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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총검을 쥔 왕자 - 1809년 폴란드의 분전

by nasica-old 2016.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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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는 나폴레옹이 란츠후트 기동전을 통해 카알 대공의 오스트리아 야전군을 격파하고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를 간단히 점령하는 장면까지를 보셨습니다.  여기서 잠깐 시점을 저 변두리, 즉 바르샤바 쪽으로 돌려보시지요.  





(원래 이번 회는 나폴레옹의 비엔나 2차 점령 기념으로 Leonard Cohen의 'Take this waltz' 해설편을 실을까도 생각했는데... 이 노래에 해석을 다는 것은 작사가의 시적 자유에 대한 모욕 같아서 관뒀습니다.  이 노래를 가사와 함께 들으시려면 https://youtu.be/6yB2l6t6GDw 를 클릭.

 

Now in Vienna there's ten pretty women    지금 비엔나에는 예쁜 여자가 10명 있어요

There's a shoulder where Death comes to cry   사신도 기대어 우는 어깨도 있지요

There's a lobby with nine hundred windows   9백개의 창문이 달린 로비가 있고

There's a tree where the doves go to die   비둘기가 죽으러 날아드는 나무도 있어요

There's a piece that was torn from the morning   아침에서 뜯어낸 조각 하나는

And it hangs in the Gallery of Frost   서리의 화랑에 걸려 있지요

...)



나폴레옹은 겉으로는 폴란드를 위하는 척 생색을 많이 냈지만, 실제로는 폴란드인들을 군사적 경제적으로 착취만 했을 뿐 그들의 독립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니, 오스트리아 및 러시아와의 관계 때문에라도 폴란드가 독립하는 것을 내심 꺼려했습니다.  그런 나폴레옹의 본심을 잘 드러내 보여준 것이 프로이센에게서 빼앗은 옛 폴란드 영토로 만들어낸 바르샤바 공국이었습니다.  바르샤바 공국의 존재는 폴란드인들에게는 완전한 독립에의 희망을 이어가게 해주었고,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에게는 나폴레옹을 잘못 건드리면 자국내 폴란드인들이 들고 일어날 수도 있는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는 꺼림직함을 안겨 주었습니다.  정작 나폴레옹에게는 바르샤바 공국은 병력과 자금을 아쉬울 때마다 부담없이 뽑아 쓸 수 있는 ATM 같은 존재가 되었지요.  







(바르샤바 구시가지의 야경입니다.  현대 바르샤바의 사진을 뒤져 보니 고층건물들 사진만 너무 많아서 약간 실망...  외국인들이 서울 관광와서 강남에 안 가고 자꾸 인사동이나 북촌 근처만 가는 것도 이유가 있는 것 같더군요.  고층 빌딩 보러 남의 나라 가는 거 아니쟎아요 ?)



그 대표적인 예가 저 멀리 스페인 소모시에서 불멸의 명예를 얻은 폴란드 기병대입니다.  나폴레옹은 '역시 폴란드 기병대가 세계 최고'라며 립 서비스를 남발했으나, 폴란드 기병대는 사실 철저하게 외노자 취급을 받아 죽을 것이 뻔한 가장 위험한 전장에 투입되어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어야 했지요.  이렇게 폴란드 남아들이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스페인 땅에서 헛된 피와 땀, 눈물을 흘리느라, 정작 1809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코 앞에 둔 바르샤바 공국의 방어 태세는 취약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당시 바르샤바 공국의 군사력은 프랑스처럼 징집제를 실시하여 작은 나라 규모치고는 꽤 큰 약 3만5천에 달했으나, 그 중 정예병들은 2만이 스페인으로 파병 나가 있었고, 본국에는 2진급 부대 1만5천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폴란드 기병의 특징은 사실 저 창보다도 저 독특한 모양의 군모입니다.  보병들도 저 군모를 쓰는 모양입니다.)



