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책을 두권 읽었습니다. 둘다 고전물은 아닌데, 하나는 (적어도 제가 보기엔) 신필 김용 선생급인 서양의 대인배 스티븐 킹 선생의 "스탠드 (The Stand)"이고, 또 하나는 저는 잘 모르는 작가인 코맥 맥카시(Cormac McCarthy)의 "더 로드(The Road)"입니다.
(적어도 초반부는 정말 손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박진감 넘칩니다.)
("이 책은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내용이 아니다, 모든 부모들이 가지는 공포심에 대한 내용이다..."라는 서평이 있고, 그에 매우 공감합니다. 저도 이 책 읽으면서 통조림 못지 않게 우리 애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두권의 공통점은 둘다 인류 멸망을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탠드"에서는 미군 당국이 연구 중이던 수퍼 감기 바이러스 병기가 사고로 누출되어 삽시간에 전 인류의 98%가 사망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소설의 전반부는 치명적인 수퍼 바이러스가 어떤 식으로 누출, 전염되며 인류를 멸망으로 이끄는지, 후반부는 면역성을 가진 덕택에 살아남은, 전 인류 중 2%의 생존자들(미국 인구 2억의 2%만 해도 4백만명이니까 적은 수는 아니지요)의 갈등과 희망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아래로는 아주 약간의 스포가 있으니 유의...)
"더 로드"에서는 인류가 왜 멸망했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도 핵 또는 그 비스무리한 수퍼 병기에 의한 전쟁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무튼 대부분의 인구는 이미 죽었고, 온 세계는 재투성이의 암울한 세계가 됩니다. 이제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 그 중에서도 아버지와 어린 아들의 생존을 위한 암담한 노력이 그려집니다.
이 두 책은 모두 인류 멸망 그 이후를 그리고 있습니다만, 그 색채는 완전히 다릅니다. "스탠드"에서는 세상은 그대로이고, 단지 사람들의 대다수가 죽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TV도 안나오고 전기도 끊겼지만, 그래도 각종 물질 문명의 잔재 대부분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자기 입맛에 맞게 즐기기도 합니다. 원하기만 하면 원하는 자동차, 의류, 보석, (아무 의미 없지만) 돈, 부동산 등을 마음대로 가질 수 있으니까요. 무엇보다도 식량은 (적어도 당분간은) 무궁무진합니다.
하지만 "더 로드"에서 그리는 세계는 그야말로 흑백의 세계입니다. 인류 멸망의 원인이 핵전쟁이든 운석 충돌이든, 그런 대폭발의 열로 인해 온 세계가 다 새카맣게 타버렸고, 특히 그 폭발의 결과로 생긴 재와 먼지로 인해 대기권에 먼지층이 생겼는지 하늘은 항상 잿빛으로 태양이 사라지고 검댕투성이의 비가 자주 내립니다. 한마디로,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살아남은 것이 없습니다. 이런 세계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생존자들은 과연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할까요 ?
(이 책도 영화화되었습니다. 반지의 제왕 아라곤이 암담한 시대의 절박한 아버지로 나옵니다. 한국에서는 내년 1월에 개봉한답니다.)
처음에는 타버리지 않은 약간의 저장 식품류를 먹고 살았을 겁니다. (이 소설을 읽고나면 마트에 달려가서 많은 양의 통조림을 사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끝까지 대체 몇년 전에 파국이 있었는지 밝히지 않습니다만) 대략 10년 정도가 흐른 뒤, 농사는 커녕 잡초 한포기도 자라지 않는 잿빛 지구에서, 식량은 거의 자취를 감춥니다. 이 소설 초반부에 길을 걷는 아버지와 아들이 대체 무엇이 두려워 자꾸 주변을 살피는지 궁금했습니다만, 그 이유를 곧 알 수 있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책을 읽으시고 (특히 어린 자녀분이 있는 분들은 꼭 읽어보십시요) 여기서는 그냥 딱 한마디만 하지요. Dog eats dog...
