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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장 란 특집 (1편) - 가스코뉴의 열혈남아

by nasica-old 2016.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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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9년, 코르시카 섬에서 나폴레옹이 태어나던 바로 그 해 4월, 프랑스 가스코뉴(Gascogne) 지방에 살던 란(Lannes) 가문에서도 사내 아이가 하나 태어났습니다.  사실 가문이라는 용어를 쓰기가 살짝 창피할 정도로 미미한 집안이었던 란 집안에서는, 남자 아이에게는 무조건 베르나르(Bernard) 아니면 장(Jean)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이 다섯번째 아이의 이름도 장이라고 붙여졌습니다.  총 5명의 사내 아이와 3명의 여자 아이가 있던 이 집에서, 아이 이름이 베르나르 아니면 장일 경우, 엄마가 '장!~' 하고 부를 때 누굴 부르는 것인지 불분명했으므로, 이 가족들은 번호를 붙여서 불렀고, 이 아이도 장 5 (Jean Cinq)라고 불렸습니다.  흔히 평범한 사람을 말할 때 장씨네 세째 아들, 이씨네 네째 아들이라는 뜻으로 장삼이사(張三李四)라고 하는데, 이에 딱 걸맞는 상황이었지요. 




(가스코뉴 하면 생각나는 인물은 ? 예, 바로 장 란과 나름 비슷한 성격인 달타냥, 바로 삼총사의 주인공의 고향이 바로 가스코뉴입니다.  아마 그 동네가 남자의 동네인 듯.)



원래 농사일을 하다가 렉투르(Lectoure)라는 가스코뉴 지방의 읍내로 이사를 와 장사를 하던 장의 아버지는 살림살이가 그리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맏아들이자 그나마 똑똑한 편이던 베르나르는 그 동네 신부님의 배려로 수업료를 면제 받고 학교를 다닐 수 있었지만, 5번째 아들이던 장은 그런 행운을 누리지 못 했고, 따라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 했습니다.  그나마 장이 까막눈을 면했던 것은 자주 집에 들렀던 맏형 베르나르가 동생에게 읽고 쓰기와 산수, 프랑스어를 가르쳤기 때문이었습니다.  잠깐, 프랑스어라고요 ? 예, 당시만 해도 프랑스에서 통용되는 말은 프랑스어 하나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가스코뉴에서는 가스코뉴어가 따로 있었고, 노르망디에서는 역시 그 지방 언어가 따로 있었습니다.  알사스 지방에서는 독일어 방언을 사용했고요.  장은 그다지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었는지, 문법이나 산수나 그다지 뛰어난 편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운동은 매우 잘 하는 튼튼한 젊은이였습니다.





(지금도 가스코뉴 남부 바스크와 인접한 지방에서는 프랑스어와 바스크어, 가시코뉴 방언 3가지 언어가 병행으로 일부 사용된답니다.)



17살이 되던 해, 장은 인근 소도시인 오슈(Auch)에 있는 뒬로(Dulau)라는 염색공 밑에서 도제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장이 염색공의 도제 노릇을 얼마나 오래 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따로 없습니다.  전해지는 말로는 곧 때려치우고 당시 가난하고 지루한 시골 생활을 벗어나고는 싶지만 따로 방법이 없던 젊은이들에게 열린 탈출구였던 군대에 입대했으나, 곧 장교와 싸운 뒤 때려치우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만, 확실치는 않습니다.  그러나 다시 염색공의 도제 자리를 알아보던 그에게, 그 동네 직물 상인인 귈롱(Guilhon) 씨에게서 '염색공 일은 물값 벌기도 어렵다, 차라리 군에 재입대해라, 혹시 아냐, 어쩌면 대위까지 승진할지도 모르지 않나 ?' 라는 조언을 듣고는 정말 다시 군에 입대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이 귈롱씨는 사단장이 되어 돌아온 란에게 '거봐라 내 말이 맞았지 ?'라며 아주 자랑스러워 했다고 합니다.


