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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개혁과 돈 - 오스트리아의 사정

by nasica-old 2016.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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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는 스페인 원정 중이던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의 전쟁 준비와 파리에서의 정치적 음모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한 뒤, 푸셰와 탈레랑을 질책하는 모습까지를 보셨습니다.  푸셰와 탈레랑의 소동은 나폴레옹이 파리에 나타나는 순간 잠잠해졌으나, 저 멀리 오스트리아에서 진행 중이던 전쟁 준비는 결국 끔찍한 유혈 사태로 이어집니다.  제5차 대불동맹전쟁이라고 불리는 이 대규모 전쟁은 대체 왜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

오스트리아로서는 프랑스와의 한판 전쟁은 애초부터 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전통적으로 부르봉 왕가와 유럽을 양분하던 합스부르크 왕가로서는 결코 코르시카의 듣보잡 출신인 보나파르트 따위에게 고개를 숙이고 살 생각은 없었으니까요.  문제는 시기였습니다.  오스트리아의 당시 국력으로 볼 때, 도저히 오스트리아 단독으로는 나폴레옹의 프랑스를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때는 영국과 러시아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도 패전했는데, 그 패배로 인해 상당한 영토를 잃고 많은 배상금을 물어낸 뒤인 오스트리아 혼자로서는 애초에 승산이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제5차 대불동맹전쟁이라고는 하지만 이 전쟁은 오스트리아와 영국 외에는 별 대단한 동맹국 없이 수행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오스트리아가 사실상 단독으로 프랑스의 웅후한 군사력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오스트리아를 도와줄 동맹국은 러시아와 프로이센도 있었으나, 이들은 모두 나폴레옹의 철저한 견제 조치에 묶여 있었습니다.  1808년 9~10월의 에르푸르트(Erfurt) 회담을 나폴레옹이 괜히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회담을 통해 나폴레옹은 자신이 스페인 원정을 떠난 사이 오스트리아가 딴 짓을 못하도록 러시아의 알렉산드르를 구워 삶아놓았습니다.  러시아의 핀란드 점령을 승인하고, 장차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분할을 약속한 대신, 만약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벌일 경우 러시아는 '능력이 닿는 한 최대한' 프랑스를 무력으로 지원한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입니다.  프로이센은 1807년 제4차 대불동맹전쟁에서 영토의 절반 가까이를 빼앗기고 절치부심 중이었는데, 오스트리아와 함께 프랑스를 공격할 이유는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가 프랑스에 대한 전쟁 도발에 불참할 것이 분명해지자, 프로이센의 빌헬름 3세는 (비록 자신보다 7살이나 어렸지만) 형님처럼 모시던 알렉산드르의 권고대로 얌전히 찌그러져 있는 것을 택했습니다.

이렇게 주요 동맹국들의 손발이 묶인 상태였으므로, 오스트리아도 그냥 찌그러져 있는 것이 합리적인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오스트리아는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패배를 안겨준 카알 대공의 모습입니다.)


