부의 셰링가파탐을 지배하던 티푸 술탄을 영국군이 공격한 이야기를 담은 역사 소설, Sharpe's Tiger입니다. 젊은 시절의 웰링턴 공작도 참전했고, 그도 이 소설에 출연합니다.)
이건 누가 봐도 과대망상증 환자들이나 꿈꿀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홍해에서 인도양까지도 영국 해군이 득실거리는데, 수에즈에서 이집트인들이 만든 허술한 배를 타고 인도까지 1만 5천명의 병력을 이동시킨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지요. 그럼에도 이 계획이 실행된 것은, 일단 이집트를 점령하고 나면 오스만 투르크를 프랑스와의 동맹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고, 또 그렇게 되면 정말 인도의 안전이 위험해졌다고 느낀 영국이, 프랑스가 이집트에서 철수하는 조건으로 뭔가 프랑스에 유리한 내용의 평화안을 제시할 것이라고 내심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단, 나폴레옹은 정말 인도까지 쳐들어갈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팔레스타인의 생-장-다르크의 요새에서 그 꿈이 깨졌지만요.)
그런데 당시 이집트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영토였습니다. 투르크 영토를 침공하면서 투르크와 동맹을 맺겠다는 계획은 대체 어떤 미친넘의 머리 속에서 나오게 된 것일까요 ?
당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아직도 분명히 제국이었습니다만, 많이 삐그덕거리는 제국이었습니다. 제국의 각지에는 이런저런 파샤(태수)들이 거의 반독립 상태의 자치 정부를 구성하고 있었고, 이스탄불에 있는 오스만 황제인 술탄에게는 형식적인 조공만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이런 자치 정부의 파샤들은 분명히 이스탄불에서 임명하는 관직이었습니다만, 그건 형식상의 이야기 뿐이고, 실제로는 자기들끼리 전쟁을 벌일 정도로 독립적이었습니다. 다만, 전쟁을 벌이더라도 항상 "오스만 술탄의 명을 받들어 대역무도한 XXX를 치겠다"라는 식으로, 이스탄불 정부의 체면을 살려주는 형태를 띠었습니다. 많이 우습지요 ? 하지만 중국의 주나라 때의 춘추 시대나, 한나라 말기의 위촉오 삼국시대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이때 당시 오스만 제국 지방 정권들의 이야기는 Patrick O'Brian의 나폴레옹 시대 영국 해군 이야기인 The Ionian Mission 편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잭 오브리 함장은 서로 분쟁하는 여러 오스만 제국의 태수들 사이에서 정치적인 판단을 하여 그 중 가장 적합한 상대와 동맹을 맺고 이오니아 해에서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는 임무를 맡습니다.)
나폴레옹이 이집트에 상륙하던 당시, 나폴레옹에게 저항하여 전투를 벌인 세력도, 오스만 투르크의 정규군이 아니라 바로 이런 지방 정권의 부대였습니다. 이들은 마멜루크(Mameluke, Mamluk)라는 자들로서, 이슬람 세계 특유의 노예군이었습니다. 원래 이 마멜루크라는 단어 자체가 '구매된, 돈주고 산'이란 뜻입니다. 9세기 경부터 이슬람의 교황격인 칼리프들은 호위병으로 측근의 이슬람 명문 귀족 청년들 대신, 이슬람 종교를 갖지 않은 외국 노예들, 주로 아르메니아나 칩챠크인들을 사들여 군대를 구성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입장에서 보면 참 희한하다라고 생각이 들 수 있지만, 나름 현명한 수단이었습니다. 먼 외국에서 어릴 때 사들인 노예들은 이슬람 귀족 세력들과 어떠한 사적인 이해 관계도 갖지 않았으므로, 명문 귀족들을 적절히 통제해야 했던 칼리프나 술탄으로서는 매우 신뢰할 수 있는 병사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왕이나 교황도, 직속 호위병은 자국민이 아닌 외국 용병, 특히 스위스나 크로아티아 용병으로 편성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 였습니다.
