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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근대화에 대한 저항 - 티롤의 반란

by nasica-old 2016.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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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카알 대공의 지휘 하에 군대를 개혁하며 나폴레옹에게의 복수전을 준비하는 오스트리아 내부의 상황을 보셨습니다.  카알 대공의 입장은 아직은 준비가 부족하다는 것이었으나, 파리에서 메테르니히가 가져온 소식과 함께, 아름다운 티롤에서 날아온 소식은 오스트리아 주전파들의 입장을 더욱 공고히 해주었습니다.  과연 어떤 소식이었을까요 ?




(티롤 지방입니다.  과거부터 독일-오스트리아 지방과 이탈리아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한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지금은 남부 티롤은 이탈리아 땅입니다.)



먼저 지난 몇년 간 티롤 지방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살펴 보시지요.  티롤은 독일어권이면서도 산악 지방에 위치하여 오스트리아와는 다른 전통과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4세기 이후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아온 티롤 지방은 산악 지방 특유의 폐쇄성과 보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령 스위스도 무척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들 하지요.  16세기 종교 개혁 이후 개신교와 카톨릭으로 찢어져 대립한 스위스와는 달리, 티롤은 카톨릭을 굳게 지켰고, 카톨릭의 수호자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해 종교적인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많은 민족을 다스리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각 민족별로 자신의 전통을 지키고 어느 정도 자치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편이었습니다.  특히 산악 지방이라서 어차피 인구도 적고 생산물도 많지 않았던 티롤에 대해, 합스부르크 왕가는 세금도 그다지 무겁게 부과하지 않았고 또 독일권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시 병력 차출 등에서도 꽤 너그럽게 대해주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비엔나와 티롤의 관계는 마치 부모 자식 사이처럼 우호적이었습니다.





(티롤이라는 지방명은 원래 사진 속 티롤 성 Schloss Tirol 에서 나온 것입니다.  대대로 티롤 지방을 다스린 백작의 거주지가 저 티롤 성이었습니다.  저 성은 현재 이탈리아 땅에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가 패전하고 이탈리아가 승전하는 바람에, 남부 티롤이 이탈리아 땅이 되었거든요.)



그러던 중 오스트리아는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나폴레옹이라는 희대의 괴물에게 참패를 당했고, 그 결과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었을 뿐만 아니라 티롤 지방을 통째로 바이에른(Bayern, 영어식으로는 Bavaria) 왕국에게 양도해야 했습니다.  나폴레옹 편에 붙은 독일 민족의 배신자 바이에른 국왕 막시밀리안(Maximilian I Joseph)에 대한 두툼한 보상이었지요.  바이에른을 민족 배신자로 부르는 것은 사실 부당합니다.  바이에른 공국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과 프로이센의 호헨촐레른 가문 사이에서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급급하던 입장이었고, 따라서 그런 동네 덩치들을 단숨에 때려눕힐 전국구 형님인 나폴레옹에게 붙은 것은 국가로서는 당연한 결정이었습니다.




(인생은 줄서기라는 것을 보여준 바이에른 국왕 막시밀리안 1세입니다.)