원래 폴란드군의 장기는 귀족 위주의 군사력을 자랑했던 전통 때문에 울란(Uhlan)으로 통칭되는 창기병 및 경기병에 있었고, 평민들로 구성되는 보병대나 포병대는 매우 취약했습니다.  나폴레옹에 의해 바르샤바 공국의 국방 장관이 된 진짜 폴란드 왕자인 포니아토프스키(Józef Antoni Poniatowski)는 자신의 군대의 약점인 보병과 포병 개선에 힘을 기울였으나, 나폴레옹의 착취로 인한 병력과 자금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포병대는 포니아토프스키의 간곡한 부탁으로 나폴레옹이 아예 폴란드군으로 이적시켜준 펠레티에(Jean Pelletier)와 그랑빌(Jean-Baptiste Mallet de Grandville) 등 몇몇 프랑스 포병 장교들의 기술 전수와 훈련을 통해 많이 개선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근대전의 핵심 분야이던 보병대는 여전히 취약했습니다.  제대로 된 군복도 지급받지 못해 병사들 중 상당수는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으로부터 빼앗았던 군복을 입어야 했고, 머스켓 소총도 그런 노획품을 주로 사용해야 했습니다.  그러고도 충분한 수의 머스켓 소총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쥬가 뭔지, 진짜 금수저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본보기를 보여준 포니아토프스키 왕자입니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나폴레옹의 배려 때문에, 바르샤바 공국은 폴란드인들의 독립국이 아닌, 형식적으로는 작센 국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1세(Friedrich August I)의 개인 영토로 되어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1세는 뜻하지 않게 큼직한 영토를 얻게 되어 기뻤는가 하면 그게 또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확실히 군사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 외교 행정면에서도 나름 천재라서, 독립이 좌절된 폴란드인들을 선진적인 통치 제도로 달랠 줄 알았거든요.  덕분에 작센 국왕 아우구스투스 1세는 자국에도 적용하지 않은 헌법과 의회를 (나폴레옹의 지시에 따라) 바르샤바 공국에는 허용해야 했고, 바르샤바 공국은 근대적인 입헌 군주국이 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바르샤바 공국의 모든 군사력과 세금은 고스란히 나폴레옹의 손아귀로 흘러 들어갔으니, 바지 사장도 이렇게 실속없는 바지 사장은 없었습니다.  






(1870년대의 지도이긴 합니다만, 작센의 영토를 표시한 지도입니다.  작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공군의 철저한 융단 폭격으로 파괴된 도시로 유명한 드레스덴을 수도로 하는 왕국으로서, 정작 자신들은 헌법을 1831년에야 갖게 됩니다.)



그런 아우구스투스에게, 곧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게 선전포고 할 것 같다는 첩보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습니다.  전쟁이 벌어지면 오스트리아가 눈엣가시 같은 바르샤바 공국도 침공할 가능성이 컸으므로, 아무리 바지 사장이라도 뭐든 하긴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는 1809년 3월 바르샤바를 방문하여 의회를 소집하고 군비로 3천만 플로린(florin, 당시 오스트리아의 florin 은화는 대략 현재 원화로는 약 2천억원 정도입니다)의 예산안을 투표에 붙여 가결시키고, 또 1천2백 정도의 작센 정규군을 붙여준 뒤 돌아갔습니다.  포니아토프스키는 폴란드와 각별한 관계에 있던 다부(Davout)에게 나폴레옹으로부터 8백만 플로린의 보조금을 받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전쟁을 코 앞에 두고 부랴부랴 군비를 증액한다는 것은 이미 상당히 때늦은 감이 있었습니다.  또 나폴레옹은 상당한 짠돌이라서, 바르샤바 공국에게 피같은 현금 8백만 플로린을 지급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습니다.  대신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에서 몰수했던 머스켓 소총 2만정을 바르샤바로 지급했습니다.





