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본격적인 밀덕까지는 아닙니다만 그래도 꽤 밀덕의 소양을 가진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텍사스 오스틴에서 주말마다 할 일이 없어 뒹글거리던 제가 웹 검색을 하다 Texas Military Forces Museum이라는 곳을 발견했을 때 주저하지 않고 달려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위치는 시내를 관통하는 주요 도로 중 하나인 MoPac Express Way에 인접해 있습니다. 차를 타고 가다보면 뜬금없이 길 옆 잔디 밭에 팬텀기가 전시되어 있는 것이 보이는데, 바로 그곳입니다. 저는 토요일인가 일요일인가에 거길 갔는데, 현지 네비게이터인 'Never Lost'에서 안내하는 바대로 가다보니, 웬 한적한 검문소가 있더라구요. 언듯 보니까 지키는 사람도 없고 또 막혀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그냥 지나치려고 했는데, 지나치다 보니 검문소 안에서 군복을 입은 남자 하나가 서둘러 튀어나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저도 후진해서 몇 미터 되돌아가 보니, 어이없고 괘씸하다는 듯한 표정을 한 그 30~40대 병사의 군복이... 진짜 군인은 아닌 것처럼 뭔가 좀 이상했습니다. 아무튼 ID를 보여달라고 해서 (그때 여권은 없었어요) 그냥 가지고 있던 국제운전면허증을 보여줬는데 그 병사도 '이건 뭐다냐'라는 식으로 보더니 그냥 통과하라고 하더군요.
알고 보니 이 박물관은 Camp Marby라는 텍사스 주방위군 기지 내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고, 제가 통과한 검문소가 Camp Marby 위병소였던 거에요. 병영 내가 엄청나게 넓었는데, 사람은 커녕 개미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아서 '오늘 박물관 문 연 것 맞나 ? 괜히 이상한 곳에 온 것은 아닌가 ? 대체 병영 내에 왜 군인이 없는 것인가 ?' 라고 운전 내내 좀 불안했습니다. 생각해보면 휴일 날에도 죄수처럼 병사들을 영내에 가둬두는 한국군과는 달리 미군은 대부분 외출 외박을 나가는데다, 여기는 현역병도 아니고 주방위군 (National Guard) 부대이니 그럴 법도 했습니다.
네비게이션이 시키는 대로 넓은 부대 안을 누빈 뒤 도착한 곳은, 한마디로 그냥 부대 한 구석에 있는 창고였습니다. 벽돌로 된 그 낡은 건물의 입구는 심지어 목재 짝이 잘 맞지 않는 허름한 나무로 만들어진 허술한 것이었습니다. 여기가 정말 박물관 입구라고는 믿어지지가 않아서 건물 뒤로 돌아가보니, 아래와 사진과 같이 온갖 기갑 차량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모두 모형이 아니라 정말 현역 시절에는 제대로 활약하던 진짜 장비더군요. 다만 일부는 녹이 슬고 한 것이, 잘 정비된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안내판도 뭐 그다지 잘 되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아무도 지키는 사람이 없어서, 우리 애가 어렸을 때라면, 또 애가 같이 왔더라면 애를 데리고 탱크 위로 기어 올라갔을 것 같아요.
대충 기갑 차량 구경을 하고 나서 박물관(이라기보다는 창고) 안으로 들어가니, 나무 문짝 사이의 틈은 매우 넓어도 일단 에어컨은 아주 빵빵하게 틀어져 있는 것이 살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내부의 전시품은 더욱 괜찮았습니다. 게다가 무료이고, 관람객도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너무 없지도 않고요. 한 20명 되던가..? 전시품을 체감상으로 분류하자면 대략 아래와 같습니다.
1) 제1, 2차 세계대전 관련 약 10%
2) 남북 전쟁 관련 약 50%
3) 텍사스 독립 전쟁 관련 약 40%
결과적으로 보면 텍사스 군사 박물관의 주요 내용은 멕시코를 두들겨 패고 텍사스를 빼앗은 이야기와, 노예를 가질 자유를 위해 양키들과 싸우다 두들겨 맞은 이야기가 거의 대부분인데, 이 두 가지 모두에 대해 텍사스인들은 자부심이 대단한 듯 보였습니다. 가만 보면 텍사스 내에서는 차 범퍼 등에 '텍부심'을 드러내는 스티커를 붙인 차들이 많은 것이, 확실히 다른 주들에 비해 뭔가 좀 오버가 심하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제가 미국을 방방곡곡 아주 많이 돌아다닌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자기 주에 대한 자부심을 강조하는 곳은 못 본 것 같아요.
아래 내용은 다 제가 찍은 전시물 사진입니다. 한번 보시지요.
별로 덧붙일 말씀이 없네요. 설명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보시다시피 M1 탱크도 한대 전시되어 있더군요.
여기가 박물관 입구입니다. 제가 입구를 찾아 헤맨 것이 이해가 가시는지요 ?
2차 세계대전 관련된 전시물들입니다. 저 독일군 half-track 차량은 실제 독일군이 쓰던 것을 노획한 것이라고 되어 되어 있습니다. 저 독일군 돌격포도 노획물인지는... 잘 안 읽어서 확신이 가지 않습니다. 전시물도 굉장히 많았는데, 전시물마다 안내문도 아주 상세히, 또 재미있게 잘 되어 있더라고요. 누군지 모르지만 확실히 이 박물관 큐레이터는 밀덕이 확실합니다.
