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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승리, 그러나 날려버린 기회 - 란츠후트 (Landshut) 기동전

by nasica-old 2016.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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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는 다부의 제3 군단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아슬아슬하게 카알 대공의 포위망에서 빠져나오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이로써 베르티에의 실수로 벌어졌던 프랑스군의 위기 상황은 말끔히 해소되었고, 나폴레옹은 이제 공평한 상황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상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은 양군이 공정한 상황에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축구 경기에서도 한쪽이 실점 위기를 넘기면 그 직후는 상대편의 위기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형이 모두 공격 태세로 전방에 배치되어 있었다가 갑자기 상황이 반전되어 역습을 받게 되니까요.

토이겐-하우젠 (Teugen-Hausen) 전투 다음날인 1809년 4월 20일 상황이 딱 그랬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레겐스부르크에 다부를 몰아넣기 위해 행군하느라 넓게 펼쳐져 분산된 상황이었는데, 어정쩡하게 다부를 놓쳤을 뿐만 아니라 도망치는 다부의 제3 군단으로부터 반격을 받고 혼쭐이 난 상황이었습니다.  이럴 경우 능력있는 감독과 노련한 선수들로 이루어진 축구팀은 당황하지 않고 전속력으로 자기 진영으로 돌아와 수비 태세로로 전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카알 대공은 뛰어난 지장이긴 했으나 불행히도 멘탈은 유리에 가까왔고, 그 휘하 오스트리아 장교단도 잘 훈련된 편은 아니었습니다.  카알 대공이 직접 지휘하던 오스트리아군 제1,3,4 군단은 그렇게 어정쩡한 태세로 란츠후트와 레겐스부르크 사이에 위치한 에크뮐(Eckmühl) 근처에 멈춰 버렸습니다.

왜 이들이 그냥 멈춰 버렸는가 하면 나름 이해는 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단, 전날 다부와 그의 제3 군단을 통째로 잡아 삼키겠다고 출발할 때의 목적지가 레겐스부르크였는데, 비록 다부와 제3 군단은 다 등 뒤로 빠져 나가버리긴 했지만, 아직 레겐스부르크는 1개 연대 2천명이라는 소수의 프랑스군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레겐스부르크는 견고한 다리가 위치한 도나우 강변의 교통 요충지로서, 장악할 필요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았습니다.

다부가 토이겐-하우젠 전투를 벌이며 활로를 찾던 19일 낮, 레겐스부르크 시내에 남아 있던 루이 쿠타르(Louis Coutard) 휘하 제65 보병 연대도 진땀을 흘리며 방어전을 펼쳐야 했습니다.  외로이 고립된 이들 앞에 콜브라트 (Johann Kollowrat) 장군의 오스트리아군 제2 군단 전체가 나타나 성문을 열라고 문을 두들겨 댄 것입니다.  쿠타르 대령은 절대 낯선이에게 문 열어주지 말라는 부모님 말씀 잘 듣는 착한 아이처럼 절대 응하지 않았지요.  레겐스부르크의 중세 시대부터 내려오던 성벽은 의외로 튼튼하여, 오스트리아군은 19일 내내 이 성을 공격했으나 프랑스군은 잘 버틸 수 있었습니다.  이렇다보니 오스트리아 본진조차도, 북동쪽의 레겐스부르크로 향해야 할지, 또는 정반대 방향인 남서쪽의 나폴레옹 쪽으로 가야할지 애매한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프랑스 수비대에게도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고작 2천명의 부대로 이렇게까지 잘 버틸 줄 몰랐던 다부는 하루치 탄약 밖에 남겨 놓고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필요 이상의 탄약을 남겨 두고 가면 다 오스트리아군 차지가 될 것이 뻔했으니까요.  탄약이 거의 다 떨어진 쿠타르 대령은 야음을 틈타 프랑스 진영으로 파발마를 보내 긴급 탄약 보급을 요청했습니다.  프랑스군 본대도 제65 보병연대의 깜짝 활약에 놀라 밤사이에 탄약 수송대를 급파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도 바보는 아닌지라, 호위도 없던 이 탄약 수송대는 오스트리아 기병 정찰대에 걸려 간단히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쿠타르 대령은 탄약이 다 떨어진 상황에서도 24시간 휴전을 요구하며 버티었으나, 결국 저녁 무렵이 되어 항복해야 했습니다.  





