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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장 란 특집 (5편) - 친구와 적

by nasica-old 2016.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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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란은 기본적으로 명예와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아무 것도 모르는 신참 소위일 때나 금실이 잔뜩 수놓아진 원수 제복을 입었을 때나 항상 전투 맨 앞 줄에 서려 했던 것은 선천적으로 겁이 없거나 아무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용기에 따르는 칭찬과 존경을 탐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명예욕에 활활 불타오르는 사람이 항상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게는 적이 꽤 있었는데, 대개의 경우 그 스스로가 만든 것이었지요.


그의 개인적인 친구로는 누구보다도 나폴레옹 본인이 있습니다.  란과 나폴레옹은 일개 못 배운 사병 출신의 원수와 나름 엘리트 사관학교 출신의 황제라는 큰 배경의 차이가 있었으나, 란 개인의 투박하고 단순한 성격과 나폴레옹의 명민한 너그러움이 의외로 좋은 조화를 이루어 가까운 친구가 된 경우입니다.  나폴레옹은 1797년 레오벤(Leoben) 조약으로 오스트리아를 굴복시키고 난 뒤, 새로운 모험을 찾아 대서양 쪽에 배치된 영국 방면군을 시찰하며 영국 침공을 구상하는데, 이때의 시찰 여행에 데리고 갔던 것이 쉴코프스키(Joseph Sulkowski) 대위와 란 장군이었습니다.  쉴코프스키야 나폴레옹이 아끼는 참모 장교였으니 그렇다치고, 독립적인 부대를 지휘하는 장군급들 중에 란을 특별히 뽑아 데리고 다닌 것을 보면 이 두 사람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베르나도트와 함께 뼈 속까지 자코뱅이던 오쥬로는 황제가 된 나폴레옹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를 왕정 복고 이후 부르봉 왕가는 등용하여 권세를 주었으나, 그는 자코뱅답게 '부르봉보다는 나폴레옹이 낫다'라며 백일천하 때 나폴레옹 편을 들었고, 결국 그는 모든 것을 잃어야 했습니다.) 




탈영의 제왕이자, 초창기 마세나와 더불어 나폴레옹의 원투 펀치 노릇을 했던 오쥬로(Charles Pierre François Augereau)도 란과 가까운 친구 사이였습니다.  란은 한낱 소위였던 페르피냥(Perpignan) 시절부터 마르보(Marbot) 장군 밑에서 오쥬로와 함께 복무하던 사이였는데, 비록 오쥬로가 훨씬 더 상관이긴 했습니다만, 이 둘은 마르보 장군이 특별히 총애하던 인재들이었고, 그에 따라 이 두 사람도 매우 친했습니다.  특히 오쥬로는 아직 란이 나폴레옹과 만나기 전부터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란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전투 보고서를 올리면서 "란의 공로는 국민적인 칭송을 받아 마땅하다"라는 말을 쓸 정도로 란을 많이 도와 주었습니다.


란이 오쥬로의 가장 큰 도움을 받았던 것은 전쟁터가 아닌 돈 문제에서였습니다.  브뤼메르 쿠데타를 통해 제1통령이 된 나폴레옹은 자신의 심복이자 브뤼메르 쿠데타에도 힘을 보태준 란에게 포상 차원에서 근사한 보직이었던 통령 근위대 지휘관 자리를 주었습니다.  이 통령 근위대는 새로 조직된 나폴레옹의 직속 부대로서, 급여는 물론 보급 등에서 차원이 다른 대우를 받고 있었으므로 그야말로 정예 중의 정예 고참병들만 들어올 수 있는 명예로운 부대였습니다.  당연히 그 지휘관도 매우 폼나는 자리였고, 나폴레옹은 이에 더해 '근위대장에 걸맞는 규모의 근사한 주택을 구매하라'는 권고까지 했습니다.  란은 나름 신이 났습니다.  그는 이 통령 근위대에 걸맞는 군복을 입히기 위해 최고급 옷감과 장비, 신규 무기들을 대거 구매하여 병사들을 화려하게 장식했고, 자신도 폼나는 동네인 생-도미니크(Saint-Dominique)에 거창한 집을 한 채 구매했습니다.  