공식 기록에 나온 바에 따르면, 장이 군에 정식으로 입대한 것은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한지 2년 뒤인 1791년에 국민공회가 10만명의 자원병을 모집할 때였습니다.  이 때 장은 제르스(Gers) 지역의 자원병 부대에 자원했는데, 여기서 장은 척탄병 부대의 소위로 선출되었습니다.  혁명 전이라면 보잘 것 없는 농부의 아들이자 염색공 도제였던 22살짜리 청년이 장교로 임명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는 혁명의 열기가 가장 뜨거울 때였는지라, 장교도 거기 모인 병사들끼리 투표로 선출했습니다.  국민공회에서도 포퓰리즘만으로 장교를 뽑을 경우 그 결과가 심히 걱정되었기 때문에, '이전의 군 경력 및 사회적 지위를 고려하여 장교 후보를 선출할 것'이라는 지침을 내려보낸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의 경우엔 군 경력도 사회적 지위도 없었는데도 (비록 한낱 소위지만) 장교로 선출될 수 있었고, 이는 주로 그의 만능 스포츠맨다운 신체적 우월성과 열혈남아라는 개인적 매력 덕분이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장의 군 경력은 그다지 눈부시게 시작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속했던 대대는 곧 동-피레네 군(l'armee des Pyrenees orientales)으로 배속되어, 스페인과의 접경 지대 도시인 페르피냥(Perpignan)으로 이동했습니다만, 이 부대에는 제대로 된 군복은 커녕 기본적인 머스켓 소총과 탄약조차도 지급이 되지 않았습니다.  자원병 부대는 집을 떠날 때 입었던 제멋대로의 민간인 복장 그대로 제식 훈련을 했고, 무기가 없다 보니 대부분의 시간을 그냥 당시 유행하던 혁명 가요나 애국 가요를 부르며 정신 무장만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도 이 곳에서 란은 많은 이들과 미래의 인맥을 쌓았습니다.  가령 이 때 페르피냥의 총사령관은 마르보(Jean-Antoine Marbot) 장군이었고, 마르보 장군은 휘하 장교들 중 특히 2명을 좋아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장 란 소위였고, 다른 하나는 오쥬로(Charles Pierre Francois Augereau)였습니다.  당시 부관이었던 오쥬로는 이미 툴루즈(Toulouse) 때부터 마르보 장군과 친한 사이였고, 그 해 말인 1793년 12월에 마르보 장군 밑에서 장군으로 승진하게 되지요.  이때 장은 훨씬 상관이었던 오쥬로와도 좋은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때 마르보 장군은 자신의 두 아들을 데려와 자신의 숙소로 지정된 저택에서 같이 지냈는데, 장은 이 아이들과도 자주 같이 놀아주며 아이들이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중 한살 아래인 동생 마르슬랭(Jean Baptiste Antoine Marcellin de Marbot)은 훗날 스페인 전쟁때부터 장의 부관이 되는 훗날의 마르보 장군 바로 본인입니다.  이 마르보가 전에 언급했던, 레겐스부르크 성벽 앞에서 직접 사다리를 들고 성벽을 기어오르려는 란을 붙들어 말리며 '원수께서 이러시면 우린 뭐가 되느냐'며 외치던 바로 그 부관이었고, 나중에 에슬링 전투에서 란의 최후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장은 이때 부대 선임 부사관으로 근무하던 자신보다 3살 연상이던 푸제(Pierre Charles Pouzet) 상사와도 깊은 우정을 쌓았는데, 이 우정은 평생 계속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장 본인보다 불과 몇 분 전에 장의 눈 앞에서 대포알에 직격당해 두동강이 나는 친구가 바로 이 푸제였습니다.






(마르보 장군의 초상화입니다.  이 양반은 군사적 업적보다는 저술로서 크게 유명했고, 나폴레옹도 세인트 헬레나에서 이 양반의 책을 보고 '최근 읽은 책 중에서 최고'라고 칭찬을 했습니다.  마르보가 남긴 회고록은 나폴레옹 관련 최고의 회고록 중 하나로 꼽힙니다.  심지어 나폴레옹 본인의 것보다도요.  나폴레옹 이 양반은 자신의 이야기에 MSG를 하도 많이 쳐서 당최 신뢰성이 없거든요.)