가령 1830년대 텍사스 독립 전쟁에 사용된 이 평범한 대포 하나만 해도 (그나마 복제품입니다), 대포가 어떤 돈으로 구매되어 어떤 전투에 사용되었고 등등의 역사가 아주 상세히 적혀 있습니다.
Matchlock과 flintlock, 그리고 percussion cap을 구별할 줄 아신다면 당신은 이미 역덕이자 총덕 !
독립 전쟁 당시의 각 전투에 대해서도 상세히, 그리고 꽤 재미있게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전체 박물관을 다 돌아보면 거의 책 한권을 읽는 느낌이더군요.
윗 사진 우측 상단을 보면 뭔가 납덩어리 같은 것이 2개 핀에 매달려 전시된 것이 보이실 겁니다. 그 중 왼쪽 것은 특히 뭔가 모양이 찌그러진 것을 눈치 채셨을텐데, 저건 '골무 탄환'이라고 한답니다. 서부 개척 시대에 장비가 없는 황야에서 총알이 떨어지면, 바느질 할 때 쓰던 가죽 골무에 납을 부어 넣어서 머스켓 탄환을 주조했다고 하네요. 당연히 모양은 엉망으로 나왔고 명중률도 많이 떨어졌겠지만요.
제가 아주 흥미있게 본 알라모(Alamo) 요새 최후의 순간을 묘사한 디오라마입니다. 각 장면별로 정말 대단한 공을 들여서 만든, 정말 대작이었습니다. 특히 옆에 큰 패널로 상세한 설명이 장면마다 되어 있어서, 매우 재미있었습니다. 가령 맨마지막 사진을 자세히 보면 중앙부에 너구리 모자를 쓴 거한이 머스켓 소총을 거꾸로 집어들고 휘두르고 있고, 그 주변을 멕시코군이 둘러싸고 있는데, 그 발치에는 이미 대여섯명의 멕시코군이 쓰러진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저 거한이 데이비 크로켓(Davy Crockett)입니다. 영화 알라모에서는 존 웨인이 그 역을 맡았지요. 저 설명에서도 저런 장면은 실제로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저런 장면이 있었다고 전설이 내려오는 이유는 디즈니 영화 때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와 함께 '멕시코군은 바보가 아니었습니다'라고 씌어 있네요.
또한 이 전투에서 함께 전사한 제임스 보위(James Bowie) 같은 경우, 병상에서도 멕시코군과 싸우다 총검에 찔려 죽은 것으로 영화에 나오지만, 실제로는 아마 병 때문에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살해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적인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기병용 권총입니다. 흔들리는 말 위에서 총알고 화약을 장전하다 장전봉(ramrod)을 분실할 것에 대비하여, 아예 장전봉에 경첩을 달아 권총 몸체에 고정시켰습니다.
해군용 함포와 그 부속품들입니다. 다양한 형태의 장전봉 및 청소봉, 그리고 화승이 달린 linstock 등이 정밀하게 재현되어 있습니다. 벽에 걸린 사슬탄 chain-shot이 무시무시하게 보이네요.
예산 부족으로 미미하게 시작했다가 결국 예산 부족으로 미미한 최후를 맞이한 텍사스 해군에 대한 이야기도 저렇게 안내판과 비디오를 통해 자세히 설명해줍니다.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긴 하지만, 심지어 일부 해군 함정은 외국 민간 상선에 대해 해적질을 하다 외국 해군에게 응징당했다는 부끄러운 사실도 그대로 알려줍니다.
남북 전쟁 당시 포병대가 사용하던 다양한 탄약과 대포, 그리고 그에 대한 상세한 설명입니다. 이거 다 읽고 나면 정말 전문가가 될 듯 합니다. 끝에서 두번째 사진은 당시 대포에 달린 견인식 격발장치입니다. 저는 lanyard, 즉 견인줄을 당겨서 격발하는 방식의 대포에는 다 부싯돌 격발 장치가 달린 줄 알았는데, 남북 전쟁 당시에는 저렇게 수은염이 든 마찰식 뇌관봉이 달린 것이 쓰였다는 것을 여기서 처음 알았습니다.
남북 전쟁 당시 사용된 소총류입니다. 대부분 저렇게 percussion cap 격발식이었답니다. 소총탄은 미니에(Miniet) 탄을 썼고요. 당시 총검의 단면은 저렇게 삼각뿔 형태였네요. 어차피 당시 총검은 거의 100% 찌르기용으로만 썼으므로, 옆으로 베는데 사용되는 날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막 사용되기 시작한 후장식(breech loading) 소총입니다. 여기에 전시된 것은 원래 전장식(muzzle loading) 소총이었다가 후장식 소총으로 개조된 소총입니다. 후장식 소총 신규 매입가와, 기존 전장식 소총의 개조 비용까지 다 설명됩니다. 정말 대단하네요.
이 외에도 볼 만한 것 읽을 만한 것이 많았는데, 저도 2시간 넘게 전시물과 안내문을 보고 읽으니 다리도 아프고 해서 그냥 나왔습니다. 나중에 와이프와 아이가 왔을 때 여기 왔었느냐고요 ? 아닙니다... 제가 봐도 여기는 선량한 시민들을 데려올 만한 곳은 아니더라고요. 여기는 밀덕들만 가셔야 합니다.
다음 편에서 콜라라도 여행편만 간단히 올리고 여행기는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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