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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상

나폴레옹의 영욕을 통해 본 MB에 대한 국민 저항

by nasica-old 2012.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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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그러니까 예전에 광우병 파동이 한창일 때 올렸던 글입니다.  굳이 이 글을 다시 올리는 이유는 별 다른 건 아닙니다.   뭔가 신종 spam 댓글인지 '와이오밍주의 데이빗' 이런 류의 random 이름으로 뭔가 미국 정치 토론장에서 copy한 듯한 무의미한 영문 댓글이 이 글에 어제부터 수백개 달렸고, 지금 이 시간에도 달리고 있더라구요.   아마 사람이 아니라 뭔가 프로그램으로 붙이는 것 같더군요.  이건 뭥미 하고 지우려다보니  너무 많아서 지우기도 그렇고, 내버려두기도 그렇고, 해서 그냥 글을 통째로 날리고 새로 올리기로 했어요.


더불어, 한 3년전에는 제가 어떤 마음으로 이 글을 썼었는지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아래 글 요지는 나폴레옹이 황제에 올랐던 것이나 폐위된 것이나, 또 엘바섬을 탈출하여 다시 황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 모두 국민들의 경제적 이익에 부합하느냐 마느냐 여부라는 것입니다.  그 점에 비유하여, 그때 당시 MB가 광우병 파동에 시달리는 이유도 사실 광우병 자체보다는 MB 경제 정책이 국민들 마음에 안들었는데 그에 대한 불만이 광우병을 꼬투리로 터져 나온 것이라는 분석을 한 거지요.


글 끝에 보면 '경찰력에 의존하는 정권 오래 못간다' 라고 썼는데, 결과적으로는 (레임덕 현상이 나타나고는 있습니다만) MB 정권은 나름대로 괜찮게 정권을 마무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제 예측이 틀렸던 것이지요.  (모르지요 뭐... 나중에 뭐 또 무슨 비리가 드러나서 난리법석이 벌어질지...) 


지금도 이 글을 쓸 때의 제 생각이 크게 변한 건 아닌데, 이번 총선 결과를 봐도 그렇고, 아무튼 우리 국민은 '종북 냄새가 나는 좌파'보다는 (부조리가 다소 있더라도) '정통 보수'를 택한것 같습니다.  특히 이번에 통합진보당에서 벌어지는 내분이나, 북한 인권이나 3대 세습체제에 대해서 한마디 해보라는 것에는 끝끝내 입을 다무는 일부 국회의원들을 보면, 국민들이 보수 쪽을 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라는 생각도 들어요.


저는 이번 대선때까지는 '이제는 분배다' 라는 목소리와 '아직은 파이를 키워야 한다'라는 목소리의 충돌이 주요 쟁점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종북 좌빨'이 주요 쟁점이 되었네요.  게다가 그 모든 꼬투리를 야권이 제공했다는 것이 참... 씁쓸합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는 아직 대학가에는 운동권 세력이 꽤 강했습니다.  그런데 인상적이었던 것이, 그때 총학생회에서 뭔가 집회였던가 수업 거부였든가 암튼 뭔가를 하려다가 잘 안되었는데, 총학생회에서 붙인 대자보에서 그 실패 원인을 분석하면서 든 제1 원인은 바로 '홍보 부족'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데모 한번 안하던 보수파 학생이었습니다만) 당시 제 생각에는 '애초에 총학의 노선 자체가 학생들 대부분의 뜻과는 달랐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드는 모양이다' 라고 생각했더랬지요. 


왜 그런 말 있쟎습니가 ?  '민심은 천심이다'.  이유야 어쨌건 국민이 총선에서 여당을 택했다면, 그럴 이유가 있는 겁니다.


지금 야권은 자꾸 언론 탓이나 여당 탓만 하지 말고, 뭔가 자기 쪽에서 고칠 것이 없는지 생각 좀 해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어요.