알고 보면 바이에른을 친프랑스주의로 이끈 것은 막시밀리안 1세라기보다는, 그의 수상인 몬트겔라스(Maximilian Josef Garnerin, Count von Montgelas)였습니다.  몬트겔라스는 바이에른의 수도 뮌헨에서 태어났으나, 사보이 공국 출신인 아버지 영향으로 프랑스 낭시 및 스트라스부르에서 공부한 프랑스파였습니다.  심지어 독일어보다는 프랑스어를 더 능숙하게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젋은 시절 그를 사로잡은 것은 당시 프랑스를 휩쓸던 계몽 사상이었습니다.  그는 바이에른 내의 계몽주의 비밀 결사이던 일루미나티(Illuminati, 영화에 나오는 그 일루미나티와는 좀 다름)의 멤버이기도 했답니다.  그는 바이에른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서는 프랑스 계몽주의를 받아들여 근대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가 모시던 막시밀리안이 바이에른 공작이 되자 적극적으로 그 생각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바이에른 일루미나티는 계몽주의에 근거하여 바이에른을 근대화하기 위한 비밀 결사였습니다.  그들의 상징은 지혜의 상징인 미네르바 여신의 새인 올빼미가 책 위에 앉은 것이었습니다.  좋은 모임인데 왜 비밀 결사냐고요 ?  계몽주의에 따라 나라를 개혁하면 지배층에서 싫어하거든요.  실제로 몬트겔라스도 처음 얻은 직장이 바이에른 정부에서 출판 및 언론을 검열하는 직책이었는데, 일은 잘 했으나 알고보니 일루미나티 소속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빨갱이로 몰려 쫓겨나야 했습니다.)




그는 바이에른 최초의 근대적 헌법을 통과시켰고, 그때까지 남아있던 중세 농노 제도의 잔재를 철폐하는 등 온갖 개혁을 실시했습니다.  면세 혜택을 받던 귀족과 성직자들에 대한 과세를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범죄 용의자에 대한 고문 금지, 의무 교육 제도 도입, 백신 강제 접종 등 바이에른 국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던 중 편을 잘 골라 나폴레옹 편에 선 덕분에 제3차 대불동맹전쟁의 당당한 승전국이 되어 과거 상전으로 모시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티롤을 통째로 뜯어냈으니 정말 대단한 정치가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뮌헨에 세워진 몬트겔라스의 동상입니다.  2005년에 세워진 관계로 좀 과하게 현대적이지요.  그는 근대적인 개혁적 정치를 펼쳐 19세기 초 가장 성공적인 독일 정치가로 뽑힙니다.  그러나 그런 그도 "똑똑한 내가 독재를 하는 것이 낫다"라며 의회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는 등 독재자스러운 면모도 있었습니다.)



티롤로서는 헌법도 없이 구태의연한 전제 정치를 휘두르던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벗어나 근대화된 입헌 군주국으로 들어가게 되어 기뻐해야 했을까요 ?  티롤이나 바이에른이나 모두 독일어를 쓰는 지방들이었고, 종교적 배경도 둘다 카톨릭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민족, 이교도들의 지배라고도 할 수 없었으므로 티롤 주민들은 자신들에게 더 이로운 바이에른의 통치를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있습니다.  

그러나 티롤 주민들은 바이에른의 근대화된 통치에 대해 심기가 매우 불편했습니다.  왜 티롤에서는 그런 반-바이에른, 반-프랑스 정서가 들끓었을까요 ?  바로 교회 때문이었습니다.  티롤 주민들은 자신들의 종교 생활 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인 생활까지 통제하던 교회에 대해 그야말로 종교적인 신심을 가지고 복종하는, 보수적인 산악지방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이에른의 근대화된 통치는, 비단 티롤 내 교회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바이에른 본토 내에서도 필연적으로 종교와 사회를 분리하는 세속주의(secularism)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카톨릭이 대다수인 바이에른 내에서도 개신교도들에게도 완전한 시민권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배척받던 유태인들의 권리까지 상당 부분 인정해주었습니다.  사제들에게도 세금을 부과했을 뿐만 아니라, 바이에른 내의 많은 수도원의 재산을 압류하여 국가 소유로 만들었습니다.  티롤에서는 그런 것들 뿐만 아니라, 각종 종교적 지방 전통 축일을 폐지하고, 교회의 타종이나 종교 행렬 등을 금지시켰습니다.  특정 종교 행사가 국가적 행사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니까요.  