우리들은 어려서부터 식인종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주로 남태평양이나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그런 식습관을 가지고 있다고 들어왔지요. 그러나 사실 식인종이라는 것은 없다고 하는 주장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식량 부족이나 원한, 또는 주술적인 마력을 위해 일시적으로 사람을 먹는 경우는 있겠습니다만, 사람이 다른 먹을 것이 있는데도 사람 고기를 즐겨 먹는 일은 역사적으로 없었다는 것이지요. 가령 남태평양인지 남아메리카인지의 원주민들 중에는 친한 일가 친척이 죽으면 그 시신의 일부를 식구들이 나눠 먹는 풍습이 있는데, 그건 일종의 주술 의식 같은 것일 뿐, 좋아서 먹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또 중국만 하더라도 역사책에도 대역죄인을 죽여 그 고기로 젓갈을 담궈 나눠먹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그건 진짜 원한과 관계된 것이지요.
(자기 자식인 어린 포세이돈을 잡아먹는 크로노스. 아, 배가 고파서 먹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무려 루벤스의 그림입니다.)
하지만 전세계적으로, 기아로 인해 사람 고기를 먹은 역사는 항상 있어왔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90년대 후반 북한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고 (탈북자들을 만난 교회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믿거나 말거나) 하고, 1972년 비행 중에 안데스 산맥에 불시착한 우르과이 럭비팀 및 그 가족 이야기도 있습니다. 생존자들은 약 2달 동안 구조를 기다리며 살아남기 위해 죽은 동료들을 먹어야 했습니다. 사실 살기 위해 사람을 먹는 일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동부 전선의 레닌그라드나 스탈린그라드에서는 소련군과 독일군 양측에서 모두 일어났던 일입니다. (물론 포위된 측이 시체를 먹었지요.) 그나마 시체를 먹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고, 일본군은 살아있는 연합군 포로를 살아있는 상태로 포를 떠먹는 스킬을 시전하기도 했습니다. 일본놈들 욕할 때가 아니지요. 우리나라만 해도, 임진왜란 때 굶주린 우리 백성들은 자기들끼리 강한자가 약한자를 잡아먹는, "더 로드"에나 나오는 비극이 발생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생존을 위한 노력이라는 인간 승리적인 요소보다는, 식인이라는 자극적 이야기로 더 유명한 우르과이 럭비팀의 실화를 영화화한 "Alive")
결국 알고보면, 식인종이라는 것은 먼 아프리카나 남태평양 어느 섬에 사는 것이 아니라, 소위 문명인이라는 우리 자신들 속에 숨어 있는 것 뿐입니다. 우리 내면에 숨어있는 식인종이라는 괴물은 과연 언제 튀어나올까요 ? 즉, 과연 며칠이나 굶으면 사람이 고기로 보이게 될까요 ?
여러분들은 최장으로 굶어보신 것이 며칠이나 굶어보셨습니까 ? 생각해보니 저는 만 하루를 완전히 굶어본 적도 없더군요. 최장으로 굶은 것은 두끼였습니다. (밥을 안먹고 사과 1개로 때웠다는 것은 제대로 굶은 것이 아닙니다.) 제게 90년대 후반에 북한의 기아 사태 때 북한 주민들이 아기를 잡아먹은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신 교회 분의 말씀에 따르면, 한 3일 굶고나면 일단 정신이 몽롱해지고 사리분별이 잘 안된답니다. 그러다가 2주일 정도 굶으면 뭐든지 먹게 된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우리 내면의 괴물이 튀어나오는데까지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건 경우마다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약 1달 정도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도 살아남은 전쟁 포로들도 많고, 의사들에 따르면 인간은 3주 정도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가령 마하트마 간디께서는 70대의 나이에도, 3주간 단신을 하시고도 멀쩡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건 먹을 것을 곧 쉽게 구할 수 있을 경우의 이야기이고, 사방 천리에 먹을 것이라고는 사람 뿐이고, 더구나 그런 상황이 몇달 정도 계속될 수 밖에 없다고 하면, '불과' 1~2주 굶은 후에도 동료의 시체를 먹게 되나 봅니다.
(식인 이야기가 나오는 고어물이 살짝 될 뻔하다가 다행히 점잖은 영국 로열 네이비 이야기로 되돌아간 "The Fortune of War")
나폴레옹 시대에도 이런 식인 사건이 보고된 바가 있었을까요 ? 다행히도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내내, 장기적인 포위 전투가 거의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바다에서라면 어땠을까요 ? 가령 제가 좋아하는 역사 소설인 Aubrey-Maturin 시리즈 중 "The Fortune of War" 편에, 주인공 잭 오브리 함장이 탄 배에 화재가 발생하여 몇몇 선원들과 함께 작은 보트를 타고 표류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망망대해인 남대서양을 그렇게 1~2주 헤매다가 선원 하나가 발작으로 죽자, 보트에 탄 사람들은 그 시체를 평소 하던 것처럼 뱃전 너머로 버리지 않고, 무언의 동의 하에 보트 바닥에 남겨둡니다. 다만 아무도 아직 '이 친구를 먹자'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뿐이지요. 잭 오브리 및 그의 선원들은 다행히도 며칠 만에 동료 영국 군함에게 구조됩니다만, 제 생각에는 그렇지 못하고 사라져간 난파 선원들이 상당히 많았을 것 같습니다.