1793년 3월, 국민공회는 아무 대책도 없이 반동 이웃 국가 스페인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4월에 당장 스페인군은 훨씬 우세한 병력과 화력을 갖춘 군대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침공을 해왔습니다.  제복은 커녕 변변한 무장을 갖추지도 못한 프랑스 혁명군은 일방적으로 밀리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래도 파리의 국민공회에서 파견된 서슬 퍼런 정치위원의 독촉에 등떠밀린 드 플레르(Louis-Antoine de Flers) 장군은 스페인군이 점령한 생-로랑-앙-세르당(Saint-Laurent-en-Cerdans)의 외곽 진지를 탈환하기 위해 공세를 취해야 했습니다.  씩씩하게 공격에 나선 자원병 근위대가 거미새끼처럼 흩어지는데 필요한 건 그저 스페인군의 대포 및 머스켓 소총 일제 사격 한번이면 충분했습니다.  공포에 질려 도망치던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란이 소속된 제2 대대가 출동했는데, 이들도 스페인군의 대포알과 머스켓 총탄을 한번 뒤집어 쓰고는 자원병 근위대와 함께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쳐야 했습니다.  이때 란 소위는 그래도 장교라고 일반 병사들과는 달리 제복도 입고 있었고 군도와 권총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만능 스포츠맨답게 어느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 도망쳤다고 합니다.  


이때의 적전 도주가 장 란 일생에서 최초이자 최후의 도망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꼴사납게 겁장이처럼 도주한 것에 대해 크게 부끄러워하고, 절대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그는 이후 평생 두려움을 모르는 열혈남아로 이름을 떨쳤습니다만, 이는 그가 천성적으로 겁이 없는 성품이어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전투 현장에서는 자주 겁에 질린다'라고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친구이기 이전에 절대적 독재자인 나폴레옹 본인에게도 '전쟁은 항상 두렵다'라고 솔직하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훗날 맏아들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평생 겁에 질린 적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장이에, 멍청이에, 또라이가 겹친 인물이다."


이렇게 스페인과의 전쟁은 형편없이 시작되었습니다만, 곧 프랑스 혁명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공세로 전환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전세가 뒤집힌 것은 혁명 공화국을 지키기 위한 시민들의 열의가 여전히 뜨거웠고, 또 파리 국민공회에서 이 쪽 전선에도 보급을 늘려주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당시 스페인군도 답이 없는 오합지졸이었기 때문이라는 점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공세로 전환한 이후, 장은 줄곧 선두에 서서 싸우며 공을 세웠고, 덕분에 그해 10월에는 중위로 승진도 할 수 있었습니다.  포도주로 유명한 바니율스(Banyuls) 탈환전에서도 선두에 서서 싸우다 팔에 관통상을 입는 부상을 당하기도 했는데 덕분에 중위로 승진한지 얼마 안 되어 대위로 승진했지요.  뛰어난 체력과 용기에, 혁명과 전쟁이 겹쳤으니 쾌속 승진은 일상적인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장은 천성적으로 앞에 나서는 것과 주목받기를 좋아하는 성품이라서, 전투 때마다 자청하여 맨 앞에 나서는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대위로 만들어준 그 관통상이 낫기도 전에, 빌롱그(Villelongue) 탈환전에 자원하여 나섰고, 2시간의 휴전을 요청하는 스페인 장군의 전령에게 욕설과 함께 "2시간 같은 개소리 하고 자빠졌네, 니네 장군에게 10분을 줄테니 그 시간 동안 나와 결투나 하자고 해라" 라고 하고는, 결국 10분도 기다리지 않고 전투를 계속해서 스페인군을 몰살시키는 위엄을 보여주었습니다.   덕분에 장은 chef de brigade, 즉 대대 소령으로 진급했습니다.  이때가 1793년 12월이었으니, 불과 3개월 동안에 장 란 소위가 소령으로 무려 3계단 진급을 한 것이지요.  


바로 같은 시기,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툴롱(Toulon)에서는 프랑스군이 영국-스페인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고, 이 툴롱 포위전을 통해 장과 동갑내기인 한 포병 대위는 불과 4개월만에 4계단을 진급하여 장군이 됩니다.  그 포병 대위 이름은 부오나파르테 나폴리오네였고, 이 둘은 머지 않아 만나게 될 운명이었습니다.



**  앞으로 몇 편에 걸쳐 다룰 장 란 특집은 대부분 Margaret Chrisawn이라는 분의 'Emperor's Friend'라는 책에서 나온 것입니다.  실은 관련 자료를 찾아 열심히 구글질을 하다가, Google Books에서 본 이 책의 일부 내용이 너무 재미있어서 그냥 아마존 Kindle로 책을 샀습니다.  할인 적용 받았는데도 무려 92달러가 넘더군요 !  아직 얼마 못 읽었는데, 아주 재미있습니다.  스포일러 싫어하시는 분은 제 블로그 건너 뛰시고, 그냥 이 책을 사서 보시기를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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