(세속주의란 무엇인가?  1. 종교와 국가의 엄격한 분리  2. 다양한 종교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법 앞에 평등한 것)








(세속주의라는 것이 위와 같은 것이라면, 현대 사회는 당연히 세속주의를 채택하고 있겠지요.  그런데 가령 동성애나 낙태, 이슬람권 외국인 노동자 등에 대한 우리 사회의 입장을 보면, 과연 우리 사회는 세속주의가 맞는가에 대해 약간 망설이게 됩니다.  가령 개신교의 반발로 개신교 성직자들에 대한 소득세 과세가 안되고 있다는데, 이것이 세속주의인가요 ?  흠...)




티롤 주민들은 그것에 대해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동요했습니다.  가령 외부 사람들이 볼 때 신정일치인 일부 이슬람 사회의 주민들은 숨막히는 이슬람 율법에 얽매여 비참한 비근대적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이슬람 사회에 외국이 개입하여 이슬람 지도자들의 권한을 제한하고 이슬람 모스크에 재산세를 부과하여 그 세수를 가지고 여자 아이들을 포함한 전국민에게 의무 교육을 실시한다면, 과연 이슬람 주민들이 좋아할까요 ?  아니라는 것을 최근 중동 역사를 보면 아실 겁니다.  미국의 역사학자인 슬로안(Sloan)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결국 바이에른의 이런 제도 개혁은 티롤 주민에게도 결과적으로는 도움이 되는 일이었으나, 티롤 주민들에게는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근대화보다는 그저 자신들이 수백년간 지켜온 전통을 그대로 이어가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원래 정치나 개혁이나 모두 결국은 해당 국민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옳은 길이고 또 국민을 더 위하는 길이라고 해도, 국민의 수준이 떨어져서건 정책을 만드는 지도자의 판단이 틀린 것이든, 국민들이 싫어하면 다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중세시절에 머물고 있던 티롤 주민들에게 충분한 기간 동안, 가령 10년 넘게 교육부터 시켜서 인식을 개선한 뒤에 근대화 조치를 취했다면 모르겠으나, 바이에른의 개혁적 독재자인 몬트겔라스의 조치는 티롤 주민들의 반발만 불러 일으켰습니다.




(프랑스에서는 학교에서 이슬람권 여학생들이 히잡을 쓰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국가 영역에 속하는 학교에서, 특정 종교의 상징을 금지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도 당연히 금지됩니다.   미국도 대통령이 대국민 연설에서 "Merry Christmas"라고 못하고 "Happy Holidays"라고만 말하지요.  히잡이나 부르카 등 여자의 신체적 자유를 억압하는 이슬람 전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이슬람 여자들이 있는가 하면, 저 사진 속에서처럼 "왜 이슬람 전통을 억압하냐" 라며 학교에서 히잡을 쓰게 해달라고 항의하는 프랑스 내의 이슬람 여성들도 꽤 많습니다.  플래카드 내용은 "베일, 즉 히잡에 반대하는 법인가 아니면 이슬람에 반대하는 법인가" 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거기서 그쳤다면 티롤도 바이에른의 통치와 근대화를 위한 노력을 결국엔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바이에른이 스스로 나라를 지킬 수 있고 독자적인 외교 정책을 펼칠 수 있는 강대국이었다면 어땠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바이에른은 어디까지나 좋은 말로는 프랑스의 혈맹, 나쁜 말로는 속국에 불과했습니다.  바이에른은 나폴레옹에게 계속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해야 했으며, 이는 결국 세금 인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런 10~20%의 세금 인상은 티롤에도 여지없이 적용되었습니다.  가뜩이나 자신들의 전통과 교회에 대한 박해에 대해 불만이 가득하던 티롤에게 세금 인상이란 것은 더욱 큰 원성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16세기~18세기 경의 독일 은화인 Thaler 화입니다.  민중이 들고 일어나는 것은 사실 정의나 명분 뭐 그런 것보다도 경제적인 문제가 더 큽니다.)



