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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실책 - 1809년 초, 프랑스군의 대비 태세

by nasica-old 2016.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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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는 전체적인 전략면에서 부족함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시기상조였던 독일 민족주의에 호소하며 카알 대공이 제5차 대불동맹전쟁에 돌입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침공이 이렇게 다소 어리숙하게 시작되었으나, 이를 맞이하는 프랑스군의 대비도 그에 못지 않게 큰 결함을 안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이던 1809년 1월, 독일 지역에 포진한 프랑스군의 전쟁 억지 능력은 오스트리아가 원하던 수준만큼 크게 약화된 상태였습니다.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잘못 시작된 스페인에서의 침공 전쟁 때문이었습니다.  중부 독일 지역에 다부가 몇개 사단을 가지고 있었고, 베르나도트가 북부 독일 해안 지방, 즉 한자 동맹 도시들에 2개 사단을 펼쳐 놓고 있었습니다.  그 외에는 동부 프랑스 국내에 4개의 사단이 있을 뿐이었는데, 그나마 이것들은 모두 예비 사단으로서 병력과 훈련, 장비 면에서 모두 수준 미달인 상태였습니다.  독일 내에만 무려 20만 가까이 되는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던 1년 전에 비하면 비교가 안되는 상태였지요.  그리고 북부 이탈리아인 이탈리아 왕국에는 나폴레옹의 양자 외젠이 주로 이탈리아인으로 구성된 몇개 사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809년 3월초까지 다부가 주둔하고 있던 바이에른의 소도시 밤베르크의 시청입니다.  작은 도시의 시청답게 소박하면서도 운치가 있네요.)



나폴레옹이 1809년 1월 부랴부랴 파리로 달려온 것은 탈레랑과 푸셰의 '존재하지 않는 모반 음모'를 응징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으나, 오스트리아에서의 전운이 점점 짙어져 곧 폭풍우로 터져나올 것이라는 것을 누구나 다 예상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파리에서의 보이지도 않고 상대하기도 까다로운 정치적 음모를 분쇄하는데 골치를 앓으면서도 오스트리아를 둘러싼 병력을 강화하는데 신경을 썼습니다.

