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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상

4.19 혁명의 성공이 이승만의 관용 덕분이었다고요 ?

by nasica-old 2014.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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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어제 제 포스팅에 댓글로 남겨주신 anwalt님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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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는 이야기지만 블로그 예전 글-임을 위한 행진곡과 라 마르세이유와 천안문-을 보다가 생각해보니
한국에는 4월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의 통치자가 이승만이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합니다.

통치자가 독재정권이라는 평가에 어울리지 않게
자기반성적인 태도와 관용을 베풀었기에 혁명이라는 것이 성공할 수 있었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반면교사로 천안문 사태나 요즘 김일성 시대 노동자 시위 진압방법를 보자면
이승만은 한국에서는 저평가받는데 세계적인 기준에서는 아닐 것 같군요

김일성은 황해도인지 지방공장에서 노동자 시위가 일어나니
인민군 사단을 동원해서 공장 전체를 포위, 장갑차를 돌진시켜 기관총사격으로 시위노동자 5천명을 사살하고
일가족들은 재교육 수용소가 아닌 절멸수용소로 강제추방시킨 반면에

이승만 대통령은 4월 혁명 당시에 시위로 인한 희생자가 180명 수준에 달하자 자진하야를 했는데,
당시에 대통령이 군.경,공무원, 자유당원 전부 한손에 틀어쥔 걸 생각하면
이북 방식으로 시위대 전원 총살, 일가족 산간오지로 추방시키겠다고 마음 먹으면 못할 이유도 없고
더구나 군의 경우 공산당에 대한 원한과 대통령에 대한 절대충성심을 가진 서북출신이 장악하고 있단 걸
감안하면 이승만 대통령 결단이 대단한 거겠지요
군에서의 쿠데타도 미중앙정보부도 포기할만큼 대통령의 카리스마랄지 권력장악이 된 상태니..

천안문 사태 때 중국 공산당 당중앙위가 어떻게 시위를 진압했는지는, 이미 알려진 사실이니 생략

결론적으로
최근에 홍콩시위는 한국의 시위와는 달리 진정 민주주의자들의 시위지만 상대를 잘못 고른게 아닐까
한국 여당과 달리 그쪽 상대는 중국 공산당인데
중국 공산당이 한국 여당이나 과거 통치자만큼 아량이 넓은 집단일까...?
하는 의문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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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walt님은 주로 보수측의 시각에서 댓글을 남겨주신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끔은 그냥 아무 설명 없이 소위 진보측의 비도덕성을 비방하는 글을 올리셔서 저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하시지만, 나름 말이 되는 이야기를 많이 써주시기 때문에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짜에요.  저같이 그냥 취미로 블로깅 하는 사람에게는 악플보다 무플이 더 무섭습니다.)

anwalt님의 글을 특별히 올린 이유는 저 의견에 대해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강하게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anwalt님, 그렇다고 앞으로는 이런 댓글 달지 마세요 라는 뜻은 아닙니다.  제 생각에 틀렸다고 생각되는 의견도, 다른 분들에게는 맞는 의견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러면서 의견 교환이 일어나고 서로의 생각을 포용까지는 몰라도 이해는 하게 되는 것이니, 결국 좋은 것이고 환영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혁명이 성공하는 것은 '타도대상인 독재자가 관용적이거나 우유부단하기 때문이 아니라, 민심이 완전히 등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anwalt님은 민심이 등을 돌려도 독재자가 군경을 동원해서 강력하게 탄압하기만 하면 혁명은 다 진압할 수 있다고 보시고, 그 증거로 (언제 있었던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김일성의 5천명 학살 사건과 1989년 중국 천안문 사태를 드셨습니다.   






북한은 정말 근본부터 잘못된 사회라서, 김일성 개색희라는 것 빼고는 제가 뭐 드릴 말씀이 없네요.  중국 천안문 사태에 대해서도 평화 시위를 유혈 진압한 것에 대해 저는 당연히 반대하고 비난합니다만, 과연 당시 중국 인민들이 모두 공산당 체제를 전복시킬 정도의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습니다.   anwalt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진짜 혁명은 그 진압에 나선 병력들이 무력 진압을 거부할 때 일어납니다.  아무리 이승만이든 김일성 같은 독재자가 데모쟁이들에게 총을 쏘라고 독촉을 해도, 병사들도 시민의 일부이고 또 대부분 서민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서민들이거든요.  그들도 대세가 어찌 돌아가는지, 과연 저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독재자가 자신들을 잘 살게 해줄 인간인지 자기만 잘 살려고 하는 인간인지는 나름 판단을 내릴 수 밖에 없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1989년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쿠 (Nicolae Ceaușescu)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1970년대에는 나름 계몽주의적 공산지도자라고 서방으로부터 칭송받은 인물입니다.  프라하의 봄을 무력 진압하기 위해 소련이 주도한 바르샤바 조약군의 1968년 체코 침공에도 동참하지 않았고 오히려 공개적으로 비난을 했습니다.  소련과 동구권이 보이코트한 1984년 LA 올림픽에도 참가하여 서방측의 예쁨을 독점했지요.  우리 박정희 대통령처럼 스탈린을 본 떠 1971년부터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워 주로 대형 중공업 회사들을 많이 키웠습니다.  여기에 들어간 자본은 냉전시대에 소련에 반기를 든 루마니아를 지원하려는 서방측 IMF에서 받은 큰 차관이 큰 몫을 차지했습니다. 



