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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공격이냐 수비냐 - 나폴레옹과 웰링턴

by nasica-old 2009.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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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오래전에 읽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만, 신필 김용 선생의 명작(사실 김용 선생의 작품치고는 약간 졸작)인 의천도룡기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각원대사가 숨이 끊어지기 전에, 자신이 외운 구양진경의 내용을 제자인 장군보(훗날의 장삼봉)에게 읊어주자, 옆에서 곽양이 함께 듣다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니다, 이건 아니다, 저 말처럼 수비 위주로 해서는 안된다. 아버지께서도 항상 수세에 몰리지 말고 공세를 펼쳐 싸움의 주도권을 잡으라고 가르치지 않으셨던가?"




(혹시 아세요 ?  의천도룡기가 이미 절판되었답니다. 저는 김용 선생의 작품들은 모두 100년 넘게 가는 스테디 셀러라고 믿었는데 말이지요.)



혹시 이 의천도룡기를 안 읽으신 분들을 위해 사족을 달면, 곽양 소저의 부친은 강호에 명성이 드높은 곽정 곽대협 바로 그 분이십니다.  뭐요 ?  곽정 곽대협을 모르신다고요 ?  ㅉㅉㅉ...


곽정 곽대협을 모르시는 분들도,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최근에 저는 라디오에서 그 말을 다시 들었습니다.  요즘 아프간에 한국이 파병을 하네마네하고 말이 많은데요, 경비 병력을 얼마나 보낼 것인가 논란이 있습니다.  제가 라디오에서 들은 말은 병력의 규모가 클 수록 안전하며, 공격이 최선의 방어가 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말이었습니다.




(파병 찬성하는 국회의원 중에서 자기 아들 보내겠다는 사람은 아마 없다지요 ?)



어느 정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19세기 초의 군사 천재였던 프랑스의 한 대인께서도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이 바로 그 분입니다.  


'전쟁론(Vom Kriege)'을 써서 서양의 손자라고 일컬어지는 클라우제비츠(Carl Philipp Gottfried von Clausewitz)는 나폴레옹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전쟁의 신, 그 자체이다."  그렇다면 전쟁의 신은 어떤 전략과 전술을 주로 활용했을까요 ?  왜 다른 장군들은 나폴레옹을 흉내내지 못했을까요 ?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저는 영문판으로 사놓기만 하고 전혀 못읽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지루해 보이는 내용이더라구요.)



나폴레옹은 사실 전쟁이나 전략 등에 대해 주변 사람들에게 연설을 하지도 않았고, 수준 높은 책을 쓴 바도 없습니다.  (그가 직접 쓴 것은 청년 시절에 쓰다만 얼치기 연애 소설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그가 펼친 작전을 바둑의 기보처럼 찬찬히 살펴 보면, 나폴레옹의 기본 전략이 대략 어떤 것인지가 눈에 보입니다.   그를 대략 3가지로 요약하면, 공격, 집중, 그리고 기습입니다.  그리고 그를 가능케 한 것은 바로 속도였습니다.



1. 적 병력의 격멸


나폴레옹 이전 시대의 전쟁은 국가들 간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각국의 왕가들 간의 전쟁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그러다보니 전쟁의 목적은 영토 같은 이권이었고, 굳이 그런 이권 때문에 어느 한쪽이 완전히 멸망할 정도로 전면적인 전쟁을 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즉, 지극히 제한적인 전투가 벌어졌고, 전투도 주로 어떤 전략적 위치를 점령 또는 방어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기베르(de Guibert)가 자신의 저서 '전술학 개론'에서 예언했듯이 ( 나폴레옹은 어떤 공부를 했길래 군사적 천재가 되었을까 ? http://blog.daum.net/nasica/6862360 참조 ), 나폴레옹 시대의 전쟁은 국민 전쟁의 형태를 띠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투의 목적도 단순히 어떤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어떤 장소를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적국에게 자신의 정치적 의도를 강요하기 위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나폴레옹은 사관생도 시절 기베르의 저서를 탐독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나폴레옹은 항상 전쟁의 목적은 전투이고, 전투의 목적은 적 병력의 격멸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시시하게 어떤 요충지를 점령한다든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가령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를 두번이나 점령했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두번 모두 비엔나 점령 직후 각각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와 바그람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의 주병력을 격파했다는 것입니다.  비엔나 점령은 목적이 아니라 적에게 전투를 강요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습니다. 