1809년 2월이 되자,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고 보고, 일부 병력을 스페인에서 빼내어 다시 독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근위대를 스페인에서 빼냈고, 동부 프랑스에 있던 약체 4개 사단을 강화시켜 마세나의 제4 군단으로 통합했습니다.  외젠의 이탈리아 왕국군도 완편 상태로 병력을 증원하도록 했고, 라인 연방의 독일 위성국가들에게도 곧 다가올 오스트리아와의 한판 대결을 위해 병력을 준비하도록 요청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나폴레옹은 크게 3개 거점에 병력을 집결시켜 오스트리아의 침공에 대비하고자 했습니다.  먼저 마세나와 우디노의 병력을 남부 바이에른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에 집결시켰고, 중부 독일에 있던 다부의 군단을 북부 바이에른에 위치한 밤베르크(Bamberg) 주변으로 이동시켰습니다.  그리고 라인 연방내 동맹국인 작센(Sachsen, 영어로는 Saxony) 군을 동원한 뒤 드레스덴 주변에 집결시켰습니다.  지도 상에서 이들 도시의 위치를 보면 오스트리아-보헤미아를 크게 반원형으로 둘러싸는 모양새였습니다.  이는 사실 나폴레옹이 매우 싫어하는 진형이었습니다.  이런 분산 배치는 적의 집중된 공격에 쉽게 각개 격파되기 쉬웠기 때문에 나폴레옹이 극도로 싫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보헤이마와 바이에른-작센의 국경선은 오스트리아-보헤이마가 중남부 독일 쪽으로 쑥 들이미는 형태로 되어 있었고, 적이 이런 유리한 국경선 중 어디로 쳐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에 병력을 주요 요충지마다 배치해두는 수 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1809년 2월 나폴레옹이 주요 방어 거점으로 생각했던 3개 지점 - 드레스덴, 밤베르크, 아우크스부르크의 위치를 보십시요.   그리고 지도 중앙부에 붉은 별로 표시된 레겐스부르크와 그 왼쪽 붉은 삼각형으로 표시된 도나우뵈르트의 위치도 눈여겨 보십시요.  저 아래 인스부르크는 티롤의 반란에서 자주 나오는 지명이니 역시 위치를 봐두시기 바랍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쩔 수 없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 스타일대로라면, 그렇게 불리한 방어선을 움켜쥐고 절대 앉아있지 않고, 오히려 병력을 집결한 뒤 선제 공격을 했었어야 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더 나폴레옹이 원하는 식의 기동전을 펼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일단, 나폴레옹은 정말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유서깊은 합스부르크 왕가를 스페인 부르봉 왕가처럼 폐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부르봉 왕가는 워낙 막장 정치를 펼친데다 그 역사도 100년 정도로 길지 않아 어지간하면 쉽게 보나파르트 왕가로 갈아타기가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몸소 경험했듯이 스페인에서조차 민중의 저항은 격렬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를 폐지하려다가는 스페인 못지 않은 강력한 저항이 눈에 뻔했고, 더군다나 아슬아슬한 러시아와의 동맹마저 깨질 것이 쉽게 예상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 하나조차 제대로 제압하지 못한 상황에서 오스트리아와 얻을 것도 별로 없는 전면전을 벌이는 것은 원치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이 선제 공격을 하지 않은 이유가 또 있었습니다.  바로 프랑스 국민 정서였습니다.  나폴레옹이 비록 황제랍시고 거들먹거리고 있었지만, 그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왕권을 받았다는 역사적 권위와 수많은 귀족들의 지지에 기반한 합스부르크 왕가나 로마노프 왕가, 호헨촐레른 왕가와는 달리, 대혁명을 일으켰던 프랑스 국민들의 지지에 기반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프랑스 국민들의 관심과 기분을 교묘히 조종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의 치세 동안 많은 그림과 연극, 기념물과 건물들이 그려지고 공연되고 세워진 것은 모두 그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문학과 언론은 철저히 탄압되었는데, 몇몇 어용 기관과 작가들을 빼고는 이들은 도대체 구워삶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고, 결국 나폴레옹 치세는 프랑스 문학과 언론의 암흑기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공을 들여 국민 여론을 조율하려고 해도, 국민들도 바보는 아닌지라 잦은 전쟁으로 세금이 올라가고 어린 아이들까지 징집되어가버리면 그 불만이 커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나폴레옹은 어떤 경우에도 먼저 전쟁을 일으키는 경우가 드물었고,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항상 적국이 먼저 선전포고를 하도록 유도 했습니다.  그래야만 이 전쟁이 외국의 침공으로부터 프랑스를 지키려는 조국 수호 전쟁이 될 수 있었으니까요.






(프로이센을 지배하는 왕가인 호헨촐레른 Hohenzollern 가문의 이름은 이 사진 속의 호헨촐레른 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정작 이 성의 위치는 프로이센과는 별 상관이 없는, 저 독일 남쪽의 바덴-뷔르템베르크의 헤싱겐입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이렇게 알파고와의 대국에서 한수한수 바둑을 두는 이세돌처럼 세심하게 고심하며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  첫째, 자신의 참모장인 베르티에(Louis Alexandre Berthier) 원수에게 독일 전장에서의 총지휘권을 맡겼다는 것입니다.  둘째, 베르티에에게 일련의 자세한 작전 지시를 보내면서 지나치게 많은 내용을, 뒤죽박죽으로 보냈습니다.  보통 인재에 의한 큰 사고가 일어나려면 수십가지의 작은 실책들이 모여야 한다고 하던데, 나폴레옹의 이 개인적 실수 중 한가지만 없었어도 제5차 대불동맹전쟁의 시작이 그렇게 프랑스에게 불리하게 진행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참모의 대명사, 뇌샤텔 공 베르티에입니다.)