(16세기 경의 마멜룩 기병들의 모습. 노예치고는 매우 멋있지요 ? 실제로 많은 이집트인들이 스스로 마멜룩 노예가 되기 위해 꽁수를 부리곤 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이슬람 세계를 정복한 오스만 투르크에서도 예니세리(Janissary)라는, 비슷한 형태의 노예들로 구성된 정예군을 편성했습니다. 이런 마멜루크나 예니세리들은 나중에 높은 군 고위 장교가 되었기 때문에, 어떤 역사가들은 마멜루크/예니세리 제도가 일종의 종교적 형평성을 위한 제도라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즉, 세금이 면제되었던 이슬람교도들은 대신 높은 군 장교직에 진출할 수가 없고, 세금에 시달리는 비이슬람교도들은 대신 자식들을 (비록 빼앗기는 형태가 되버리지만) 출세길로 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된다는 것이지요. 어린 자식을 말과 풍습이 다른 머나먼 이슬람 궁정으로 빼앗기면서 생이별을 하게 되는데 그게 왜 혜택이냐고요 ? 요즘 우리나라 부모들은 가산을 탕진해가면서까지 말과 풍습이 다른 머나먼 미국에 어린 자식들을 보내어 미국인을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습니까 ?
(피라미드 전투에서 마멜루크 기병대는 나폴레옹의 포병대와 보병방진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마멜루크들은 처음에는 이집트 이슬람 왕조의 호위병 역할을 하다가, 나중에는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들이 이집트의 지배자가 됩니다. 이들이 이집트를 몽고 및 유럽 십자군들로부터 지켜낸 주역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도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결국 오스만 제국의 일부가 됩니다. 그렇지만, 마멜루크들은 여전히 이집트의 실질적 지배자로 남아 있었고, 이스탄불에는 조공만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나폴레옹이 쳐들어온 것입니다. 이들은 피라미드 전투에서 대패한 뒤, 무력의 차이를 실감하고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집니다. 사실 이집트를 침공한 프랑스군은 2만7천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이집트 전역을 완전히 장악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주요 도시와 교통의 요지만을 점령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의 외무성을 뜻하는 Porte라는 단어는, 원래 저 높은 대문을 뜻하는 단어였습니다.)
애초에 이집트인들은 투르크 점령군을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외국인들로 구성된 마멜룩들을 좋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기독교도들인 프랑스군을 좋아하지도 않았지요. 그래서 나폴레옹은 "우린 기독교도가 아니라 너희들의 적인 카톨릭 교황을 무찌른 이슬람의 친구"라고 선전을 했습니다. 아울러, "투르크의 압제로부터 이집트를 해방시키러" 왔다고도 했지요. 그러다가 이도저도 다 제대로 먹히지 않자, 포르테(Sublime Porte, 오스만 투르크의 외무성을 일컫는 말)로부터 마멜룩 반도들을 무찌르고 이집트를 점령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는 거짓말까지 이집트 민중들에게 퍼뜨립니다. 물론 실패로 끝난 시리아 원정 및 투르크 정규군의 아부키르만 상륙으로 인해 그 거짓말도 금새 뽀록이 나버리고, 아무래도 이슬람교도들인 이집트인들은 차라리 같은 회교도인 투르크가 더 낫다는 태도로 나와, 나일강 전투로 해군을 잃고 나폴레옹마저 떠난 프랑스 원정군의 처지를 더욱 어렵게 만듭니다. 결국 프랑스군은 영국군이 이집트에 상륙하자 조건부 항복을 함으로써 긴 이집트 원정을 끝내게 됩니다.
프랑스 원정군의 운명은 그쯤 해두고, 루스탐의 이야기로 되돌아가지요. 아부키르만에 상륙한 투르크군을 무찌르고 이집트의 주인이 누구인지 분명히 한 나폴레옹에게, 카이로의 한 시크(sheik, 수장, 족장)가 아라비아산 명마와 함께 그를 돌볼 15살짜리 노예 마멜루크를 선물합니다. 그 어린 마멜루크의 이름이 라자 루스탐(Raza Roustam)입니다.
(1911년 뉴욕타임즈 신문의 루스탐 특집에 나왔던 그의 삽화)
루스탐은 이집트에 마멜룩 노예로 팔려온 소년이었지만, 원래 태생은 그루지야의 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 부모 밑에서 태어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소년 시절에 납치되어 이스탄불의 노예 시장에 팔려갔다가 거기서 다시 이집트의 마멜룩 군단으로 팔려간 것이지요. 그는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공할 때는 다른 마멜룩 고위 간부의 메카 순례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만, 돌아와보니 이집트는 나폴레옹 천하가 된 것을 알았습니다. 마멜룩으로서의 생활은 이제 끝장이라고 생각한 루스탐은 마멜룩 복장을 버리고 농부 차림을 하고 카이로로 들어와, 세상 물정을 염탐한 뒤, 나폴레옹이 꽤 근사한 실력자라는 것을 알고는 수를 써서 그의 휘하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실 루스탐은 우연히 나폴레옹에게 선물로 주어진 노예는 아니었던 것이지요. 이때 나폴레옹은 이미 두명의 마멜룩 시종을 데리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이집트를 떠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으므로, 루스탐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루스탐은 나폴레옹을 따라 프랑스까지 옵니다. 영국 군함을 따돌리고 프랑스로 오는 배 안에서, 루스탐은 프랑스 병사들의 말에 몹시 두려워 했다고 합니다. 프랑스 병사들이 계속 "프랑스에 도착하기만 하면 넌 목을 잘리게 될 거다, 이집트에서 니들 마멜룩이 우리 병사들을 잡으면 항상 그랬쟎냐"라고 놀렸던 것입니다. 그는 나폴레옹에게 개인적으로 그런 일 없을 거란 것을 확인한 뒤에야 안심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나폴레옹에게 어떤 대접을 받고 살았을까요 ? 한마디로 괜찮았습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내 주변은 나로부터 뭔가 뜯어내려는 프랑스인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루스탐은 다르다. 그는 오로지 애정으로 내 곁에 남아 있다."