(그렇다고 제가 여당 편이 된 것은 아니고요, 그저 야당이 좀 똑바로 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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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나폴레옹이 일개 포병 소위에서 시작해서 황제의 지위에 올랐다가 결국 세인트 헬레나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은 것은 정말 드라마틱한 일이지만 약간 의아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부르봉 왕가가 싫다면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면서 혁명을 일으키고, 수많은 피를 흘리고, 얼마전까지 섬기던 왕을 죽인 프랑스인들이, 왜 불과 15년 만에 쿠데타로 집권한 황제를 받아들였을까요 ?  또, 왜 스스로 받아들이고 꽃을 뿌리며 축하했던 황제를 불과 10년만에 또 내치고 다시 부르봉 왕가를 받아들였을까요 ?  게다가, 헌신짝처럼 내친 황제를 다시 불과 10개월만에 다시 받아들였을까요 ?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답이 있을 수 있고, 또 질문 자체에 잘못된 점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가령 나폴레옹이 1814년 폐위된 것은 프랑스인들의 반역이나 폭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외부인인 연합군의 우월한 군사력 때문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나폴레옹의 폐위는 프랑스 국민들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전에 나폴레옹과 인구, 그리고 돈http://blog.daum.net/nasica/6862371 ) 편에서 언급했듯이, 당시 프랑스는 러시아와 인구 차이가 별로 나지 않고, 영국과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를 합친 것보다 약간 더 많은 인구를 가진, 그야 말로 대국이었거든요.  아무리 15년 동안 나폴레옹 전쟁을 벌이면서 병력 자원이 고갈되었다고 하더라도, 프랑스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면 불과 20만 정도 밖에 안되는 침공군을 막아내지 못할리 없었습니다.  실제로 스페인 국민들과 러시아 국민들은 절대 우위의 프랑스군에 거국적으로 저항하여 결국 프랑스군에게 패배를 안겨주었쟎습니까 ?  나폴레옹이 결사 항전을 주장할 때 국민들이 따라만 줬다면, 충분히 프랑스는 침공군을 막아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프랑스 국민들과 장군들은 항복을 택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

 

 

 

(짐도 그 점이 궁금하도다.  대체 왜 ??) 

 

 

갑자기 이야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튀는 듯 합니다만, 중년 남자가 바람을 피울 때 그 부인의 반응에 대해 들은 바가 있습니다.  이미 애정이 식은 부부 사이에서는, 남자가 젊은 여자와 바람을 피워도 부인은 별로 반응하지 않고 냉담한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 젊은 여자와 살림을 차려도 눈도 꿈뻑 안한답니다.  그러다가 그 쪽 집에서 애를 낳고 키워도 별 관심이 없대요.  하지만, 아무리 바보처럼 가만히 있던 부인이라도, 남자가 바로 이 짓거리를 하면 불같이 들고 일어나 남편을 파멸시켜 버린다고 합니다.  그 짓거리란 무엇일까요 ?  짐작하시는 분들은 중년 이상이실 것 같은데요 ?  바로 재산을 빼돌려 그 젊은 여자에게 갖다주는 행위라고 합니다.

 

나폴레옹이 권좌에 오르고 거기서 굴러 떨어진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분석해 볼 수 있습니다.  즉, 국민들은 왕권 신수설이고 정의고 나발이고, 그런 것엔 별로 관심이 없고, 자신들의 경제적 이권에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것이지요.

 

 

 

(문제의 아시냐 지폐...) 

 

 

전에 재정 적자, 아시냐 지폐, 그리고 나폴레옹http://blog.daum.net/nasica/6862340 ) 편에서 혁명 정부가 발행했던 아시냐 지폐로 인해 프랑스에 발생했던 하이퍼 인플레에 대해서 쓴 바 있습니다.  금리가 낮은 상태로 고정된 상황에서, 금이나 토지로 태환되지 않는 지폐를 대량으로 찍어내게 되면, 사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일반 서민층에게로 전가되게 됩니다.  자본가들이나 부유층들은 정보력도 있고, 교육도 받았기 때문에 대개 경제 상황에 대해 빨리 파악하고, 또 가진 돈이 많으므로 지폐를 쉽게 금이나 토지 같은 '불변의 가치'를 지닌 자산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서 저축액이 얼마 안되는 서민층은, 정보력도 별로 없고, 또 있다고 하더라도 가진 돈이 얼마 안되므로 그런 불변 가치의 자산으로 쉽게 갈아탈 수가 없습니다.  가령 오늘날도 우리같은 서민들이 원유나 니켈, 부동산 같은 것에 쉽게 투자를 못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지요.  (다행히 요즘은 펀드라는 것이 있긴 합니다만... 그건 이 글의 주제가 아니므로 패스)  결국 국민공회가 찍어냈던 아시냐 지폐는 대부분 일반 서민들의 수중에 있게 되었고, 97%에 달하는 가치 폭락은 고스란히 노동 계층, 즉 프랑스 국민들 대부분이 떠안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국민공회가 아시냐 지폐를 마구 찍어냄으로써, 노동 계층의 재산을 강탈해간 셈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당시 많은 폭동과 민란이 뒤따랐습니다.