(당시 레겐스부르크를 포위한 제2 군단을 지휘하던 콜브라트 장군입니다.  20일 아침, 탄약이 떨어진 프랑스군 쿠타르 대령은 콜브라트에게 '24시간만 휴전하자, 만약 그 이후에도 구원대가 오지 않는다면 그냥 순순히 항복하겠다' 라는 어이없는 항복 조건을 내놓았는데, 탄약도 다 떨어진 프랑스군을 무려 1개 군단을 가지고 포위하고 있던 콜브라트 장군은 '그러자' 라며 동의를 해버렸습니다.  어이가 없지요 ?  오후 5시 경 새로운 부대를 이끌고 레겐스부르크에 도착한 리히텐슈타인 대공의 기분이 딱 그랬습니다.  리히텐슈타인 대공은 '그 휴전은 프랑스군과 콜브라트 사이의 조건일 뿐, 나와 내 부대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항복하라' 라고 윽박질러 마침내 레겐스부르크의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이렇게 패전을 거듭한 것은 오스트리아 남자들이 프랑스 남자들보다 팔뚝이 얇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병신같은 귀족들이 세습 신분을 내세워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든 기업이든 나라든, 그냥 그 자식들이 목사직과 경영권과 국가 권력을 세습하는 것은 그래서 좋지 않습니다.)



여기까지는 사실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다부도 예상 못했던 부분은 바로 다리였습니다.  레겐스부르크에는 도나우 강 북안으로 이어진 아주 견고한 다리가 있었는데, 항복하기 전에 당연히 이 다리를 파괴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상보다 이 다리가 너무 튼튼하여 프랑스 공병대는 결국 이 다리 파괴를 포기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탄약마저 조금만 남겨놓고가던 다부는 폭파용 화약도 너무 적게 두고 간 모양입니다.  결국 다부는 아까와 하던 탄약까지도 날리고, 결과적으로 레겐스부르크도 날린 셈이 되었습니다.  '만약에~'라는 것은 다 부질없는 일이긴 하지만, 만약에 다부가 충분한 화약을 두고 갔다면, 그래서 쿠타르 대령이 레겐스부르크의 다리를 하늘 높이 산산조각을 내버릴 수 있었다면, 뒤이어 벌어질 아스페른-에슬링 전투도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어정쩡한 상태로 어리버리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에 비해, 열혈 황제 나폴레옹은 몹시 바빴습니다.  그에게 이런 상황은 그야말로 줍는 사람이 임자인 노다지가 널려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거든요.  그는 아직 레겐스부르크가 함락되기 전인 20일 아침부터 즉각 프랑스군을 진격시켰습니다.  나폴레옹의 기본 목표는 오스트리아군의 몰살이었고, 그를 위한 전략은 오스트리아군이 넘어온 이자르(Isar) 강의 다리가 있는 란츠후트를 선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애초에 이룰 수 없는 목표였습니다.  지도를 보면 오스트리아군은 북동쪽의 도나우강과 남쪽의 이자르강 사이에 갖힌 형세였는데, 이들의 탈출로는 남쪽의 란츠후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레겐스부르크를 통해 도나우강 북동쪽으로 탈출하여 보헤미아로 달아날 수도 있었지요.  그러나 나폴레옹은 레겐스부르크의 프랑스군이 고작 2천명 뿐이고 그나마 그날 저녁 항복할 형편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간신히 오스트리아군의 포위망을 탈출했다는 기쁨이 너무 컸는지, 서둘러 작성된 다부의 보고서에는 그런 정황까지는 들어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게다가 아무리 프랑스군의 행군 속도가 빠르고 오스트리아군이 느리다고 해도, 지리적으로 훨씬 더 가까운 곳에 위치한 오스트리아군보다 프랑스군이 먼저 란츠후트를 점령하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결정적으로, 나폴레옹은 당장 자신 앞에 늘어선 적군이 오스트리아군의 주력이라고 큰 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는 아벤스(Abbens)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오스트리아군은 오스트리아군 제2,5,6 군단 뿐이었고, 주력인 1,3,4 군단은 더 멀리 동쪽에 있었습니다.  어이없는 착각이었으나, 정찰기도 없고 무전기도 없던 시절에는 있을 수 있는 실수였지요.





