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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두번째 방문 - 1809년 비엔나 2차 함락

by nasica-old 2016.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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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는 나폴레옹이 란츠후트 기동전을 통해 4월 18일 ~ 23일 사이의 불과 5일 만에 전세를 뒤집고 바이에른 내의 오스트리아군을 산산조각 내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이 짧은 기간 동안의 기동전은 훗날 나폴레옹이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회고록을 쓰면서도 '자신의 가장 빛나는 기동 작전'이라고 자부했고, 심지어 나폴레옹의 객관적이고도 신랄한 비판자였던 조미니(Antoine-Henri Jomini)  장군도 그에 동의할 정도였습니다.





(조미니는 원래 나폴레옹 밑에서 아주 잘 나가는 장군이었으나, 그를 질투한 베르티에가 조미니를 모함하는 바람에 러시아로 망명을 했습니다.  조미니는 애초에 스위스인이었거든요.  나중에 미국에서 귀국히여 러시아군에 합류한 모로는 조국 프랑스를 공격하는 입장이 된 것에 매우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그러다 짜르 알렉산드르의 군영에서 그를 만나고 기뻐하며 '나와 같은 처지인 사람을 만나니 기쁩니다' 라고 말했는데, 조미니는 매우 냉정하게 '같은 처지가 아닙니다.  저는 스위스인이거든요.' 라고 말하여 모로를 더욱 침울하게 했다고 합니다.)



이 짧은 기간 동안 오스트리아군은 대략 5만의 병력과 40개의 군기, 100문의 대포와 600량의 탄약차, 그리고 약 3000량의 수송마차를 잃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아직 충분한 병력을 갖추고는 있었으나, 크게 두동강이 나 힘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즉, 레겐스부르크를 통해 탈출한 카알 대공 휘하의 주력부대는 도나우강 북쪽에서 대기하던 부대와 합류하여 약 10만 이상으로 보강된 뒤 보헤미아에서 부지런히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었고, 란츠후트에서 이자르강을 넘어 남쪽으로 탈출한 약 4만의 병력은 힐러(Johann von Hiller) 장군의 지휘 하에 도나우강 남쪽에서 비엔나를 향해 탈출과 저항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힐러 장군입니다.  비록 도망치며 싸운 것이고 상대 병력 수가 자신의 절반에 불과하긴 했습니다만, 에벨스베르크 전투는 꽤 잘 싸운 전투입니다.  상대가 프랑스의 명장 마세나였고, 상대에게 거의 궤멸적인 타격을 주었으니까요.)



이렇게 양분된 두 부대 중 상황은 힐러의 부대에게 더 좋지 않았습니다.  보헤미아의 깊은 숲 속으로 탈출한 카알 대공의 부대에 대해서 나폴레옹은 일단 추격을 포기하고 그냥 비엔나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끊임없이 카알 대공의 본대와 합류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했던 힐러 장군의 부대는 뒤를 쫓는 마세나의 프랑스군 때문에 더욱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힐러 장군은 정보 부족으로 인해 프랑스군의 추격이 느슨해진다 싶으면 '혹시 도나우강 북쪽에서의 다른 전황 때문에 이것들이 추격을 멈춘 것인가?' 라고 생각하여 멈춰서서 반격을 시도했으므로 계속 크고 작은 전투를 치루어야 했습니다.  그 중 가장 큰 충돌은 5월 3일 벌어진 트라운(Traun) 강가의 에벨스베르크(Ebelsberg)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비교적 소수였던 2만의 병력으로 추격하던 마세나는 전체 병력의 거의 절반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는 등 악전고투를 치러야 했습니다만, 어쨌거나 힐러가 후퇴를 했으므로 이 에벨스베르크 전투도 프랑스군의 승리로 기록되기는 했습니다.





(에벨스베르크 전투 당시 상황입니다.  에벨스베르크는 린츠 남단에 있는 도시이니, 오스트리아 땅이지요.  전투 막판, 프랑스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서 힐러는 에벨스베르크 시가지 전역을 홀라당 태워버립니다.)