 

 

 

(브뤼메르 쿠데타... "놔라 !  쿠데타를 하든 뭘 하든 일단 경제를 살리고 봐야 할 거 아닌가 ?")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승리의 상징 젊은 장군 나폴레옹이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나폴레옹은 1799년 브뤼메르(Brumaire, 프랑스 혁명력 중 포도달) 쿠데타로 집권했는데요, 당시 서민층들이나 부르조아층들이나 모두 총재 정부의 무능력과 부패에 대해서는 지긋지긋해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부패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시에예스(Emmanuel-Joseph Sieyes)라는 양반입니다.  이 분의 이름이 그리 유명하지는 않지만, 이 분이 쓴 소책자의 문구는 매우 유명해서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1° Qu'est-ce que le tiers état ? Tout.
2° Qu'a-t-il été jusqu'à présent dans l’ordre politique ? Rien.
3° Que demande-t-il ? À y devenir quelque chose.

 

1.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 모든 것이다.
2. 제3신분은 정치적으로 여태까지 정치적으로 어떤 것이었나 ?  아무 것도 아니었다.
3. 제3신분은 무엇이 되길 요구하는가 ?  무엇인가가 되길 요구한다.

 

 

 

(이 분이 그 유명한 문구를 지은 시에예스입니다.  정말 프랑스인처럼 생겼지요 ?) 

 

 

이 시에예스라는 분은 원래 카톨릭 사제여서 루이 16세가 소집한 삼부회(Estates-General)에 제1신분으로 참여가 가능했으나, 제3신분으로 참여하여 유명한 테니스 코트 집회를 이끈 혁명파 인물이었습니다.  이 분도 정치적인 굴곡을 겪으면서, 자신이 총재 정부의 일원이면서도 총재 정부의 전복과 나폴레옹의 쿠데타에도 참여했습니다.  특히 안 좋게 볼 수 밖에 없는 것은, 막판에 나폴레옹이 시에예스에게 정치적 양보를 얻어내는 대신 준 뇌물건입니다.  당시 통령 정부에서는 3명의 통령이 있어서, 나폴레옹이 제1통령이었고, 시에예스와 뒤코라는 사람이 나머지 통령이었는데, 나폴레옹은 자신이 모든 정치력을 행사하는 대신, 시에예스와 뒤코에게 총재 정부가 남긴 빈약한 재무 금고에 남아있던 80만 프랑을 모두 줘버립니다.  나폴레옹은 그 돈의 분배는 둘이서 알아서 하라고 했는데, 나폴레옹 앞에서 시에예스와 뒤코는 서로 더 갖겠다고 설전을 벌여 결국 시에예스가 60만 프랑, 뒤코가 20만 프랑을 나눠 가지는 추태까지 보여줍니다. 

 

결국 총재 정부의 이런 무능과 부패 속에서, 프랑스 국민들은 아무라도 좋으니 경제적, 군사적 안정을 원했고, 그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대안을 젊은 장군 나폴레옹에게서 찾은 것입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그 욕구를 충족시켜 줍니다.

 

 

 

(Banque de France, 프랑스 중앙은행입니다.  나폴레옹이 1800년에 설립했습니다.)

 

 

1803년, 나폴레옹은 당시 여러 기관에서 발행하던 다양한 지폐를, 통폐합하여 파리에서는 프랑스 중앙은행에서만 지폐를 발행할 수 있도록 선포합니다. 그리고 1803년 화폐 개혁을 단행하여 여태까지 쓰이던 화폐인 리브르(livre)와 데니에르(denier)를 프랑(franc)과 상팀(centime)으로 교체합니다. 또한 나폴레옹은 자신의 이름을 딴 나폴레옹 금화를 주조하는 등 프랑스 화폐의 안정화를 추구합니다. 황제가 되면서는 “내 재위 기간 중에는 새로 지폐를 발행하지 않겠다”라고 약속했고, 많은 재정 위기 속에서도 실제로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 전의 혁명 정부가 지폐를 남발하여 경제 문제를 눈가리고 아웅하는 방식으로 풀려고 했던 것에 비해, 나폴레옹은 나름대로 정공법을 취합니다.  즉, 세금을 높였습니다.  다만, 서민들의 이익에는 다소 떨어지는 방식, 즉 직접세보다는 간접세를 부과했습니다.  인기 하락을 두려워하지 않고 1802년과 1810년 사이에 담배, 증류주, 소금에 간접세를 부과하는 등 앙시엥 레짐 (Ancien Regime, 왕정 시대의 구 체제) 때의 간접세를 부활시켰고, 특히 담배의 생산과 판매를 국가가 전매하도록 했습니다. 이런 물품세는 1806년에 비해 1812년 사이에 4배가 될 정도로 증가했습니다. 1813년에는 이런 물품 간접세가 전체 국가 세수의 1/4을 차지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영국이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세금이었던 소득세를 부과한 것에 비해, 나폴레옹은 중산층의 이익 보전 및 상업 발전을 위해 소득세는 도입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당연히, 세수는 불충분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부하 원수들마저 ‘전쟁광’이라고 수군거릴 만큼, 나폴레옹은 전쟁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1806년 프랑스의 재정 규모는 7억 프랑 정도였는데, 이는 점점 늘어 1812년에는 10억 프랑 정도가 됩니다. 재정 규모가 점점 커진 것은 주로 군사비 지출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전체 재정 지출의 60~80% 정도를 군사비가 차지했으니까요. 군사비로 1807년에는 4억6천2백만 프랑, 1813년에는 8억1천7백만 프랑이 지출되었는데, 이는 장부상 그렇다는 것이고 실제로는 더 많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전쟁은 돈을 먹고 사는 괴물입니다. 울름과 아우어스테를리츠 원정에 든 비용이 6천만 프랑이었고, 특히 나폴레옹의 종양이라고 불리운 스페인 전쟁에는 매년 약 7천만 프랑 씩이 들어갔습니다. 운명의 1812년 러시아 원정에는 무려 7억 프랑이 소모되었습니다.