(아벤스베르크 전투에서 바이에른 병사들을 격려하는 나폴레옹의 모습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나폴레옹의 진격이 오스트리아군을 덮쳤습니다.  이 공격을 주도한 것은 프랑스군의 열혈남아 장 란(Jean Lannes)이었습니다.  란도 스페인에서 작전 중이었으나, 나폴레옹의 부름을 받고 바로 전날 밤인 19일에야 바이에른 현지에 도착한 상태였습니다.  나폴레옹은 가장 믿는 장군이었던 란에게 여기저기서 차출한 사단들을 모아 만든 임시 군단을 하나 주었고, 란은 도착한지 하루만에 이들을 이끌고 공격에 나섰습니다.  이와 함께 르페브르가 바이에른군으로 이루어진 제7 군단을, 그리고 방담(Dominique Vandamme )이 뷔르템베르크(Württemberg)군으로 이루어진 작은 군단을 이끌고 공격에 나섰습니다.  이들과는 별도로, 저 남쪽에서는 마세나가 란츠후트를 선점하여 오스트리아군의 퇴로를 끊기 위해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벌어진 아벤스베르크(Abbensberg) 전투에서 이미 사기가 떨어진 오스트리아군은 2천의 사상자와 4천의 포로를 내며 퇴각했고,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은 약 1천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아벤스베르크 전투와 란츠후트 전투, 에크뮐 전투의 상황을 보여주는 지도입니다.)



다음날인 21일에도 나폴레옹의 착각은 여전했습니다.  전날의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 주력을 격파했다고 생각한 나폴레옹은 동쪽으로 철수한 일부 잔존 세력의 소탕을 다부에게 맡기고, 자신은 본진을 이끌고 오스트리아군의 주력이라고 착각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 좌익을 추격했습니다.  프랑스군은 21일 란츠후트에서 이들을 따라 잡고 전투를 벌여 다시 승리했으나, 오스트리아군의 대부분은 무사히 이자르 강을 건너 철수한 뒤였습니다.  서쪽으로부터의 마세나의 진격이 먼저 란츠후트를 점령하는 것은 무리였던 것입니다.  마세나의 부대는 이미 프랑스군이 란츠후트를 점령한 21일 오후 1시 경에나 란츠후트에 당도했습니다.

이 란츠후트 점령전은 완전한 낭비에 불과했습니다.  얼마 안되는 오스트리아 패잔병들을 쫓는데 프랑스의 주력이 모조리 움직였고, 그나마 포착에 실패했으니까요.  정작 이들을 필요로 하는 곳은 에크뮐 부근으로 진격하던 다부였습니다.  다부의 제3 군단은 그 병력의 절반 이상을 란의 임시 군단에게 떼주고 무척 약화된 상태였습니다.  이는 여전히 오스트리아군 주력은 란츠후트를 통해 탈출하고 있다고 믿은 나폴레옹의 실수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동쪽 에크뮐 인근의 오스트리아군은 기껏해야 3개 연대 정도에 불과하다고 보고, 다부에게 그렇게 약한 병력만을 주어 모조리 잡아들이라고 명령한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아직도 레겐스부르크의 프랑스군이 이미 항복했다는 것을 몰랐으므로 그들은 독안에 든 쥐라고 생각했지요.