(플로린 florin은 원래 플로렌스, 즉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처음 주조된 금화로서, 금화 한개에 약 1돈에 해당하는 금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금 함량이 점점 줄어들었고, 또 네덜란드와 영국 등에서도 플로린 금화를 찍어냈습니다.  위 금화는 네덜란드에서 찍어낸 플로린 금화입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플로린은 은화로 된 화폐였고, 대략 프랑화 대비 1/2.5에 달하는 가치를 가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바르샤바 공국의 방위를 위해 포니아토프스키 왕자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동안, 오스트리아는 나름 야심찬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제5차 대불동맹전쟁을 시작하면서, 9개의 정규 군단과 2개의 예비 군단을 동원했는데, 그 중 제7 군단을 통째로 바르샤바 공국 침공에 할당했습니다.  제7 군단은 오스트리아군 중에서도 상당히 실속있는 군단으로서, 보통의 군단들은 실제로는 2만에도 못 미치는 병력을 가지는 경우도 많았지만, 이 제7 군단은 3만5천 정도의 병력과 함께 포병도 100문에 달하는 막강한 화력을 가졌습니다.  게다가 기병으로 유명한 폴란드를 공략하기 위해 무려 5천의 기병을 포함시켰는데, 그것도 정예로 이름난 흉갑기병(curassiers)을 대거 포진시켜 폴란드 창기병들을 상대하겠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바르샤바 바로 남쪽인 서 갈리시아(West Galicia)에 이 군단을 배치하면서, 그 지역에서 추가로 2만명의 병력을 새로 징집하여 증원 병력도 보내기로 했지요.  고작 1만5천 정도의 오합지졸 폴란드군이 지키고 있는 조그마한 공국을 침공하는데 총 6만의 병력을 동원하는 계획이었으니, 정말 어마어마한 준비를 한 셈이었습니다. 






 (갈리시아는 현재의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에 걸친 지역으로서, 서 갈리시아는 슬로바키아 바로 북쪽에 있습니다.)



이 강력한 제7 군단의 총지휘관은 흔히 에스테(d'Este) 대공으로 알려진 페르디난트(Archduke Ferdinand Karl Joseph) 대공이 맡았습니다.  당시 28세였던 이 양반은 밀라노 출신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매우 가까운 친척이었고, 개인적으로는 무척 용감하지만 또한 성격이 매우 온순하고 공정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다만 제3차 대불동맹전쟁의 울름(Ulm) 포위전에서 총사령관 마크와의 불화로 인해 오스트리아 지휘부를 난장판으로 만든 전력이 있긴 했지요.  오스트리아 군부가 이 젊은 대공을 바르샤바 공략의 책임자로 임명한 것은 나름 깊은 생각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폴란드인들은 1793년의 제2차 폴란드 분할 다음해 벌어졌던 코시우스코 봉기 사건(굴욕 그러나 꺼지지 않는 열망 http://blog.daum.net/nasica/6862567 참조)에서 보여주었듯이, 굴종을 거부하는 강한 투쟁심을 가진 민족이었습니다.  이들을 제대로 정복하기 위해서는 그저 무력으로 소탕만 해서는 안되고 적절히 구슬리며 공정한 처분으로 폴란드인들의 마음를 사야 한다고 판단되었습니다.  그래서 온순하고 공정한 페르디난트 대공이 적임자로 뽑힌 것이었지요.  








(이 그림은 30년 뒤인 1840년대에 그려진 것으로서, 당시 페르디난트 대공은 아직 20대의 젊은이였습니다.)



실제로 페르디난트 대공은 오스트리아령 서 갈리시아에서 국경을 넘어 바르샤바 공국으로 침공하기 직전인 4월 12일,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발표하며 폴란드인들을 선동했습니다.


"우리는 폴란드를 침공하기 위해 군을 동원한 것이 아니다.  너희를 착취하는 나폴레옹으로부터 너희를 해방시키려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나폴레옹이 약속한 행복을 너희가 누리고 있는가 ?  마드리드에 뿌려진 너희 병사들의 피는 너희를 위해 흘린 것인가 나폴레옹 개인을 위한 것이었나 ?  타구스(Tagus, 스페인의 강)와 비스툴라(Vistula, 폴란드의 대표적인 강)가 같은 줄기에서 흘러나왔던가 ?  너희 병사들의 용기로 너희가 조금이라도 더 번영하게 되었나 ?  나폴레옹이 너희 병사들을 데려간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지 너희를 위한 것이 아니다 !"


뻔뻔스러운 나폴레옹이라면 아마 하나하나 반박할 말이 있었겠습니다만, 사실 저 선동문에서 지적하는 바는 다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폴란드를 러시아 및 프로이센과 함께 갈라먹고 폴란드인들을 경멸하고 억압하던 오스트리아 대공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지요.  오스트리아의 침공을 맞이하는 폴란드인들의 심정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반쪽짜리 독립이나마 자신들에게 희망을 안겨준 나폴레옹을 배신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고, 나폴레옹의 바르샤바 공국 통치 방식에 회의감을 가지던 폴란드인들조차도 오히려 나폴레옹 편으로 단결하여 오스트리아군에게 저항했습니다.  가령 나폴레옹의 통치에 환멸을 느끼던 유명한 문인이자 군인이던 고데브스키(Cyprian Godebski)도 주저하지 않고 포니아토프스키 휘하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싸웠습니다.