 

 

 

(7억 프랑이나 들인 프로젝트였는데... 결과는 오링 !) 

 


나폴레옹은 이런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서라도 전쟁을 계속했습니다. 네덜란드나 이탈리아 같은 정복지의 확대가 세수 증가에 도움이 되었거든요. 또 패배한 적으로부터 받아내는 전쟁 보상금이 매우 쏠쏠했습니다. 예나 전투 이후 프러시아에 부과한 배상금이 무려 3억1천1백만 프랑이었고, 약 2년 동안 이 중 절반 정도를 실제로 받아냈습니다. 이런 식으로, 1812년까지는 전쟁 비용 상당 부분은 프랑스 국민들이 아닌 외국 국민들에게 부과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이 외국으로부터 프랑스에 유입시킨 정금(正金)은 무려 20억 프랑이었고, 1차로 퇴위하며 엘바 섬으로 유배당할 때 파리 튈르리 궁 지하에 남긴 금만도, 역시 나폴레옹의 주장에 따르면, 4억 프랑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사업은 이겨야만 수익이 남았습니다. 1812년 러시아 원정의 참패는 모든 것을 수렁에 빠뜨렸습니다. 1812년 말, 재정 적자가 1억2천2백만 프랑에 달할 것이라는 것이 분명해지자, 나폴레옹은 1억3천만 프랑에 달하는 채권을 발행하고, 그 채권에 대한 담보로 각 마을의 공유지를 매각할 것을 약속합니다. 당시 재무 장관이던 몰리앙(Mollien)은 이런 공유지가 무척 잘 팔려나가고 있다고 헛소문을 퍼뜨렸지만, 실제로는 1814년까지도 겨우 6천4백만 프랑 어치만 팔렸고, 그나마 실제로 대금이 입금된 것은 2천2백만 프랑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1813년 말, 궁지에 처한 나폴레옹이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세금을 대폭 인상하는 것이었고, 이는 곧장 정치적 소요로 이어져 나폴레옹의 퇴위에 상당한 기여를 합니다. 스페인이나 러시아 국민들이 프랑스 침략군에 대해 대대적으로 저항을 한 것에 비해, 1814년 프랑스 국민들은 침공해들어오는 연합군에 대해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던 것도, 나폴레옹이 부과한 무거운 세금과 연관이 좀 있었거든요.

 

 

 

(폐하, 걍 내려오시지요.  폐하께서 내려오시는 것이 저희들에게 더 이익이 많이 남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을 저버린 프랑스 국민들은 불과 10개월 만에, 엘바 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을 감동적일 정도로 열렬히 환영합니다.  나폴레옹이 그토록 쉽게 다시 권좌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위의 아시냐 지폐 이야기 편에 나오는, 나폴레옹이 황제 즉위식에서 서약한 ‘국가 재산 매각의 취소 불가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 서약에서, 나폴레옹은 혁명 때 교회와 귀족으로부터 몰수하여 일반 시민들에게 판매했던 토지의 소유권을 영구히 인정하겠다고 맹세했었지요.  그런데 나폴레옹의 폐위에 이어 다시 왕위에 앉은 부르봉 왕가와 함께 프랑스로 되돌아온 구(舊) 귀족들이, 혁명 전 자신의 재산이었던 토지를 되찾을 움직임을 보였던 거든요. 프랑스의 영광이나 정당한 왕권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던 국민들도, 자신의 재산을 건드리려는 움직임에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나폴레옹은 도통 분위기 파악을 못하던 프랑스 구 귀족들의 그러한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가,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고 엘바 섬을 탈출하여 툴롱에 상륙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평화를 사랑했던(?) 부르봉 왕가는 군대를 개편하면서 2만명에 달하는 장교들을 half-pay로 돌려버렸기 때문에, 나폴레옹을 진압하러 출동한 장교들이나 병사들이나, 나폴레옹을 환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폐하 !  계산기를 다시 두드려보니, 폐하를 모시고 사는 것이 더 남는 장사였나이다 !!) 