(비엔나도 좋지만 더 좋은 것은 바로 이것 ! 아우스테를리츠의 승리)


나폴레옹이 1797년에 이런 명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내 목표는 오직 하나, 즉 적의 주력 부대이다.  나는 그것을 격파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것을 이루고나면 나머지 문제들은 그냥 놔둬도 스스로 해결된다."


지금의 관점으로 생각해도 정말 맞는 말입니다.  나폴레옹은 항상 이 점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병력의 이동이나 전투의 개시 등이 모두 남다른 효과를 냈던 것입니다.  하지만 딱 한번, 이 원칙에 맞지 않은 전쟁을 벌인 적이 있었고, 그 실수가 곧 그의 파멸로 이어집니다.  러시아군의 격멸보다는 그저 모스크바 점령을 목표로 삼았던 러시아 원정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이 평소에 안하던 짓 하면 망한다더니... 모스크바 화재에 당황하는 나폴레옹)



2. 전광석화 같은 집중


맥아더 장군이 한 말이라고 합니다만, 정말 맞는 말이 있습니다.  "전쟁이란 것은 간단하다.  숫자가 더 많은 편이, 숫자가 더 적은 편을 이기는 것이다."   만약 맥아더 장군의 말이 맞다면,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할까요 ?




(감히 웨스트포인트 출신인 내 말에 토다는 색희는 원자탄을 그냥 확...)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당시 유럽의 인구 지도는 요즘과는 많이 달라서, 당시 프랑스는 전체 유럽 인구의 약 1/6을 차지하는 거대한 인구 대국이었습니다. ( 나폴레옹과 인구, 그리고 돈 http://blog.daum.net/nasica/6862371 참조)  하지만 프랑스 혼자서 전체 유럽 열강과 맞서 싸우기에는 턱없이 병력이 부족했지요.  당시의 유럽 강국들인 영국,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러시아, 스페인, 스웨덴 등은 모두 프랑스 혁명 진압이라는 공통된 목표 하에 뭉친 연합국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나폴레옹은 이들 모두를 항상 궁지에 몰아넣었고, 승리를 거듭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


나폴레옹은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제갈공명처럼 뭔가 기발한 전술을 끊임없이 창조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원칙, 즉 우리편은 뭉치게 하고, 적은 분산시켜서, 아무리 많은 적과 상대하더라도 정작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전장에는 프랑스군이 숫적 우세를 점하도록 한 것 뿐이었습니다.  Divide and conquer, 즉 분산 후 각개격파라는 것은 고대로부터 수없이 반복되어온 전략이자 전술입니다만, 사실 모두가 아는 원칙을 글자 그대로 수행하는 것이야 말로 대단한 능력이지요.




(말로는 쉽지만 그게 어디...)



사실 많은 적장들이 도저히 흉내내지 못한 나폴레옹의 특기가 바로 이 이 부분입니다.  나폴레옹은 이 원칙의 구현을 위해 무엇보다도 군대의 기동성을 중시했습니다.  숙영의 문제도 그렇고 ( 나폴레옹과 케사르의 차이점 - 진지 구축 http://blog.daum.net/nasica/6862388 참조) 군량 조달의 문제도 그렇고, 스피드를 위해서라면 자잘한 것들은 모두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연합국 장군들은 긴 병참선의 지원 없는 작전은 상상하기 힘들어 했지요. 


게다가, 나폴레옹은 제1통령 또는 황제로서,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질 필요가 없었고, 특히 스스로 천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데 시간이 거의 걸리지 않았습니다.  전쟁을 시작하는 것도, 전투에 돌입하는 것도 항상 적의 예상을 앞질렀습니다.


덕분에 나폴레옹은 항상 많은 수의 적군을 상대로 했지만, 정작 전투가 벌어질 때 전장에서 보이는 것은 프랑스군의 푸른 제복이 더 많았습니다.  가령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는 프러시아가 참전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영국 침공을 준비하던 부대를 이끌고 중부 유럽을 횡단하여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무찔렀고, 예나 전투에서도 러시아의 원군이 접근하기 전에 프러시아 군을 격파했습니다.  그의 명성을 쌓게 해준 이탈리아 원정에서도, 항상 그는 오스트리아 군이 아직 분산되어 있을 때 공격했고, 그럴 때마다 승리했습니다.  


아우스테를리츠에 직접 참전했던 러시아 황제 알렉상드르의 표현이, 바로 그런 점을 더욱 생생하게 증언해줍니다.




(히틀러를 무찌른 건 처칠보다는 스탈린, 나폴레옹을 물리친 건 웰링턴보다는 알렉상드르 1세)



"1805년 나폴레옹이 보여준 부대 기동은 그가 공격한 어느 한 곳도 우리가 구원할 시간을 주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그의 부대는 전장 어느 곳에서나 아군의 두배가 넘는 것처럼 보였다."