한편, 20일 저녁 무렵 레겐스부르크와 그 다리를 점령하여 퇴로를 확보한 카알 대공은 여유를 되찾고 반격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19일 토이겐-하우젠 전투에서 그에게 굴욕을 안긴 다부와 다시 2차전을 치를 기회가 주어진 셈이었습니다.  2차전에서도 다부는 상관의 착각 때문에 다시 한번 큰 위험에 빠진 셈이었습니다.  다부가 약 1만을 간신히 넘는 병력을 가진 것에 비해, 카알 대공은 무려 3개 군단 약 6만 명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카알 대공은 이미 정신적으로는 패배를 인정하고 있어서 그랬는지, 도나우강 북쪽 강건너에 있던 제1 군단은 소환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다부와의 회전은 도나우강을 건너 보헤미아로 철수하기 전의 굿바이 전투 정도로 생각했었나 봅니다.  결과적으로 전투에 참여 가능한 오스트리아군은 약 4만 정도였습니다.

다부는 21일 오후 늦게 오스트리아군의 움직임을 포착하고는, 이들이 결코 3개 연대에 불과한 잔존 세력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화들짝 놀라 나폴레옹의 본진에 SOS 요청을 하면서도 허둥지둥 퇴각하지 않고 제 위치에서 수비 태세를 유지했습니다.  이렇게 간 큰 행동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군의 기동력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다부의 전갈을 받고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22일 새벽 2시에 즉각 부대를 에크뮐로 이동시켰습니다.  무려 30km 가까이, 즉 하루 종일 행군해야 하는 거리였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 버프를 받은 프랑스군이라면 반나절이면 주파 가능한 거리였지요.






(현재 란츠후트와 에크뮐 사이의 거리입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의 부하 병사들이 22일 새벽에 주파해야 했던 거리는 18마일, 즉 28km 정도였다고 합니다.)



다음날인 22일, 다부의 보잘 것 없는 부대에 오스트리아군의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명백하게 열세인 프랑스군이 도주하지 않고 당당히 응전하는 것을 보고는 오히려 오스트리아군이 약간 겁을 먹어버렸습니다.  적의 태도로 보아, 부근에 강력한 프랑스군 지원 부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었지요.  그리고 그 사실이 맞았습니다.  전날 괜히 적군을 추격한답시고 남쪽으로 강행군을 했던 프랑스군은 새벽 2시부터 다시 북쪽으로 맹렬한 분노의 행군을 한 끝에, 오후 1시 반 경에 다부의 제3 군단을 구원하러 나타난 것입니다.  이렇게 벌어진 에크뮐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도 용감하게 싸웠으나 아무래도 전투 의도 자체가 승리보다는 후퇴를 위한 견제 공격에 불과했던지라, 병력의 집중에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프랑스군의 집중된 공세에 의해 오스트리아군의 패배로 이어진 이 에크뮐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은 약 1만2천, 프랑스-바이에른군은 약 6천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에크뮐 전투를 묘사한 그림입니다.  그림이 참... 성의가 없네요 !)



일이 이렇게 되자 오스트리아군은 걸음아 날살려라 하며 레겐스부르크의 다리를 건너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때는 나폴레옹도 이미 레겐스부르크가 함락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방법이 없었습니다.  에크뮐 전투에서도 오스트리아군은 마음 속으로 진격보다는 철수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철수는 나름 재빨랐습니다.  바로 다음날인 23일 아침 9시에 프랑스군의 선두인 낭수티(Étienne Marie Antoine Champion de Nansouty) 장군의 기병대 1만이 레겐스부르크에 당도했을 때, 오스트리아 측에서도 기병대를 내세워 이들을 영격했고, 이들은 엎치락뒤치락하며 거의 3시간 동안 시간을 끌었습니다.  이 사이에 오스트리아군 본대는 레겐스부르크의 다리와, 그도 부족해 임시로 세운 부교를 통해 강 너머 보헤미아로 부지런히 철수하고 있었지요.  란츠후트에 이어, 여기서도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의 탈출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낭수티 장군이 지휘하던 프랑스군 최강의 기병대, 흉갑 기병입니다.  흉갑 기병과 기타 기병들과의 구분은 꼭 저 번쩍이는 가슴받이 갑옷 cuirass 의 유무가 아니라, 사람이나 말이나 다 키가 큰 것이었다고 합니다.  마치 척탄병 중대가 수류탄의 휴대와는 무관하게, 그냥 일반 병사들 중 가장 키가 큰 병사들만 뽑아서 만든 부대였다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지요.  실제로 일부 흉갑 기병들은 흉갑 없이 싸웠습니다.)