(1984년 미국 LA 올림픽 때 여자 체조 단체 종목에서 미국을 누르고 금메달을 목에 건 루마니아 선수들입니다.)

 


하지만 민생보다는 중공업 위주의 성장 전략을 펼쳤던 그의 경제정책은 1970년대의 오일쇼크 등 예상치 못한 암초에 부딪혀 표류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처음에는 은혜였던 IMF의 차관이 곧 목을 조르는 빚이라는 본색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차우세스쿠는 여기서 독재자적인 결단을 내립니다.  극단적인 내핍 정책을 써서 외채를 다 갚아버리자라고 결정한 것이지요.  여기에는 원금 회수라는 사명감에 불타는 IMF의 조언도 큰 몫을 했습니다.  차우세스쿠는 식량, 의복과 전기, 연료 등을 배급제로 돌리면서 국민들에게 심한 생활고를 안겨주었습니다.  덕분에 1980년대 후반 경에는 놀랍게도 그 IMF 차관을 거의 다 갚아버릴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 와중에도 차우세스쿠는 40여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친 독재를 굳게 하고자 개인 숭배를 위한 온갖 선전 활동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국민들의 불만은 악명 높은 비밀 경찰 (Securitate) 제도와 언론 통제를 통해 억눌렀고요.




(1986년 부카레스트 시내에서 식용유 배급을 받기 위해 줄을 선 루마니아인들)




이렇게 쌓인 루마니아 국민들의 불만은 결국 1989년 12월 혁명으로 터져 나옵니다.  지방 도시인 티미소아라 (Timisoara)에서 시작된 소요 사태는 장갑차와 헬기까지 동원한 무력 진압으로 탄압되었지만, 그 파장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차우세스쿠는 당시만 하더라도, 정말 국민들 대다수는 자신을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 소요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수도 부카레스트의 정부 청사 발코니 아래 광장에 10만명의 시민들을 모아 놓고 일장 연설을 늘어 놓았습니다.  그것도 TV에서 생중계를 하면서 말이지요.  그 시민들 대부분은 비밀 경찰과 관료들이 마구잡이로 동원해 놓은 허수아비에 불과했습니다.  



(독재자 최후의 장광설.  1989년 12월 21일의 모습입니다.)



(당시 연설 장면이 아직 유튜브에 올라와 있습니다.)



그러나 지루한 장광설을 늘어놓는 차우세스쿠의 연설에 호응하는 사람들은 맨 앞 열에 늘어선 바람잡이들 뿐이었습니다.  광장 뒤쪽에서는 웅성거림이 시작되었고, 곧 이어 '티미소아라 !  티미소아라 !' 라는 구호가 시작되었습니다.  광장을 가득 매운 군중들이 점점 이 구호를 따라 외치면서, 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당황한 차우세스쿠와 그의 각료들은 건물 안으로 피신하고 비밀 경찰이 곧 TV 송출을 중단하고 애국적인 음악과 차우세스쿠 업적을 칭송하는 방송을 하루 종일 틀어댔지만, 이미 광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생중계로 다 보여진 후의 일이었습니다.




(혁명이다 !!!)



차우세스쿠는 관용적이지도 않았고, 우물쭈물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티미소아라에서 했던 것처럼 장갑차와 탱크를 동원하여 시위를 유혈 진압할 것을 명령했고, 실제로 일부 유혈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군대가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그들도 다년간의 경제적 궁핍과 차우세스쿠의 독재에 신물이 났을 뿐만 아니라, 이미 민심이 등을 돌렸다는 것을 거리에서 느낄 수 있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차우세스쿠에 충성하는 비밀 경찰들과 군 친위대가 발포했고, 이들로 인해 1천여명의 사망자와 3천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차우세스쿠 처형 이후에도, 독재 체제에 충성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거리로 나온 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사상자 수는 차우세스쿠 실각 전에도 많았습니다만, 실각 이후 며칠 간 훨씬 더 많았습니다.  이 사진들 속에서 루마니아 정규군은 시민들과 함께 그 차우세스쿠 충성파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결국 차우세스쿠는 부인 엘레나와 함께 지방으로 도망치다 체포되어 약식 군사 재판에 회부되어 두어시간 만에 유죄 판결을 받고 그 자리에서 총살되었습니다.  독재자에게 마땅한 최후였지요.




(세계의 독재자들이 매우 두려워 하는 사진이지요.)