 


제 생각에는 MB가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보입니다.  노무현 정권에서 부동산 가격의 제어를 제대로 못하여 엉뚱하게 서민들만 죽어나면서, 일단 서민들이 노무현 정권에 대해 등을 돌렸습니다.  결정적으로 노무현 정권에서 한미 FTA 추진하면서 (이의 유익성 여부는 저도 잘 모르겠으니 패스) 그나마 좀 남아있던 진보 세력의 지지층도 많이 떠났지요. 게다가 종부세라는 세금 폭탄을 맞은 상류층과, 그들을 대변하는 언론 권력도 당연히 노무현 정권을 맹공격했고요.  MB 정권이 투표자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지지를 받으며 당선된 것은 그러한 노무현 정권의 경제적, 정치적 실수에 어부지리를 얻은 바가 크다고 봅니다. 

 

그런데 불과 몇개월 만에, 광우병 파동으로 MB 정권의 지지도는 바닥을 기게 되었습니다.  이는 사실, MB 정권이 일반 서민들도 좀 먹고 살 만하게 해줄 것이라는 서민층의 기대를 완전히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MB 정권은 아무런 국민적 합의 없이 정말 대통령 방미에 맞추어 캠프 데이비드 입장료를 지불하듯이 쇠고기 수입을 재개했고, 또 서민들의 이익과는 별로 상관없이 일부 토지 소유주와 건설사들의 이익만을 챙겨주는 대운하나 4대강 정비 사업만을 추진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서민층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기대할 수는 없겠지요. 

 

 

 

(제가 운하 관련 주식 가지고 있거나 4대강 주변에 땅 가지고 있으면 저도 "매우 찬성"입니다.  제 정치적 도덕성에 실망하셨다고요 ?  원래 세상 이치가 그런 겁니다.  영~원히.) 

 

제가 특히 현 정부에 분노했던 것은 상속세/증여세와 법인세를 깎아주거나 없애자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렇게 부유층에게 경제적 여유를 주어야 부유층이 돈을 쓰게 되고, 그래야 그 중 일부가 서민층에게도 흘러들어간다는 것이었지요.  글쎄요, 이건 불우 이웃 돕기가 아니라 부유 이웃 돕기인데요,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서민층을 돕기 위해서는 당연히 상속세/증여세가 아니라 간접세인 부가가치세를 깎거나 없애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  상속세나 증여세를 없애주자는 것은 너무 속보이는 주장이 아니겠습니까 ?  이건... 지들끼리 다 해먹는 것도 모자라 국민들을 바보천치로 취급하는 것 같아 몹씨 씁쓸했습니다.

 

 

 

(그런데... 소득이 낮을 수록 상속세 폐지하자는 의견이 더 많은 것을 보면... 어우, 대체 적과 아군이 구별이 안되시나보네요. 아마 이 분들은 5억원 미만은 상속세 비과세라는 걸 모르시나봐요.) 

 

 

현재 우리 국민들은 삶이 몹시 팍팍합니다.  MB께서는 자신이 하는 4대강 사업이나 세금 개편이 정말 국민들의 삶을 윤택하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신이 정권을 잡게 해준 사람들에게 돈을 벌 기회를 주고 싶은 것일까요 ?

 

 

 

(정권에 문제가 있는 건지... 국민들에게 문제가 있는 건지... 혹은 MB께서 생각하시는 대로 "일부 좌빨"의 난동이 문제인 건지... 확실히 어디엔가엔 문제가 있습니다.)

 

 

정의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것이 정말 경제학적으로 더 유리한 것인지 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국민들은 나름대로 '느끼고' 있다고 봅니다.  국민들의 의사에 반하는 정권, 국민들이 단체 행동을 할까봐 전전긍긍하고 경찰력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정권은 오래 갈 수 없다는 점은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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