이렇게 통령 근위대를 그 명성에 걸맞는 부대로 쫙 껍질을 갈아입힌 뒤 나름 우쭐해진 란은 그에 소요된 비용 청구서를 나폴레옹에게 제출했습니다.  그러나 30만 프랑(요즘 가치로는 약 41억원 정도)이라는 비용 청구서를 받아본 나폴레옹은 크게 놀랐습니다.  내가 부대를 운영하랬지 언제 패션 쇼를 기획하라고 했단 말인가 ?  나폴레옹은 화를 내며 길길이 뛰었고, 란은 어리둥절 했습니다.  알고 보면 나폴레옹이 이런 문제에 대해 어리숙하고 경험이 없던 란에게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주지 않은 것이 문제였습니다만, 아무튼 나폴레옹은 3주 안에 이 비용을 알아서 게워 내던가 아니면 군법 회의에 회부되던가를 택하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란은 기가 막혔습니다.  자신은 지시대로 했을 뿐인데 뭐가 문제였다는 것인지 ?  그는 "난 너의 허락없이는 한푼도 쓰지 않았고, 부자도 아니다, 너에게서 얻은 거라고는 온몸 구석구석의 상처 뿐이다"라며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막무가내로 란을 쫓아낸 뒤 돈을 채워 놓을 때까지는 만나주지도 않았으므로 어쨌거나 돈을 채워 넣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란이 쓴 돈 중 가장 큰 부분인 생-도미니크의 근위대장 관저를 매각한다고 해도 그 절반인 15만 프랑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란은 마세나와는 달리 전쟁터에서 불법적인 개인 노획물을 챙기는데 그다지 열성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개인적인 재산도 별로 없었습니다.  당장 군법 회의에 회부될 위기에 놓인 란에게 도움을 준 것이 바로 오쥬로였습니다.  오쥬로도 장군으로서의 급여만 저축했다면 그런 큰 돈은 없었을텐데, 마세나 만큼은 아니어도 전쟁터에서 나름 손놀림이 빨랐는지 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고, 기꺼이 곤경에 처한 란에게 그 큰 금액을 빌려 주었습니다.  게다가, 갚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지요.  


결국 란은 오쥬로에게 그 돈을 갚기는 갚았는데, 그 과정은 나름 복잡했습니다.  근위대장에서 즉각 보직 해임된 란은 나폴레옹의 배려에 의해 포르투갈 전권 대사로 가게 되었습니다.   단순 무식한 란이 외교관 노릇을 한다 ?  이건 누가 봐도 이상한 인물 등용이었는데, 나름 효과가 있었습니다.  당시 포르투갈 섭정공 조아오 6세(João VI)는 매우 무능한 인물이었는데, 이 왕자에게 란은 무엄하게도 "내 말에 예 또는 아니오 로만 답하시오"라며 비외교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고 퍼부어 조아오 6세를 겁에 질리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란을 포르투갈에 전권 대사로 보낸 것은 란의 그런 성품이 약해 빠진 조아오 6세에게 딱 어울린다는 계산도 있었으나, 근위대 부대 비용 사건으로 알거지가 되다시피한 란이 거기서 여러가지 공식/비공식적인 부수적인 수입을 올릴 수 있도록 하는 배려도 있었습니다.  결국 여기서 한몫 단단히 긁어모은 란은 오쥬로에게 받았던 빚을 다 청산할 수 있었습니다.





(불꽃남자 조아생 뮈라입니다.)



프랑스군 전체에서 둘째가라면 또 서러워 할 사나이가 있긴 하지요.  바로 불꽃남자 조아생 뮈라(Joachim Murat)였습니다.  이 두 사람의 사이는 어땠을까요 ?  사나이끼리는 통하는 바가 있었을까요 ?  이 둘의 사이는 상당히 복잡했습니다만, 전체적으로는 반목과 불신이 더 우세했습니다.  원래 이 두 사람의 관계는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사내는 사내를 알아 보는 법이니까요.  특히 뮈라도 프랑스 남부 출신이라서, 가스코뉴 출신의 란과는 더 통하는 바도 있었지요.  이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진 것은 이집트 원정 초기의 일이었고, 원인은 결국 나폴레옹 때문이었습니다.  


1798년 8월 15일, 성공적으로 카이로를 정복한 나폴레옹은 프랑스군 주요 지휘관들을 모두 초대하여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그 주된 목적은 아부키르 해전에서 함대가 궤멸되어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것에 대해 제장들의 불평불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나폴레옹이 부하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함이었고, 그 타겟이 바로 뮈라였습니다.  연회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나폴레옹은 모두가 듣고 있는 와중에 뮈라에게 공개적으로 한마디 했습니다.  