(라쉰 전투에서 숨을 거두는 고데브스키 장군과 현장에 나타난 포니아토프스키의 모습입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오스트리아령 서 갈리시아에서 징집될 2만의 추가 병력은 당연히 100% 폴란드인들이었는데, 이들은 재촉하는 오스트리아 관리들의 바램과는 정반대로 무척이나 느릿느릿 소집되었고, 소집된 이들도 눈에 반항심이 가득한 것이 전혀 믿고 전장에 투입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나중에 서 갈리시아까지 쳐들어온 포니아토프스키의 폴란드군에 가담하는 경우가 태반이었습니다.  또 이미 침공을 시작한 오스트리아 제7 군단은 독일계가 주축이긴 했지만, 헝가리인, 체코인, 크로아티아인 등 다양한 민족들이 있었고, 폴란드인들도 25%나 되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폴란드인 중 상당수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낙오하거나 탈영하여 속속 이탈했고, 그 중에서도 또 많은 수가 포니아토프스키의 자유 폴란드군에 가담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폴란드군은 오스트리아 제7 군단에 비해 너무나도 미약했습니다.  훈련과 장비는 커녕 군복조차 제대로 입지 못한 소수의 폴란드군이 2배가 넘는 오스트리아군에게 맞서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폴란드군에는 매우 뛰어난 지휘관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총사령관인 포니아토프스키 왕자 자신이 일찌기 오스트리아군에서 복무하며 여러차례 실전 경험을 쌓아 오스트리아군을 매우 잘 아는 사람이었고, 또 코시우스코 봉기 때도 왕자의 신분으로 평민 코시우스코 밑으로 자진해서 들어가 여러 차례 러시아군과 싸워 이긴 진짜 역전의 용사였습니다.  또 폴란드 국가에도 이름이 나오는 다브로브스키 장군도 여전히 남아 있었고요.  






(미하우 소콜니키(Michał Sokolnicki) 장군은 나중에 러시아 침공 때 나폴레옹의 정보 책임자로 임명될 정도의 인물이었지요.  나폴레옹이 그의 충언을 듣지 않았던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소콜니키는 나폴레옹에게 '절대 러시아 침공을 서둘러서는 안되고 천천히 진격하며 동계 병영을 건설하고 겨울을 나야 한다고 했거든요.  또 두툼한 방한복을 충분히 확보한 뒤에 전쟁을 시작해야 한다고도 했고요.)  



포니아토프스키는 이 1809년의 폴란드-오스트리아 전쟁 내내 매우 정확한 전술-전략적 판단을 내려 그야말로 전쟁 승리의 1등 공신이 되었습니다.  먼저, 그는 자신의 소수 병력으로 강력한 오스트리아군과 정면 충돌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요새 도시가 아닌 바르샤바를 지킨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는 것을 냉정하게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저항없이 바르샤바를 내준다면 적의 사기만 올려주고 폴란드 국민의 저항 의지를 꺾을 것이라는 것도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어느 한 곳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싸우기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가 정한 싸움터는 오스트리아군의 바르샤바를 향한 진격로 상에 있는 라쉰(Raszyn)이라는 연못 근처였습니다.  바르샤바 바로 남서쪽에 위치한 이 곳은 라프카(Rawka)라는 개천이 흐르고 몇 개의 마을과 습지와 숲이 적절히 뒤섞여 있어, 광활하게 탁 트인 폴란드 평원에서 그나마 소수의 군대로 적의 대군을 막아서기에 딱 좋은 위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축구선수와 명장의 공통된 기본 요소는 위치 선정인데, 그 점에서 포니아토프스키는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고 시작했습니다.





(라쉰의 위치는 지도 왼쪽 아래의 구글 지도 표시로 된 곳입니다.  이 지도에는 라프카 개천이 보이지 않습니다만, 그 주변의 큼직한 연못들은 저 지도에서도 잘 보입니다.)