오스트리아군 주력이 강을 다 건넌 다음에도 레겐스부르크에는 여전히 오스트리아 수비대가 남아 시간을 끌었습니다.  마치 4일전 프랑스군 수비대가 남아있던 것과 똑같은 상황이었지요.  소수의 프랑스군 수비대가 이틀 가까이 버티다 탄약이 다 떨어진 다음에야 어쩔 수 없이 항복한 것에도 이유는 있었습니다.  워낙 레겐스부르크의 성벽이 튼튼했던 것이지요.  레겐스부르크를 함락시키는 임무는 또 다시 란에게 주어졌는데, 이 임무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단 포병대의 집중 화력 지원 속에 이루어진 주성문에 대한 공격은 두차례나 큰 피해만 내고 돈좌되어 버렸습니다. 

오후 3시경이 되자 스트라우빙(Straubing) 성문 근처 성벽에 베르트랑(Henri Gatien Bertrand) 장군이 그의 공병대를 이끌고 벽을 일부 무너뜨리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그럼에도 일이 쉽지 않습니다.  먼저, 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관측하러 나폴레옹이 직접 현장으로 달려갔는데, 그만 멀리서 발사된 오스트리아군의 포도탄 한 발이 튕겨 날아와 나폴레옹의 왼발목을 때렸습니다 !  보통 이런 경우 발모가지가 날아가야 했으나, 이 포도탄은 멀리서 발사된데다 여기저기 튕기느라 운동 에너지가 많이 감소한 상태였던 모양입니다.  기적적으로 그의 발목은 무사했고, 그저 심한 타박상을 입었을 뿐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막스 갈로의 소설 '나폴레옹'에서 티롤 저격수가 날린 탄환에 엄지발가락을 부상당한 것으로 묘사되기도 했고, 또 모트(C. Motte)가 그린 유명한 석판화에서는 왼발이 아니라 오른발을 다친 것으로 묘사되는 등 잘못 알려진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장 큰 오보는 바로 당일 현장에서였습니다.  나폴레옹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주변의 참모들이 호들갑을 떠는 것을 보고는 많은 수다쟁이 병사들이 '황제 폐하가 쓰러졌다, 나폴레옹이 죽었다' 라고 소문을 퍼뜨려 전군의 사기가 바닥을 친 것입니다.   덕분에 나폴레옹은 아픈 발목을 무릅쓰고 말을 타고 전 진영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한참 동안 돌아다니며 병사들에게 자신의 건재를 증명해 보여야 했습니다.  아무튼 이 부상은 1793년 툴롱 포위전에서 영국군 하사관의 총검에 다리를 다친 이후 나폴레옹이 처음 당하는 부상이었고, 그 이후로도 이것이 유일한 부상이었습니다.  