"몇몇 장군들은 이 원정에 대한 불만을 부하들 앞에서도 대놓고 떠들어댄다고 들었소.  그런 장군들은 조심하는게 좋을게요.  난 장군과 북치기 소년을 구별하지 않소.  어느 쪽이든 서슴지 않고 쏘아 버리겠소.  가령 뮈라 장군의 그 잘 생긴 머리통을 박살낸다면, 나중에야 분명히 후회하겠지만,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할거요."


그런 장군들의 불만을 나폴레옹이 모를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분위기는 다들 대놓고 나폴레옹에 대한 험담을 서로 지껄여대고 있었으니까요.  특히 전지전능한 참모 베르티에는 그런 불만 사항들을 깨알처럼 모아 나폴레옹에게 충직하게 다 보고하고 있었거든요.  그런 불만을 터뜨리고 다닌 것은 란도 마찬가지였고, 나폴레옹이 뮈라에게 무시무시한 협박으로 경고하고 있을 떄 그 말을 듣고 란도 겁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연회가 끝나자마자 뮈라는 친구 콜베르(Auguste Colbert) 장군에게 '밀고자는 란이 틀림없다'라며 화를 냈습니다.  뮈라가 나폴레옹을 욕하는 장면을 가장 많이 목격한 것은 당시 뮈라와 짝을 지어 다니던 란이었거든요.  게다가 란은 자타가 공인하는 보나파르트 충성파 중의 하나였고요.  이유야 어쨌든, 이후 란과 뮈라의 관계는 친밀함에서 경쟁, 경멸, 증오까지를 왔다갔다 하는 매우 복잡한 애증 관계가 되었습니다.


가령 시리아 원정 이후 이집트에 쳐들어온 오스만 투르크군과 벌인 1799년 아부키르(Abukir) 전투의 수훈갑은 누가 뭐래도 기가 막힌 기병 돌격을 지휘한 뮈라였습니다.  당시 란은 뮈라가 모든 영예와 공로를 독차지 하는 것을 보고 쓴 입맛을 다셔야 했고, 아부키르 성채에 들어가 농성하는 투르크군 잔당 처리나 해야 했습니다.  이 잔당 처리라도 화끈하게 해내자고 다시 맨 앞에 나선 란은 결국 투르크군의 총탄에 다리를 다쳐 또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가보니 자신의 바로 옆 병상에 뮈라가 턱을 붕대로 꽁꽁 묶은 채로 누워 있었습니다.  뮈라는 아부키르 전투에서 권총을 든 적장 무스타파에게 말을 탄 채 달려 들어 그의 손가락을 베며 사로잡았는데, 뮈라가 군도를 내리 찍기 전에 무스타파도 권총을 쏘아 뮈라의 턱을 맞췄던 것입니다.  이때 뮈라가 남긴 명언 "파리의 여인들이여 안심하라, 나의 입술은 멀쩡하다"에도 불구하고, 턱 뼈에 입은 총상은 나름 중상이어서 턱을 단단히 붕대로 묶어 놓았습니다.  란은 자신의 다리 총상이 감염되어 고열에 시달리는 상황에서도 뮈라를 온갖 말로 놀려 댔는데, 뮈라는 턱이 묶여 아무 대답을 못 하고 끙끙 대기만 했다고 합니다.





(아부키르 전투에서의 뮈라와 무스타파)