혼쭐이 나기는 힐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카알 대공과 합류하기 위해 결국 5월 8일에 도나우강을 건넜습니다.  이렇게 강을 건너기 전에, 그는 약 1만의 병력을 떼어내 비엔나로 보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비엔나를 완전 무방비 상태로 놓아둘 수는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나폴레옹의 대군 앞에 고작 1만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  이는 완전히 병력 낭비에 불과했습니다.  힐러도 그렇게 생각했나 봅니다.  그는 자신의 잔존 부대 중에 가장 신뢰할 수 없고 가장 미숙련 병사들인 갈리시아(Galicia) 출신 폴란드인로 구성된 지역방위군(Landwehr) 부대를 골라 이렇게 비엔나로 보냈습니다.  이렇게 신뢰가 안가는 2급 병력으로 구성된 '비엔나 방어 특공대'는 터덜터덜 걸어 5월 9일 비엔나에 입성했습니다.  


이들을 맞아들이는 비엔나 방어 책임자 막시밀리안 대공(Archduke Maximilian)은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그의 사촌인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는 이미 궁정 식솔들을 이끌고 탈출한 뒤였는데, 이 믿을 수 없는 폴란드인들 1만명 외에, 그에게 주어진 것은 약 3만의 병력 뿐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중세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하나 지키는데 총 4만의 병력이라면 충분한 병력이었습니다.  거의 2개 군단에 달하는 병력이었으니까요.  그러나 현실은 달랐습니다.  이들은 모두 불과 몇 개월 전에 지역방위군(Landwehr)이라는 이름으로 소집된 민간인들로서, 별 훈련을 받지도 못 했고 전투 경험도 전혀 없었습니다.  이들에게 프랑스군이 총검을 들이대거나, 혹은 대포알 세례를 두어 번 퍼붓는다면 이들이 견딜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불안했던 막시밀리안은 포로를 호송하며 비엔나를 통과하던 정규 오스트리아군 2개 대대를 제멋대로 시내에 묶어둘 정도로 자신의 지역방위군을 믿지 못했습니다.


비엔나 시민들의 분위기도 막시밀리안 못지 않게 싱숭생숭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점령을 이미 4년 전에 한번 겪은 바 있던 비엔나 시민들은 프랑스군에게 점령된 도시 주민 치고는 꽤 괜찮은 대접을 받은 편이었지만, 역시 점령군 눈치를 보며 그들에게 숙소와 식사를 대접해야 했던 것은 결코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그 일을 또 겪는 것은 당연히 싫었습니다.  특히 이번에는 스페인에서 망신을 당하고 있던 나폴레옹을 반드시 꺾을 수 있다고 요란을 떨며 출정식을 했던지라, 다시 비엔나 성문 앞에 프랑스군이 밀려온 것이 비엔나 시민들에게도 몹시 굴욕스러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도 비엔나 시내의 병력으로 나폴레옹과 싸워 이길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오스트리아 야전군 사실상 거의 전부를 이끌고 있던 카알 대공이 한 10일 뒤에는 병력을 추스려 비엔나 북쪽에 도착할 수 있다는 전갈을 보내왔으므로, 이때까지만 버텨주면 최소한 함락은 면할 수도 있겠다는 낙관론도 있었습니다. 





(타로 장군입니다.  그림이... 좀 이상하네요.)

 


비엔나 시내의 분위기가 이렇게 비관과 낙관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사이, 바로 다음날인 5월 10일 란(Lannes)의 프랑스군이 비엔나 앞에 나타났습니다.  콜베르(Colber) 장군이 이끄는 경기병대와 타로(Jean Victor Tharreau) 장군의 보병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처음에는 프랑스군은 비엔나가 감히 저항할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었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아무 경계도 하지 않고 비엔나 외곽 골목길로 접어든 타로 장군이 성난 아주머니들의 공격을 받고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는데, 솔직히 그런 이야기는 좀 믿기 어렵습니다.  


막시밀리안은 일단 버틸 수 있을 때까지는 버틴다는 각오로, 중세의 성벽 외부에 있던 시민들을 모두 성벽 안으로 소개시키는 등 나름 단단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즉각 비엔나를 포위하기 시작했습니다.  비엔나 성벽 밖에 있던 쇤브룬(Schönbrunn) 궁에 이미 5월 10일 아침에 도착하여 사령부를 차린 나폴레옹은 이 보고를 받고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습니다.  혹시 잘못하면 마드리드에서처럼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쓸데없는 피를 흘리는 불쾌한 경험을 하게 될 판이었으니까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폴레옹도 밀라노나 베를린처럼 현지 주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입성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이날 오후 성내의 막시밀리안에게 편지를 보내, '항복하면 관대한 대접을 받을 것이지만, 저항할 경우 폭격으로 시내를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이에 대해 막시밀리안은 뾰족하게 답을 내놓지 못 하고 전전긍긍하며 밤을 지새워야 했습니다.