나폴레옹 시대 문명인들의 식인 스캔들 중 가장 큰 것은 워털루 전투가 나폴레옹의 패배로 이어진 바로 다음해인 1816년 일어납니다. 이제 막 복귀한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는 승전국인 연합국들의 요구 조건들을 대부분 수용하는 것으로 협약을 맺고, 대신 혁명 전에 프랑스가 소유했다가 영국에게 빼앗긴 해외 식민지들 중 일부를 되찾습니다. 그 중 하나가 아프리카의 세네갈이었습니다. 이 세네갈을 영국으로부터 접수하기 위한 관리, 군인 및 그 가족들은 나폴레옹 전쟁에서 영국 해군과 맞서 싸웠던 프랑스 프리깃함 메두사(Meduse)호를 타고 출항합니다.
(메두사 호의 난파... 이해들 하세요, 프랑스 애들이 바다에서 하는 일이 다 그렇죠 뭐)
이 메두사호에는 불행의 씨앗이 2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 함장이었습니다. 함장인 드 쇼므레이(de Chaumereys)는 마지막으로 항해라는 것을 해본 것이 20년 전일 정도로 실무에 맞지 않는 사람이었으나, 루이 18세를 따라 해외에서 고생했던 망명 귀족이라는 이유로 함장직을 따낸 무능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en flute(앙 플루이트)였습니다. 이는 더 많은 짐 또는 승객을 싣기 위해, 군함의 대포 대부분을 떼어내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이 40문짜리 프리깃함인 메두사호에는 정상적인 프리깃함의 탑승인원인 약 250~300명 정도가 아니라, 승무원 포함 총 400여명의 인원이 타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롱보트, 커터, 바지(barge)선 등 작은 보트들의 수를 더 늘릴 수는 없었습니다. (원래 이 보트들은 상륙이나 독립 작전 등 각자 임무가 따로 있는 것이지, 구명정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이 무능한 함장이 몰던 배는 현재의 모리타니아 해안에서 약 100km 떨어진 곳에서 좌초되고 맙니다. 배를 다시 바다에 띄워보려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자, 함장 및 고위 관리 등은 프리깃함의 정규 보트들인 롱보트, 커터, 바지(barge)선들을 타고 아프리카 해안으로 탈출하기로 합니다. 롱보트나 커터 등은 수십명이 탈 수 있는 큰 보트들이므로, 100km 정도는 쉽지는 않아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항해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보트들에 태울 수 있는 인원이 총 250여명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en flute가 재난으로 다가온 것이지요. 결국 보트에 타지 못한 146명의 하급 선원 및 승객들은 임시로 엮은 뗏목을 타고, 보트가 이들을 끌어주기로 했습니다.
(당시 메두사호에서 급히 엮은 뗏목의 재구성... 제리코가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연구하면서 만든 여러가지 자료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일단 바다에 나서자, 이 임시 뗏목은 금새 물에 잠기고 분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사태가 심상치 않자, 귀족 및 장교들이 탄 보트는 이 뗏목을 내버려두고 '나만 아니면 돼' 정신으로 나몰라라 튀어버립니다. 이 뗏목에는 양식이라고는 겨우 건빵 한자루 뿐이었는데 이는 첫날 다 먹어버렸고, 물은 두통이 있었으나 난파된 사람들끼리 서로 마시겠다고 아귀다툼을 벌이다가 두통 다 바다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남은 것은 포도주 몇통 뿐이었습니다. (난파 뗏목에 물 대신 왠 포도주 ? 아무튼 프랑스넘들...)