어떤 기록을 보면 뮈라와 란의 사이가 벌어진 결정적인 계기는 나폴레옹의 여동생 카롤린과의 결혼이라고 합니다.  뮈라와 란 둘다 나폴레옹의 매제가 되기 위해 서로 경쟁하다 사이가 틀어졌다는 것이지요.  거기에 베시에르(Jean-Baptiste Bessieres)도 등장합니다.  란이 뮈라와의 경쟁에서 패한 것은 당시 통령 근위대장이던 란이 부대 운영 비용을 전용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는데, 그를 나폴레옹에게 고자질한 것이 바로 뮈라의 친구 베시에르였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는 그냥 억측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뮈라와 카롤린이 결혼한 것은 1800년 1월 20일이었는데, 이때는 아직 란의 이혼 소송이 끝나지도 않은 때로서, 뮈라는 란과 경쟁할 일이 없었습니다.  또 부대 비용 전용 문제도 베시에르의 밀고 때문이 아니라, 순진한 란 자신이 청구서를 나폴레옹에게 제출하면서 벌어진 일이었고요.  다만, 그렇게 통령 근위대 지휘관 자리에서 란이 불명예스럽게 물러난 뒤 그 후임으로 임명된 것이 베시에르였다는 점은, 훗날 란과 베시에르가 친구 사이였다가 원수지간이 되는데 일부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후로 란은 종종 (이제 나폴레옹의 인척으로 지위가 높아진) 뮈라의 지휘권 밑에 들어가게 되는데, 대개의 경우 란은 뮈라의 지휘가 엉망진창이라고 생각하고 그 지휘를 따르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뮈라와 쿵짝이 잘 맞아 근사한 전공을 세우는 일도 꽤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1805년 11월 13일 비엔나 점령 직후 도나우 강을 건널 유일한 타보르(Tabor) 다리 점령 작전이었지요.  여기서 뮈라와 란은 폭발물이 잔뜩 쟁여진 다리 위를 몇몇 장교들만 데리고 태연히 걸어 건너와 폭약 심지와 함께 대포를 겨누고 있던 오스트리아군에게 '휴전이 성립되었으므로 일단 폭발물을 치워라'는 식으로 속임수를 써서 다리를 점령하는 기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대담한 작전은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바그라티온에 대해서는 http://blog.daum.net/nasica/6862545 참조)


프랑스의 두 상남자 이야기를 하다보니, 러시아의 상남자 바그라티온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네요.  제3차 대불 동맹 전쟁 때인 1805년 11월 중순의 홀라브룬 전투에서, 러시아군의 바그라티온 대공이 부린 책략에 넘어간 뮈라는 러시아군과 임시 휴전 협정을 맺고 나폴레옹의 지원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란은 휴전에 반대했고 즉각 전투를 벌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뮈라가 더 상관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뮈라가 초대한 러시아군 지휘관들과 와인잔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그때 란은 러시아의 상남자 바그라티온과 처음 대면했는데, 란은 다른 러시아 장군들과는 말도 섞으려 하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바그라티온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바그라티온이 러시아 제일의 상남자라는 소문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그 남자가 현장에 있는 러시아군 최상급자였으니 그랬을 법도 합니다.  프랑스 제일의 열혈남아가 러시아 제일의 상남자에게 건넨 말은 정말 남자들의 대화다웠습니다.


"만약 지휘권이 뮈라가 아니라 내게 있었다면 지금 우린 이렇게 실없이 와인을 마시며 날씨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라 피를 튀기며 싸우고 있었을게요."


이 다음날 벌어진 홀라브룬 전투에서 란은 바그라티온이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님을 알게 되었고, 약 한달 뒤에 벌어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도 란은 프랑스군의 좌익에서 바그라티온이 지휘하는 러시아군 우익과 맞붙어야 했습니다.  아우스테를리츠에서의 이 두 사나이들의 우열은 당연히 란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전군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바그라티온만 잘 싸울 수도 없었고, 또 미리 상통(Santon) 언덕을 진지화한 란의 선견지명 덕분에 란과 바그라티온이 1대1로 싸웠더라도 란이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빛나는 승리를 거둔 뒤 란의 기분은 최악이 되었습니다.  바로 술트와 나폴레옹 때문이었습니다.   


1805년 12월 아우스테를리츠 직전, 나폴레옹의 전체 전략을 이해하지 못한 뮈라와 술트 등은 프랑스군의 병력 열세에 대해 안절부절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술적 후퇴가 정답이라고 판단했으나, 누구도 감히 나폴레옹에게 후퇴하자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심복이자 겁이라고는 없는 란이라면 나폴레옹에게 그런 충언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실제로 란은 나폴레옹에게 아부의 말만 늘어놓는 스타일이 아니라, 나폴레옹과 옥신각신하며 다투는 일이 더 많았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란이 나폴레옹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의견을 늘어놓더라도, 나폴레옹은 란에 대해서 항상 너그러운 마음으로 넘어가더라는 것이었지요.  뮈라와 술트도 그 점 때문에 란을 통해 나폴레옹에게 후퇴하자는 의견을 전달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란을 설득하여 후퇴의 필요성에 대해 나폴레옹에게 편지를 쓰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그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나폴레옹이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분위기가 묘한 것을 느낀 나폴레옹이 무슨 일 때문에 분위기가 이렇게 엉망이냐고 묻자, 뮈라가 재빨리 란의 편지를 나폴레옹에게 전달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것을 읽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란, 자네가 후퇴를 건의하다니 믿을 수가 없군.  한번도 이런 적 없쟎은가 ?  술트, 당신 생각은 어떠시오 ?"