거기에 결정타가 들이닥쳤습니다.  바로 징집제였습니다.  나폴레옹이 전쟁을 할 때 바이에른은 그 전장이 자신들과 아무 상관없는 스페인이건 저 멀리 단치히이건 나폴레옹을 돕기 위한 병력을 뽑아 나폴레옹의 대포밥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전통적으로 티롤 주민들은 오스트리아군에 동원되더라도 최소한 형식적으로는 자유군단(Freikorps 프라이코어)이라고 해서 일종의 자원 의용병으로 차출되었고, 또 총알밥이 되기 쉬웠던 일반 전열병이 아니라 산악 사냥꾼의 전통을 살려 정찰병이나 유격병 등 좀더 자유로운 병종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와의 전면전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병력 동원을 지시하자, 바이에른은 티롤에 대해서도 프랑스나 바이에른 국내에서처럼 일반 전열병을 대규모로 징집하기로 하고 동원령을 내렸습니다.  이는 자신들이 오랜 기간 좋은 형님으로 모시던 오스트리아군과 피를 흘리며 싸워야 한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자유군단 Freikorps 라는 것은 독일권의 자유 의용병입니다.  그림 속에서 앞에 반쯤 기댄 자세의 사람이 쾨르너 Theodor Körner 라는 유명 극작가라고 합니다.  나폴레옹에 저항한 자유군단에 자원하여 싸우다 1813년 21살의 젊은 나이로 마클렌부르크에서 전사했습니다.)



이미 끓는점을 넘고 있던 티롤은 대대적인 병역 거부와 탈출로 이에 대응합니다.  전운이 무르익던 1809년 3월 12일, 티롤 악삼스(Axams)에 주둔한 바이에른군 진영으로 소집될 예정이던 청년들이 인근 도시인 인스브루크(Innsbruck)로 집단 도주하는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이들이 인스부르크로 도망친 것은 인스부르크에 요세프 호마이어(Joseph Hormayr)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호마이어는 인스브루크 출신의 티롤 귀족으로서, 오스트리아 외무부에서 근무한 경험도 있었고, 특히 프란츠 1세의 친동생인 요한 대공(Erzherzog Johann Baptist Joseph Fabian Sebastian von Österreich)의 비서로 근무한 경험이 있어 그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요한 대공은 제2차 대불동맹전쟁 때 희대의 대패전이었던 호헨린덴(Hohenlinden) 전투의 형식적 총지휘관이었고, 제3차 전쟁에서는 티롤 지방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인해 요한 대공은 이제 바이에른에 대한 반란을 계획 중이던 티롤 주민들에게 동정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반란 지원을 기대하고 있던 티롤 주민들은 당연히 호마이어를 통해 요한 대공에게 줄을 댔습니다.  이미 1809년 1월, 티롤 주민들의 비밀 대표단이 비엔나를 방문하여 반란 지원을 호소했고, 이 사건은 그렇쟎아도 전쟁 쪽으로 결론을 내리던 비엔나 궁정을 더욱 전쟁 쪽으로 기울게 했습니다.  따라서, 티롤의 반란은 인스부르크를 중심으로 한 친오스트리아파 호마이어의 주도로 진행되었습니다.  다음 편에서 다루겠습니다만, 결국 제5차 대불동맹전쟁은 오스트리아가 1809년 4월 9일, 바이에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며 시작되었는데, 그 표면적인 이유는 원래 티롤의 자치를 허용하게 되어있던 프레스부르크(Pressburg) 조약을 바이에른이 위반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호마이어의 초상입니다.)



이래저래 티롤은 이번 전쟁의 핵심 역할을 하게 되었고, 티롤의 저항은 당연히 귀족이자 지식인이며 애국자인데다 비엔나 궁정에서도 인정하는 티롤의 지도자인 요세프 호마이어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 같았습니다.  적어도 호마이어 자신은 그렇게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티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티롤 내에서의 싸움도 전혀 엉뚱한, 귀족도 아니고 배운 것도 없는 여관집 주인을 주인공으로 하여 치루어졌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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