4월 19일 전투가 시작될 때, 1만5천의 전군을 거느리고 이 위치를 지키던 포니아토프스키는 나름 큰 모험을 하는 셈이었습니다.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자신들이 지키는 개천가를 크게 우회하여 개천을 건넌 뒤 측면을 공격할 경우 난처한 입장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상대는 28세의 젊은 금수저 철부지 공작 페르디난트 대공이었습니다.  폴란드 영내로 들어온 뒤 빨리 폴란드 주력군을 격파하고 싶어하던 그는 적의 주력군이 쳐부수기 좋게 한 곳에 집결해 있는 모습을 보고는 모양새 안 나는 우회나 뭐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페르디난트 대공은 우세한 병력이 할 수 있는 전통적인 전술 그대로 포격 뒤 정면 돌격에 들어갔고, 폴란드군의 창기병들을 상대하기 위해 데려온 흉갑 기병들을 동원하여 측면을 공격했습니다.  





(흉갑 기병은 프랑스만의 전유물은 아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도 큼직한 말과 키큰 병사들을 뽑아 갑옷을 입히고 흉갑기병이라고 불렀습니다.)



폴란드군은 의외로 잘 버텼습니다.  아무래도 민족적인 감정이 섞여들면 잘 싸울 수 밖에 없나 보다 싶지만, 감정이나 정신력만으로 대포알과 총탄에 맞설 수는 없었습니다.  폴란드군이 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먼저 위치 선정이 좋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숲이나 마을 등 방어에 좋은 엄폐물을 점거한 상태에서 허허벌판에 노출된 채 접근하는 오스트리아군과 교전하다보니 오스트리아군보다 사상자가 훨씬 적었습니다.  게다가 그 일대의 상당 부분이 악명 높은 폴란드의 진흙구덩이 습지였습니다.  그런 지형 지물에 대한 지식 없이 페르디난트 대공은 적의 측면을 공격하답시고 큰 말을 탄 큰 체구의 무거운 흉갑 기병들을 투입했고, 이들이 진흙지대에 발이 빠져 엉기적거리고 있는 사이 프랑스군에게 훈련받은 폴란드 포병들이 앉은뱅이 신세이던 이들을 타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러나 두 팔로 네 개의 팔을 당할 수는 없다고, 숫자에는 장사가 없는 법입니다.  여러 마을로 연결된 넓은 방어선에서 압도적인 병력의 적을 상대하다보니, 여기저기서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습니다.  오후 2시에 포격전으로 시작된 전투가 3시 경을 넘어서면서 폴란드군에게 위기가 닥쳐 옵니다.  2개 대대 약 2천4백의 오스트리아 보병들이 고작 8백명이 지키던 팔렌티(Falenty) 마을로 난입한 것입니다.  곡물 창고를 비롯한 몇몇 건물을 점령한 오스트리아 보병들에 맞서 폴란드군도 용감하게 역습을 가했으나, 약 1시간 정도 악전고투를 벌이던 중 그 지휘관이던 고데브스키가 다리에 한발, 가슴 아래에 한발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고데브스키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나폴레옹의 통치에 점점 회의감을 품고 있었으나 오스트리아의 침공에 분연히 맞서 일어난 인물로서, 왕년에 다브로브스키 장군 하에서 이탈리아 전역에서 싸운 역전의 용사였고, 그때까지 부하들을 잘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치명적인 중상을 입은 그가 전투 현장에서 실려 나가자, 폴란드군의 사기는 급속도로 떨어져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라프카 개천 너머의 사령부에 있던 포니아토프스키가 현장에 도착한 것은 폴란드군이 막 후퇴하려던 그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현황을 파악하고는 즉각 병사들의 후퇴를 막아섰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그는 타고 온 말에서 내려 주변 병사 하나로부터 총검을 꽂은 머스켓 소총을 손에 쥐고, 직접 선두에 서서 오스트리아군을 향한 총검 돌격을 지휘했습니다.  왕의 조카이자 현직 국방부 장관인 금수저 왕자님이, 일개 사병들이나 드는 총검을 손에 들고 맨 앞에서 달려나가는데 병사들이 가만 있었겠습니까 ?  오스트리아군은 미친 듯 달려드는 폴란드군에게 쫓겨났고, 마을은 다시 폴란드군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라쉰 전투의 클라이맥스 장면입니다.  왼편에 몰려오는 폴란드군 선두에 붉은 바지를 입은 사람이 포니아토프스키입니다.  물론 실제로맨 앞줄에 있었는지는 미지수...  아무튼 당시 소총은 농민 출신의 사병들이나 드는 것이었고, 신사 계급인 장교들은 소총을 손에 들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물며 금수저 총사령관이자 왕자님, 진짜 왕자님이 손에 총검을 들고 병사들 앞에서 돌격을 한다 ?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쥬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마을들과 숲들이 몇차례씩 이쪽편과 저쪽편에 떨어졌다가 다시 빼앗기기를 거듭하며 벌어진 이 악전고투는 밤 늦게까지 이어졌습니다.  결국 밤 10시가 되어 전투가 끝날 때 즈음, 폴란드군은 마을들을 끝까지 지킬 수 있었으나, 몇몇 둑길은 오스트리아군에게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이때 폴란드 측에서 싸우던 작센군 1천여명은 슬그머니 작센 방향을 향해 일방적으로 철수하여 남은 폴란드군을 격노하게 만들었습니다.  알고 보면 작센 국왕 아우구스투스 1세는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작센군에게 철수를 명했으나, 포니아토프스키가 그 명령을 일방적으로 중지시키고 최소한 이 전투만이라도 끝내고 철수하라고 부탁했던 것입니다.  더 이상 싸우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포니아토프스키도 바르샤바를 향해 후퇴했습니다.  하루 종일 격전으로 지친 오스트리아군은 감히 그 뒤를 추격하지 못 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은 폴란드군의 2배에 달하는 약 2천4백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포니아토프스키의 뒤를 쫓아 바르샤바 코 앞까지 온 페르디난트 대공은 시가전에 들어가지 전에 포니아토프스키에게 회담을 신청했습니다.  바르샤바 외곽의 회담장으로 나온 포니아토프스키를 페르디난트 대공은 매우 예의를 갖추어 만났고 라쉰 전투에서의 그와 그의 부하들의 용기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포니아토프스키도 어차피 요새화 시설도 되어 있지 않은 바르샤바를 지킬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폴란드군이 바르샤바에서 철수하는 조건으로 비스툴라 강을 건너 남동쪽으로 후퇴할 때 공격하지 않고 장비를 갖춘 채 철수를 보장할 것을 요구했고, 라쉰 전투에서 혼이 난 페르디난트 대공도 그에 동의했습니다.  