여기서 나폴레옹이 란의 의견을 묻지 않고 곧장 술트의 의견을 물은 것은 이미 나폴레옹이 모든 것을 꿰뚫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는 사람 보는 눈이 탁월했으니, 상황이 어떻게 되어 란이 이런 편지를 썼고 분위기가 왜 이렇게 된 것인지 한눈에 파악했던 것이지요.  아마 술트도 그걸 눈치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나폴레옹의 날카로운 눈빛과 함께 자신에게 향한 질문에 대해 즉각 이렇게 반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라면 절대 후퇴를 건의하지 않을 겁니다!"


그 뒤의 광경은 안 봐도 비디오였습니다.  눈치가 없어 술트의 처지에 대해 이해가 부족했던 가스코뉴의 열혈남아 란은 즉각 폭발하여 술트에게 거짓말쟁이에 배신자에 겁장이라고 적나라한 욕설과 함께 비난을 퍼부었고, 할 말이 없던 술트에게 더 나아가 '남자라면 칼을 뽑아라, 결투다 !' 라고 외쳤습니다.  다행히 현장에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나폴레옹이 있었습니다.  그는 조용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 일은 란이 옳소.  그러나 결투는 안 되오.  난 이제 곧 벌어질 전투에서 당신들 둘 다 필요하거든."


이 사건 직후에 벌어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술트는 프라첸 고지 쟁탈전에서 빛나는 공을 세우며 영웅으로 떠오르지만, 란은 술트와 계속 원수로 남습니다.  애초에 란은 가장 극적인 승리가 벌어질 수 밖에 없었던 중앙 프라첸 고지 쟁탈전에 자신을 투입하지 않고 배신자 술트를 투입했던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란에게 결정타를 먹인 것은 전투 며칠 뒤 발간된 대육군 회보 (le Bulletin de la Grande Armée) 제30차 발행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구술, 혹은 최소한 나폴레옹의 재가를 받아 발행된 것이 확실한 이 공식 회보에서, 프라첸 고지를 빼앗은 술트의 활약은 크게 다뤄진 것에 비해, 러시아의 상남자 바그라티온의 멱살을 붙잡고 힘겹게 싸워 나름 큰 공을 세운 란과 그의 제5군단의 활약에 대해서는 매우 소홀히 다루어진 것입니다.  그 회보에는 "란의 제5군단은 마치 연병장을 행진하듯 전진했다"라고 되어 있어서, 누가 보면 매우 쉬운 전선을 맡아서 실제 싸움은 거의 벌어지지 않은 것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란은 폭발했습니다.






그는 즉각 나폴레옹에게 찾아가 그의 친구가 사실은 황제라는 사실을 잊고 격하게 따져 물었으나, 나폴레옹이 란의 분노에 공감을 하면서도 기사를 고쳐주지 않자, 놀랍게도 사실상 그냥 탈영을 감행합니다.  부하들에게 '난 휴가다'를 외친 뒤 그의 제5 군단을 버려두고 그냥 파리로 떠나 버린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먼저 비엔나로 떠난 란을 달래서 데려오라고 뮈라를 보냈으나, 사실 사람을 잘못 보낸 것이었지요.  란의 성깔을 알고, 또 란과 나폴레옹 사이를 잘 알던 뮈라는 서두르지 않고 뮝기적거리며 비엔나로 갔고, 란은 이미 비엔나를 찍고 파리로 간 뒤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란을 처벌하지 않았고, 그의 명참모였던 베르티에는 고심 끝에 '실은 란 원수는 나폴레옹의 휴가 허락을 받은 뒤 떠난 것이고, 제5 군단은 당분간 모르티에가 맡는다'라는 공고를 냈습니다.  물론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란은 떠나면서 자신의 불만과 행동에 대해 고래고래 떠들며 다녔거든요.  심지어 다음해 초에 나폴레옹이 직접 보낸 황실 전령이 전달한 초대장에 대해서도 "전장에서라면 그의 명령에 따르겠지만, 난 지금 휴가 중이다"라는 구두 답변과 함께 거절할 정도였습니다.   나폴레옹은 그저 란이 화를 풀기를 기다리며 내버려 두었고, 이 휴가는 그해 10월, 즉 1806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이 터질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이때의 영향이 전혀 없지는 않아서, 나폴레옹은 이후 다시는 란에게 수세적인 역할을 맡기지 않고 항상 소원대로 선봉에 서도록 했습니다. 