(쇤브룬 궁전입니다.   다음번 유럽 여행은 저쪽으로 가보고 싶네요.)



이런 막시밀리안에게 희소식이 날아든 것은 그렇게 하얗게 밤을 새운 다음날 아침이었습니다.  5월 8일 도나우강 북안으로 강을 건넜던 힐러의 부대가 비엔나의 강건너편에 나타난 것입니다.  힐러는 킨마이어 장군의 약 4천 병력을 도나우강 위에 놓인 다리를 통해 비엔나 시내로 진입시키며 비엔나 시민들의 용기를 한껏 부풀게 했습니다.  막시밀리안은 이 소식에 용기백배하여 밤새 미루던 나폴레옹에게의 답장을 일필휘지로 내리썼습니다.  당연히 '할테면 해보라'는 식의 거절이었지요.


그러나 상황은 시시각각 변했습니다.  먼저, 힐러가 비엔나 시내로 4천의 추가 병력을 투입한 직후, 카알 대공의 전령이 힐러에게 당도해 '더 이상 비엔나 방어에 추가 병력을 투입하지 말라'는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는 올바른 결정이었습니다.  어차피 방어에 부적절한 비엔나에서 불리한 전투를 치루는 것은 오스트리아군에게 유리한 것도 아니었고, 그런 전투 와중에 아름다운 비엔나가 불바다가 될 뿐이었습니다.  실제로 바로 1주일 전에 힐러가 벌였던 에벨스베르크(Ebelsberg) 전투 결과, 에벨스베르크는 거의 전소되는 참사를 낳았지요.  그러는 사이 프랑스군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포병대가 보유하고 있던 대포들 중 성벽 너머로 폭발탄(shell)을 쏘아넘길 수 있는 곡사포(howitzer) 20문을 모아 발사 준비를 하면서, 도나우강에 있는 프라터(Prater) 섬에 병력을 투입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라터 섬은 비엔나와는 거의 개천 수준으로 좁아진 도나우강과 분리된 매우 긴 섬으로, 여기를 점령당하면 강쪽으로도 완전히 포위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날 오후에는 프라터 섬의 도나우강 하류 쪽 끝부분인 루스트하우스(Lusthaus)가 프랑스군 손아귀에 떨어졌습니다.








(프라터 섬은 비엔나에 바싹 맞붙어 거의 섬이라는 느낌이 안 듭니다.  마치 여의도가 한강 남안에 거의 바싹 붙은 것과 유사한 모양입니다.)



비엔나 방어군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막시밀리안은 프라터 섬의 프랑스군을 몰아내기 위해 밤 9시 경 병력을 내보내 프라터 섬 탈환을 노렸습니다.  그러나 이 야습은 너무나 맥없이 격퇴되었고, 야습 부대가 허둥지둥 되돌아 올 때 즈음 프랑스군의 곡사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습니다.  보통 도시에 대한 포격은 야밤에 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는 시민들의 공포감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었지요.  2년 전인 1807년 영국군이 덴마크 코펜하겐 시를 포격할 때도 밤에 했지요.  그래야 했던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사실 당시 프랑스군이 쓰던 6인치 폭발탄 속에는 기껏해야 콜라 캔 하나 정도의 흑색 화약이 들어있을 뿐이었으므로, 위력이 별로 대단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시 쓰이던 흑색 화약의 무게당 위력은 요즘 쓰이는 C4 폭약의 약 1/12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곡사포는 일반적인 대포에 비해 포구가 좀더 크고 포신이 짧은 것이 특징입니다.)