그가 이렇게 루스탐을 애지중지했던 것은 나폴레옹 자신의 허영심과 루스탐의 헌신이 묘하게 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루스탐 자신은 정말 오리지널 마멜루크 전사처럼, 나폴레옹 외에는 프랑스에 아무 친구도 친척도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나폴레옹에게 의존했고 그에게 충성했습니다. 밤에 잘 때도 나폴레옹의 침실 문간 앞을 가로지른 자세로 잤기 때문에 누구든 밤에 나폴레옹의 침실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의 몸을 넘어가야 할 정도였습니다. 나폴레옹으로서야 그런 루스탐을 신뢰할 수 밖에 없었겠지요. 게다가 나폴레옹은 자신이 이집트에서 작전을 펼쳤던 것을 몹시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말메종의 자신의 집 내부를 이집트 풍으로 장식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이집트에서 데려온 마멜룩 시종이 있다는 것은 더욱 그를 돋보이게 해주는 존재, 가방으로 치면 루이뷔똥 브랜드였던 것이지요. 실제로 저 위에 들었던 예처럼, 틸지트 회담에서 프로이센의 왕비 루이제도 나폴레옹의 독특한 시종 루스탐의 이름까지 알고 있었으니, 나폴레옹이 노렸던 '명품 효과'는 확실히 있었던 모양입니다.
(나폴레옹을 그린 그림들에 나오는 저 터번을 쓴 사람이 바로 루스탐입니다. 루스탐의 저 터번 때문에 나폴레옹은 종종 적군의 표적이 되곤 해서, 나중에는 나폴레옹이 그런 터번을 못쓰고 다니게 했다고 합니다.)
다만 나폴레옹은 정말 루스탐이 오로지 자신에 대한 애정으로 자신에게 봉사하고 있다고 생각을 했었는지, 몇년간, 심지어 황제가 오른 뒤까지도 루스탐에게 한푼의 급료도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돈 욕심이 없는 친구라고 해도, 그렇게 몇년간 한푼도 없이 지낸다면 매우 곤란했을 것입니다. 결국 루스탐은 이집트에서 가져온 옷가지들을 내다팔기에 이릅니다. 다행히 어느날 밤, 문간에 누워자던 루스탐을 나폴레옹이 깨워 밤참을 가져오게 하다가 나폴레옹이 농담 삼아 '자네 나에게 돈 좀 꿔줄 수 있나'라고 묻습니다. 그 자리에서 비로소 몇년간 루스탐이 돈 한 푼 없이 지냈다는 것을 안 나폴레옹은 그에게 900 프랑의 파격적인 월급을 줍니다. (당시 장군 월급이 약 600 프랑이었으니까 엄청난 액수였지요. 그러나 베시에르가 그 중 400 프랑을 삥땅칩니다.) 그러나 루스탐은 속으로 '그간 몇년간 지급되지 않았던 월급은 소급을 안해주는구만'하고 몹시 서운해했다고 합니다.
루스탐은 사실 돈 욕심이 꽤 있었던 친구였습니다. 나폴레옹은 루스탐 외에도, 나중에 이집트로부터 2~300명 정도의 마멜룩 기병대를 수입해서 마멜룩 기병 중대를 편성했습니다. 루스탐도 형식적으로는 이 중대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멜룩 중대장이 (아무리 형식적이라지만) 루스탐의 이름이 중대 월급 목록에 들어있는데도 루스탐에게 기병 중대원으로서의 월급을 주지 않자, 집요하게 조르고 졸라 결국 밀린 월급을 (할부로) 받아내고는 다 받아내자 달랑 제대를 해버립니다.