란과 원수지간이었던 인물 중 가장 사이가 안 좋았던 인물은 베시에르였습니다.  전편에 소개해드렸다시피, 베시에르와 란은 처음에는 무척 사이가 좋은 편이었습니다.  란의 부인 루이즈와 중매 결혼을 하기 전에, 란의 부탁으로 루이즈가 미인인지 아닌지 보러 가준 것도 베시에르였지요.  베시에르도 평민 출신에, 부사관 출신으로 군 생활을 시작한 인물이었고, 초기에는 피레네 산맥에서 스페인과 싸웠다는 점에서 란과는 일맥 상통하는 점이 많았습니다.  





(베시에르입니다.  마세나 못지 않은 탐욕가였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란이 생각하는 것처럼 완전 겁장이에 비겁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란의 사후 벌어진 바그람 전투에서 타고 있던 말이 적탄에 맞아 쓰러지는 등 몸을 아끼지 않고 분전했고, 결국 1813년 란처럼 적의 대포알에 맞아 전사합니다.)




이 둘의 사이가 벌어진 것은 란이 쫓겨난 근위대장 직을 베시에르가 낚아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베시에르와 란의 성격 차이였습니다.  원래 베시에르는 뮈라처럼 주로 기병대 지휘관으로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고, 그 외의 재주는 사실 신통치 않았습니다.  특히 어느 정도 지위가 높아진 뒤에는 전투 현장보다는 나폴레옹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일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즉, 나폴레옹에 대한 아부가 전투에서 적 연대 깃발을 낚아 오는 것보다 출세에 더 이롭더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이야기지요.  단순 무식한 란의 성격상, 베시에르의 그런 점은 대단히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란이 베시에르에 대해 반감을 가지게 된 것은 1807년 틸지트(Tilsit) 조약 때였습니다.  러시아의 짜르 알렉산드르로 하여금 두 손 들고 회담장으로 나오게 만든 것은 프리틀란트(Friedland) 전투였고, 이 전투의 사실상 수훈갑은 란 본인이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http://blog.daum.net/nasica/6862582  참조)  적어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틸지트의 회담장에서 나폴레옹을 수행하는 영광을 누린 것은 뮈라와 베시에르였습니다.  뮈라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그는 나폴레옹의 매제이자 베르크(Berg) 대공이니 그렇다고 치고, 베시에르는 뭐냐 라는 것이 란의 불만이었습니다.  그는 임시 회담장인 네만 강의 뗏목에서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주변 사람들에게 공공연하게 마구 떠들며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 내용은 '전투 현장에 베시에르는 나타나지도 않았다, 모든 것이 다 끝난 뒤에 보니까 저 멀리 후방에 아무 하는 일 없이 서 있던 근위 기병대와 베시에르가 보이더라, 심지어 베시에르의 제복에는 먼지도 안 묻었더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나폴레옹으로서는 란 대신 베시에르를 뽑아갈 이유가 충분했습니다.  상대는 약소국 포르투갈의 멍청한 섭정 조아오 6세가 아니라, 프랑스와 유럽 대륙을 양분할 대국 러시아의 짜르 알렉산드르였습니다.  이런 자리에 눈치 없이 무례하게 큰 목소리로 떠들어댈 란을 데리고 가는 것은 매우 부적절한 일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베시에르는 전투 현장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이런 자리에 딱 어울리는 우아한 태도와 외모, 그리고 빠른 눈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베시에르는 평민 출신임에도 옷차림과 행동거지 등에 몹시 신경을 써서 모르는 사람은 옛 왕정시대의 귀족 출신인 모양이다 라고 생각하게 만들었고, 심지어 헤어스타일도 이미 구식이 되어 버린 장발에 흰가루를 뿌리는 스타일을 고집했다고 합니다.  


그런 베시에르와 란의 충돌은 모든 상황이 좋지 않던 1809년 도나우강 좌안에서 크게 벌어지게 됩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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