3. Shock and Awe (충격과 공포)




(충격과 공포는 꼭 레이저 유도 폭탄이 있어야 줄 수 있는 건 아니지요)



위에서 나폴레옹은 항상 공격으로, 그것도 빠른 공격으로 기선을 제압한다고 했습니다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전투에서의 승리 그 자체로 만족하지는 않았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그의 부하 원수들조차도) 나폴레옹을 피에 굶주린 전쟁광이라고 불렀습니다만, 사실 나폴레옹은 전쟁터를 헤매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가만 보면 나폴레옹은 항상 자신의 제국에 위협이 나타날 때 그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만 검을 들었고, 전투가 끝나면 항상 그 전과를 이용하여 적국과 평화를 맺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게 적으로 하여금 나폴레옹이 제시하는 조건에 따라 평화 조약을 맺도록 강요하기 위해서는, 적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어 완전히 저항 의지를 끊어 놓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보통의 소모전 끝의 고된 승리가 아닌, 확실하고 일방적인 승리가 필요했습니다.




(이탈리아 전역에서 승리 후, 나폴레옹은 1797년 캄포 포르미오 협정에서 일개 장군 주제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물로 성장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폴레옹은 항상 적의 예상을 뛰어넘는 기습 작전을 펼쳤습니다.  그 기습의 목표는 주로 적의 보급 및 통신을 단절하기 위한 우회 기동이었습니다.  여기서 다시 나폴레옹 특유의 '발로 뛰는 전쟁', 즉 기동성을 중시하는 작전이 빛을 발했지요.  이렇게 적의 측면 또는 배후에서 갑자기 나타난 나폴레옹군을 보고 적군이 보급선이나 퇴로를 걱정하게 되면, 적에게 남은 점은 두가지 뿐이었습니다.  즉, 황급한 후퇴이거나 불리한 위치에서의 전투였지요. 


특히 이런 점에서 나폴레옹은 기병(騎兵)을 중시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기병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기병은 전투 전에, 전투 중에, 그리고 전투 후에 매우 유용하다."


나폴레옹은 전투 전에 우회 기동을 할 때면 기병대를 앞에 내세워 적을 상대하게 함으로써 이쪽이 어떤 기동을 하고 있는지 볼 수 없도록 가림막을 쳤습니다.  또한 적이 패배하거나 전략적인 퇴각을 택해 후퇴할 때, 기병들이 득달처럼 달려들어 진영을 갖추지 못한 적을 철저히 짓밟았습니다.  




(예나 전투 이후 환호하는 나폴레옹의 병사들)



나폴레옹이 전쟁 발발 불과 몇 주만에 예나-아우어슈타트 전투에서 프러시아군을 완파하고 베를린은 물론 바르샤바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예나-아우어슈타트 전투에서 패배하고 후퇴하는 프러시아군을 뮈라(Murat)의 기병대가 무자비하게 추격 섬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러시아의 동맹국이었던 러시아의 베니히센 장군이 구원병력을 이끌고 한발 늦게 달려왔을 때, 불과 한달 전에 15만의 병력을 자랑했던 프러시아의 정예병력은 불과 1만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설마 그들이 다 죽었겠습니까 ?  (실제 두 전투에서의 프러시아군 전사 및 부상, 포로 숫자는 약 5만도 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전광석화와 같은 패배와 추격으로 인해, 프러시아의 패잔병들이 재규합될 시간적 정신적 여유를 주지 않았던 것이지요.




(도망치는 등 뒤에 이런 애들이 시퍼런 칼 뽑아들고 나타나면 정신이 혼미해져요)



이렇게 보시다시피, 나폴레옹은 기본 전략은 공격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재빠른 집중 기습 공격입니다.  간단하지요 ?  잊어서는 안되는 점은 나폴레옹은 항상 공격을 했다는 점입니다.  나폴레옹은 단 한번도 방어전을 펼치지 않았습니다.  (물론 아우스테를리츠에서처럼 함정을 놓기 위해 수세를 가장한 것은 예외입니다.)  그는 항상 적군을 찾아나섰고, 자기가 원하는 곳에서 적이 전투를 벌이도록 적에게 강요했습니다.  심지어 1813년~1814년의 패퇴기에 프랑스로 침공해오는 적과 싸울 때도 그는 항상 공격을 했지 참호를 파고 적의 공격을 기다리지는 않았습니다.