(지도에 붉은 색으로 표시된 프라가 Praga는 비스툴라를 사이에 두고 바르샤바와 면하고 있는, 사실상 바르샤바 외곽 동네 이름입니다.  바르샤바를 빠져나간 폴란드군은 비스툴라 강을 방패삼아 이곳을 지키며 오스트리아군을 견제했습니다.)



포니아토프스키가 이렇게 바르샤바를 포기하고 비스툴라 강 동쪽으로 철수한 것도 매우 좋은 판단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오스트리아는 희대의 괴물 나폴레옹을 상대하면서 무려 4만에 가까운 1급 부대를 아무 전략적 가치가 없는 바르샤바 공략에 투입해서는 안 되는 형편이었습니다.   애초에 오스트리아가 이 전쟁을 시작한 이유가, 그럴 실력도 없는 주제에 과거에 누리던 중부 유럽의 패권을 되찾겠다고 한 것이니, 무리를 해가면서 굳이 바르샤바를 침공한 것도 이해는 가지만, 그래도 차라리 그 병력을 나폴레옹의 주력군을 상대하는데 썼다면 훨씬 더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르샤바를 결국 손에 넣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손에 넣은 것은 또 수비병을 배치하여 지켜야 했습니다.  페르디난트 대공은 바르샤바에만 약 1만의 병력을 주둔시켜야 했고, 비스툴라 강 동쪽에 자리 잡은 포니아토프스키의 주력군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고작 6천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 토룬(Torun)을 비롯한 비스툴라 강 서쪽의 기타 지역에도 병력을 나누어 보내야 했거든요.  그러다보니 이렇게 분산된 오스트리아군은 맥을 추지 못했습니다.  원래 바르샤바 공국의 영토는 비스툴라 강으로 크게 양분되는 모양이었는데, 바르샤바 공국 점령전을 끝내려면 비스툴라 강 동쪽으로의 진격이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르샤바 바로 외곽이자 비스툴라 강의 동쪽 강변 마을인 프라가(Praga)만 하더라도 점령이 어려웠습니다.  강을 사이에 낀 점을 십분 활용하여 고작 1천의 폴란드군이 6천의 오스트리아군을 막아낸 것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군은 라지민(Radzymin), 그로초브(Grochów), 오스트로베크(Ostrówek) 등 곳곳의 작은 전투에서 패배하며 아무 의미없이 병력만 소모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폴란드 땅은 오스트리아나 헝가리에 비해 낙후된 지역이라 비스툴라 강에는 튼튼한 다리가 별로 많지 않았는데, 부교를 갖춘 공병 부대가 없던 오스트리아군은 비스툴라 강을 쉽게 도하하지 못하고 쩔쩔매야 했습니다.  