(이미 여러번 보여드린 이 그림은 의외로 석판화입니다.  뒤에 터번을 쓴 사람은 물론 나폴레옹이 이집트에서 데려온 마멜룩 몸종인 루스탐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나폴레옹과 함께 이집트에서 온 남자 http://blog.daum.net/nasica/6862417 편 참조)



일이 이렇게 되자 란은 더욱 분통이 터져 성의 함락을 독려했습니다만, 이렇게 무너진 성벽 틈으로의 사다리 돌격은 3차례나 실패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너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성벽은 높아서 사다리를 타고 무너진 벽을 넘어야 했고, 또 무너진 벽으로 프랑스군의 돌격이 집중될 것이 뻔했으므로 오스트리아군도 병력과 화력을 그 무너진 벽 너머에 집중 배치했기 떄문입니다.  이렇게 무너진 벽 사이로의 돌격은 매우 위험했으므로 자원병들로 구성된 약 50~100명 정도의 결사대를 투입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영국군은 이런 결사대를 forlorn hope, 즉 '덧없는 희망'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성공하고 살아남으면 진급이나 훈장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3차례나 돌격이 실패하자, 더 이상 자원자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란은 손수 사다리를 손에 들고 병사들 앞에서 돌격을 독려하는 연설을 했는데, 연설이 끝나도 병사들로부터는 어색한 침묵 외에는 아무 자원자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분통이 터진 란은 이에 그 유명한 말을 내뱉고는 직접 사다리를 들고 직접 성벽으로 향했습니다.

"나는 원수이기 이전에 척탄병이었고, 아직도 그렇다는 것을 너희들에게 보여주겠다!"  ('Je vais vous montrer qu'avant d'être maréchal, j'étais grenadier et que je le suis toujours !)








(레겐스부르크에서 직접 사다리를 놓고 성벽을 오르는 란 원수...의 모습은 그러니까 꼭 진실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실제로 란이 성벽을 기어올랐고, 그에 감복한 병사들이 그 뒤를 따라 앞을 다투어 벽에 달라 붙어 성을 함락시켰다면 얼마나 멋있었겠습니까 ?  란이 정말 그렇게 성벽에 앞장 서서 달라붙을 의지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옆에 있던 부관들이 그를 뜯어 말리면서 '저희들이 대신 가겠습니다'라고 소리를 질렀고, 이 모습에 수치심을 느낀 병사들이 마침내 우르르 몰려가 결국 성을 함락시켰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란의 리더쉽은 인정해야지요.





(레겐스부르크, 그러니까 라티스본 전투 그림입니다.  여기서는 좀더 현실적으로 란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오스트리아의 바이에른 침공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고 이제 전쟁은 오스트리아 국내로 밀려오게 되었습니다.  레겐스부르크 함락 직후, 나폴레옹은 도주하는 카알 대공의 뒤를 쫓아 보헤미아로 즉각 진격할 것을 고려했으나, 평소와는 달리 작전 회의를 소집하여 부하 장군들의 의견을 일단 물었습니다.  당장 추격을 개시하여 카알 대공의 주력 부대를 격파해야 한다는 나폴레옹의 주장에 대해, 부하들은 모두 병사들이 지난 며칠 동안의 강행군으로 인해 기진맥진한 상태라, 더 이상의 추격전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아마 예전의 나폴레옹이었다면 애초에 작전 회의에서 부하들의 의견을 묻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나폴레옹이 사람이 변했는지, 혹은 요 며칠 동안 자신의 오판으로 인해 다부를 위험에 빠뜨리고 오스트리아군이 탈출하도록 허용한 것이 심적 부담을 주었는지, 놀랍게도 나폴레옹은 무척 주저하면서도 결국 부하들의 요청대로 추격을 일단 포기하고 재정비 시간을 갖기로 했습니다.

반복하는 말이지만, 역사에 있어 '만약'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때 나폴레옹이 부하들의 의견을 뿌리치고 보헤미아 깊숙히 카알의 뒤를 쫓아 강행군에 나섰다면 어땠을까요 ?  너무 지친 병사들을 끌고 갔다가 오히려 위험에 빠졌을까요 ?  혹은 결국 오스트리아군을 포착해서 완승을 거두고 전쟁을 더 빨리 끝낼 수 있었을까요 ?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카알 대공이 빠져나가도록 허용한 것은 나폴레옹에게 두고두고 후회할 일로 남습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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