먼저 스페인에서의 상황은 도저히 그냥 지나쳐 버리기 아까운 기회였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는 이미 주요 강대국을 모조리 격파한 천하무적의 위용을 자랑하는, 실질적인 유럽의 지배자였습니다.  그런 그랑 다르메의 1개 군단이 통째로 (비록 신병들로 이루어진 2진급 부대였다고는 해도) 스페인 바일렌(Bailen)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소식은 오스트리아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나폴레옹은 라인 연방에 주둔하고 있던 그랑 다르메의 1진급 부대 20만 명을 스페인으로 이동시켰는데, 이는 오스트리아의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풀어준 것이나 다름없는 힘의 공백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오스트리아로서는 '이때가 아니면 또 언제 기회가 오겠는가 ?'라는 절박함을 가지게 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자체적인 사정도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아우스테를리츠 이전부터도, 국민개병주의의 징집제를 실시한 프랑스와 대적하기 위해서는 군제 개혁이 필요함을 느끼고 조금씩 개혁을 해오고 있었습니다.  아우스테를리츠의 참담한 패전 이후 그 개혁은 프란츠 1세의 친동생인 오스트리아의 군사 천재 카알 대공(Karl Ludwig Johann Josef Lorenz, Archduke Charles)이 전권을 가지고 수행해왔습니다.  카알 대공의 군제 개혁을 세부적인 기술적 내용을 빼고 큰 줄기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합스부르크 세습 영토(즉 헝가리나 세르비아 등을 제외한, 독일계 영토)에서의 전면적 징집제 실시
- 과거 종신 복무였던 직업 군인 사병들의 복무 기한을 10년으로 줄이는 대신, 제대 이후 장기간 예비군으로 편성
- 각 지역별 권역을 자체 방어하기 위한 지역 방위군(Landwehr) 편성
- 기병과 포병의 독립 사단 편성으로 집중된 화력과 돌파력 향상
- 일종의 미니 군(mini-army)라고 할 수 있는 군단제 도입
- 현재 조달을 적극 활용하는 보급 체계 편성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의 용맹한 오스트리아군 모습입니다.  이제 숙련된 전문 전쟁꾼인 그랑 다르메를 상대로, 징집된지 얼마 안되는 오스트리아 징집병들은 이 전투에서 매우 잘 싸웠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습니다만 이런 개혁 방향은 프랑스식 군사 제도를 거의 노골적으로 베끼는 수준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이 이런 제도를 도입하여 무적 군대가 되었으니, 그런 것들을 따라하면 오스트리아군도 강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지요.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이 이렇게 프랑스의 모든 것을 따라하면서도 차마 따라할 수 없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군 지휘부의 대대적 개편이었지요.  프랑스군이 강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제도적인 부분도 컸지만, 여관집 아들이나 채소집 아들이라도, 능력있는 자가 지휘관이 된다는 점이 더욱 컸습니다.  '프랑스군에서는 졸병들이 모두 잡낭 속에 원수봉을 넣고 다닌다' (Tout soldat français porte dans sa giberne le bâton de maréchal)라는 말이 그랑 다르메의 강인함을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말이지요.  프랑스군은 패주하다가도 다시 집결하여 역전승을 이끌어내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이는 우수한 지휘관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병사들 개개인이 스스로 용맹을 발휘할 이유가 충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귀족이 지배하는 신분제 사회인 오스트리아에서는 그런 것을 흉내낼 수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원수들에게 나누어주었다는 원수봉입니다.  이건 당연히 모조품이겠지요.)


오스트리아군도 인사 개혁을 하기는 했습니다.  1806년 초 군제 개혁의 전권을 잡자마자, 카알 대공은 낡은 교리에서 벗어날 생각을 못 하던 25명의 고위 장군들의 옷을 벗겼고 그 자리를 더 젋고 더 유연한 생각을 지닌 장군들로 채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그런 장교들도 다 금수저 귀족 출신들이었습니다.  즉, 그 밥에 그 나물인지라, 오스트리아군 수뇌부는 끝내 획기적인 전투 교리 전환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단적인 예가 군단제 도입의 결과였습니다.  나폴레옹이 그랑 다르메에 도입한 군단제는 약 2만 규모의 보병 사단들에 기병 사단과 포병 사단까지 통합 편성하여, 각 군단이 다른 부대의 지원없이도 군단장 판단하에 독자적 작전을 펼치는 능력을 가지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의 각 야전군 지휘부는 그럴 능력도, 의지도 별로 없었습니다.  이들은 여전히 최고 군 지휘부에서 내려오는 서면으로 된 명령서에 따라 경직된 작전을 펼치려는 경향이 강했고, 이는 프랑스군에 비해 현격히 떨어지는 작전 능력으로 이어졌습니다.





(괴테가 '새로운 역사를 씌여지는 장소에 우리가 있었다' 라고 높이 평가한 1792년 발미 전투입니다.  당시 괴테는 패주한 프로이센군 측에 있었다는 것이 에러...)



무엇보다도, 프랑스군은 1792년 발미 전투 이후, 새로운 군사 제도와 교리에 따라 많은 시행 착오를 거치며 나름대로의 경험과 지식을 실제 전투 현장에서 취득한 것에 비해, 오스트리아군의 개혁은 그저 '프랑스놈들을 보니 이렇게 하더라'는 흉내내기에 불과하다는 점이 결정적이었습니다.  가령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보급 마차를 과감히 생략하고 현지 조달을 통해 행군 속도를 높인 것은 언뜻 보면 상당히 따라하기 쉬운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카알 대공도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프랑스군의 현지 조달이라는 것은 그저 현지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약탈하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요.  먼 행군길을 가다보면 부유한 동네가 나올 수도 있고 아예 곡물 창고를 만날 수도 있지만, 1주일 동안 허물어져가는 오두막 몇 채만 만날 수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현지 조달한 식량과 물품을 때와 환경에 따라 적절히 비축하고 또 군대의 행군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이를 운송하고 분배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고 복잡한 업무였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 병참부는 이런 지식과 경험 전혀 없이, 그저 '이제 현지 조달로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안이한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덕분에 1809년의 이 전쟁 내내 오스트리아군은 극심한 보급 부족과 혼란에 시달려야 했고, 이는 전쟁 초반 기세 좋게 진격하던 오스트리아군이 프랑스군의 반격을 받자 곳곳에서 맥없이 무너져 내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당시 포병대의 탄약 수송차 caisson 입니다.  교통 체증이라는 것이 현대에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워낙 도로 사정이 안 좋았거든요.  따라서 군대가 이동할 때 이런 대포와 탄약 수송차가 신속하게 이동하는 것이 전투의 승패를 판가름 지을 수 있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군사 개혁이 미흡하기는 해도 전혀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오스트리아는 이 전쟁에 당장 30만이 넘는 야전군을 동원하여 온 유럽을 놀라게 했습니다.  오스트리아가 아무리 전통의 강국이라고 해도, 당시 유럽에서 30만의 대군이 그것도 한꺼번에 전장에 나온다는 것은 훨씬 더 거대한 프랑스 제국을 가진 나폴레옹조차도 해내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오스트리아가 국가 규모에 어울리지 않는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특히 예비군 제도와 지역 방위군(Landwehr, 란트베어, 지역 방벽이라는 뜻) 덕분이었습니다.  전군이 30만이라고 하면, 그 중 전장에 내보낼 수 있는 것은 절반 정도인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온 나라에 기본적인 수비 병력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출정을 내보낼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예비군과 지역 방위군 덕분에 정말 대부분의 정규군이 전장에 투입될 수 있었습니다.