1917년 러시아 혁명 때 짜르도 시위대에게 발포했고, 1979년 이란 혁명 때 팔레비 국왕도 시위대에게 발포했습니다.  독재자들은 대부분 시위대에게 발포합니다.  독재자가 무너지는 것은 차마 시위대에게 총을 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군대까지도 독재자에게 등을 돌리기 때문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것도 루마니아 혁명 때의 사진입니다.  아주 훈훈한 사진이지요. 저는 항상 그런 이유로 모병제보다는 징병제가 더 나은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군대가 시민들과 멀어지는 것은 민주주의 쇠퇴의 시작입니다.  단, 징병제를 하더라도 병사들에게 최저임금에 준하는 급료는 줘야 하고, 또 군사 기밀이랍시고 군내에서 벌어지는 온갖 폭행, 가혹행위 등을 감추려고만 들지 말고 엄정하고 투명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병사들은 노예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시민이니까요.)



제가 이승만이나 박정희라는 인간들에 대해서 왈가왈부 떠들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혁명이 일어나는 곳에는 대부분 공통된 이유가 있다는 점은 말하고 싶습니다.  바로 경제적 궁핍입니다.  차우세스쿠도 만약 박정희처럼 운빨이든 실력이든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성공리에 수행되어 경제적으로 성공을 이루었다면, 그 악명 높은 독재 행위에도 불구하고 장기 집권하여 지금도 반신반인으로 추앙받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비교적 최근 시작되었다가 혼란만을 남기고 열매를 맺지 못한 아랍의 봄이라는 것도 결국은 국민들에게 일자리와 빵을 마련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터져 나온 것입니다.  심지어 4.19 혁명조차도, 그 근본적인 원인은 미국이 1957년까지만 해도 무려 3억8천만 달러의 경제 원조를 해주던 것을 1959년 2억2천만 달러로 대폭 줄인 탓에, 미국 원조에 의존하던 한국 경제가 크게 어려워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습니다.  (저는 매우 그럴싸 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한, 민중이 들고 일어나는 것은 거의 언제나 '빵과 일자리'가 부족할 경우입니다.




(아랍의 봄은 어디로...)



반대로 말하면, '빵과 일자리'가 어느 정도 있다면, 아무리 포악한 독재자가 정권을 잡고 있어도 국민들은 참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혁명은 역사가와 선동가들에게는 멋있게 보일지 몰라도, 당장 서민들에게는 죽음과 혼란, 체포와 고문, 그리고 배고픔이 뒤따르는 것이거든요.  당장 배를 곯지 않는다면, 국민들은 참습니다.  제 생각에, 천안문 사태가 실패한 '사태'로 끝난 것도 그 비슷한 이유라고 생각해요.   또 누구나 독재자라고 인정하는 러시아의 푸틴 푸짜르도 러시아에서 아주 탄탄한 입지를 가지고 계시지요.  (당분간 저도 홍차는 안 마시겠습니다.)  푸틴의 정권이 탄탄한 이유는 푸틴이 합법적인 투표에 의해서 뽑힌 정당한 지도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러시아의 천연가스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즈프롬이라는 회사 이름 들어 보셨습니까 ?  푸짜르의 한마디면 서유럽이 벌벌 떨게 됩니다.  무서워서보다는, 가스관을 잠그면 정말 추워서 벌벌 떨게 되지요.)



이번에 홍콩에서 벌어지는 시위 사태에 대해서도, 저는 이것이 단지 '사태'로 끝날 가능성이 많다고 봅니다.  비슷한 이유에서입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최악인 상황이 아닌 경우라면, 혁명은 불가능한 것일까요 ?  그게 또 그렇지 않습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1987년 대한민국의 6월 민주 항쟁이 있쟎습니까 ?  이건 오히려 경제적인 성장에 비해 너무나도 낙후된 독재 정치에 불만을 가진 국민들이 들고 일어난 경우지요.  당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 축출 사건에 의해 영향도 받았고, 또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감히 국민들에게 총을 쏘지는 못할 것이라는 믿음도 국민들이 거리로 나선 이유 중 하나이겠지요.  아무튼 제가 볼 때, 이는 몇 안되는 '굳이 배고프지 않아도, 민주주의를 위한 열망으로' 거리로 뛰쳐나온 사건이었고, 이는 정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의 한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반대의 경우, 즉 아무리 배가 고프고 삶이 어려워도 독재자에게 들고 일어나지 않고 비굴하게 사는 경우는 없나요 ?   그것도 바로 코 앞, 북한의 경우가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조선시대도 비슷했지요.  대부분의 백성들이 쌍놈이라고 무시받으며 처절하게 굶주리는 생활을 하면서도, 지배 계급에 대해서는 유교 논리에 따라 무조건 충성을 해야 한다고 굽신거리며 살았던 것이 무려 5백년이었지요.  사실 신라든 고려든 그 이전 시대도 비슷했고요.  제가 볼 때 21세기까지도 조선 왕조의 확장판인 김씨 왕조가 이어져 나가고 있는 것은, 진짜 한민족 역사에 감추고 싶은 흑역사로 남을 사건 같습니다.  




(위대한 지도자의 자식을 대를 이어 모시며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흠...  뭐라 할 말이 없군요.  지들이 좋다는데 뭐 어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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