뗏목 위에 남은 것은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배고프고 목마르고 뜨거운 적도 근처의 태양은 내리 쬐고, 지도자도 없고 규율도 없는 곳에서 무엇이 기대되겠습니까 ? 불과 며칠만에 사람들은 서로 싸우고 죽이고, 배가 고프자 죽은 동료들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인간 그 이상의 (아니 이하인가) 모습을 보여준데 걸린 시간은 불과 1주일 남짓 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난파된지 13일 만에 함께 출항했다가 뒤쳐졌던 동료 선박 아르고스(Argus)호에 의해 구조됩니다. 이들이 구조되었을 때, 146명 중 살아남은 사람들은 고작 15명이었고, 이들 중 5명이 구조 직후 또 사망합니다. 나머지는 굶어죽거나 (사실 10일 정도 굶었다고 죽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목말라 죽거나, 동료들에 의해 살해되거나, 또는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바다에 투신했지요.
(역시 제리코가 메두사 이야기를 그리기 위해 연구하며 만든 습작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는 좀더 자극적으로 뭔가 씹는 장면도 나오는군요.)
이 사건은 당시 아직 자리를 완전히 잡지 못했던 복고 왕정의 위신을 크게 깎아먹은 스캔달이었습니다. '프랑스 병사들은 배낭 속에 원수 지휘봉을 하나씩 넣고 다닌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능력에 의해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던 시절을 20년 정도 맛본 프랑스 민중들에게, '난 귀족이니까'라는 것 하나만으로 지배하려들던 복고 왕정 및 그 떨거지들의 무능력과 비도덕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 바로 이 메두사호 난파 사건이었거든요.
이런 웅성거림에 기름을 끼얹은 것이 바로 테오도르 제리코(Theodore Gericault)라는 젊은 화가였습니다. 당시 화가들은 주로 돈많은 후원자로부터 '이러이러한 그림을 그려달라'는 의로를 받고 그에 따라 그림을 그리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위업을 화려하게 묘사한 많은 그림들이 다 그렇게 나폴레옹의 주머니에서 나온 금화에 의해 그려진 것이었습니다.
(이 '돌격하는 엽기병'이라는 그림도 1812년 제리코가 파리 살롱전에 출품한 작품입니다. 그의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젊고 유명세도 없었던 제리코는, 아무도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 악명높은 사건을 그림으로 묘사하여 한방에 이름을 떨치겠다는 계산으로, 2년에 걸쳐 이 사건을 그림으로 그려냅니다. 이 그림이 바로 프랑스 낭만파의 대표작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명작 '메두사 호의 뗏목'입니다. 이성보다는 인간의 내면과 감정에 더 솔직한 표현을 중요시했던 낭만파에게,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인육을 먹을 정도의 고통에 시달리다 막 수평선에 나타난 아르고스 호를 발견했을 때의 장면처럼 매력적인 소재도 드물었겠지요.
(10여일 굶었다는 사람들치고는 사람들이 너무 건강해보이네요. 뭘 그렇게 쳐먹은건지... 그나저나 왼쪽 하단의 저 '하의가 벗겨진 채 양말만 신고 있는 젊은이의 모습에 일단 주목하십시요.)
하지만 제리코가 너무 젊고 경험이 없어서였는지, 제가 생각해도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을 몰랐었나 봅니다. 이 그림은 전시되자마자 찬사와 함께 비난을 잔뜩 받았습니다. 일단 이 그림을 1819년 루이 18세가 후원하는 파리 살롱전에 출품했다는 것 자체가 도전적이었지요. 이 그림은 정치적으로 많은 논란거리를 일으켰습니다. 심지어 그림 오른쪽 상단에 천 조각을 흔드는 사람이 흑인이라는 점도 정치적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결국 이 전시가 끝난 뒤, 제리코는 금메달을 받기는 했지만 이 그림이 루브르 박물관 소장용으로 채택되지도, 팔리지도 않았습니다. 또, 제리코가 노렸던 것처럼 부유한 후원자들로부터 신규 작품의 의뢰를 가져오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실망하여 영국으로 건너갔고, 거기서 빠리보다는 좀더 나은 평가를 받았으나, 낙마 사고에 이어 병마에 시달리다, 1824년 아직 젊은 시절에 요절하고 맙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웅장하거나 예쁜 것들만 그리던 고전주의에서 벗어나, 인간 내면의 표출이라는 새로운 장을 열어준 것으로 높이 평가받습니다. 특히 그와 동문 수학했던 동료 화가가 바로 들라크루아이고, 들라쿠르아도 제리코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들라크루아가 훗날 그린 이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라는 그림에서도,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의 영향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제 블로그의 표지 그림입니다. 특히 왼쪽 하단의 '하의가 벗겨진채 양말만 신고 있는' 인물이... 눈에 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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