먼저, 베르티에라는 인물에 대해 잠깐 보시지요.  베르티에는 중령 계급의 공병 장교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중산층 시민 계급의 아들로서, 나폴레옹보다 무려 16살 연상이었습니다.  그도 아버지처럼 공병 장교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고 컸고, 17세부터 군에 들어가 참모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미국 독립 전쟁에도 참전했고 프랑스 혁명 발발시 이미 대령 계급에 올라 있는 등 꽤 많은 경험을 쌓은 고참 장교였습니다.  다만 그의 전투 경험은 대부분 총지휘관을 돕는 참모 역할이었고, 그가 연대 단위의 전투 부대를 맡아 독립적으로 큰 전투를 치루어본 경험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혁명군을 위해 충실히 싸우다 1796년 이탈리아 방면군으로 배속되면서 인생이 바뀌게 됩니다.  바로 여기서 나폴레옹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천성적으로 머리가 명석하고 꼼꼼하며, 매우 근면한 사람인데다 다년간 군에서 참모 역할을 수행하며 많은 경험을 쌓은 상태였습니다.  나폴레옹의 천재성이야 여기서 다시 이야기할 필요도 없겠습니다만, 나폴레옹은 다소 즉흥적이고 말과 생각이 많은데다 큰 그림만 챙기고 작은 것은 수하들에게 맡겨버리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 둘의 만남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속사포처럼 내뱉는 수많은 지시 사항들은 베르티에에 의해 잘 정리되어 깔끔한 명령서 형태로 수하 장군들에게 정확하게 배포되었는데, 이런 천재적 참모가 없었다면 나폴레옹의 작전이 그렇게까지 성공적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황제가 되면서 베르티에를 마세나, 마르몽 등과 함께 원수로 승진시키고 우대했는데, 이는 나폴레옹도 베르티에의 공헌이 자신의 성공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르티에는 1809년 초반까지, 자신이 독립적인 지휘권을 행사해본 경우가 없었습니다.  평화 시기라면 인사나 보급, 부대 편성 등의 업무를 매우 잘 수행했겠습니다만, 이제 곧 오스트리아와의 전면전이 벌어지는 상태에서, 그것도 병력이 턱없이 부족한 급박한 시기에 독일 전역을 관장할 총지휘관으로서 베르티에는 적절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이 베르티에를 총지휘관으로 임명한 것은, 마렝고 전투 직전의 상황처럼 명목상으로는 베르티에가 총사령관이지만 실질적인 지휘는 자신이 직접 행사할 것이므로 자신의 명령을 명확히 이해하고 잘 수행할 인물로서는 베르티에가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마렝고 전투 때와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그때는 나폴레옹이 직접 이탈리아 원정군과 함께 움직였으나, 이번에는 나폴레옹은 수천 km 떨어진 파리에 앉아서 편지만 연신 날려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는 진흙 투성이의 도로를 달리는 파발마들에 의해 불규칙적으로 전달되다 보니, 어떤 편지는 나중에 씌여졌음에도 먼저 씌여진 편지보다 먼저 베르티에게 전달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뜻 밖의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3월 말 즈음 나폴레옹은 여전히 오스트리아가 언제 어느 곳을 칠 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쩔 수 없이 몇가지 가정을 세우고 그에 따라 대응책을 세웠는데, 그런 if~ then 식의 조건절을 제대로 수행하자면 컴퓨터라고 해도 입력 자료가 매우 정확해야만 했습니다.  만약 이런 명령서가 세밀한 다이어그램과 함께 한 통으로 잘 정리되어 왔다면 괜찮았겠습니다만, 나폴레옹은 그런 세밀한 정리정돈을 잘 하는 편은 아니었고, 그런 명령서들은 생각나는 대로 급히 휘갈겨 적은 채로 파발마로 그때그때 전달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명령서들 중 일부는 순서가 뒤바뀐 채 베르티에에게 도착했습니다.