(연합군이 프랑스 국내로 침공한 뒤에도 나폴레옹에게는 오직 공격 뿐)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나폴레옹이 어떤 요새에 틀어박혀 방어전을 펼친다면, 그는 더 이상 천재도 아니고, 나폴레옹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장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방어진 안에서 어떻게 기동전을 펼칠 것이며, 어떻게 적의 의표를 찌르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  방어는 수동적이고, 적의 공세에 대응을 하는 것이 고작입니다.  그래서는 필연적으로 적에게 모든 주도권을 내주고, 더 많은 자원을 가진 적에게 결국 당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수비 전술로 승승장구했고, 결국 나폴레옹을 운명의 결전장에서 패배시킨 장군이 있습니다.  바로 철의 공작, 웰링턴이었습니다.




(내 이름은 웰링턴이야.  우리 형제들은 모두 매부리코라서 옆면 초상화 따위는 안그려.)



웰링턴은 스페인-포르투갈의 반도 전쟁에서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명성에 흠이 있다면 딱 하나, 항상 나폴레옹의 부하들과 툭탁거렸을 뿐 정작 나폴레옹 본인과는 싸워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인데요, 1815년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을 꺾음으로써 그의 영광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전술을 보면 하품이 나올 정도로 지루한 구석이 있습니다. 


1810년 포르투갈을 침공하는 프랑스의 마세나 원수를 저지하기 위해 웰링턴이 이끄는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은 부사코(Busaco) 능선에 방어선을 칩니다.  여기서 웰링턴의 전형적인 수법이 나옵니다.  즉, 주병력은 언덕 능선 너머에 숨겨두어 적 포병이나 사격으로부터 보호하고, 능선에는 장교들과 포병대만 노출시켜 고지대로 힘겹게 올라오는 프랑스군에게 포격을 퍼붓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프랑스군이 머스켓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면 비로소 능선 뒤의 주력 보병들을 전진시켜 영국군 특유의 속사를 퍼붓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전술로 마세나의 프랑스군은 큰 피해를 입고 일단 패퇴합니다.




(부사코 전투.  비탈길 올라오는 것만으로도 힘든 프랑스군을... 잔인한 앵글로색슨놈들)



웰링턴의 수비 선호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부사코 고지에서 승리를 거두고도, 정작 후퇴를 한 것은 웰링턴이었습니다.  그는 대담하게도 (혹은 뻔뻔스럽게도) 그 코딱지만한 포르투갈에서 후퇴 및 청야 작전을 펼친 것입니다.  그는 코임브라 시 등 많은 포르투갈의 도시와 마을들이 프랑스군에게 점령/약탈 당하는 것을 애써 외면하면서, 리스본 코 앞까지 후퇴하여 거기 미리 구축해둔 강력한 2중 방어선인 토레스 베드라스(Torres Vedras) 방어선 뒤로 숨어버립니다.  그 뒤에서 프랑스 군이 보급품 부족으로 굶다가 후퇴하기를 기다렸던 것이지요.  이 이야기는 Sharpe's Escape 그리고 초토작전 http://blog.daum.net/nasica/6862355 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웰링턴은 워털루에서도 똑같은 수법, 즉 능선 뒤에 보병을 감추고 능선 위에는 포병대만 늘어놓는 방어전법으로 결국 나폴레옹을 패퇴시킵니다.  (사실 블뤼허의 원군이 없었다면 결국 웰링턴이 패배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기억해주는 것은 바로 나, 나폴레옹.  그것도 바로 이런 모습으로 !)


아무튼 웰링턴은 수비 전술로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오늘날의 평가에 있어서, 나폴레옹과 웰링턴은 결코 동급으로 평가받지 않습니다.  나폴레옹은 국가를 쓰러뜨리고 왕가를 굴복시키는 전략과 전술을 모두 가진 위대한 장군이자 정치가, 아니 글자 그대로 황제였던 반면에, 웰링턴은 고작 수비 전술 하나를 주특기로 가진 유능한 장군일 뿐이었기 때문이지요.   무엇보다, 공격하다가 망한 사람은 많아도 수비만 하다가 왕후 장상이 된 사람은 없쟎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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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본문이었고요, 혹시나 싶어서 부탁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원래 추천 같은 건 별로 신경을 안쓰는데요, 과연 제 글을 끝까지 읽으시는 분이 몇분이나 계신지 궁금하네요. (실은 저도 인터넷에서 재미있는 글이 나와도 너무 길면 보통 끝까지 읽은 엄두를 못내거든요.)  혹시 여기까지 읽으셨으면 아래 추천 버튼 한번 눌러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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