(1808년 5월 2일 마멜룩의 돌격. 무려 고야의 그림입니다. 나폴레옹의 대군단(Grande Armee)에서 복무한 마멜룩은 저 붉은 바지와 흰 터번을 특징으로 했고, 무장은 이집트에서처럼 긴 시미타르 검과 여러자루의 권총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아우스테를리츠에서도 상당히 잘 싸워 무훈을 세웠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이 1814년 퐁텐블로에서 폐위되자, 루스탐은 온다간다 말도 없이 그냥 스르르 사라져버리고, 엘바섬으로 따라가지는 않습니다. 사실 루스탐 외에도 나폴레옹의 심복 비서인 콩스탕도 은그릇 등 속을 챙겨 사라져 버립니다. 그로 인해 나폴레옹은 극심한 분노와 허탈에 사로잡힙니다. 자신이 그토록 아껴주고 특권과 재산을 안겨주었던 심복들이, 정작 자신이 몰락하자 냉큼 자기를 버릴 줄은 몰랐던 것이지요.
(엘바섬으로 유배를 떠나기 전, 자신의 근위대와 작별을 고하는 나폴레옹)
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탈출하여 튈르리 궁에 재입성하자, 루스탐은 슬그머니 돌아와 다시 나폴레옹을 모시기를 원했지만, 나폴레옹은 그의 편지를 찢어버리며 대노합니다. 이 소식을 접한 루스탐은 현명하게도 슬그머니 다시 사라져 와이프의 고향인 파리 근교 두르당(Dourdant)에서 우체국에서 근무하며 조용히 삽니다. 루스탐은 부르봉 왕가로부터 잠재적인 보나파르트 주의자(Bonapartist), 즉 요주의 인물로 찍혀 감시를 당합니다. 한번은 그가 영국으로 여행을 가는 바람에 그 목적이 영국의 보나파르티스트들과 접선하는 것으로 오해한 정부 당국을 바짝 긴장시킵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전통적인 마멜룩 복장을 하고, 영국 런던의 극장의 여흥거리에 출연하기 위해 여행을 했던 것입니다. 그는 여전히 돈을 좀 밝히는 편이었습니다. 그는 두르당에서 계속 조용히 살다가 1845년에 숨을 거둡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는 대체 어떻게 상세히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냐고요 ?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하고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귀양간 이후, 한동안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은 부르봉 왕정 하에서 금기시되는 단어였습니다. 그러나 일단 나폴레옹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그와 관계되었던 모든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나폴레옹 회고록을 써대기 시작합니다. 물론 이런 회고록들의 내용은 당시 자신의 역할을 과장하거나 자신의 행동을 거짓말로 정당화하는 등 당대의 입맛에 알맞게 윤색이 되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당시 파리 근교의 두르당(Dourdan)에서 프랑스인 부인과 근근히 살고 있던 루스탐에게도 이 회고록 열풍이 불어닥쳤던 것입니다. 그는 명백히 돈을 벌 생각으로, 문법과 스펠링이 엉망인 회고록을 썼습니다. 그러나 일개 시종이었던 그의 회고록은 출판업자나 독자들의 관심을 그리 끌지 못했고, 덕분에 두르당의 루스탐네 집에서 썩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영국인 잡지 편집장이 그 문서를 발견하고 세상에 출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별로 잘 팔리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도 역시 다른 회고록들처럼,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노력이 역력하다고 합니다.
가령 왜 루스탐은 자신을 그토록 신뢰하던 나폴레옹이 엘바섬으로 유배될 때 따라가지 않았을까요 ? 루스탐의 회고록에 따르면, 엘바섬으로 유배되기 직전 퐁텐블로에서 나폴레옹이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친구'에게서 들었는데 (이 자살 미수 사건은 사실이었지요), 그때 그 '친구' 이야기가, 만약 나폴레옹이 그렇게 죽는다면 사람들은 너 루스탐이 연합국에게 매수되어 나폴레옹을 독살했다고 믿을 거라고 했답니다. 그 말에 놀란 루스탐은, '어쩔 수 없이' 나폴레옹에게 '때가 되면 다시 모시겠다'는 편지를 남기고 총총히 사라져야 했다고 합니다. 원통하게도 그 편지는 나폴레옹에게 전달되지 않았고요. 그래서 나중에 나폴레옹이 복위되자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폴레옹에게 다시 모시겠다고 연락을 했는데, 나폴레옹이 오해를 하고 자신을 내친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는 그럴 듯 한가요 ? 글쎄요, 저는 "비겁한 변명"이라는 생각이 좀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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