(아마 당시에 나폴레옹에게는 이런 if-then-else 그림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을 것입니다.  Flowchart라는 개념이 나온 것이 20세기 초반이라고 하니까요.)



이런 명령서들에서 나폴레옹이 원래 의도한 바는 이랬습니다.

1) 취합된 정보에 따르면 오스트리아군은 보헤미아에 집결해있으니, 여기서 공세가 시작될 것이다.  -->이는 처음에는 사실이었으나, 당시엔 이미 비엔나 귀족들의 간섭으로 공세는 더 남쪽인 도나우강 쪽으로 바뀐 상태였습니다.  나폴레옹이나 베르티에나 당시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2) 적의 공세는 4월 중순 경에 시작될 것이다.  --> 무엇에 근거하여 그렇게 판단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실제 공세는 1주일 먼저인 4월 10일에 시작되었습니다.

3)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4월 중순 이전에 먼저 공격해온다면,  프랑스군은 후방 멀찍이 물러난 아우크스부르크 북쪽 레흐(Lech) 강변에 집결하여 적을 1차 저지한다.   이 경우, 프랑스군의 사령부는 도나우뵈르트(Donauwörth)에 둔다.


4)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4월 중순까지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프랑스군이 좀더 강화될 수 있으므로 사령부는 좀더 전진한 위치인 레겐스부르크(Regensburg, 영어로는 라티스본 Ratisbon)에 둔다.

나폴레옹의 가정 1,2번은 시기와 위치에 있어 모두 잘못된 것이었으나,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방어선을 주욱 늘어놓은 것이 그 본질적인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우에든 일단 대응이 가능하다는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문제는 3,4번의 두가지 옵션이었습니다.  이는 현장 지휘관이 언제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이 있을지 판단하고 결정할 수 밖에 없었는데, 급변하는 전황과 때를 가리지 않고 날아드는 나폴레옹의 긴급 명령서에 정신이 없던 베르티에는 3번과 4번을 '적절히' 뒤섞어 이해해 버리는 실수를 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는 나폴레옹의 명령서가 두서가 없이 혼란스럽게 작성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에서 책임을 뒤집어 쓰는 것은 하급자인 베르티에였지요.

결국 나폴레옹의 예상보다 1주일 앞선 4월 10일, 오스트리아군이 선전포고와 함께 인강을 넘어 침공을 개시하자, 베르티에는 3번과 4번을 둘다 수행하는 묘기를 보여줍니다.  즉, 4월 10일 당시 뉘른베르크(
Nürnberg, 영어식으로는 Nuremberg)에 위치했던 다부의 프랑스군 좌익만 레겐스부르크로 향하게 했고, 나머지 프랑스군은 아우크스부르크 북쪽 레흐 강변에 집결시킨 것입니다.  이로써 다부의 소수 병력만 고립시켜 멀리 전방에 던져두고, 오스트리아군이 그를 포위 격파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나머지 병력은 모두 후방 멀찍이 후퇴시켜 버린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르페브르는 제4차 대불동맹전쟁에서 단치히 자유시를 함락시켜 나폴레옹을 기쁘게 해준 공로로 단치히 백작의 지위를 얻었지요.  아마 그때가 이 양반의 리즈 시절이었던 듯.)



오스트리아군은 인(Inn)강 방면에만 무려 6개 군단을 동원하여 일제히 바이에른을 침공했습니다.  이들 앞에 늘어선 것은 르페브르(François Joseph Lefebvre) 원수가 지휘하는 바바리아군으로 구성된 제7 군단이었는데, 이들은 그나마 뮌헨부터 레겐스부르크까지 매우 넓은 거리에 걸쳐 분산되어 있었으므로 오스트리아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뉘른베르크 일대에 흝어져 있던 다부의 제3 군단만 무려 6개 군단이 집결되어 밀려오는 오스트리아군을 향해 레겐스부르크로 전진하는 위험천만한 상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과연 프랑스군은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었을까요 ?  그 이야기는 다음번에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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