(잘츠부르크 Salzburg 지역에 편성되었던 지역 방위군 Landwehr 입니다.  배낭도 없이 다소 태평한 모습으로 그려진 것 외에는 정규군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쨌건 간에, 1809년에 오스트리아가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뭔가에 떠밀리 듯 전쟁에 뛰어든 것과 이런 군사 개혁과는 무슨 상관이었을까요 ?  바로 돈이 문제였습니다.  스페인에서 난리가 난 1808년 중반 이후, 오스트리아는 카알 대공의 주도 하에 새로운 병력을 징집하며 군대를 대규모로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정규군 병력을 소집하여 군복과 소총, 탄약 등의 장비 뿐만 아니라 급료를 지급하고 군마와 안장을 사들이는 등의 모든 활동은 엄청난 군비를 필요로 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에게 1805년의 전쟁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던 오스트리아에게는 돈이 없었습니다.  예비군 제도와 지역 방위군 제도는 나폴레옹의 감시를 피해 병력을 증강시키려는 목적도 있었으나, 정규군 육성에 따른 비용을 최소화하려는 눈물겨운 노력이었습니다.  원래 오스트리아는 매우 훌륭한 기병대를 보유한 것으로 유명했으나, 1805년 패전 때 온 나라의 군마를 프랑스군에게 노획당하는 바람에 새로 군마를 많이 사들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어서 상당수의 기병 연대에 말이 없는 상태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오스트리아군 기병대는 전통적으로 각 지역별/민족별 전통의 군복과 장비로 편성되었습니다.  이 그림에 나오는 기병들은 독일권 기병대입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체코, 슬로베이나,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폴란드 등 워낙 다양한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중에서 전통적인 독일권 영토를 세습 영지 hereditary lands 라고 불렀고, 아무래도 이 영토가 오스트리아의 핵심부였습니다.)


카알 대공은 이런 눈물겨운 상황 때문에, 1809년 초에 나폴레옹에게 전쟁을 도발한다는 오스트리아 내 강경파들에게 반대했습니다.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실제로 준비가 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돈이 문제였습니다.  일단 전쟁 준비를 한답시고 군대를 양성하기는 했는데,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키우고 개혁한 이 군대를 유지할 돈이 부족해진 것입니다.  오스트리아 재무부의 보고에 따르면, 이 군대를 유지할 자금이 1809년 중반이면 바닥이 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카알 대공으로서는 모처럼 일으킨 이 군대를 해산하고 다음 기회를 노리던가, 아니면 다소 준비가 부족하더라도 전쟁이라는 모험에 뛰어들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1808년 11월, 나폴레옹이 스페인 원정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파리 주재 대사혔던 메테르니히가 매우 솔깃한 소식을 들고 비엔나로 달려왔습니다.  파리에 반-나폴레옹 음모가 진행 중이고, 오스트리아가 프랑스를 침공하더라도 러시아는 에르푸르트 조약에도 불구하고 중립을 지킬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이 오스트리아 수뇌부에게 어느 정도의 임팩트를 주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분명히 영향을 주기는 주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전쟁에 돌입하기로 합니다.

오스트리아가 전쟁에 뛰어들기로 결정한 것에는 돈과 탈레랑 외에도 더 실질적이고 절실한 이유도 있었습니다.  1809년 1월, 이미 전쟁 쪽으로 분위기가 기울던 비엔나에 티롤에서 소식이 날아 왔고, 이는 오스트리아에게 나폴레옹과의 전쟁에 대한 결심을 더욱 굳게 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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