(독일의 상징이 라인 강이라면 폴란드의 상징은 비스툴라 강입니다.)



그러는 사이 포니아토프스키는 전혀 예상 밖의 작전을 펼쳐 오스트리아군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바르샤바 공국의 본토는 다브로브스키 장군에게 맡겨 지키게 하고는, 자신은 기병대를 이끌고  전쟁 발발 전 오스트리아령으로 되어 있던 서 갈리시아, 즉 옛 폴란드 땅으로 쳐들어간 것입니다.  그의 군대는 5월 중순 현지 폴란드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5월에는 루블린 (Lublin)과 르포프(Lwow) 등을 잇달아 점령하여 이미 나폴레옹에게 얻어맞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오스트리아를 크게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바르샤바에 퍼질러 앉은 오스트리아 제7 군단도 난처한 입장이 되어버렸습니다.  남의 진지를 점령하느라 자신의 본진이 다 털리고 있었으니까요.  또 본국과의 연락이 끊기게 된 판국이라, 결국 6월 1일 페르디난트는 바르샤바에서 철수하여 서 갈리시아로 되돌아와 포니아토프스키와 교전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포니아토프스키는 교전을 요리조리 피하여 서 갈리시아의 여러 지역에 대한 장악력을 넓혀갔습니다.   7월에는 폴란드 왕국의 옛 수도인 크라코프까지 점령하지요.  이때는 러시아군도 동쪽으로부터 밀고 들어왔는데, 러시아군은 겉으로만 틸지트 조약에 의해 오스트리아군을 견제하는 척 했을 뿐, 실제로는 폴란드 땅에 대한 욕심 때문에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포니아토프스키는 이미 프랑스 측의 승리로 전쟁이 기울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서 갈리시아에 죽지고 있어야 전후 조약이 폴란드 옛 영토 회복에 유리해진다는 것을 알고 서 갈리시아에 집요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크라코프 Krakow의 야경입니다.  크라코프는 폴란드 제2의 도시이자, 7세기에 형성된 가장 오래된 폴란드 도시 중 하나입니다.  16세기 말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그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종전이 된 뒤 정말 크라코프(Krakow)를 포함한 서 갈리시아 상당 부분이 결국 바르샤바 공국의 영토로 편입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포니아토프스키는 이 활약의 결과로 나폴레옹으로부터 명예의 상징인 기병용 군도를 하사받는 영예를 누렸습니다.  포니아토프스키는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프랑스의 원수로 임명되었는데, 이렇게 된 이유가 이 1809년의 눈부신 활약 덕분이라고 흔히 오해들 하지만, 그가 프랑스의 원수직에 오른 것은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씁쓸했던 1809년의 승리에 대해 그다지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지 못했으므로, 포니아토프스키의 뛰어난 작전을 높이 평가해줄 아량이 부족했었나 봅니다.  그러나 적은 병력으로도 뛰어난 리더쉽과 명석한 판단으로 무려 4만에 달하는 오스트리아군을 붙잡아 놓은 것이 나폴레옹의 죄총 승리에 큰 도움이 된 것은 확실합니다.





(오늘날 바르샤바 대통령 궁 앞을 지키고 있는 포니아토프스키 장군입니다.  우리나라 이순신 장군급인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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