이렇게 곡사포에 의한 폭격의 피해는 사실 별 것 아니었지만, 비엔나 시민들과 경험없는 방위군에 대한 심리적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군 6인치 곡사포의 유효 사거리는 기껏해야 6~7백 미터 뿐이었으므로 비엔나 중심부까지는 닿지도 않았지만, 고요한 야밤에 울려퍼지는 포성과 폭발탄의 폭발 굉음은 시민들을 공포에 질리게 했습니다.  원래 외적에 맞서는 애국심이라는 것은 입으로 떠들 때 최고치에 달하지만 적의 사격을 받아보면 즉각 사라지는 것이거든요.  이때 우왕좌왕하며 공포에 질리던 비엔나 시민들 중에는 위대한 작곡가 베토벤도 있었습니다.  그는 이때 이미 청각이 많이 쇠퇴해 있었는데, 프랑스군의 폭격을 피해 지하실에 몸을 숨기고도 그 포성과 폭발음에 그렇쟎아도 약해진 청력이 더 손상을 입을까봐 베개를 두 귀에 대고 전전긍긍했다고 합니다.   


이런 소동을 겪기 직전에, 베토벤은 제롬 보나파르트이 왕으로 있던 신생 베스트팔렌 왕국의 궁정 음악가로 초청을 받은 바 있었습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는 이에 응하려 했었는데, 그를 아끼던 루돌프 대공(Archduke Rudolph)를 비롯한 몇몇 귀족 후원가가 1년에 4천 플로린(florin, 당시 오스트리아 florin은 프랑화의 1/2.5의 가치를 가졌다고 하니, 1 florin을 6500원 정도로 계산하면... 대략 2천6백만원입니다)을 지급하겠다며 말리는 바람에 주저 앉은 바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후원 연금은 전쟁통에 결국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으니, 베토벤은 이래저래 나폴레옹 때문에 고생이 많았던 셈입니다.





(베토벤이 '보나파르트'라는 이름의 교향곡을 쓰다가 그가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그 악보에서 '보나파르트'라는 이름을 힘주어 쓱쓱 그어 지워버린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1809년 비엔나 함락의 봉변을 겪고 난 뒤 1년 후에, 제자이자 친구인 체르니에게 '난 한때 나폴레옹에 대해 매우 안 좋게 생각을 했으나, 이제 보니 꼭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네' 라고 한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호떡집에 불난 것 같은 상황이 된 것은 비엔나 방위군 사령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막시밀리안은 새벽 1시반에 작전 회의를 소집하여 어찌 대응할 지를 물었습니다.  무슨 답이 나오겠습니까 ?  회의에 참석한 장군들은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지만, 막시밀리안은 그래도 굴하지 않고 다시 한번 병력을 출동시켜 루스트하우스의 프랑스군을 공격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불굴의 의지를 꺾는 소식이 곧 날아들었습니다.  카알 대공이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라며 비엔나 시내의 정규군에게 철수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시내에 잠깐 들어왔던 정규군 병력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새벽 3시반에서 6시반 사이에 시내를 나와 도나우강 위에 놓인 타보르(Tabor) 다리를 건너 철수했고, 이는 막시밀리안의 방어 의지를 산산조각 냈습니다.  막시밀리안을 비롯한 방위군 수뇌도 이들과 함께 철수했습니다.






(루스트하우스란 저 아래쪽 붉은 사각형 쪽을 말하나 봅니다.  위쪽 붉은 사각형 속에 레오폴드슈테트라고 쓰인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입장이 난처해진 것은 오라일리(Andreas Graf O'Reilly) 장군이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철수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 그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며 '어 어' 하는 사이에 마지막 오스트리아군이 타보르 다리를 건넌 뒤 다리를 폭파까지 해버린 것입니다.  아무도 임명한 적은 없지만, 졸지에 비엔나 방위군 총책임자가 되어버린 오라일리 장군의 심정은 과히 좋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 프라터 섬의 마세나는 날이 밝자 병력을 전진시켜 프라터 섬 중앙부까지 뻗어나간 비엔나 시가지의 일부인 레오폴드슈타트(Leopoldstadt) 코 앞까지 접근했습니다.  이러면서 다시 항복을 요구했지요.  굳이 나폴레옹도 비엔나에서 유혈이 낭자한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오라일리도 굳이 항복 요구에 대해 매정한 입장을 보일 필요는 없었지요.  그는 진지하게 항복 조건을 협의했고, 밤 늦게까지 이어진 협상 후, 다음날인 5월 13일 새벽 2시에 항복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나폴레옹이 파리를 떠난지 정확하게 1달 만의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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